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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6일 주일낮 예배 설교
설교 제목: 그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 십자가에 담긴 진정한 의미
갈라디아서 2:20
요한복음 12:24
설교를 위한 묵상: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을 사랑하셔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 사랑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신학자 톰 라이트는 이 고백을 야곱의 아들 유다와 베냐민 사이의 이야기와 빗대어 설명했다. 유다가 베냐민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생각을 한 것은 아마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졌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창세기 38장). 그의 실망이 얼마나 컸던지 며느리와 동침을 하는 실수를 했어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슬픔을 아버지 야곱에게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지셨을까? 나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논개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번 주에 읽은 책, ‘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에 나오는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이야기를 되새겨본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톨스토이의 질문,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질문의 반향이다. 어쩌면 예수께서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기에 십자가를 지셨는지도 모른다(요 13:1). 그런데 이 사건을 목격한 사도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 구약 예언의 성취를 의미한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구약의 사건에 비추어 사도 바울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 사건을 이해한 것은 아닐까?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유월절에 맞춰진 점에 주목하여 그것을 출애굽의 구원과 연결지었을 것이고 사도 바울은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다고 고백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골로새서 2:15). 그렇게 되면 세상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곳이 되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잘 몰랐을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 자체로 사랑의 표시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하고 증거한 제자들의 입장에서 이 사건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언약의 빛 가운데서 바라볼 때 비로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신약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와 대속의 의미를 얄팍하게 이해하게 되고 공식화하게 되어 결국 그 의미를 퇴색하게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나는 단지 감성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그 동안 설교한 내용을 되새기면서 성경 전체의 메시지 가운데서 이 사건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 동안 나는 성경 전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다. 그것은 톰 라이트의 영상, ‘성경에서 이미지를 읽어내기’(Reading the Images with Tom Wright)라는 원재료에서 온 것인데, 그 동안에는 형상, 성전, 바벨론, 죽음, 보혈, 그리고 씨앗을 다루었다. 이제 십자가를 여기에 추가할 것이다.
‘형상’이라는 주제에서 나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했고, ‘성전’이라는 주제에서 나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회복 프로젝트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는 하나님의 계획을 가로막는 세력이 어떻게 이 땅에서 활동하는지를 생각했다. 즉, 악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친구와 나는 악의 기원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성경은 악의 기원을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 악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집중하는 것 같다. 그 악의 결과는 ‘사망’인데 하나님은 사망의 권세를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이기셨다. 그처럼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시려고 하나님은 보혈을 통하여 그들을 정결하게 하셨고, 이 회복 프로젝트에 동참한 사람들은 세상을 번성하게 하는 ‘씨앗’과 같은 존재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십자가를 생각해 본다면, 십자가는 그 씨앗과 같은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즉,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그것은 베냐민을 위하여 자기를 바친 유다의 헌신이며, 그것은 백성들을 위하여 자기를 던진 논개와 같은 사랑이다. 그것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정의에 대한 갈망이자 결단이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불의에 대항하셨다. 그리고 죄인의 자리에 서셨다. 그것으로 불의한 권세를 무력화시키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것은 고난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살리시고 만인을 구원하시리라는 예언의 성취였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을 회복하시고 사람을 본래적 형상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과 같이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고백과 결단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지금까지 기독교는 이어져 오고 있으며, 하나님의 회복 프로젝트는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설교 개요
1.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다
2.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다
3. 한 알의 밀이신 그리스도
4. 유월절 해방과 십자가 혁명
설교 목적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이며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담은 이 상징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재현될 때 하나님의 회복프로젝트가 실현된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는 것이 이 설교의 목적이다.
***
1.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다
옛날 중동의 가나안 땅에 열두 아들을 낳은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지금의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 가족은 양떼를 기르는 목축업과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야곱인데 그는 열두 아들들을 양육하면서 그들과 함께 농사도 짓고 양을 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들들이 성장하면서 출가를 합니다. 넷째 아들도 가나안 지역의 한 여인을 사랑하고 그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오늘은 야곱의 넷째 아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의 이름은 유다입니다. 유대인이 이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세 아들과 함께 오손도손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들들이 성장하자 장남을 위해 며느리를 맞이했습니다. 그 며느리도 가나안 지역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장남이 죽었습니다. 당시에는 형이 자손이 없이 죽으면 시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levirate, 형사취수제, 형제계승혼, 신명기 25:5~10). 그래서 아버지 유다는 둘째 아들에게 형수를 아내로 맞아 형의 계보를 이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도 하나님 앞에서 악한 생각을 가졌는지 자신의 씨를 형수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둘째 아들도 얼마 후에 죽고 말았습니다.
