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 백종조 조부 오시재(五視齋) 선생의 휘는 명윤(明胤)이고, 자는 중선(仲宣)이며, 서재 이름은 이극(李克)이 문후(文侯)에게 답한 말에서 취한 것이다. 채씨는 본래 평강(平康)의 대성(大姓)으로 신라 부마(駙馬)의 후손이다. 고려 시대에 휘 송년(松年)은 전쟁터에 나가면 명장이 되고 조정에 들어오면 명재상이 되었으며, 시호는 경평공(景平公)이다. 경평공의 아들 휘 자화(子華)는 평장사(平章事)이다. 평장사의 아들은 모(謨)이고, 모의 아들은 종린(宗麟)인데 모두 평장사이니, 대개 4대가 정승을 지낸 것이다.
우리 조정이 천명을 받자, 휘 양생(陽生)은 송경(松京 개성)에서 식솔을 이끌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호남의 임피현(臨陂縣)에 정박하여 그곳에서 살았으니, 망복(罔僕)의 의리를 지킨 것이며, 삼대(三代)의 분묘가 모두 그곳에 있다. 돈녕부 주부 휘 자침(子沉)에 와서 경기 과천 막계(幕溪)에 처음으로 장사 지냈다. 그의 아들 휘 중경(仲卿)은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부호군의 아들 휘 난종(蘭宗)은 사헌부 집의를 지냈는데 아름답게 도를 지키며 문절(文節) 유희춘(柳希春)과 도의(道義)로써 사귀었다. 그 아들 휘 경선(慶先)은 홍문관 응교를 지냈고 호는 죽촌(竹村)이며, 대신이 재능과 덕행으로 천거하여 장차 크게 쓰려 했으나 오래 살지 못하였는데, 실은 선생의 고조부이다. 증조부 휘 충연(忠衍)은 성균관 진사로서, 높은 명성이 한 시대를 압도하고 왕좌(王佐)가 되리라 사림이 기대했는데 불행히 수명이 중년에 이르지 못하였다. 아들을 두 명 낳으니, 장남은 대총재(大冢宰)이자 태학사(太學士) 휘 유후(裕後)로 호는 호주(湖洲)이고 시호는 문혜공(文惠公)이며, 차남은 이조 참판 행 화순 현감(行和順縣監)에 증직된 휘 진후(振後)인데 이분이 선생의 조부이다. 아버지 휘 시상(時祥)은 음직으로 벼슬길에 올라 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세 명이 입신양명하여 조정의 반열에 오른 것과 본인이 노년에 받은 노직(老職)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르고, 나중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현감을 지낸 권흥익(權興益)의 딸로 효종(孝宗) 임진년(1652, 효종3)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몸가짐을 삼가고 품행을 닦으며 학문에 뜻을 둔 것이 매우 확고하였으며 향리에서는 효의(孝義)로 이름이 알려졌다. 호주옹(湖洲翁 채유후(蔡裕後))이 세상을 떠난 이래로 가문이 점점 쇠퇴한 것을 슬프게 생각하여, 글을 읽고 부모를 모시는 여가에는 혼자 스스로 공령문(功令文)을 익혔으며, 동생들을 가르치고 감독할 때는 엄한 아버지나 스승처럼 하였다.
둘째 아우는 경조 아윤(京兆亞尹)으로 세상을 떠난 구봉공(九峯公) 휘 성윤(成胤)이고, 셋째 아우는 성균관 진사 휘 정윤(禎胤)이고, 넷째 아우는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세상을 떠난 희암공(希菴公) 휘 팽윤(彭胤)인데, 아동기부터 모두 선생에게 배웠다. 선생은 비록 동생들을 지극히 사랑했지만 그들이 배워야 할 때가 되면 학업 과정을 엄격하게 세워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매일 동생들을 새벽에 깨워 전날 배운 글을 읽게 했는데, 물을 쏟아붓듯 좔좔 외우지 못하면 해가 기울어도 밥을 주지 않았고, 해가 저문 뒤에는 여러 가지 문체로 글짓기 시험을 보았는데, 마치지 못하면 한밤중에도 밥을 주지 않았다. 10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므로 동생들이 문장과 덕행으로 당대에 명성이 자자했다.
