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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영접하면 '우리' '나' '삶'이 확 바뀐다>의 줄거리:
세례요한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대로, 사람들이 눈앞에 보이고 그 소리가 귀에 들리는 현장에서 내 의식은 예수께 집중하며 그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규정합니다. 나를 규정하는 방식은 십자가 예수님에게 나를 대입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 영접이 나의 모든 것을 확 바뀌게 합니다.
영접하면 ‘우리’ ‘나’ ‘삶’이 확 바뀐다
(요한복음 1:35~51)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영접하면 ‘우리’ ‘나’ ‘삶’이 확 바뀐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영접하면 ‘우리’ ‘나’ ‘삶’이 확 바뀐다”
우리가 읽은 부분 이후에는 빌립에 의해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인도되어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47절에서 나다나엘을 향하여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평가하셨습니다. 한편 5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시는 특이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가 바뀌고 “나”가 바뀌고 “삶”이 바뀌게 됩니다. 본문은 예수님 영접하기의 전형적인 모델로 세례 요한을 보여줍니다. 지난 시간에 산헤드린공회에서는 세례 요한을 트집 잡고자 파견단을 보냈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의 대화 주제는 “세례 요한이 누구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자신을 누구라 생각하는지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자기를 소개하는 세례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의식이 예수님께 고정되어 묶여있다시피 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규정되고 있는 자기를 이야기하다 보니 파견단과의 대화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파견단은 예수님을 몰랐기에 예수님에 의해 규정되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누구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계속했지만 파견단은 정작 그 대답을 통해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나를 규정하는 대상이 무엇이고 누구인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규정하는 대상을 안다면 나를 이해할 수 있지만 나를 규정하는 대상을 모른다면 나를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르기에 이렇게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에게 나를 제대로 이해시키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영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산헤드린공회의 파견단과 세례 요한의 대화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처럼 깊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인 사도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로부터 시작해서 생명이시고 빛이시라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며 예수님을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임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한 뒤에 갑자기 세례 요한이 누구냐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 무엇이냐를 세례 요한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우리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질문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 혹은 직장동료들을 비롯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에서 예수님이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매순간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지금 아내 앞에 있다고 해서 남편으로 여기고, 자녀 앞에 있다고 해서 부모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직장에 나가서 회사의 직원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일을 앞에 두고 과제를 앞에 두고 세례 요한처럼 계속해서 예수님을 첫 번째로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나를 규정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접해야 하는 예수님은 어린 양이십니다. 번제단에서 날마다 번제로 드려지는 어린 양으로서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번제단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나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장님 앞에서 직원이기에 앞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의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산헤드린공회의 파견단에 둘러싸여 질문을 받으면서도 의식은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던 바와 같습니다. 눈으로는 사람들을 보고 귀로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의식은 예수님께 꽂혀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장님 앞에서 사장님을 보고 사장님의 말을 들을 것이지만 의식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대입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사장님 앞에서 스스로 생각하려고 하는 동안 예수님 영접은 끝나기 때문입니다. 가시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을 떠올리며 “나는 주님과 함께 머리를 쓰지 못하는 죽은 자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한 소원이 생길 때에는 배를 창에 찔리신 예수님을 떠올리며 “나는 주님과 함께 배를 창에 찔린 자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손대고 발을 들여놓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신 예수님을 떠올리며 “나는 주님과 함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어진 것들을 좋아함으로 마음에 살이 된 것에 대해서는 온몸을 채찍에 맞은 주님을 생각하며 “나는 주님과 함께 채찍을 맞은 자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듯 예수님 영접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나를 대입하고 규정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예배당 안에서 예배드린다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식에 참여했다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에 의해서 규정된 나를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는 남자다, 나는 여자다, 나는 부모다, 나는 직장인이다,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이러한 모든 자아의식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오직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다.”라는 자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할 때 나타나는 일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뀌고 “나”가 바뀌고 “삶”이 바뀌게 됩니다. 본문은 공관복음에서는 나오지 않는 제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면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첫 번째 그룹으로써 열두 제자가 언급됩니다. 