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의 전통 있는 가문 중에 삼가 선조들의 법도를 지키면서 부자의 도리를 다하고 형제의 도리를 다하며 향당에서 추중(推重)받는 이들은 오직 용주(龍洲) 조 선생의 후손이 최고이다. 선생은 한양인(漢陽人)으로 휘는 경(絅)이다. 벼슬은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강하고 굳세게 큰 절개를 지키고 행하였으며 문장과 덕업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생전에는 훌륭한 신하였으며 졸한 후에는 서원의 향사를 받고 있다. 휘 위봉(威鳳)으로 응교를 지낸 아들과 휘 구원(九畹)으로 정언을 지낸 손자를 거쳐, 휘가 수홍(守弘)이고 자가 중유(仲裕)인 이에 이른다. 중유는 나보다 세 살이 적은데 대대로 서로 교유하고 있으며, 나이로는 동생이나 마음으로는 형으로 받들고 있다. 모부인은 진주 유씨(晉州柳氏)로 판중추부사를 지낸 명천(命天)의 따님이다.
공은 숙종 10년 갑자년(1684)에 포천(抱川) 가채리(嘉茝里)에서 태어났다. 신축년(1721, 경종1)에 진사가 되고, 계해년(1743, 영조19)에 온릉 참봉(溫陵參奉)에 제수되었다. 5년 동안 북부 봉사(北部奉事),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을 역임하고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로 승진하였는데 병으로 사직하였다. 무진년(1748) 여름 4월 2일에 고종하니, 향년 65세였다. 묘소는 영평현(永平縣) 삼현(三峴) 축좌(丑坐)의 산에 있다.
공은 불행히 지위를 얻지 못하여 한 시대에서 능히 세상 풍속의 모범이 되지 못했으며, 또 백 년의 수명을 누리지도 못해서 향리의 자제들이 능히 평생 동안 우러러 의지하지 못했다. 다만 한두 붕우들만이 끝없이 흠모하고 좋아하여, 세상에 쓰이지 못한 말을 가지고 후인들에게 남겨 보여 주려 했으니, 그 뜻이 또한 비장하다 하겠다.
증자(曾子)께서 말씀하기를, “군자는 행동할 때에는 거칠고 태만함을 멀리하며, 얼굴빛을 바르게 할 때에는 성실함에 가깝게 하며, 말과 소리를 낼 때에는 비루함과 도리에 위배되는 것을 멀리하여야 한다.” 하였다. 이 세 가지는 온갖 행실의 근본이며 사람을 살피는 데에 있어 요체가 된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있다면 오직 공만이 거의 그와 비슷한 사람일 것이다.
공의 기상은 봄처럼 따뜻하고 옥처럼 깨끗하였다. 공경하며 예의를 지키고 말은 공손하였으며 이름이 행실보다 지나친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때문에 유술(儒術)로 스스로 표방하지 않았으며, 선조의 가르침을 혹 무너뜨릴까 봐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움직이거나 쉴 때에도 반드시 신중하였으며, 손에서 경전을 놓지 않았고 속된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이는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이를 것이다.
일찍이 나의 성호장(星湖莊)을 방문했을 때 그의 막내아들 숙(
)이 약관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이른 나이에 합격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학업이 아직 진취되지 못한 것을 부족하게 여겨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내가 즉시 말하기를, “명망과 덕이 있는 가문의 후예로서 뛰어난 재주로 벼슬길에 나서니, 반드시 마음을 크게 가지고 안목을 높게 가져, 승진에 마음을 두지 않고 큰 업적을 이루는 것을 가계(家計)로 삼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그 말을 이어서 찬탄하기를, “아버지는 길러 주고 자식은 재주 있으니, 낳아 준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지금 공이 몰하고 3년이 지났는데 그의 여러 아들과 여러 동생들이 기록한 언행록을 보았다. 아, 이것이 옛사람이 말한 덕행 있는 이의 언행을 기록한 돈사(惇史)라는 것이니, 평소의 행실이 매우 순후하였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공의 큰아들 서(恕)가 이르기를,
“부친의 성품은 담박하여 가산을 경영하지 않고, 교유하는 벗을 신중하게 택하였으며 두문불출하며 마음을 조용하고 맑게 가지셨습니다. 뭇사람을 따라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분경(奔競)하는 것을 보고 자기를 더럽힐 것처럼 미워하셨습니다. 어버이의 병을 간호할 때 정성이 밖으로 드러나니, 의원이 그 오만한 습관을 버리고 치료해 주었으며, 당시의 재상이 소문을 듣고 얻기 힘든 약재를 보내 주었습니다.