숙종 기미년(1679, 숙종5)에 선생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갑자년(1684)에 구봉공이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기사년(1689)에 선생이 희암공과 함께 원자(元子) 정호(定號) 증광(增廣) 회시(會試)에 응시하였다. 급제자 발표 소식이 날 때 희암공의 급제 소식이 먼저 왔는데, 이때 희암공의 나이는 21세였다. 선생은 기쁨을 금치 못하고 어루만지며 “네가 급제했는데 나까지 급제할 필요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잠시 후 선생의 급제 소식이 뒤따라 왔는데 선생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때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선생이 의연히 앞장서서 의론을 제창하며 함께 급제했던 사람들과 혈성을 쏟아 상소문을 써서 간쟁하려 했는데, 함께 급제했던 사람들 중에 다른 의견을 지닌 자가 있어서 상소문을 올리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마침내 세상일에 뜻이 없어져 밝은 창가에 깨끗한 책상을 놓고 날마다 성현의 글을 마주하고, 정주(程朱)의 말을 음미하며 예악의 근원을 탐색하여 거의 늙음이 닥쳐오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였다. 국조(國朝)의 유현(儒賢) 중에서는 오직 퇴계(退溪)를 스승으로 여기며 한 글자 한 단어도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영달의 길이나 화려한 관직을 볼 때는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겼다.
이조(吏曹)가 선생의 이름을 승문원(承文院)에 분속하였다. 그 후 몇 년 동안 잇따라 제원(濟原), 율봉(栗峯) 두 곳의 찰방(察訪)에 제수되었는데, 잠시 부임했다가 곧 관직을 버렸다. 찰방으로 있는 동안에 털끝만큼도 이끗을 가까이하지 않고 생활에 쓰고 남은 돈은 모두 우인(郵人)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시골집으로 돌아올 때, 우인들이 서로 함께 포목을 싣고 집 앞에 잇따라 찾아와서 가져가실 것을 힘껏 청하였으나 공은 웃으며 물리쳤다.
정축년(1697)에 전적(典籍)에 올랐다가, 곧 예조 좌랑,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기묘년(1699)에 홍문관의 선발에 들었다. 당시에 당인(黨人)이 정권을 잡고 뜻이 다른 자들의 진출을 몹시 거세게 막아 삼사(三司)에는 반걸음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선생에 대해서는 비록 엄선하는 경연관에 임명할지라도 딴말이 없었다. 이것은 선생의 경학과 품행, 명예와 절조를 부러워하고 열복했기 때문이다.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인조 을해년(1635, 인조13)에 조부 참판공(參判公)이 동지들을 이끌고 상소문을 올려 율곡(栗谷)과 우계(牛溪)를 문묘(文廟)에 종사하는 것은 온 나라의 공통된 의론이 아님을 논하였고, 기사년(1689)에 희암공이 출향(黜享) 상소에 동참하여 당인들에게 미움을 사 이미 완성된 홍문록(弘文錄)과 도당록(都堂錄)에서 이름이 삭제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다. 선생은 이것을 벼슬길에 나아가기 어려운 단서로 여기고, 이후에도 수찬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번번이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갑신년(1704) 겨울에 결성 현감(結城縣監)에 보임되었다. 이때 양친(兩親)이 모두 살아 계셨으나 가난하여 봉양할 수 없었으므로 억지로 부임하여, 맛있고 좋은 음식으로 봉양을 극진히 하며 아침과 저녁에는 반드시 직접 음식을 살펴보았다. 남녀 조카들 중에 고아가 되어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을 모두 데려와 친자식처럼 돌보며 시집가고 장가들게 해 주었다. 제사를 지낼 때마다 관복을 입고 앉아 베고 삶는 과정을 지켜보며 낮부터 밤까지 게을리하지 않으니, 아전들이 감화되었다. 결성에 머문 2년 동안 온 경내가 크게 다스려지고 토호들이 숨을 죽여 백성들이 안도하고 아래로 어부나 승려까지 모두 부모처럼 믿었다.
