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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무(袤), 자는 연지(延之), 자호(自號)는 과암(果菴),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가정(稼亭) 문효공(文孝公) 휘 곡(穀)과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 휘 색(穡)이 공의 10대조와 9대조가 된다. 목은의 셋째 아들 양경공(良景公)의 휘는 종선(種善)이고, 양경공은 영중추부사를 지낸 문열공(文烈公) 휘 계전(季甸)을 낳고, 문열공은 대사성을 지낸 휘 우(堣)를 낳았다. 3대를 내려와 휘 지번(之蕃)이란 분이 있는데 내자시 정(內資寺正)을 지내고 호가 성암(省菴)이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이분이 휘 산해(山海)를 낳으니 영의정을 지내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아계(鵝溪)인데, 이분들이 바로 공의 증조부와 조부이다. 선고의 휘는 경전(慶全)으로 좌참찬을 지내고 한평군(韓平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석루(石樓)이다. 선비(先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홍문관 교리 김첨(金瞻)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경자년(1600, 선조33)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또래에 비해 월등하였다. 아옹(鵝翁 이산해)의 슬하에서 간혹 시정(時政)을 논하고 시비(是非)를 가리기도 하였는데 그 논리가 대나무를 쪼개듯 명쾌하였고, 조금 장성하여서는 잠깐 스쳐보기만 한 책을 암송하면서도 언제나 헷갈리거나 틀린 적이 없었다. 이에 아옹이 기특히 여겨 늘 말하기를 “내 허리춤에 있는 서대(犀帶)를 반드시 이 아이에게 부탁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광해가 집권하던 시절 셋째 형 부(阜)가 항장(抗章)을 올려 이이첨의 참수(斬首)를 청할 때 공이 소장의 앞뒤 내용에 관여하였는데, 이때 공은 아직 관례(冠禮)도 하지 않은 나이였다. 몇 년 뒤에 백형인 호당공(湖堂公) 후(厚)와 중형인 한림공(翰林公) 구(久)가 젊은 영재로서 잇달아 요절하자, 석루공(石樓公)은 공이 현달하는 것을 원치 않아 공부를 독책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책이었던 까닭에 때를 놓칠까 염려하여 석루공이 호남 관찰사로 있던 시절 혼자 서실(書室)에 틀어박혀 그곳을 깨끗이 정돈한 다음, 분잡하고 화려한 것들에 대해 마치 자신의 몸을 더럽힐 오물인 양 여기면서 매일같이 글을 음송하는 일밖에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는 혼조(昏朝)의 시대였던지라 과거에 응시하려 하지 않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이루어진 뒤 “이모(李某)는 지금 나와 응시할 만하다.”라고 하는 전교가 내려지고서야 비로소 공은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리하여 병인년(1626, 인조4) 별시(別試)에 합격하였으나 마침 합격자 전원이 파방(罷榜)되었고, 이후 또 기사년(1629) 별시에 합격하였는데, 당시 월사(月沙) 이공 정귀(李公廷龜)가 시관(試官)으로 있으면서 감탄하기를 “이는 진정 모래와 자갈 속의 주옥(珠玉)이다.”라고 하였다.
병자년(1636)에 오랑캐의 침탈이 급박해지자 공은 석루공에게 상을 호종하여 강도(江都)로 들어간다고 여쭙고는 노량(鷺梁)으로 말을 타고 달려가서 어가(御駕)를 기다렸다. 그런데 상이 갑자기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 버리자 길이 막혀 쫓아갈 수 없게 되어, 눈물을 흘리며 갈팡질팡한 채 몸을 맡길 곳을 찾지 못하였다. 이후 사태가 안정되자 벼슬 생활이 달갑지 않게 느껴져 우협(牛峽)의 깊은 곳에 초가집을 짓고 세상의 소식에 귀를 닫았으며 이따금 조그만 배를 타고 내왕하면서 부모님을 뵙고 문안하는 일만 일삼았다.