조상을 모실 때에는 평소에는 세수하고 머리 빗고 사당에 절했으며, 기일에는 몸소 제기를 닦으셨습니다. 제사를 마치고도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부모님을 생각했으며 종일 이를 드러내어 웃지 않으셨습니다. 조부께서 제사에는 맛있게 요리한 음식을 금했으므로 유밀병(油蜜餠)을 쓰지 않았으며, 조부님을 여의고 나서는 다시는 맛보지 않았습니다.
항상 《노론(魯論)》 1부를 몸에 지니고 다니며 말씀하기를, ‘만약 이것을 다 익히면 일생 동안 이용해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산수를 매우 좋아하여 한가한 날이면 산수를 유람하며 시를 읊조리다가 돌아오는 것을 잊으셨습니다.”
하였다. 둘째 아들 사(思)가 이르기를,
“자녀를 교육하는 데 법도가 있었습니다. 항상 말씀하기를, ‘다른 집의 자제들은 대부분 부형과 다른 곳에 살아서 행실이 점점 나쁘게 변해 가니, 이는 아비의 잘못이다.’ 하였습니다. 관아에 나아가실 때는 춥거나 덥거나,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더라도 새벽에 일어나 관복을 입고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능참봉이 되셨을 때 재사(齋舍)에 버려 두고 사용하지 않던 목욕통이 있었는데 선친이 제사 때가 되면 번번이 가져다 깨끗이 씻으셨습니다. 이런 일을 서로 전하여 목욕통이 끝내 무용지물이 되지 않은 것은 선친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였다. 막내아들 숙(
)이 이르기를,
“부친은 성리서를 깊이 연구하셨으나 오히려 빈객들 사이에서는 드러내지 않으시며 말씀하기를, ‘나는 스스로 학문을 즐기고 있다. 오늘날의 학자는 반드시 남이 먼저 알아주기를 바라는데 매우 그른 일이다.’ 하였습니다. 북부 봉사로 재직할 때 검시하는 일을 맡았는데 때로 악취가 나서 가까이하기 어려웠습니다. 부의 서리가 그릇된 전례로 아뢰니, 부친께서 말씀하기를, ‘살인에 대한 옥사는 중요한 일이다. 내가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 하고, 맞아서 멍든 자국을 반드시 끝까지 살펴보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씀하기를, ‘나는 평소에 비장에 병이 있는데도 참고 살펴보았다. 무릇 천하의 일에 대해 단지 힘쓰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감당하지 못할까는 걱정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동생인 진사 수도(守道)가 이르기를,
“형님은 붕우들과 교유하면서 오래 사귀었어도 능히 공경했습니다. 한 가지라도 국정(國政)이나 시의(時議)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는 것처럼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우애가 마음에서 우러나 봉록을 함께 나누었으며, 비록 사는 곳이 달랐어도 제철 음식을 보면 반드시 맛 좋은 것을 멀리까지 보내 주셨습니다.”