을유년(1705)에 기근이 들자 곧 남강(南康)의 황정법(荒政法)에 의거하고 하남(河南)에서 임의대로 곡식 창고를 연 의리를 본받아, 결성현의 그해 납부해야 할 대동미(大同米)를 자의로 조달하여 나누어 주고 진휼하며 마음을 다해 어루만지며 온갖 계책을 내어 모두 살려 주었다. 이보다 앞서, 선혜청(宣惠廳)에 공문을 보내 대동미를 머물러 둘 것을 요청했으나 회답이 내려올 때까지 형세상 기다릴 수 없어 마침내 자의로 곡식을 빌려 지급해 주었다. 나중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선혜청 당상의 뜻이 내려오자 경사(京司) 및 관찰사의 감영에 급히 보고하여 자신의 죄를 물을 것을 청하였는데,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에 상소문을 올려, 자의로 지급한 것을 아뢰며 죄를 청하고, 아울러 지급한 800섬을 특별히 잠시 유예해 줄 것을 청했으나 비답을 받지 못하였다.
병술년(1706) 가을에 수찬으로 부르자, 평소 읽던 서책 몇 권만을 가지고 결성현을 떠나며 다른 물건은 하나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타던 말도 관아에서 산 것이라고 하며 타고 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성현 재임 시에 자의로 대동미를 조달한 것을 가지고 선혜청에서 선생을 파직할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갑자기 관찰사와 감진 어사(監賑御史)가 앞뒤로 포창하는 보고서를 올리니, 상이 특별히 유지를 내려 포창하며 타이르기를 “편의에 따라 곡식을 옮기고 백성을 어루만지며 골고루 진휼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하다.”라고 하고, 특별히 표리(表裏) 1벌을 하사하였다. 선생은 죄를 지었다고 인책하며 감히 공경히 받지 못하고, 삼가 선정신(先正臣)의 고사를 본받아 상소문을 지어 공손히 받들고 대궐에 나아와 표리를 되돌려 바쳤는데, 승정원에서 거절하였다.
무자년(1708)에 지평에 제수되었다가 오래 지나지 않아 수찬에 제수되었다.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의 아우 신 채팽윤이 한 번 홍문록에 오르고 한 번 삭제된 것은 참으로 신의 아우에게는 손해될 것이 없으나 세상의 도의는 더욱 험악해지고 사람들의 말은 망극합니다. 아, 이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임공 수간(任公守幹)이 옥당에서 숙직하면서 뒤따라 상소문 한 통을 올려, 희암공의 이름을 홍문록에 그대로 둘 것을 청했는데, 상이 특별히 의논하여 처리할 것을 명하였다.
적신(賊臣) 조태구(趙泰耈)가 상소하여 임공을 배척하는 말을 몹시 패악스럽게 하자, 선생이 상소를 올려 변론하기를,
“신의 아우 신 채팽윤이 양현을 출향할 것을 청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문 끝에 이름을 썼는데, 이것은 《통기(通紀)》의 ‘오징(吳澄)에게 사적인 원한을 지닌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한 줄기 공론이 10여 년 뒤에 비로소 나왔는데, 준엄하게 배척하기를 한마디에 한마디를 더하니, 세도(世道)가 지극히 위험합니다.”
하였다. 이에 당인들이 떼 지어 일어나 날뛰며 삭출할 것을 청하였다. 심공 득원(沈公得元)이 장령으로서 상소문을 올려 신원하려 하다가 역시 파직당하였다. 이로부터 오래도록 조정을 사직하여 관직에 제수하는 일이 있어도 끝내 응하지 않았다.