무인년(1638)에 국자감(國子監)에서 비로소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이로부터 예조와 병조에서 좌랑과 정랑을 지내고, 사간원에서 정언과 헌납과 사간을 지내고, 사헌부에서 지평과 집의를 지내고, 춘방(春坊)과 국자감에서 필선과 보덕(輔德)과 직강과 사성을 지내고, 여러 시(寺)의 경우는 군기시(軍器寺), 종부시(宗簿寺), 상의원(尙衣院), 사복시에서 정(正)을 지냈다. 한 관직을 여러 번 지낸 경우는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가장 많았다. 외직으로는 관서 아사(關西亞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파직되었고, 해미(海美)와 서천(舒川)과 담양(潭陽)에 외보(外補)되기도 하고 좌천되기도 하였다.
공이 지평이 되었을 때는 인조가 재위하던 시절이었는데, 소장을 올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세자를 보익하는 것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입니다.”라고 하고, 이어 정온(鄭蘊), 홍익한(洪翼漢),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을 모두 정표(旌表)하고 이경여(李敬輿), 이식(李植) 등을 모두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고, 묘당에서는 회계(回啓)하기를 “이모(李某)는 언관(言官)의 책임을 맡아 시국을 걱정하는 뜻이 간절하니, 만언의 소장을 올린 것은 진심 어린 충정에서 나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병조의 낭관으로 있을 때 효종이 막 정사를 맡아 전부(銓部)에 명하여 간관(諫官)을 선발하라고 하였는데 공이 이로 말미암아 정언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유신(儒臣)이 간관 두세 명과 함께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시호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가 상의 뜻을 거스르자 공이 힘써 그들을 변호하였는데, 이 일로 상이 노하여 공을 외직으로 내보내 해미현(海美縣)에 보임하였다. 이후 임지에 이르러서는 오직 민사(民社)를 시급히 여겨 소장을 통해 고질적인 폐단을 반복하여 아뢰었는데 그 분량이 1000자에 이르렀으며 상이 이에 대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한다.”라는 비답을 내렸다. 또 어사(御史)가 “몸가짐이 청렴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다.”라고 표창하였다. 그러다 마침 중죄를 지은 죄수가 도망간 일로 파직되어 돌아가게 되자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해 주었다. 서천군(舒川郡)을 다스릴 적에는 오공주(五公主)의 궁노(宮奴)들이 심한 전횡을 일삼아 백성들의 전답을 빼앗아 사찰을 살찌우는 한편, 스스로 원당(願堂)에 붙어 오만한 태도로 기세를 부렸는데 백성들은 이에 대해 아무도 흘겨보지 못하였다. 이에 공은 소장을 올려 그 죄상을 폭로하였는데,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그대가 백성을 사랑함이 이와 같으니, 나는 고을 하나에 대한 걱정을 덜었다.”라고 하는 한편, 특명을 내려 궁노를 거두고 사찰을 본군(本郡)에 귀속하였다. 그러자 온 경내가 환호작약(歡呼雀躍)하였는데, 공이 돌아갈 때에는 비석을 새겨 그 공덕을 잊지 않기를 해미현의 경우와 똑같이 하였다.
어떤 사람이, 공이 한만히 읊은 시구(詩句)를 가지고 권세 있는 간신에게 공을 참소하면서 “당세를 기롱하고 업신여겼다.”라고 하였는데, 이 일로 담양부(潭陽府)로 좌천되었다. 그 후 열 달이 지난 뒤에 현종이 새로 즉위하여 공을 사간으로 부르자,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머금으며 떠남을 애석히 여기는 한편, 비각(碑閣)을 세워 거사비(去思碑)를 덮어 준 뒤 그것을 ‘이후생사우(李侯生祠宇)’라고 불렀다.
