俄館播遷(아관파천)
어느날 덕수궁을 갔습니다.초봄 쓸쓸한 덕수궁 돌담을
비켜서 안으로 들어가는데 놀러 왔던 중학생 둘이 나한테 묻기를
“여기근처에 옛 러시아 공사관이 있다고 하던데 아시나요? ”
“ 듣기는 들었는데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데 거기는 왜? ”
“ 역사 숙제를 내 주셔서 한번 가 보려구요”
“ 정문 표 받는 사람에게 물어 보면 알지 모르는데”
나도 여러번 들어본 얘기라 같이 가서 들었습니다.
덕수궁 담 뒤편으로 거리로 따지면 한 10분정 되는데 덕수궁 안에 있는건 아니더라구요
학생 둘은 먼저 가고 나는 덕수궁을 한 바퀴 돌고나서 나도 갔습니다.
사진에서 보시는 것이 1900년도에 러시아 공사관 사진입니다.
지금은 6.25때 다 부서지고 탑하나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나도 궁굼 했던건 내가 학교 다닐 때 들은 俄館播遷 이었습니다
俄館播遷(아관파천) 무슨 이야기냐. 지금까지 아는 내용은 고종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어느 날 피난을 갔다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집에와서 자료를 찾았습니다.
몰랐던 여러 가지 사실내용이 있네요.
嚴尙宮
자료중 제일처음에 눈에 띠는 건 嚴尙宮이란 시녀였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明成皇后를 日本 낭인들이 경복궁 연못 까지 끌고 가서 칼로 난자를 하고 시신에다 불을질러 시해한 사건 )후 고종은 한시도 맘을 놓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고종과 세자인 순종을 가마에 태워 밤중에 경복궁 궁문을 빠져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인도한 여인 이 여인이 엄상궁입니다. 사진을 보시지요. 그리 미녀도 아니고 뚱뚱하며 보잘 것 없던 시종(심부름하는 여인)인 여인.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일본으로 데려감
엄성궁의 이야기입니다
왕후인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은 시위상궁(侍衛尙宮이란 私家로 말하면 몸종)인 엄상궁.
그런 시위상궁이 어느 날 갑자기 高宗의 승은(承恩)을 입었다. 몸종 주제에 주인마님과 통정을 한거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못생기고 뚱뚱한 외모였으며, 또한 그녀의 나이 32살 이었고 高宗보다 2살이 적은 나이였다. 당시의 평균수명이 50살 정도, 그리고 조혼 풍습 이었음을 고려하면 그녀는 늙은 축에 들었던 여인 이었다.그런 宮女가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高宗의 침소에서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왔으니, 대궐 안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宮女가 王의 승은을 입게 되면, 그 사실을 대궐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오는 것이 관행이었다. 처음에는 궁궐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1854년 음력 11월 5일(양력 12월 26일)에 증찬정 엄진삼(嚴鎭三)의 딸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5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최고 지위인 상궁(尙宮)이 되었기 때문에 ‘엄상궁’으로 더 잘 알려졌다. 명성황후를 가까이에서 모시다가 고종의 승은을 입으니 이사실이 명성화후에 알려지자 마자 질투심이 매우강한민비가 1885년 궁 밖으로 쫓아 났는데 민비 살해당한 후 고종의 부름으로 다시 입궁한다. 고종이 1852년 7월 25일 생이니까 이때가34세 였다. 한창 때 나이고 고종이 11살에 왕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보는 건 미인들 뿐이고 정치야 여걸이었던 명성황후가 이렇쿵 저렇쿵 했으니 할 일이 별로 없었던 高宗은 이쁜 여인네를 밝혔던 모양으로 왕후가 질투심이 강하게 된건 고종임금이 워낙 밝혀서 곱고 미운 것을 안가리고 치마만 입으면 찝적거려서 궁녀 여러명을 내쫒았다고 野史에는 기록 되어있다 합니다.
여기서 을미사변(명성황후가 사해된 사건)을 잠간 보고가기로 합니다. 좀 깁니다.
<1882년 6월9일 그동안 별기군이라 해서 군을 새로 모집을 해서 총도 새것으로 주고
급료도 구식군인들와 대지도 못해게 많이 주면서 대우를 했는데 기존에 구식군에게는
13개월치 쌀배급도 없다가 한때 준다고 하는게 모레가 섞이는등 먹지 못하게되고
구식군대에게 구박을 했지요. 이게 빌미가 돼서 들고일어나서 軍亂이 일어났습니다.