기축년(1709)에 구봉공이 지방으로 나가 여산(礪山)을 다스릴 때 양친을 모시고 갔는데, 선생도 따라서 남쪽으로 가서 이웃한 가까운 고을에 우거하였다. 이것은 양친을 늘 찾아뵙기에 편리해서였다.
선생은 성품이 준엄하고 냉정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었으니, 말하고 웃는 일이 거의 없었다. 손님으로 와서 뵙기를 청한 자는 마음속으로 두려워하여 마치 고개를 들고 대화를 하지 못할 것 같았으나, 마주 앉으면 온화한 기운이 넘쳐 각자 해야 할 말을 하고 그쳤는데, 물러 나오면 만족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부모를 섬기는 데 사랑하고 공경하는 성품을 타고나서 부모를 기쁘고 즐겁게 해 드리려고 힘썼으며 《소학(小學)》 한 부의 내용을 조금도 어긴 적이 없었다. 선생이 여산의 관아에서 부모를 모실 적에 부녀자들이 태부인(太夫人) 곁에서 즐겁게 웃으며 자유롭게 있다가도 선생의 신발 소리가 밖에서 들려오면 모두 두려워하며 몸을 피하여 방 안이 조용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위엄과 엄격한 태도를 내려놓고 온화한 말로 가족을 불러 모아 줄지어 단란히 앉게 하고서 옛날이야기를 돌아가면서 하거나 윷놀이 같은 놀이로 내기를 하게 하여 한밤중이 될 때까지 끝내지 않으면서 태부인을 기쁘게 해 드렸으니, 화락하여 온 관아가 봄날과도 같았다.
이듬해 겨울에 태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당시에 연로하고 기력이 쇠했으나 곡하고 가슴을 치며 슬퍼하니 관아의 하인들이 모두 슬퍼서 차마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홍주(洪州)의 정곡(程谷)에 반장한 뒤에는 근신하고 매우 삼가며, 여막 위에 비바람이 쳐도 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여름에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이때 동추공(同樞公)은 오히려 건강하여 구봉공의 어촌(漁村) 집에 가서 봉양을 받았다. 선생이 있는 여막에서 어촌까지의 거리는 5리 남짓이고, 정곡의 선영까지의 거리는 10리 남짓이었는데, 5일 동안은 정곡의 선영에서 곡을 하고 며칠에 한 번씩 어촌에 문안을 갔는데, 비록 큰비나 큰 눈이 내리더라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으나 남루한 옷차림으로 어린 종 한 명 데려 가지 않으며 오직 늙은 말에만 의지하여 빨리 가든 천천히 가든 돌아가든 곧장 가든 말이 가는 대로 맡겨 둘 뿐이었으니, 원근의 사람들 중에 보고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무술년(1718)에 동추공을 모시고 희암공이 다스리는 서천(舒川)의 임소에 갔는데 갑자기 동추공의 상을 당하였다. 선생은 노쇠한 나이에 스스로 다해야 할 정성을 다하고, 홍주로 반장한 뒤에는 예제(禮制)를 더욱 엄중하게 지켜, 선영을 5일 동안 돌보기를 한결같이 모친상 때처럼 하였다. 마침 거센 눈보라가 치고 혹한에 손가락이 얼 정도로 추워 자제들이 재차 간하였으나 굳이 가기를 마지않았다.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는데 사지가 모두 얼어 거의 스스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여서 안고 부축해서 말에서 내리니, 궤연에 나아가 예를 올렸다. 희암공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오늘의 추위는 비록 장년으로 하여금 감당하게 하더라도 함부로 나가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노인이겠습니까. 만약 병에 걸린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형님은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라고 하였는데, 선생은 틀린 말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행동을 바꾸지 않다가 마침내 혹한에 몸을 상하여, 결국 경자년(1720)에 여막에서 세상을 떠나니, 곧 1월 21일이며, 향년 69세이다.