당시 예를 의논하는 자가 국가의 예법을 그르쳐 식견 있는 이들이 놀라고 개탄하였다. 이에 미수(眉叟) 허 문정공(許文正公)이 장령으로서 소장을 올려 이를 개정(改定)하여 종통(宗統)을 엄중히 할 것을 청하자, 당로자가 몹시 노여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은 고산(孤山) 윤공 선도(尹公善道)에게 말하기를 “국가의 예법이란 중대한 의론인데, 어찌 허 장령만 훌륭한 명성을 독차지하게 둘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튿날 고산공(孤山公)이 강개한 심정으로 소장을 올리자 당시 의론이 크게 시끄러워져 먼 지역으로 유배를 보내도록 한 뒤에야 잠잠해졌는데, 공이 강가에서 그를 전송할 때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이때부터 공은 시골집으로 물러나 있었는데 이따금 직무가 한가한 사국(司局)으로 제수하는 명이 내려지기도 하였으나 일절 나아가지 않았으니, 이렇게 두문불출한 기간이 12년이었다.
계축년(1673, 현종14)에 공이 70세가 되었다. 조정의 반열에 있던 옛 신하라는 이유로 쌀과 콩을 하사받았는데, 이는 실로 양로(養老)의 은전이었다.
갑인년(1674)에 왕대비(王大妃)가 승하한 당시 대왕대비(大王大妃)의 복제(服制)를 중부복(衆婦服)으로 결정하자 현종은 지난날의 의례(議禮)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크게 깨달았는데, 그러던 중 갑자기 병이 크게 악화되어 옥궤(玉几)에 몸을 기대어 유언을 남겼다. 숙종이 왕위를 이어받아 허 문정(許文正)을 발탁하여 대사헌에 제수하고는 전조(銓曹)에 명을 내려 벼슬에서 물러나 칩거하고 있는 자들을 녹용(錄用)하여 나오게 하였는데, 공이 그중 한 사람이었다.
다시 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일찍이 경자년(1660)에 고(故) 참의(參議) 윤선도(尹善道)가 예(禮)를 변론한 소장으로 인해 북방으로 귀양 간 일이 있었습니다. 윤선도는 신이 평소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나 구제하기에 역부족이라 두문불출하여 입을 닫고는 더 이상 당대의 일을 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중간에 아첨을 일삼는 무리가 신을 명예와 이익을 낚는 미끼로 삼아 신이 조경(趙絅)의 시골집에 왕래하고 김 국구(金國舅)의 문관(門館)에 출입한다고 하는 한편, 윤선도, 허목, 홍우원(洪宇遠)의 소장이 전부 신의 손에서 감교(勘校)되었다고 말하는 등, 한쪽에서 말하면 다른 한쪽에서 화답하면서 기어코 신을, 폐기되어 금고(禁錮)에 처해진 와중에서 죽게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참소하는 입으로부터 시달리는 것이 신처럼 혹심한 경우가 없으니, 성명(聖明)하신 상이 아니었다면 신이 어떻게 이러한 뜻밖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비답을 내려 위로하고 타일러 주었다. 아아, 공이 소장 가운데에서 나열한 몇몇 공은 곧 당대의 현인으로 당시로부터 곤액을 당했던 분들이다. 하물며 그 예를 변론한 소장은 의리가 엄정하여 백세 뒤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이 없을 것이니, 시샘하고 질투하는 자들이 공을 몰아 공과 뜻을 같이하는 분들 속으로 밀어 넣었던 것은 그 의도가 실로 화를 싣고 와 먹이려는 것에서 나온지라, 다만 공이 평소 가지고 있던 명절(名節)을 성취시켜 주기에 충분할 뿐이다. 그러한즉 공이 말한 “참소하는 입으로부터 시달린다.”라는 것은 공에게 범진(范鎭)과 사마광(司馬光)이 함께 전(傳)에 실린 것 같은 행운이 되는 것이다.