이게 대원군의 암묵적인 지지속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민씨 일가가 죽임을 당하는등
혼란이 일어 났습다. 이렇게 되니 민씨 일가는 모두 뿔뿔히 흩어지게 됐고
무정부상태가 되니 할 수없이 고종은 대원군에게 민심 수습을 부탁하게 되니
당시 64세되던 대원군이 그동안 며누리한테 밀려서 은둔생활을 하던차에 구식군대에 호위를 받으며 당당히 등장을 합니다. 어느정도
수습이 됐는데 원수처럼 보기 싫었던 며누리 민비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난리 통에 민비는 궁궐에 있다가 궁녀 옷으로 갈아 입고 서성이던 중에 당시 문지기였던
김중현이란 사람에 등에 업혀 누이동생이 병이나서 큰일이니 하면서 군병사들 틈을 빠져나와 장호원 민웅식집에 숨어 있게 됩니
다. 한편 민비를 찾을 수 없었던 대원군은 멀정이 살아 있는 민비를 죽었다고 공표를 하고 국장을 치릅니다. 목적은 살아 있어도 죽었다고
공표를 하고 장례식 까지 치렀으니 살아 있어도 궁에는 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네요.
한편 숨어 있던 민비는 몰래 고종과 편지 연락을 하는데 당시 집주인 민웅식 밑에
보부상이었던 일꾼이 있었는데 이자는 하루에 300리길을 거뜬히 달렸다고 합니다.
장호원에서 아침에 출발하면 오후 4.5시경이면 한양에 도착을 해서 고종의 비서
집에 도착을 해서 편지를 전했고 이튿날 고동의 답신을 가지고 장호원으로
가서 편지를 전하니 이렇게 소통을 했습니다. 장례식까지 치르고 한동안 잠잠하니까
민비가 고종에게 서신을 전하기를 청나라에게 구원을 청해 달라고 서신을 냈습니다.
고종이 김윤식 어윤중에게 조선을 구해달라는 국서를 만들어 청나라 이홍장에게
청하자 이홍장은 마건충 정여창 오장경에 병사 4500명을 주면서 대원군을
대려오라 합니다. 청나라 배가 지금의 남양만에 도착해서 지금 서울역 근처에 막사를 지어 놓고 대원군에게 화담을 요청하니 대원군이 부하였던 천.하.장.한 4사람을 데리고
마건충을 보러 갔는데 여기서 납치가 돼서 청국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상륙한 청국나라 병사들이 기존 구식군대를 해산하고 가혹하게 고문도 하고
해서 세상은 30일 만에 다시 민비쪽으로 넘어 오게 됩니다.
도망간지 50일만에 다시 민비가 돌아오니 청국병사들이 까맣게 호위를 하면서
한양으로 왔는데 와서 한참 있다 보니 청국이 자기네 속국처럼 취급을 하면서 관리하나
임명을 하려해도 간섭을 하는등 일본처럼 집어 삼키려고는 안했으나 도저히 간섭 때문에
뭐든 할 수가 없어서 이게 아니다 느낀 민비가 러시아와 미국을 끌어당기기 시작을 합니다
미국은 거리가 멀고 한번 왕복을 하려면 2달이상을 걸리지만 러시아는 맘만 먹으면
2일 만에 올수가 있어서 라시아에 맘을 둡니다. 일본으로서는 이제까지 들은 돈도 있고
다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이럴 수 있냐 한 거지요.
러시아 공사 “베베루”는 부로디브스크는 겨울만 되면 바다가 얼어서 꼼작 을 못해
남쪽에 혹시 不凍港은 없나 하던 차에 민비에 부탁을 받은 겁니다. 러시아가 간섭을 시작하고 일본을 밀어 내려고 공사 베베루는 여러 군데 작업을 하면서 일본의 만행을 일일이 적어서 미국이나 등등에 소식을 주면서 갖가지 비난을 일본이 받게 합니다. 울화가 치민 일본.
일본 중장 출신 강경파 “미우라 고로”라는 공사를 새로 임명해서 조선으로 보냈는데
민비에 행동을 그냥 두고 볼 자는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1895년 일본 낭인들을 데리고 대낮에 처 들어 와서 민비를 살해 한거지요.
아무리 힘이 없다 해도 여기는 조선 땅인데 그 황후를 죽이다니 당시 미국이나 소련
주변 국가들이 모두 경악하고 비난을 하니 일본은 크게 당황했지요. 그래서
이 미우라 고로와 그 수행원들을 체포하고 재판에 붙입니다. 그러나 다 무혐의로
방면되었습니다. 이게
을미사변인데 이 사건이후로 고종은 늘 위험 속에 살면서 밤잠을 자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종의 나이43세 였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하는데 이것이 아관파천입니다. 이 피신을 주도한 사람이 엄상궁인데 엄성궁은 32세때 고종의 승은을 받었는데 1885년 쫒겨 났다가 민비기 죽자 다시 중으로 불러 들인게 1886년 들어오자 마자 43세에 임신을 해서 다음해에 낳으니 이가 곧<<李垠>>왕세자입니다.