조정과 재야가 모두 탄식하고 애석해하였다. 호남(湖南)의 사림이 서원을 건립하고 제향하자는 논의를 발의했으나, 선생이 생전에 늘 말하기를,
“근래의 서원은 권세가 크면 세우고 관직이 높으면 세우고 자식의 신분이 귀하면 세워, 한 사람을 그가 지나갔던 곳마다 중첩해서 세워 여러 서원에서 널리 제향하기까지 하니,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했으므로, 문하에 들어와 가르침을 받은 문생들은 선생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 모두 응하지 않으니, 의론이 드디어 그쳤다.
아, 선생은 관직에 나아간 이래로 전심으로 정신을 모아 《대역(大易)》의 의리를 탐색하고 태극(太極)의 뜻에 침잠하였으며, 공부가 깊어진 뒤에는 널리 구수(九數)에까지 미쳐 반드시 궁구하여 근원에 도달하였다. 저 황극(皇極)의 준칙이나 종률(鍾律)의 심오함이나 설시(揲蓍)의 오묘함에 이르러서는 연구하는 대로 술술 분석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더욱이 성리(性理)에 관한 서적들을 좋아하여, 지경(持敬)과 존성(存誠)을 한결같이 정주(程朱)의 법도를 따라 하였으며 거의 즐거워서 배고픔을 잊을 정도였다.
밖으로 드러난 것으로 말하자면, 효제(孝悌)가 신명(神明)에 통하고, 청렴하다는 명성이 고을에 드러났다. 친척과 마을 사람 들이 모두 신명처럼 우러러보고, 향리의 평범한 사람들에 이르러서는 혹 그른 일을 했을 경우에는 불안해하며 선생이 듣고 아실까 봐 두려워하였다. 참으로 만약 선생을 들어 천하 국가에 썼다면 태평성대를 이루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한스러운 것은 간사한 붕당이 많은 시대에 태어나 세상에 용납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 욕심 없이 산림에 묻혀 은거한 것이다.
조정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 40년 동안 비록 찰방과 현감 지위에 잠시 지내기는 했지만 그것은 선생의 뜻이 아니었다. 저 학문을 토론하고 기강을 바로잡는 직임의 경우는 은혜로운 소명으로 임금이 마음을 비우고 선생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한 번도 조정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바른 길을 열고 후학을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종이 위에 써 놓은 평소의 바른말들일 뿐이다. 성정(性情)과 이기(理氣)의 변(辨)에 대해서는 늘 말하기를,
“이것은 더욱이 학문 중에서 제일 중요한 의리이다. 퇴계(退溪)가 ‘사단이발(四端理發)과 칠정기발(七情氣發)의 설’이라 한 것은 참으로 《주자어류(朱子語類)》 중 단전밀부(單傳密付)의 뜻에 부합한다. 이른바 ‘분별(分別)하여 말하고, 혼륜(渾淪)하여 말한다.’라고 한 것은 또한 〈태극도해(太極圖解)〉에서 ‘혹은 떨어지고 혹은 합하며 혹은 다르고 혹은 같다.’라고 한 것과 서로 부합한다. 이것이 고봉(高峯)이 처음에는 힘써 변론하다가 마지막에는 성심으로 복종한 까닭이다. 이로부터 그 뒤에 문인이나 지인의 물음에 답할 때 반복하여 깨우쳐 준 것이 명백하고 친절하였으니, 참으로 ‘백세 뒤에 성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의혹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뒤 우계(牛溪)가 처음으로 논란을 일으켰는데, 율곡(栗谷)은 번번이 ‘성정에는 본래 이기호발(理氣互發)의 이치가 없고, 단지 기가 발하여 이(理)가 타는 것이다.’라고 하고, 또한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른다는 설에는 분명히 선후가 있다.’라고 하고, 또한 ‘양(陽)이 움직이는 것은 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음(陰)이 고요한 것은 이가 고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또한 ‘사단(四端) 역시 기가 발한 것이다.’라고 하고, 또한 ‘칠정(七情)을 주재(主宰)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경서(經書)에서 찾아보고 선유(先儒)의 여러 설을 참작해 보니, 마음이 적연부동(寂然不動)한 것은 성(性)이고, 감이수통(感而遂通)하는 것은 정(情)이다. 