그 후로 얼마 되지 않아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라 판결사(判決事)가 된 뒤에, 예조 참의에 이배되고 같은 날 발탁되어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대개 허 문정은 공을 문학(文學)으로 천거하였다. 이런 이유로 상은 공의 사직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리면서 “경 같은 문학과 중망이 아니면 어찌 이 중임을 감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또 형조 참판에 제수되는 한편, 겸임으로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의 세 직함이 한날에 이르렀다. 이에 공은 두려운 마음에 몹시 간절한 내용으로 사직 상소를 올렸는데, 상이 또다시 “경의 문학에 대해 오래전부터 익히 들어 왔다. 승진시켜 발탁함이 이에 이르렀는데 또 어찌 지나치게 사양하는가.”라는 비답을 내렸다. 다시 대사간으로서 이조 참판으로 이배하고 동지경연사를 겸관하게 하였는데, 그 사직 상소에 또 비답을 내리기를 “이조의 참판은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뜻이 맞는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은 천 년에 한 번 찾아오는 기회인데, 백발로 정사에 참여함에 어찌 비웃고 손가락질할 일이 있겠는가. 대정(大政)을 실시할 날도 머지않으니 공정함을 다하는 데 힘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공은 그 특별한 대우에 감격하여 오로지 지극히 공정한 태도를 견지하였는데 이에 아무도 감히 사사롭게 청탁하지 못하였다.
병진년(1676, 숙종2)에 부묘 당상(祔廟堂上)으로서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대사헌을 거쳐 또 이부(吏部)에 들어가 천거해 올린 사람이 7명인데, 효행과 청렴을 갖추고 언행이 방정한 사람을 천거하기도 하고 학문과 선행을 갖추고 재주와 도량이 있는 사람을 추천하기도 하니 조야가 모두 하나같이 이에 대해 칭찬하였다. 중궁(中宮)의 옥책문(玉冊文)을 찬술하여 상전(賞典)을 받았다.
정사년(1677)에 대사성에 제수되고 예조 참판에 전직되었다. 상이 특별히 우로전(優老典)으로 발탁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를 올려 주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도록 하니, 조자손(祖子孫) 3대가 기영회(耆英會)에 들어간 것은 국조(國朝)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무오년(1678)에 우참찬에 제수되고 공조 판서로 전직하였다.
기미년(1679)에 여든의 나이로 종1품에 올라 문형(文衡)에 천거되고 누차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공은 관직을 사양하고서 시골로 돌아가리라 단단히 작정하고는 매번 “강호(江湖)는 내 즐거움이다.”라고 말하였다.
경신년(1680) 봄에 척신(戚臣)이 큰 옥사를 일으켜 관리들이 일망타진되었다. 이에 공의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대간(臺諫)의 분한이 더욱 기승을 부림으로 인해 북관(北關)의 이성(利城)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친지들은 공과 작별하면서 모두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으나 정작 공은 풍설(風雪)이 몰아치는 철관(鐵關)을 마치 평탄한 길처럼 여겼다. 당시 남파(南坡) 홍공(洪公)도 귀양을 간 상태였는데 그 귀양지가 공이 있던 지역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수시로 서로 시통(詩筒)을 전하면서 대궐을 그리워하고 시국을 걱정하는 마음을 풀어 냈다.
임술년(1682)에 상의 전교로 인해 덕원(德源)으로 양이(量移)되었다.
계해년(1683)에 나라에 임금의 마마가 무사히 회복된 경사가 생겨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이 내려졌다. 이에 보령(保寧)의 옛집으로 돌아갔는데, 기운이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러다 같은 해 11월 6일에 작은 감기로 인해 별세하니, 향년 85세였다. 다음 해 1월에 집 뒤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에 대한 우애를 천성으로 타고났다. 7세에 모친을 잃자 능히 몸이 상하도록 애통해하면서 예제(禮制)를 지켰으며, 중년에 이르러 석루공(石樓公)이 별세하자 시묘살이를 하며 죽만 먹으니 고을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어릴 적에 큰누님이 출산하였는데 곁에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자 자신의 여종을 보내 드리니, 누님이 공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여종이 귀한 게 아니라 너의 그 뜻을 귀중하게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장가들 때에 마침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을 보고는 서둘러 초이엄(貂耳掩)을 벗어 주었으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이 있으면 번번이 거친 베옷으로 바꾸어 입었다. 늘 집안의 생업에 대해 초탈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여러 형제와 노비를 나누어 가질 적에 공이 말하기를 “종질(宗姪)이 책임은 무거우나 살림이 가난하니, 이들을 전부 그에게 주어 제사에 이바지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자 모두들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누군지도 모르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 울 아래에 있던 노비를 가리키면서 “이자는 내 노비이다.”라고 하였는데, 공은 “그런가?”라고 하고 웃으면서 주었고, 뒤에 또 잇달아 찾아와 같은 행동을 하는 자가 두 명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대해 주었다.