그중에서도 본문의 저자인 요한과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언급되고 안드레의 형인 베드로가 언급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다가 빌립을 만나게 되고 빌립은 다시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빌립도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예수님의 사역에 연속성을 가지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사역에 굉장히 긍정적 영역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내용만을 보자면 요한과 안드레는 본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36~37절을 보면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너희의 스승인 세례 요한이 나를 어린 양이라고 소개하였는데, 너희는 어린 양인 나에게 무엇을 얻고자 하느냐?”라고 질문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요한과 안드레는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되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은 당시에 제자가 랍비와 처음으로 관계를 맺을 때 관용적으로 사용되던 표현이라고 합니다. 풀어보면 “당신께서 어디에 계시든지 이제 나는 당신과 함께하며 당신으로부터 배우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으로써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결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결혼할 때 결혼서약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혼서약에서 “힘들 때나 병들 때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함께 하겠다.”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질문은 “당신의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든 내가 늘 당신과 함께하며 당신으로부터 고귀한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한과 안드레는 제자들 중 첫 번째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공관복음서와 비교되는 서술 방식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의 제자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 이후입니다. 정확하게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제자다운 제자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러한 제자들의 흑역사를 언급하지 않은 채 제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바로 드러냅니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기인합니다. 요한과 안드레가 제자들 중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저자인 사도 요한은 역사적인 기록을 기반으로 해서 “제자가 누구냐”라는 본질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이루어진 일입니다. 제자는 언제 어디서나 스승과 함께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에서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39절에서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열 시”라는 구체적인 시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으로부터 인류역사상 한 번도 유래가 없던 “우리”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신이신 하나님과 함께 “우리”라는 특별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체는 이제까지 지구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개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 설 때마다 “나는 누구냐”에 대한 신분을 요청받습니다. 학생 앞에서 선생님의 자아의식을 갖게 되고, 아내 앞에서는 남편의 자아의식을 갖게 되며, 자녀 앞에서는 부모의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마주하는 사람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의식하는 동안에는 나의 신분 또한 예수님을 통해 규정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는 인격의 핵심인 마음이 지금 살아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하게 될 때 나 개인적으로 “우리”라는 개념의 변화가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나와 배우자가 우리였고, 나와 부모님이 우리였고, 나와 형제자매가 우리였으며, 나와 자녀가 우리였습니다. 우리의 개념은 가족으로 시작하여 내가 속한 우리나라로까지 커집니다. 이 개념은 지구 전체를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면 “우리”라는 개념 속에는 지구도 나라도 들어오지 못하고 친구도 들어오지 못하고 가족도 들어오지 못하고 심지어 배우자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우리”라는 개념 속에 오직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 예수님은 성령님과 하나님과 하나 되어계시기 때문에 우리라는 개념 속에서 나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위가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한 우리의 개념에서는 사랑하는 애인조차도 우리 속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애인과 만나서 대화하는 동안에도 의식은 예수님께 꽂혀서 예수님을 통하여 나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머리를 쓸 수 없이 예수님과 함께 가시면류관을 쓰고 죽은 자다. 나는 소원을 가질 수 없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창에 찔려 죽은 자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죽은 자다. 좋아하는 것이 마음에 살이 될 수 없도록 예수님과 함께 채찍에 맞아 죽은 자다. 이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애인을 좋아하여 “우리”로서 붙잡고 있다면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통해 나를 규정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하다 보면 우리의 개념은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 그리고 나”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라는 개념 속에서 배우자도 쫓아내고 자녀도 쫓아내고 나라도 쫓아내고 지구도 쫓아낼 때 나는 이들을 위하여 가장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됩니다. 지구 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나의 우리에서 쫓아냈을 때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루고, 그 결과 우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관계를 맺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몇몇 분들과 개인적으로 만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부부사이에서조차 우리의 개념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편에게 무엇이라 이야기해야 할까요?”, “우리가 아내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라고 물을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 “우리”라는 개념으로 묶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된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네 가지 포인트에서 나를 대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만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우리 속에 포함됩니다. 같이 십자가를 붙잡는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집사님의 남편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다면, 나와 그 집사님은 우리로서 그 남편을 위하여 같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부부도 갈라져야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부부가 우리로 묶여있다면 오히려 서로를 죽이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에 이어서 “나”가 바뀌게 됩니다. 