성은 이(理)이고, 정은 기이다. 그러나 성에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있다. 그러므로 정에도 사단지정(四端之情)과 칠정지정(七情之情)이 있다. 또한 어찌 일찍이 기는 움직이는 데만 치우치고 이(理)는 고요한 데만 치우쳤겠는가.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이(理)는 곧 마음속에 있는데 일에 따라 발한다.’라고 하고, 진안경(陳安卿)에게 답한 글에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이(理)이다.[不動而能動者理也]’라고 한 말이 있고, 호광중(胡廣仲)에게 답한 글에는 ‘감응하면 곧 이 이(理)가 발한 것이다.’라고 한 말이 있고, 황면재(黃勉齋)가 말하기를 ‘혹은 기가 움직여 이(理)가 따르고, 혹은 이(理)가 발하여 기가 대동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종류가 적지 않은데, 만약 율곡의 견해와 같이 단지 기가 발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여러 가지 말이 모두 틀렸단 말인가.
이(理)는 기에 깃들고 기는 이에 뿌리박아 서로 운용하며 타기도 하고 따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성정에 나타난 것이 그러한 것이다. 이(理)가 기를 탄 것은 주재하는 것 없이 한갓 기에 탄 것이 아니고, 기가 이를 따르는 것은 또한 이가 발하는 처음에 서로 간여하지 않다가 도리어 기가 발한 뒤에 이를 따르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理)는 본래 반드시 기에 의지하는데, 기는 유독 이에 의지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기는 비록 선후가 없지만, 그러나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로 말하자면, 선후가 있는 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설명하는 사이에서 그 주된 뜻을 따르면 선후를 두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이(理)에 해가 되겠는가.”
하였다. 이것은 선생이 조금씩 꾸준히 쌓아 올리고 그 속에서 자득한 것을 말로 표현하여 후학을 깨우친 것이다.
예(禮)에 있어서는 고금의 예설(禮說)을 널리 채집하고 내용과 형식을 둘 다 극진하게 하려고 힘썼다. 태부인의 상이 났을 때 선생이 말하기를,
“노이빙(盧履氷)이 말하기를 ‘예에 따르면, 아버지가 계실 적에 어머니를 위해서는 1주년이 지난 뒤에 영(靈)을 제거하고 3년 동안 심상을 행한다.’ 했는데, 1주는 기년(朞年)이고, 영을 제거한다는 것은 궤연(几筵)을 치운다는 뜻이다. 《가례(家禮)》 대상장(大祥章)에서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예법에 궤연은 반드시 3년이 지난 뒤에 치운다.’ 하였다. 이것으로 볼 때 1주년이 지난 뒤에 영을 제거하는 것이 예이나 궤연을 3년이 지난 뒤에 치우는 것도 예이다. 궤연을 치우지 않았다면 조석상식(朝夕上食)을 유독 정지할 수 있겠는가. 퇴계 역시 심상을 행할 적에 조석제(朝夕祭)에 입는 의복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를 ‘백포의(白布衣)를 입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렇다면 조석상식은 옛사람 중에 본래 행했던 사람이 있는 것이다. 《가례》의 ‘소상(小祥) 때는 조석곡(朝夕哭)을 그친다.’에 대한 주(註)에서 ‘오직 초하루와 보름에는 아직 제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곡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비록 삼년상을 입는 자의 예법이지만 심상을 행하는 자가 이것을 본떠 행하지 않고 무엇을 본떠 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동추공에게 여쭙고 아우들과 의논하여 마침내 13개월이 되는 소상 뒤에 조석제를 행하면서 곡을 그쳤고, 초하루와 보름에 전(奠)을 드리고 곡하면서 3년을 마쳤다. 이것은 예법을 참작하여 반드시 후한 쪽을 따르려 한 것으로 자손의 법식이 되었다. 이 외에도 학문을 논하고 예법을 논한 것을 다 기록할 수 없다.