수재(守宰)로 있을 때에는 일용품이 남으면 전부 공공 장부에 기록해 두었는데,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 저녁에 거친 밥과 나물국만 있었어도 유감을 가지지 않았다. 지위가 팔좌(八座)에 이르고 나이가 구순(九旬)의 고령이 되고서도 가볍고 따뜻한 옷을 몸에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공을 몰래 엿보고 돌아온 어떤 사람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그의 집에는 짚으로 만든 깔개 하나와 질흙으로 만든 동이 하나만이 있을 뿐이니, 그를 해하려는 자는 반드시 자신이 재앙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러 조정을 차례로 거치면서 비록 관직에 머물던 기간은 적었으나, 임금에 대한 충성과 나라에 대한 사랑이 가슴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 언제나 그에 대한 일념으로 직무를 태만히 하지 않고 늘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목숨을 바치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임금의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미수(眉叟), 남파(南坡) 등 여러 공과 더불어 임금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협력하여 한 시대의 정치를 일신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세로(世路)가 기구하여 덤불 속에 잠복한 군사 같은 무리로 인해 북변으로 유배를 갔다가 4년이 지난 뒤에야 돌아왔는데, 풍파의 존몰(存沒) 속에 만사가 공허해져 버려 세도가 마침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아, 이 어찌 천도가 아니랴.
공의 문장은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었다. 지봉(芝峯) 이공 수광(李公睟光)이 그의 문장을 보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천하의 모든 책을 다 읽어 본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미옹(眉翁 허목)은 일찍이 말하기를 “이 노인이 가진 문장의 품격은 가면 갈수록 더욱 신이(神異)해지니, 글자마다 정력(精力)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지혜가 낮다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지는 않던 분들이 한 말이다. 유편(遺編)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부인은 증 정경부인(貞敬夫人)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과거에 급제한 유희발(柳希發)의 따님이다. 마음씨가 선량하고 부드러우며 온화하고 순종적이어서 남편을 섬기면서 덕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향년 60세에 졸하였으며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인빈(寅賓)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수찬을 지냈으며, 차남은 용빈(龍賓)이다. 딸은 현령 이행경(李行敬)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게서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세빈(世賓), 홍빈(鴻賓), 봉빈(鳳賓)이며, 딸 가운데 첫째는 학관(學官) 윤직미(尹直美)에게 출가하고 둘째는 생원 김영(金𡎘)에게 출가하고 셋째는 정행천(鄭行千)에게 출가하였다.
인빈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가운데 첫째는 동근(東根)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문학(文學)을 지냈으며 둘째는 도근(道根)으로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지냈고 셋째는 회근(晦根)으로 요절하였고 넷째는 효근(孝根)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을 지냈다. 딸 가운데 첫째는 사인(士人) 이만주(李萬柱)에게 출가하고 둘째는 진사 유명린(兪命麟)에게 출가하였다. 용빈은 아들이 없어 도근을 후사로 삼았다. 내외의 손자와 증손자는 많아 기록하지 않는다.