안드레는 형제인 시몬에게 와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전하고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42절을 보면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짜고짜 시몬을 게바(베드로)라 부르십니다. “바위”라는 뜻이 히브리어로는 게바이고 헬라어로는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해서 예수님과 우리로 묶일 때 예수님과 함께하기 이전의 나와 예수님과 함께한 이후의 나는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으로부터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아름답고 정확하고 올바르게 계획된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영접할 때 아담의 타락과 함께 잃었던 진정한 나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아내를 맞이해서 40년을 같이 살았다면 창조주가 만들어 놓은 진정한 아내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까지 진정한 모습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배우자에 대한 불만을 갖지만 그것은 배우자 본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진짜 배우자와는 아직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배우자뿐만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다면 진정한 나 자신을 찾지도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나의 모습은 죄악에 찌든 상태입니다. 십자가의 네 가지 포인트에 대입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진짜 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죄악에 찌든 나는 죽어야 합니다. 그러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부활시키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나는 멀쩡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모습은 가짜입니다. 있어서는 안 되고 존재해서도 안 되고 지속되어서는 안 되는 나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 대입시켜서 가짜 나를 죽이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면 진짜 나를 찾게 됩니다. 진짜 나를 찾아야 진짜 하나님과의 만남도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진짜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계획해 놓으신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7절을 보면 “…바요나 시몬아…”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바요나 시몬”이란 본문 42절에 기록된 대로 “요나(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입니다. 이제는 요나라는 육체의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삶은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육체의 아버지는 더 이상 우리 속에 포함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육체의 관계에서 비롯된 우리가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다른 우리를 만들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가 되어 태어난 나는 지금까지의 나와는 다릅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과 딸로 태어난 나, 형제자매들과 함께 있는 나, 친구들과 함께 있는 나,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과 예수님과 우리가 되어있는 나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러한 나로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친구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완전히 달라진 우리에서 태어나게 된 나로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이후에는 나다나엘이 언급됩니다. 47절을 보면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래 이름인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는 자라는 뜻으로써 간사하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곱이라는 이름을 염두에 두시고 51절에서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벧엘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던 때는 인생의 암흑기였습니다. 이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당시의 야곱은 복을 추구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얼마나 복을 추구했는지 아버지도 속이고 형도 속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닥다리를 보았다면 그 복을 추구하는 마음은 이제 하늘을 향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사닥다리는 위로 올라가는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정적으로 세상의 복을 추구하던 야곱에게 이러한 환상을 보여주신 것은 추구하는 방향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진정한 복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환상을 보고서도 땅의 복을 추구하였습니다. 라헬을 추구하였고 라반 삼촌의 양들을 도둑질하듯이 교활한 방법으로 교배를 시켜서 튼튼한 양은 자기가 갖고 약한 양은 삼촌에게 넘겨줍니다. 심지어 얍복 강가에서 여호와의 사자와 씨름을 해서 이기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결코 긍정적으로 볼만한 사건이 아닙니다. 단적으로 말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와 비교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시고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을 이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가지고 있던 간사함입니다. 이러한 성향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선민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결국 이들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겨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야곱이 그랬듯이 하나님을 이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복으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올라오라고 방향을 제시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간사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이 땅에 있는 복을 추구하였습니다. 진정한 복이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등지고 세상에서 복을 찾으며 하나님의 주장을 이기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130년간이나 살았던 야곱은 스스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 향하는 사닥다리를 환상으로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만이 진정한 복이심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말을 듣지 않았고 세상 것을 좋아하여 추구하였습니다. 이 간사함 때문에 일평생 험악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는 이와는 반대의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나를 대입하면 반드시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예수님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면 간사하고 하나님을 이기려는 삶은 중단됩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고 복이라는 말씀을 이겨먹고 세상 것을 더 좋아하는 간사한 삶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으로써 험악한 삶은 종식됩니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보여준 대로 사람들 속에서 나를 규정하는 상대로 예수님을 붙박이로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나를 대입시켜 내가 누구인가를 규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을 통해 고집스럽게 나를 규정해나갈 때에 “우리”가 바뀌고 “나”가 바뀌고 “삶”이 바뀝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사람들 속에서 나의 의식은 예수님을 첫 번째 붙박이로 붙잡고 예수님을 통해 나를 규정하는 영접함이 이루어짐으로써 “우리”가 바뀌고 “나”가 바뀌고 “삶”이 바뀌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