야곱의 아들 유다는 세 아들 중에 두 아들이 죽고 나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서 수절하면서 막내 아들이 성장하기까지 기다리라고 보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유다의 아내도 죽었습니다. 유다는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는지 아내를 잃고 나서 깊이 낙심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친구가 유다를 데리고 양떼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때는 양들의 털을 깎는 시기였습니다. 그곳은 며느리 다말이 사는 곳과 가까웠습니다.
그러자 유다의 며느리 다말에게 어떤 사람이 시아버지가 양털을 깎으러 이 근방으로 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다말은 과부의 옷을 벗고 창녀의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시아버지 유다가 지나는 길 가에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아내를 잃고 시름에 빠졌던 유다는 길 가의 창녀를 보고 그에게 들어가겠다고 말합니다. 창녀로 변장한 다말은 그 대가로 무엇을 주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염소 새끼를 주겠다고 합니다. 다말은 지금 염소 새끼가 당신에게 없는 것으로 보아 나중에 주겠다는 말인데, 그러면 담보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동침을 했고 유다는 돌아가서 친구에게 염소 새끼를 보내서 자기 담보물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곳에는 창녀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유다는 자기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며느리를 끌고 오게 했습니다. 행음을 한 며느리를 불사를 것이라고 하자 다말은 자기가 이 물건의 주인으로 말미암아 임신을 했다며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놓았습니다. 유다는 그때서야 며느리 다말이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했습니다. 셋째 아들 셀라가 성장했는데도 자신이 며느리를 셀라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둘을 결혼하게 하고 다시는 며느리를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다말은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에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38장에는 이 가슴 아픈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중동 지방 전역에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농사도 되지 않고 양들을 먹일 물도 부족했습니다. 당장 먹을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모두 굶어 죽게 생겼을 때 야곱은 자기 아들들을 이집트로 보냈습니다. 거기는 먹을 것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 보니 양식 판매를 맡은 총책임자가 이상한 요구를 합니다. 그 책임자는 말하지도 않은 것을 물어봅니다. 형제들에게 부모에 대해서 형제들에 대해서 물어보더니 결국에는 막냇동생을 데려오라고 양식을 주어 보냈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다음에 양식이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막냇동생을 데리고 가서 양식을 사러 갔습니다. 이집트의 총책임자는 형제들을 모두 관저로 초청하여 잔치를 열어주고 양식도 많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군대가 와서 도둑으로 몰아 그 형제들을 모두 체포해서 끌고 갔습니다. 그 양식부대를 열어보니 막내의 부대에서 금잔이 나왔습니다. 이제 막냇동생은 꼼짝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앞으로 나서더니 그 동생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신을 종으로 붙들어 두시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가 동생을 대신하여 종으로 남겠으니 동생과 형제들을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그 총책임자는 갑자기 울면서 큰 소리로 형제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이 바로 요셉이라고 신분을 밝혔습니다. 이 모든 일은 자기가 꾸민 것이라고 하면서 형들이 어렸을 때 자기를 종으로 팔아버린 것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시험했노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흉년이 남아 있으니 아버지와 온가족을 모시고 오라고 초청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가족은 모두 이집트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2.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다
신약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묵상하면서 큰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이 말을 다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나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나도 세상에 대하여 이미 죽었습니다. 나도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전적으로 자신을 바칩니다. 이제 옛날의 나는 없고 예수님만 내 안에 사십니다. 이제부터 내가 사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신학자 톰 라이트는 사도 바울이 이런 깨달음에 이르게 된 배경을 이렇게 추측합니다. 사도 바울은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다 지파의 자손입니다. 그 먼 옛날 유다가 자기 막냇동생 베냐민을 위해서 대신 종이 되겠다고 자신을 바친 것처럼 예수님이 베냐민 지파 후손인 바울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그렇게 자신을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신학자는 상상합니다.
사도 바울이 보기에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모두 모든 사람은 죄의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인을 대신하여 자신을 바치심으로 죄인은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며 다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유다가 베냐민을 위해서 자신을 종으로 바친 것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도 죄인을 사랑하셔서 늘 죄인들 가운데서 사셨고 마침내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고 하늘로 올리셨으니 여기에 큰 비밀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글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빛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죄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나 사망의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본래 목적을 잃어버리고 욕심과 탐심의 종이 되어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죄인들 가운데서 죄인들을 위하여 사시다가 죄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죄인을 대신하여 자기 아들을 희생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어 예수님을 따라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이제 사도 바울 자신처럼 예수님이 그 안에서 사시고 행하시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셨을까요?