공이 세상을 하직한 지 지금 100여 년이 흘렀으나 묘도에 아직 비명이 없어, 6대손 호명(灝溟)이 나에게 명(銘)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같은 고을에 사는 후생(後生)으로서 일찌감치 공의 풍도를 들어 왔기에 감히 노쇠하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없으므로 명을 짓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주역》에선 난초의 향기라 하였고 / 易言蘭臭
《예기》에선 담담한 물이라 불렀는바 / 禮稱淡水
의리의 사귐은 / 義理之交
자기를 이롭게 하고자 함이 아니니 / 匪以利己
숙종이 즉위한 처음에 / 肅廟初元
한 무리의 군자들이 있었네 / 有彙君子
미로가 항장을 올리자 / 眉老抗章
나라의 체통이 비로소 높아졌는데 / 國統始尊
아름다운 이공이 있어 / 有美李公
향리로부터 기용되니 / 起自鄕園
두어 선류들은 이로 인해 / 二三善類
그 덕에 이웃이 있게 되었네 / 其德有隣
한 해 만에 등급을 뛰어올라 / 一歲超遷
연로한 몸으로 높은 반열에 섰네 / 黃髮崇班
좌우로 서로 이끌어 주며 / 左提右挈
춘대의 세상을 만들려고 하였는데 / 擬鑄春臺
변고가 좌복에서 일어나 / 變起左腹
태평한 나날이 가고 비색의 시대가 도래했네 / 泰往否來
철관은 바다에 이웃해 있어 / 鐵關隣海
고래와 악어의 소굴이었는데 / 鯨鰐攸宅
임금을 그리는 곡을 / 望美之曲
시통을 부치며 계속 노래하였네 / 郵筒有續
신하에게 고향 땅이 있어 / 臣有田里
왕이 돌아가라 하였는데 / 王曰歸哉
신하가 돌아가 있을 곳을 얻으니 / 歸得臣所
강호의 모퉁이라 / 湖海之隈
살아서는 그곳에서 즐거워하고 / 生而樂斯
죽어서는 그곳에 묻혔네 / 歿而葬此
생각건대 이 약당은 / 惟玆若堂
이공의 무덤이니 / 李公之隧
이곳을 지나는 모든 이들이 / 凡百過者
어찌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겠는가 / 曷不敬止
담담한 물과 난초의 향기는 / 淡水蘭臭
미로와 파옹이었으니 / 眉老坡翁
내 그 당대의 일을 논하고 / 我論其世
명을 지어 무궁한 후세에 보이노라 / 銘示無窮
[주-D001] 소장을 …… 청하였다 : 이 내용은 《인조실록》 24년 10월 13일 기사에 실려 있다. 홍익한, 오달제, 윤집은 병자호란 때 청(淸)나라와의 화의(和議)를 반대하고 척화(斥和)를 주장하면서 끝까지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키다가 심양(瀋陽)에 끌려가 참형을 당하여 삼학사(三學士)로 불린 인물들이고, 정온 역시 그 당시 척화를 주장하다가 항복이 결정되자 자결을 시도한 뒤 관직을 버리고 덕유산(德裕山)에 들어가 세상을 떠났는데, 이무는 당시 지평으로 있으면서 소장을 올려 이들의 절개를 높이 칭양하고 추증(追贈)과 정표(旌表)를 청하였다. 한편 당시 이경여는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이 소의(昭儀) 조씨(趙氏)를 저주했다고 하여 사약을 받게 되었을 때 반대하다가 진도로 유배를 가 있었고, 이식은 1646년 9월 별시관(別試官)으로서 출제한 과거 시험의 문제에 역모의 뜻이 있다고 하여 삭탈관직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 《仁祖實錄 24年 2月 18日, 3月 14日, 9月 5日》[주-D002] 이때 …… 내놓았다가 : 인조가 승하한 뒤 효종이 부왕(父王)의 묘호(廟號)를 ‘인조(仁祖)’로 정하자, 응교 심대부(沈大孚)가 상소하여 창업한 군왕만 조(祖)로 호칭하고 그 밖에 선대의 뒤를 이은 군왕들은 큰 공덕이 있다 하더라도 종(宗)으로 호칭하는 것이 예에 맞는다고 논하는 한편, 다음 날 부수찬 유계(俞棨)가 상소하여 이미 인묘(仁廟)가 있으므로 다시 묘호에 인(仁) 자를 쓰는 것은 예에 맞지 않는다고 논하면서 심대부의 주장을 옹호한 일을 말한다. 《孝宗實錄 卽位年 5月 23日》[주-D003] 이에 …… 폭로하였는데 : 이 상소문은 《효종실록》 3년 12월 7일 기사에 실려 있다.[주-D004] 어떤 …… 하였는데 : 여기서 말한 한만히 읊은 시구는 “흰 달은 얼음에 양보하고 얼음은 달에 양보하며, 밝은 모래는 눈을 속이고 눈은 모래를 속이네.[白月讓氷氷讓月, 明沙欺雪雪欺沙.]”를 말하며 권세 있는 간신은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송시열이 정권을 잡자 이무가, 송시열이 일을 그르칠 것을 염려하여 한 재상에게 시를 지어 보이며 그를 풍자했는데, 곁에서 이 말을 들은 어떤 사람이 송시열에게 이 말을 전하고 그 시구를 인용하면서 당세에 대한 모독의 감정이 담겨 있다고 하였다. 