하였다. 사촌 아우 수의(守誼)가 이르기를,
“제가 형님을 모신 지 거의 50년인데 사람을 대할 때 희롱하거나 거만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며, 친구들도 감히 농지거리를 하거나 익살을 떨지 않았습니다. 비록 나이가 어리더라도 너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천한 이의 여막에도 몸소 조문하기에, 사람들이 물어보니, 답하기를, ‘죽은 사람을 슬퍼하는 것에 어찌 존비의 구별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 몇 사람은 모두 품위가 고상하고 엄정하여 대가의 풍도를 잃지 않은 이들이다. 반드시 실상이 없는 일로 어진 부모와 어진 형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 사람들이니 거의 믿을 만하다. 문예와 사조(詞藻)는 《손재집(遜齋集)》이 있으니, 내가 군더더기말을 하지 않는다.
영인(令人) 이씨(李氏)는 선원(璿源)의 후예로 태종(太宗)의 왕자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이조 좌랑을 지낸 정빈(廷賓), 좌찬성을 지낸 충(冲), 부윤을 지낸 민수(敏樹), 서윤을 지낸 태(邰)가 바로 고조 이하 4대이다. 외조는 창원 황씨(昌原黃氏)로 첨정을 지낸 도명(道明)이다.
영인은 효성스럽고 자애로우며 남을 잘 돌보아 준다고 종족 사이에 이름났다. 평소에는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머리 빗고 세수하기를 마치면 방과 당을 물 뿌리고 비로 쓸며 노비를 시키지 않았다. 집기의 위치를 바로 하며 어지럽지 않게 가지런히 정돈하였다. 밤이 되면 등불을 켜고 일을 하며 수고로움도 꺼리지 않았다. 규중의 담화와 소설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일을 못하게 하는 무익한 것이다.” 하였다. 여러 아들이 어렸을 때 가끔 안채에서 놀이를 하니, 책망하기를, “남자는 부친을 따라서 글을 배워야 한다. 어미를 따라 여공을 배우고 싶으냐?” 하였다.
종신토록 부모를 그리워하며 선친과 선비의 필찰(筆札)을 간직하였다. 때로 펼쳐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서찰을 같이 묻는 것은 예가 아니고 남겨 두면 산실될 수 있다.” 하며, 태우라고 유명을 남겼다. 임술년(1682, 숙종8)에 태어나서 68세를 일기로, 공보다 1년 후에 고종하였다. 공과 같은 언덕에 묘혈만 달리해서 묻혔다.
장자는 진사인데 백부의 후사가 되었다. 막내아들은 정자(正字)인데 당숙의 후사가 되었으니, 바로 공의 언행을 기록한 이이다. 딸 하나가 있고 사위는 완산 이씨(完山李氏) 이경희(李景煕)인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이분은 선인(善人)과 신인(信人)의 중간이니 / 夫夫二之中也
갑의 시각으로 보면 경사를 넘나들어 / 甲視之出經入史
환연히 사령으로 공을 이루었다네 / 渙然詞令之爲功
을의 시각으로 보면 법도를 따라 / 乙視之繩尺步趨
예법이 넉넉하였다네 / 禮法之從容
아마도 곧게 살면서도 세상과 단절하지 않고 / 蓋貞不絶俗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은 분이 아니겠는가 / 和不合同者歟
아 슬프다 / 噫
[주-D001] 증자(曾子)께서 …… 하였다 : 《논어》 〈태백(泰伯)〉에 있는 말로, 군자가 귀중히 여기는 것이 이 세 가지이니, 수신하는 요점이요 정치하는 근본이라 하였다.[주-D002] 만약 …… 것이다 : 정이(程頤)가 말하기를, “무릇 《논어》와 《맹자》를 볼 때에 우선 모름지기 익숙히 읽고 완미하여 성인의 말씀을 가져다가 자신에게 간절하게 할 것이요……이 두 책을 보아 자신에게 절실하게 한다면 종신토록 이용함이 진실로 많을 것이다.” 하였다. 《近思錄 卷3 致知》[주-D003] 선인(善人)과 신인(信人)의 중간이니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호생불해(浩生不害)가 악정자(樂正子)는 어떠한 사람이냐고 묻자, 맹자께서, “선인과 신인의 중간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