3. 한 알의 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에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우리는 지난 주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모든 생명에게 축복을 선언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충만의 역사를 이루시려고 하나님은 모든 생명에 씨를 두셨다고 성경이 들려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범죄함으로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다시 세상을 회복하시려고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시기를 그들의 씨를 통하여 세상 만민이 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견고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한 알의 밀은 온 세상에 충만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회복 프로젝트를 의미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씨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씨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씨 중의 씨가 있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한 알의 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충만하게 될 생명의 씨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씨에서 발아한 또 하나의 씨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한 알의 밀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이방인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그렇게 기독교 신앙은 한 알의 밀로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이어받고 실천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그 생명의 씨앗은 움트고 자라고 희생하고 그리고 또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시라고 찬송하고 경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배하는 예수님은 사실 갈릴리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어부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시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셨고 그들 가운데서 먹고 친구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때도 두 강도 사이에 달리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죄인들 가운데 사시다가 죄인들 가운데서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사는 법이며, 한 알의 밀이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절정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인들을 거룩한 의인들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동네에서 은둔자로 살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끝까지 모시는 봉사자가 되었습니다. 동네에서 손가락질 받고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아서 ‘손절’을 당하던 수전노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나고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당시에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형틀인 십자가를 가장 큰 사랑의 상징으로 만인의 가슴에 새겨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한 알의 밀이라는 생명의 씨가 작동하는 방식이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역사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가장 높이 영광을 받으시는 곳은 예배당인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임이 분명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갈 때, 즉 한 알의 밀로서 생명의 씨앗으로 살아갈 때 예수님의 역사는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죄인들 가운데 사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사람들 사이에서 더불어 친구가 되고 생명의 씨앗으로 살아간다면 바로 그곳이 거룩한 예배당이며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당에 모여서 자기 막냇동생을 대신하여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나선 유다를 배웁니다. 그리고 한 알의 밀로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자신을 바친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교회와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헌신한 죄수 사도 바울을 배웁니다. 이런 배움과 경배와 기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습니다. 그것이 교회이며 예배입니다. 우리의 교회와 예배는 일종의 훈련소입니다. 진짜 현실에서 십자가를 세울 수 있는 밀알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결의를 다지고 준비하는 곳, 그곳이 우리의 교회가 아닐까요?
4. 유월절 해방과 십자가 혁명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성경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예수님이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말씀을 듣기도 하고 찬양을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의 어린 양이시라는 말은 예수님이 유월절에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유월절이 깊은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월절에 죽으신 것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월절이 무엇입니까?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해방절입니다. 앞에서 이집트로 이주한 야곱의 자손이 400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는데 그 후에 큰 민족으로 성장하자 이집트 왕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나중에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고 지금의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예수님의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옛날에는 고려인이라고 부르다가 조선인 그리고 이제는 한국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을 기념하면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설날처럼 오랜 풍습이었습니다. 우리의 설 명절은 조상들의 은덕을 기억하고 친지들과 이웃을 돌아보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유월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루시려고 그 민족을 구원하신 날이며 온 세상을 위한 제사장으로 우뚝 서게 하실 것을 기억하고 기대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유월절에 일어난 것을 보고 하나님이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빛나는 제사장으로 살 수 있게 하셨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 증거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늘로 올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시고 만민의 주가 되게 하셨고 성령을 선물로 보내셨다고 교회는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생명의 씨앗으로서 자신들은 십자가의 정신을 따라 사는 새로운 백성이 되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교회는 이 어두움의 삶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를 것을 다짐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것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따라 살 것을 각오했습니다. 그것은 먼저 대접하고 먼저 용서하고 은밀하게 선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신 길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는 새로운 유월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전의 유월절이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벗어나고 종살이를 떠나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라면, 새로운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죄의 길에서 떠나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십자가의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중심 상징이며 기독교 정신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퇴색할 때 교회는 형해화(形骸化)되었습니다. 이 말은 형식만 남고 가치나 의미를 잃었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십자가는 교회의 첨탑에만 있고 예배당에만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생기있게 될 때는 십자가가 성도들의 가슴에 새겨져서 일상 속에서 실천될 때였습니다.
십자가는 교회당에 세워집니다. 그러나 진정한 십자가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아버지를 위로하는 친구의 격려의 손길에 세워집니다. 십자가는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돌보는 그 따뜻한 손길과 함께 빛나고 있습니다. 진정한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세워지고 빛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십자가는 바로 그런 십자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