묘소는 홍주 치소 동쪽 모곡(茅谷)의 집 뒤편 간좌(艮坐)의 기슭에 있다. 선생은 저술을 좋아하지 않아 원고를 쓸 때마다 찢어 버렸는데, 선생의 노년에 태어난 장남 응손(膺孫)이 뒤를 따르며 주워서 이름을 산록(散錄)이라 붙이고 집에 소장한 것이 겨우 약간 편이다.
전배(前配) 의인(宜人) 기계 유씨(杞溪兪氏)는 유명성(兪命成)의 딸로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 딸은 이만하(李萬夏)에게 시집갔다. 계배(繼配) 의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감찰 한세장(韓世章)의 딸로 딸 둘을 낳았는데, 딸들은 이미년(李眉年)과 한도원(韓道垣)에게 시집갔다. 계배 의인 초계 정씨(草溪鄭氏)는 정수하(鄭洙夏)의 딸이고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의 현손녀로, 4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응손은 문장을 잘 지었으나 곤궁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니, 선비들이 애석해하였다. 차남 응동(膺仝)은 양자로 나가 희암공(希菴公 채팽윤(蔡彭胤))의 후사를 이었다. 삼남은 응모(膺謩)이고, 사남은 응겸(膺謙)이다. 딸은 참봉 박천(朴泉)에게 시집갔다.
응손의 아들 헌공(獻恭)은 재능이 있었으나 이른 나이에 죽었고, 서자는 유공(愈恭)이다. 응동은 조카 희공(希恭)을 양자로 삼았다. 응모의 아들 민공(敏恭)은 음직으로 벼슬하여 관직이 현감이고, 딸 둘은 사인(士人)들에게 시집갔다. 응겸의 두 아들은 지공(趾恭), 이공(履恭)이다. 이만하의 세 아들은 이지엽(李之曄), 이지창(李之昶), 이지업(李之曗)이다. 이미년의 외아들 이재망(李載望)은 성균관 진사이다. 한도원의 외아들은 한석범(韓錫範)이다. 박천의 세 아들은 장남이 박도맹(朴道孟)이고, 차남 박도천(朴道天)은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고, 삼남 박도인(朴道仁)은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
헌공의 외아들은 홍준(弘俊)이다. 민공은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홍원(弘遠)은 현재 이조 참의인데 종숙부 영의정 제공(濟恭)이 양자로 삼았고, 차남은 홍진(弘進)이고, 삼남은 홍정(弘定)이며, 딸은 사인에게 시집갔다. 지공의 두 아들은 홍규(弘逵), 홍선(弘選)이다. 이공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홍벽(弘璧), 홍박(弘璞)이고, 딸은 사인에게 시집갔다.
아, 소자(小子)의 아버지이자 영의정에 증직된 휘 응일(膺一)은 선생의 조카이다. 선생은 친아들처럼 여기고 아우들을 가르쳤던 방법으로 가르치며 아침부터 밤까지 면려하여 성취하게 하였으니, 경학과 품행이 오직 선생을 닮았다. 일찍이 소자에게 알려 주며 말하기를,
“내가 선생의 곁에 있은 지가 30여 년이니, 평소의 언행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르는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늙은 뒤에 묵묵히 되새겨 보니, 대개 말씀과 행동에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점이 한마디나 한 가지도 없더구나. 조행(操行)의 순수하고 독실함은 근세의 학자들이 지니지 못한 것이다.”
하였는데, 소자는 말씀을 듣고 감히 잊지 못하였다.