《韓山李氏世譜 果菴公行狀》[주-D005] 당시 …… 개탄하였다 : 1659년 효종의 장례에 효종의 계모이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가 제기될 때 서인인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이 주장한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자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을 비롯한 남인들이 크게 반발하여 삼년설을 주장한 것을 말한다.[주-D006] 서로를 …… 뿐이었다 : 이무와 윤선도가 서로 마음에 거슬림이 없는 막역지우(莫逆之友)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이다.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자상호, 맹자반, 자금장 세 사람이 서로 벗하면서 말하기를 ‘누가 서로 사귐이 없는 것을 서로 사귀는 것으로 여기며, 누가 서로 도와줌이 없는 것을 서로 도와주는 것으로 여길 수 있는가. 누가 하늘에 올라 안개 속에 노닐어 한없이 넓은 세계에서 자유롭게 움직여 생을 잊고 끝나고 다하는 바가 없게 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세 사람이 서로 보며 웃고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어 마침내 서로 벗이 되었다.”라고 한 이래로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라는 표현은 굳이 말이 없어도 마음으로 이해하는 막역한 친구 사이를 의미하게 되었다.[주-D007] 왕대비(王大妃)가 …… 깨달았는데 : 여기서 왕대비는 효종의 비(妃)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이고, 대왕대비는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모후(母后)인 자의대비 조씨(趙氏)이다. 중부복이란 ‘서자부복(庶子婦服)’이라고도 하는데 차장자(次長子)의 며느리에 대한 상복인 대공복(大功服)을 말한다. 1674년 현종이 인선왕후의 상에 자의대비가 입을 복을 서인의 주장대로 대공복으로 정하였다가, 남인들이 그 부당성을 지적하자 이를 전면 재검토할 것을 지시한 것을 말한다.[주-D008] 김 국구(金國舅) : 김우명(金佑明, 1619~1675)으로, 현종의 장인이기 때문에 국구라고 칭한 것이다.[주-D009] 화를 …… 것 : 동한(東漢)의 하복(夏馥)이 중관들의 미움을 받아 체포령이 내리자 임려산(林慮山)으로 숨어들어 대장간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우 하정(夏靜)이 비단을 싣고 찾아와서 대접하려 하자 “아우는 어찌하여 재앙을 싣고 와서 나를 먹이려 하는가.”라고 한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資治通鑑 卷56》 윤선도를 비롯하여 이미 화를 입은 바 있는 여러 사람과 한패라고 함으로써 이무에게까지 그 화를 미치게 한다는 말이다.[주-D010] 공에게 …… 것 : 왕안석(王安石)이 재상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때 천자에게 여러 차례 바른말을 한 것으로 유명한 범진은 사마광과 일생 동안 두터운 우정을 유지하였는데, 사마광에게 말하기를 “그대와는 살아서는 뜻을 함께하고, 죽어서는 열전을 함께할 것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緇衣集傳 卷3 壹類章》 여기서는 이무가 윤선도를 비롯한 동지들과 함께 역사서에 나란히 실리게 되는 행운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주-D011] 우로전(優老典) : 나이 많은 사람을 우대하여 특별히 내리는 벼슬을 말한다.[주-D012] 척신(戚臣)이 …… 일망타진되었다 : 1680년 경신대출척 때 김석주(金錫冑), 김익훈(金益勳) 등이, 허적(許積)의 서자인 허견(許堅)이 종실인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 형제와 같이 역모를 꾀한다고 남인들을 대거 무고한 일을 가리킨다.[주-D013] 남파(南坡) 홍공(洪公) : 홍우원(洪宇遠, 1605~1687)으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군징(君徵), 호는 남파이다. 1680년 허적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죽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복작(復爵)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주-D014] 임금의 …… 경사 : 숙종이 앓던 천연두가 회복된 경사를 말한다. 