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학 민주당 청년최고위원이동학 최고위원은 “선배 정치인들이 정치적 유불리만 따지다 보니 연금, 환경, 쓰레기 등 미래세대의 삶에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하지 않고 연기만 하고 있다”며 “청년세대는 그 유탄을 고스란히 맞는 만큼 지금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함께 책임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이진구 기자 《정치권에 청년 정치 바람이 불면서 청년 정치인들이 귀한 몸이 됐다. 과거에는 말석 한 자리도 얻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위원회 구성이나 회의에 이들이 없으면 “왜 안 불렀느냐”며 먼저 찾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일각에서는 신념과 실력, 자질보다 ‘나이’가 더 우선시되는 부작용도 벌어지고 있다. 이동학 더불어민주당 청년최고위원(39)은 “청년들의 정치 참여는 바람직하지만, 동시에 과연 연공서열형 문화를 깰 만큼 괜찮은 사람인지 증명해 내야 하는 숙제도 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5월 송영길 민주당 대표가 취임하며 지명직 청년최고위원에 임명됐다.》
―당신 자신은 어떻게 증명해낼 건가.
“시작하자마자 ‘훅’ 들어오시네요. 하하하. 지금 당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못 나오고 있다. 아킬레스건이 찔리는 걸 보면서도 아픔을 못 느끼는 거대한 공룡 같은 상태라고 할까. 이달 중 청년미래연석회의라는 기구가 발족되는데 그곳을 통해 당내 ‘레드팀(Red Team)’ 역할을 하려고 한다. 내가 의장을 맡았는데 파열음이 나더라도 한번 세게 할 생각이다.” (대부분 그렇게 시작하지만 용두사미가 됐다.) “민주당이 지금까지 견지해온 것을 지켜내야 정권을 연장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 강력한 의지가 다양한 목소리들을 계속해서 쳐내고 있는데 나는 우리가 좀 더 품이 넓어지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쪽이다. 내가 정치적 출세에 연연해하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거라 본다.”
※레드팀은 조직 내 취약점을 찾아서 공격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팀을 말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한 검증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나.
“검찰총장 임명 때는 옹호하다가 지금은 왜 의혹을 제기하느냐는 건가?” (앞뒤가 안 맞지 않나.) “그때는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실드(shield·방패)’ 쳐준 거지. 그래 놓고 지금은 입장이 달라져서 다르게 얘기하는데, 당연히 좋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당시에 당이 ‘실드’ 쳤던 걸 사과해야 한다고 본다. 대부분 당시에도 나온 이야기들이어서 검증 과정에서 모르지는 않았을 거다. 당시 검증에서 문제가 없었다면 지금 공격하는 건 안 맞는 거고, 지금 공격하는 게 맞다면 당시 검증 소홀에 실드 친 건 사과하는 게 상식 아닌가.”
―문재인 대통령의 비정규직 제로 시대가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는데….
“그게 어떻게 현실에서 가능한지 방법을 모르겠다. 대기업은 노조가 있으면 10년 정도, 없으면 6, 7년 정도 근속한다. 중소기업은 노조가 있으면 6년 정도, 없으면 3, 4년 정도고. 통계가 이렇게 나오는데 이 모두를 정규직으로 만들자는 주장은 소설에나 나올 수 있는 얘기다. 생산가능인구가 3500만 명 정도 되는데 이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만들려면 아마 우리나라가 전 지구를 장악할 수 있을 정도의 시장 지배력을 갖고 있어야 할 거다.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지 않나. 우리 당도 사회를 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당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관점을 어떻게 바꿔야 한다는 건가.
“존재 자체를 없애려 하지 말고, 비정규직이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본다. 비정규직이라도 보수나 안전 이런 부분에서 걱정 없이 일하고 살 수 있도록 사회안전망을 실질적으로 까는 것.” (안에서 그런 말을 하면 국민의힘 가라고 하지 않나?) “그러더라. 가라고…. 하지만 난 할 수 있는 말이고, 또 해야 한다고 본다.”
―정치는 어떻게 하게 된 건가.
