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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아모스 3장 1-8절
이스라엘 자손들아 들으라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로 하여금 북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나라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난 뒤 본격적으로 북이스라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1장과 2장 전체의 핵심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주의해서 봐야 할 사실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하여금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죄에 대한 벌을 말씀하신다는 것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없는 회개, 하나님의 말씀 없는 믿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3장은 히브리어 원문으로 ‘들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4장도 그러하고, 5장도 그러합니다. 들으라는 강조가 계속됩니다. 무엇을 들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 선지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는가? 듣지 않고서는 자신이 죄인인 줄 알 수도 없고, 자신이 죄인인 줄 알지 못하면 회개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딤후3:16). 왜냐하면 성경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기 때문입니다(딤후3:17). 이런 점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됩니다(계1:3).
물론 우리는 여기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만이 유효성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 없이, 단지 말씀만으로 죄를 깨닫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회개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중요성은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되지 않고 역사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즉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지자를 통하여 ‘들으라’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을 더욱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의 죄악 됨을 보게 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더해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1절과 2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선지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부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말합니다. 귀 기울여 들으라는 것입니다. 주의 깊게 들으라는 것입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너희의 마음을 열고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을 향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시는데, 이러한 방식은 아모스 2장에서 이미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말할 때 언급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출애굽 사건 및 가나안 정복에 대한 내용을 회상시켰습니다(암2:9-10). 그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가고 있는 방향이 죄악 된 쪽이라면 그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되는데, 너희는 어떤 자들이냐?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 자체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2절의 말씀을 하시는데,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 알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보다 더 근원적인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시는데,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 알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족속에 대하여는 알고자 하지 않았고, 너희만 알았다, 너희에게만 관심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만물에 대하여 섭리하십니다. 당연히 다른 모든 족속에 대하여 모를 수가 없습니다.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친히 모든 것에 대하여 다스리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어떤 것에 대하여 모르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속성으로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 지혜와 지식에 있어 완전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십니다(마5:45).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와 지식으로 저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심으로 친히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너희만 알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땅에 많은 피조물들이 있고, 인격적 피조물과 관련해 많은 족속들이 있지만, 나의 관심은 오직 너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다른 모든 민족 가운데 너희만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의 율법서에서 종종 나타납니다. 신명기 7장 6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7:6-8) 특히 여기서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에 너희를 택한 것이 아니란 것은 그들의 외적 조건 때문에 택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택함을 받을만한 어떤 자격이나 조건이 되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가 많아서, 너희의 됨됨이가 다른 민족들에 비해 좀 괜찮아서, 도덕적으로 볼 때 남다르기 때문에 너희를 택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너희를 택한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로 했기 때문이요, 특별히 너희 조상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약속하신 바를 지키시기 위해서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 내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10장 15절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기뻐할만한 모습이 있기 때문에, 사랑할만한 모습이기 때문에 기뻐하고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백성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신 것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격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격 없는 그들을 기뻐하기로 하시고 사랑하기로 하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짓는데도 그냥 내버려두시겠다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0장 16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7장의 이어지는 말씀도 마찬가지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지난 번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다는 말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육적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영적 이스라엘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다고 할 때 육적 이스라엘이든, 영적 이스라엘이든 하나님의 선택은 어떤 조건과 자격을 보고서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확하게 말하면 조건과 자격으로 따지자면 선택 받을만한 이유가 그들 안에는 없습니다. 단 1%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심을 따라 선택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선택은 단지 선택으로 끝나지 않고 목적을 가집니다. 