엄상궁은 1896년에 고종과 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시킨, 이른바 아관파천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즉 아관파천이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에 의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이 왕세자와 함께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까지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거처한 사건이다. 이는 한 나라의 왕인 고종에게나, 그 왕이 통치하는 국가를 믿고 또 국가에게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조선의 국왕이 조선 땅 안에서 일본의 위협이 두려워 러시아의 공사관 안으로 피신하여 생활을 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으며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러한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는 ‘엄상궁’이라는 여인이 있었으니. 사실 아관파천은 엄상궁이라는 여인의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후궁인 그녀는 실로 대담한 담력과 연출력, 그리고 놀라운 배짱과 지략을 가진 여인이었다. 때문에 임금 부자의 왕궁 탈출 기도가 오직 단 한 번의 실행으로 그처럼 완벽하고 뛰어난 성공을 거둔 덕 역시 오로지 엄상궁에게 돌아갔지요. 한 나라의 황후며 황제의 아내인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인들. 고종에게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지요. 그 와중에 엄상궁은 고종 곁에서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의 피신을 권했다. 그녀는 친일파 들이자 궁을 지키는 자들이 자신에 대해서는 완전히 마음을 놓도록 천연덕 스럽게 행동을 하면서 문지기들 한테는 용돈도 두둑히 줄뿐아니라 아니라 이범진 등 외부에 있는 친러파 인물들과 물 샐 틈 없이 완벽하게 연락을 유지하여 탈출 방색을 모의하였다 또한 도피 당사자인 고종이 그녀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조하여 몸을 던져 따르게 할 만큼 신임을 얻었습니다. 한낱 궁녀인 여인이 감당 하기에는 실로 엄청난 일이었으나 그녀는 고종과 왕세자가 탄 가마를 러시아 공사관까지 메고 갈 가마꾼들까지도 완벽하게 자기 사람으로 장악 해냈고, 출입할 궁문의 수비병 들에게도 일주일에 걸친 공작을 펼친 결과 그녀가 나간다고 하면 아무말없이 가마가 몇 개던 간에 말들이 없었으니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과 세자 순종을 무사히 가게 했는데 사전 준비 단계 중 단 한 군데에서만 어긋나도 일은 실패로 돌아가고 엄청난 파문과 역작용이 발생했을 것이지요.
엄상궁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을 보필하며 43세에 아들을 잉태하였고,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후 낳으니 이 아이가 영친왕 이은(李垠)이다. 이때 고종의 나이는 45세로 이로 인해 고종의 후궁으로 귀인(貴人)에 책봉되었고, 선영(善英)이란 이름도 받았다. 1900년에 순빈(淳嬪)에, 1901년에 순비(淳妃)에, 1903년에는 황귀비(皇貴妃)에 책봉되었다. 궁호를 경선(慶善)이라 하여 ‘경선궁 마마’로도 불렸다.엄 황귀비를 황후로 승격 시키고자 하는 운동이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났으나, 한편에서는 반대하는 의견도 많아 결국 황후에 책봉 되지는 못 하였다. 그녀는 후궁 이었지만 왕비가 없는 상황에서 왕비와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황귀비라는 독특한 지위에 있었다.그러나 엄황귀비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강제로 퇴위 당하고 영친왕이 유학의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가는 인간적인 시련을 겪으며,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7월 20일에 덕수궁 즉조당에서 52세에 갑자기 사망 하였다. 일본에 있는 14살의 영친왕이 고된 군사 훈련을 받으며 주먹밥을 먹는 활동 사진을 보다가 감정이 북받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렇게 예쁘지도 않은 추한 얼굴로 대한제국의 황제를 쥐고 흔든 엄상궁,
비록 얼굴은 넙데데 하고 못 생겼지만 지략이 뛰어나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엄상궁.
이완용등의 나라 팔아 먹은 남자들이 살던 나라에서 여자의 몸으로 엄황귀비는 구한말의 시대적인 요구를 잘 파악하여 여성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私財)를 들여 1906년에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를 창설하고, 1907년에는 경영난에 부딪혀 있던 양정의숙(養正義塾)을 도와주었다. 이외에도 궁녀들도 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도록 했고, 수시로 교원들과 학생들 에게 필요한 경비와 학용품을 지원해 주었다. 또 종로의 걸인들에게 자선을 베풀었고, 불탄 종로상점 재건축 비용이 모자라자 건축비를 대 주었으며, 진명부인회(進明婦人會)에 돈과 건물을 하사하였다. 또 대한부인회(大韓婦人會)의 모범 잠업장 건립에 기금을 하사하는 등 사회 활동과 자선사업을 많이 하였다.
당시 이등박문은 <이 은왕>을 손주처럼 데리고 다녔다함.
고종은 사진과 같은 자식을 두었으나 영친왕을 왕세자로 삼음
일본 중장자격을 주었으나 지휘권은 안주었음
1919년 고종의 붕어로 장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