“의자 나르다가….” (의자?) “제대하고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대회에서 의자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데 대기 중에 누가 연설을 하는데 ‘깨끗한 정치로 잘 사는 나라를 만들자’ 이런 말들이 가슴에 꽂히더라. 이후 내 상황과 겹쳐서 많은 생각이 들면서 입당했다.” (어떤 상황과 겹쳤기에….) “아르바이트만으로는 살기 힘들어서 좀 무리해 생과일주스를 파는 트럭 노점상을 했다. 그런데 영화에서나 보던 일들이 벌어졌다. 동네 깡패가 돈 뜯으러 오고, 노점 단속반, 주차단속 요원도 수시로 오고, 가끔은 경찰도 왔다. 노점이 불법인 건 안다. 그런데 나처럼 낭떠러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당시 고졸인 내가 취직을 하기는 어렵고, 살기 위해 하는 행동은 불법이니…. 그런 고민이 확장되면서, 그러면 국가는 이들에게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건가를 생각하다 보니 정치가 보이게 된 것 같다.”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려웠나.
“초등학생 때 군인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께 부담을 안 드리려고 6학년 때부터 신문 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했다. 공업고등학교를 간 것도 인문계와 달리 일찍 끝나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는 다행히 국가장학금을 받아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게 늘 감사해서 국가유공자 자녀라 6개월 공익 가면 되는데 해병대에 자원했다. 뭔가 사회에 기여하고 싶기도 했고.” (꼭 해병대 입대로 기여할 필요는 없지 않나.) “하하하, 어린 마음도 있었고…. 입대 첫날 ‘잘못 왔다’는 생각은 들었다. 정말 힘들더라. 훈련도, 내무생활도.” (기간이?) “2년 2개월.”
―정의당은 생각하지 않았나.
“정의당은 아직 많은 것을 담기에는 그릇이 협소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점이 그렇다는 건가.) “기업과 노동자를 대결주의로 보는 시각 같은 것…. 우리 당에서도 일정 부분은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저쪽은 더 심하니까. 대변하려는 계층을 정확히 대변하려다 보니 생기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양쪽을 다 봐야 하지 않을까? 나도 노동자들의 처우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주 조그만 수준이지만 사업을 해봤기 때문에 사람을 고용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안다.”
―노점 말고 다른 것도 했나.
“노점을 접고 대전역 근처 지하상가에 카페를 냈는데 아르바이트생을 8명이나 썼다. 그런데 인건비 주는 게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내 월급도 다 챙겨가지 못했으니까. 나는 주인이니 적게 가져가도 할 수 없지만 직원들에게는 그럴 수가 없지 않나. 그런 상황에서 자꾸 자영업자, 기업가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노동자 권리만 주장하면 사장 입장에서는 문 닫는 게 편하지. 그런 고민의 폭이 정의당은 작은 것 같다. 우리 당도 양자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데 더 노력해야 한다. 상대를 적으로 모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입장을 바꿔 적으로 몰리면 나는 가만히 있겠나. 그러면 남는 건 싸움밖에 없다.”
―대학생 때부터 정치활동을 했는데 뭐가 힘들던가.
“시작하자마자 벌금 맞고 쓰러져서….” (벌금?)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열린우리당이 깨끗한 정치, 아래로부터의 공천을 표방하면서 후보 경선에 선거인단 투표를 처음 도입했다. 그런데 누군가 동의도 받지 않고 내 개인정보를 알아내 선거인단에 등록시킨 거다. 불법 선거인단인 셈이지. 그때 22세였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를 때였다. 그냥 당에서 투표하라고 해 투표를 했는데 그게 정당한 투표를 방해한 업무방해죄라고 1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나왔다.” (형량이 엄청 센데?) “국선변호인과 상의해서 항소를 했고 덕분에 벌금 300만 원으로 떨어졌지만 그때는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첫 재판 받은 날 대전현충원 아버지 묘소에 갔는데… 함께 간 친구에게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남들은 나를 범법자로 볼 텐데 내가 깨끗한 정치를 말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며 엄청 울었다. 정치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깨끗한 정치로 잘 사는 나라를 만들자는 말이 멋있어서 들어왔는데, 현실은 술수가 난무했고 처참했다. 많은 고민 끝에 나는 그래도 정치를 바꾸기 위해 남기로 했지만, 함께 시작했던 친구들 중에는 떠난 사람도 많다.”
―17년이 지났는데, 지금은 정치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지금도 아래쪽, 밑바닥 정치를 보면… 변했다고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진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