신명기 6장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6:4-9) 하나님만을 참신으로 알고 그분만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5장에서는 십계명을 말씀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네 이웃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지금 북이스라엘은 자신이 선민이라는 것만 주장할 뿐 선민으로서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할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사실만 가지고 있을 뿐, 그런 선택에 걸맞은 모습으로 나타내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2절 하반부에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달리 말하면 내가 너희를 선택하고 부른 것은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 또한 거룩한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불렀다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이 있지만 내가 너희 민족만 알았다는 것은 다른 민족이 아니라 너희가 다른 민족과는 구별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며, 광야 가운데서도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놀라운 역사로 너희와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다른 나라와 구별된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앞선 장에서 이방인들이 이웃을 것을 빼앗기 위해 압박하는 것처럼 너희도 그렇다는 것이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팔아넘기는 것처럼 너희도 그렇다는 것이고, 형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긍휼이 아닌 화와 분으로만 대하는 것처럼 너희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잔인한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 뿐만 아니라,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할 정도라는 것입니다(암2:6-7). 문제는 적어도 유대인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야 말씀이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말씀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같은 죄라도 사실은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택함을 받은 자 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북이스라엘의 모습만이 아니라 많은 신자의 모습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값없는 은혜, 거주 주신 사랑을 받았지만 우리의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는 쪽보다 마치 헛된 것처럼 하는 쪽으로 나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불신자처럼 행동합니다. 아니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보다 더 강퍅하게 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격과 조건을 보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명으로 예정된 자들에 한하여 하나님은 결코 버리시지 않습니다. 행위로만 보자면 버려야 하고 버려야 마땅하지만, 행위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버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버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두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이때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의 말씀인가? 히브리서 12장 5절 이하의 말씀과 같습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5-11) 그러니까 사랑하시는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징계를 통하여 자신의 잘못을 알게 하시고, 거기서 돌아서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그 방향이 9절에서는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는 데 있다고 말씀하시고, 10절에서는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는데 있다고 말씀하시며, 11절에서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징계를 경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꾸지람을 받는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채찍질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징계가 없는 것은 친아들이 아니라 사생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그들은 친아들이 아니요, 사생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죄가 관영할 때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심판을 행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 그들에 대하여는 오래 참으십니다. 일시적인 심판을 행하시기도 하시지만, 모든 일에 대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의 죄에 대하여는 징계하십니다. 때로는 오래 참으시기도 하시지만 참으시는 것만 하지 않으십니다. 일시적인 심판을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고, 돌이키도록 만드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복이요,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며, 그래서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리임을 알게 하십니다. 때문에 주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고, 주의 꾸지람을 받는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2절 하반부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라고 하면서 이어지는 말씀은 너희 모든 죄악에 대하여 보응할 수밖에 없는 정당성을 여러 가지로 열거합니다. 너희가 징계 받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너희에게서 원인을 찾을 수 없지만, 선택 받은 자들이 징계를 받는 것은 너희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3절을 보시면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말씀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동행 한다고 할 때 뜻이 같지 않으면 동행하는 그 길이 어렵습니다. 흔한 예이지만 부부가 같은 마음이 아니라 내 주장만 펼친다면 거기에는 분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분란도 한쪽에서 참고 참으면 그나마 조용히 가기도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일반적으로도 그러하다면 신앙에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여러분, 교회 역사 속에서 교리에 대한 논쟁이 있었던 것은 각자의 뜻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치하지 않은데 어떻게 함께 동행 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가톨릭에서 분리하여 개신교가 나왔지만 루터주의와 개혁주의가 분리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찬에 대하여 일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529년 마부르크Marburg 회담이 그것입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14개 조항에서는 일치했지만, 마지막 성찬에 대한 일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함께 동행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개혁파 신학과 알미니안 신학, 웨슬리안 신학이 함께 할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개혁파와 뜻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나의 뜻은 너희의 거룩이다. 그러나 너희의 뜻은 거룩이 아니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과 상관없는 죄를 향해서만 나아가고 있다. 이렇게 뜻이 다른데 어떻게 함께 동행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올라가 차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은 열 명의 정탐꾼의 말, 즉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크고 강하다는 말에 올라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순종한 것이 아니라, 불순종하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 40년 길을 걸은 것 아닙니까?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하기 위한 징계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광야 같은 인생이 이런 목적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은 불변합니다. 그리고 그의 뜻은 언제나 선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일치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광야 40년 길 안에서도 더욱 큰 화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우리만 불편할 뿐입니다.