숙종은 1682년 천연두가 발병하였다가 열흘 남짓이 지난 뒤에 완쾌되어 종묘와 사직에 경사를 고하고 대사면(大赦免)을 명하였다. 《肅宗實錄 9年 10月 18日, 11月 17日》[주-D015] 초이엄(貂耳掩) : 관복(官服)을 입을 때에 사모(紗帽) 밑에 쓰던 초피(貂皮)로 된 방한 도구로, 귀 가리개를 말한다.[주-D016] 팔좌(八座) :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는 여덟 명의 고위 관료를 이르는 말로, 동한(東漢) 시대에는 육조(六曹)의 상서(尙書)와 영(令)과 복야(僕射)를 가리켰으며 조선 시대에는 흔히 판서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주-D017] 덤불 …… 무리 : 제 모습을 숨기고 잠복해 있는 강포하고 흉악한 소인을 의미한다. 《주역》 〈동인괘(同人卦) 구삼(九三)〉에 “군사를 덤불 속에 숨겨 두고 높은 구릉에 올라가서 3년이 되어도 일어나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정자(程子)의 전(傳)에 “이치가 정직하지 못하고 의(義)가 이기지 못하므로 감히 드러내어 발하지 못하고서 병사를 수풀 속에 숨겨 둔 것이며, 악한 마음을 품고 안에 정직하지 못한 생각을 갖고 있으므로 또 두려워하여 때때로 높은 구릉에 올라가 관망하여, 이와 같이 하기를 3년에 이르도록 끝내 감히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효는 소인의 정상(情狀)을 깊이 나타냈다.”라고 하였다.[주-D018] 주역에선 …… 하였고 :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니 그 예리함이 쇠를 끊는다.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고 하였는데, 이는 친구와 우정이 매우 두터운 것을 말한다.[주-D019] 예기에선 …… 불렀는바 : 《예기》 〈표기(表記)〉에 “군자의 접함은 물과 같고 소인의 접함은 단술과 같으니, 군자는 담담하여 이루고 소인은 달아서 무너진다.[君子之接如水, 小人之接如醴. 君子淡以成, 小人甘以壞.]”라고 한 것을 말한다.[주-D020] 미로(眉老) : 미수 허목을 가리킨다.[주-D021] 그 …… 되었네 : 《논어》 〈이인(里仁)〉에 “덕은 외롭지 않아서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덕이 있는 사람은 같은 부류의 사람이 따르므로 항상 친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이무가 기용됨으로써 조정에 있던 여러 선류에게 뜻을 함께하는 동료가 생겼음을 말한 것이다.[주-D022] 춘대(春臺) : 태평성대의 화락한 기상을 상징하는 말이다. “세속 사람들 화락하여 마치 큰 잔칫상을 받은 듯, 따스한 봄날 누대에 오른 듯하다.[衆人煕煕, 如享太牢, 如登春臺.]”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老子 第12章》[주-D023] 변고가 좌복(左腹)에서 일어나 : 임금에게 아첨을 떨면서 정권을 잡은 소인들의 계략으로 변고가 일어난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1680년 경신대출척 때 김석주, 김익훈 등이 일으킨 허적의 역모 사건을 가리킨다. 좌복은 《주역》 〈명이괘(明夷卦) 육사(六四)〉에서 “왼쪽 배로 들어가서 밝음을 해칠 마음을 얻는다.[入于左腹, 獲明夷之心.]”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전(傳)에 이르기를 “음흉하고 사특한 소인이 높은 지위에 있어 유순함과 간사함으로 군주에게 순종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주-D024] 약당(若堂)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공자가 “내가 집채같이 큰 봉분을 보았다.[吾見封之若堂者矣]”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로, 사방이 사각형으로 반듯하고 높은 무덤을 형용하는 말이며 후세에는 일반적으로 무덤을 뜻하는 말로 통용되었다.[주-D025] 파옹(坡翁) : 홍우원으로, 호가 남파(南坡)이기 때문에 이렇게 지칭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