계속해서 4절을 보시면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사자가 먹이를 잡기 전에는 조용히 접근하지만 잡은 후에는 포효하는 것처럼 내가 너희를 향하여 외치는 것은 결코 이유가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너희를 향해 외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큰 소리만 외친다면 부당할 수 있겠지만, 내가 너희를 향하여 큰 소리를 치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있어서 선지자를 세워 저들에게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참된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더 이상 부드럽게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사자가 포효하는 것처럼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미 아모스 1장 2절에서부터 표현된 내용인데, 거기 보면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부르짖는다, 소리를 낸다는 것은 마치 사자의 포효처럼 그렇게 소리를 발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하자면 너희의 죄를 큰 소리로 드러내겠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입니다. 덫을 땅에 놓아야지만 새가 땅에 있는 먹이를 먹을 때 잡히는 것처럼, 또한 잡히면 덫이 어떤 반응을 하는 것처럼 너희를 향한 벌 혹은 재앙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의의 재난을 당할 때 우연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재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재물 혹은 좋은 일에 대한 운이 없다는 것인데, 선지자는 사람이 새를 잡기 위해 덫을 놓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재앙이라는 벌을 놓아 너희의 죄에 대하여 징계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혹은 새가 먹이에 정신이 팔려 덫을 보지도 못하고 잡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는 보지 못하고 죄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게 되는 이스라엘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징계와 진노를 피하기 위해 온갖 발버둥을 칠 것입니다. 그러나 새가 덫에 걸려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6절입니다.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여기서 나팔이 울리는 것은 두려움과 관련된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위험을 알리는 나팔소리인데, 위험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리게 되면 백성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재앙이 성읍에 미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결국 4절과 5절, 6절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는 것이고, 그 이유로 인하여 덫을 땅에 놓는다는 것인데, 그 덫은 무엇인가?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위험이 있다는 것이고, 그 위험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위험은 결국 재앙이 북이스라엘 성읍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유는 무엇입니까? 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 모든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에게 보응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죄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유기자들과 관련해서는 일시적인 심판과 함께 영원한 심판에 이르게 하지만, 택자와 관련해서는 영원한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시적인 심판을 행하십니다. 특히 6절 ‘재앙’으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는 ‘רָעָה֙’[라아]라는 단어인데, 그 의미는 ‘나쁜’, ‘사악한’, ‘해로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죄의 저자란 의미가 아닙니다. 도덕적 악의 주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말 번역대로 저들 입장에서 볼 때 나쁜 일, 해로운 일을 행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으로서 도덕적 악의 주체는 아니시지만, 저들의 도덕적 악에 대하여 물리적인 악, 다시 말해 재앙은 내리는 것에 대해서는 주체로 계십니다.
때문에 재앙은 결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운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혹은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분명한 주체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자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만물에 대하여 섭리하십니다. 섭리하신다는 것은 거기에 우연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소위 우리가 불행이라고 여기는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있는가? 모든 경우가 죄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경우가 죄로 말미암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죄로 말미암은 재앙이라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택하신 백성을 이렇게 다루시는가를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으로 하자면 하나님 아버지께만 복종하도록 하기 위함이요,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의도를 전혀 모르고 광야 이스라엘 백성처럼 원망과 불평만 한다면 재앙을 통해 순종과 거룩에 참여하기보다는 결국 죽음으로 결과 될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계속해서 7절을 보시면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1장과 2장에서 우리는 북이스라엘 주변국들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벌을 돌이키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각 나라들마다 선지자를 보내시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물론 요나서의 경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아닌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은 아니듯 이방인이라고 해서 다 이방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약의 경우 많은 부분 이스라엘 중심입니다. 구약에서조차 이방인이 완전히 제외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이스라엘 주변국들에 대하여 죄로 벌하신다고 할 때 그들 나라들, 거기에 속한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신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 말은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이스라엘만 알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이방인처럼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에돔, 암몬, 모압과 같은 나라들에게는 미리 말씀하시지 않고 벌을 내리신다면, 너희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대상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은 임박한 재앙에 대하여 미리 알리심으로 회개할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기만 한다면 용서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데도 그의 말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재앙을 내릴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만큼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고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재앙을 내리실 것을 말씀하시고, 그 비밀을 자기의 종인 선지자에게 보이심으로 행하려고 하신다면 거기에는 저들의 강퍅함과 완악함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강퍅함과 완악함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저들에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강퍅함과 완악함에 대하여 선지자를 통해 알리신다면 핑계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히 증거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얼마나 강퍅하고 완악한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증거 하는 참된 선지자의 말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제발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귀를 기울여 들으라는 것이고, 마음을 다하여 들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는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는데, 결국 사자가 부르짖을 때 두려워하는 것처럼 너희는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비밀을 선지자에게 보이심으로 말미암아 행하신다고 할 때 선지자는 그렇게 보이신 바를 증거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런 증거가 마치 사자가 부르짖는 것처럼 하고 있다면 너희는 그 말씀에 대하여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회개할 수 있고, 그래야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두려움으로 서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책이 제거되었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부패함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죄를 짓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보다 나은가? 그러해야 하지만, 늘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가 다른 모든 나라와 비교할 때 나은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러할 때가 많습니다. 구별되어야 하는데, 남달라야 하는데, 사실은 저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 안에 있는 이 부패성은 로마서 7장의 말씀처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롬7:19).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선택 받을만한 원인이나 자격이 우리에게 있어서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다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때가 되어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목적하신 바가 있는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부패한 우리가 늘 선이 아니라 악을 향해 나아갈 때 그 길을 막기 위해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을 그의 말씀을 통하여 직시해야 합니다. 얼마나 우리가 완악하고 강퍅한지를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결코 주 앞에서 합당하게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아니고서는 거룩함으로 나아올 수 없다(딤전4:5)는 것을 다시금 분명히 새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