소자 같은 자는 학문이 거칠고 품행이 볼 것 없어, 선생의 가훈을 본받지 못하고 선생의 가문을 부지하지 못하여 송구하고 부끄러운데, 지금 덕을 형용하는 글에 어찌 한 글자라도 과장하여 선생의 더없이 엄중한 법도에 죄를 거듭 질 수 있겠는가. 지난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눈에 가득하고 붓을 잡으면 땀이 얼굴을 적셔 글을 짓는 동안에 전전긍긍할 뿐이다. 입언 군자(立言君子)가 굽어보고 채택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상(上)의 21년 정사년(1797, 정조21) 동지(冬至)에 종손(從孫)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원임 규장각제학(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原任奎章閣提學) 제공이 삼가 쓰다.
[주-D001] 오시재(五視齋) 선생 : 채명윤(蔡明胤, 1652~1720)으로, 본관은 평강, 자는 중선(仲宣), 호는 오시재이다. 번암의 백종조부(伯從祖父)이다.[주-D002] 이극(李克)이 …… 말 : 위(魏)나라 문후가 위성(魏成)과 책황(翟璜) 두 사람 중에서 누구를 정승으로 삼을지 이극에게 묻자, 이극이 “그들이 거처할 때 누구와 가까이하는지, 부유할 때 누구에게 베풀었는지,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누구를 천거하였는지, 곤경에 처했을 때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가난할 때 무엇을 취하지 않았는지, 이 다섯 가지를 살펴보면 충분히 정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한 것을 말한다. 《史記 魏世家》[주-D003] 신라 부마(駙馬)의 후손 : 평강 채씨의 먼 조상인 채원광(蔡元光)이 신라 제17대 내물왕의 사위 채보한(蔡輔漢)의 후손이라는 말이 전한다.[주-D004] 송년(松年) : 채송년(蔡松年, ?~1251)으로, 본관은 평강, 자는 천로(天老), 시호는 경평(景平)이다. 평강 채씨의 시조이다. 추밀 승선(樞密承宣),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어사대부(御史大夫),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등을 지냈다.[주-D005] 자화(子華) : 채자화(蔡子華)로, 고려 때 평장사를 지냈다. 《평강채씨대동보》에는 ‘채화(蔡華)’라고 하였다.[주-D006] 종린(宗麟) : 채종린(蔡宗麟)으로, 고려 때 정승을 지냈다. ‘채종린(蔡宗璘)’이라 한 곳도 있다.[주-D007] 양생(陽生) : 채양생(蔡陽生)으로, 고려 때 군기감 소감(軍器監少監)을 지냈다. 조선이 개국하자 전라도 임피(臨陂)로 가서 은둔하였다.[주-D008] 망복(罔僕) :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이 되지 않으려는 절조를 말한다. 은(殷)나라가 망할 무렵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書經 微子》[주-D009] 삼대(三代) : 채양생, 채왕승(蔡王承), 채효순(蔡孝順)의 세대를 말한다.[주-D010] 자침(子沉) : 채자침(蔡子沉)으로, 《평강채씨대동보》에는 ‘채침(蔡沉)’이라 하였다.[주-D011] 중경(仲卿) : 채중경(蔡仲卿)으로, 채자침의 둘째 아들이다.[주-D012] 난종(蘭宗) : 채난종(蔡蘭宗, 1513~1573)으로, 본관은 평강, 자는 문원(聞遠)이다.[주-D013] 유희춘(柳希春) : 1513~1577.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시호는 문절(文節)이다.[주-D014] 경선(慶先) : 채경선(蔡慶先, 1559~1610)으로, 자는 자장(子長), 호는 죽촌이다.[주-D015] 충연(忠衍) : 채충연(蔡忠衍, 1580~1617)으로, 자는 연지(衍之), 호는 애려(愛廬)이다.[주-D016] 대총재(大冢宰)이자 태학사(太學士) : 대총재는 이조 판서의 이칭이고, 태학사는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의 이칭이다.[주-D017] 유후(裕後) : 채유후(蔡裕後, 1599~1660)로, 자는 백창(伯昌), 호는 호주, 시호는 문혜(文惠)이다.[주-D018] 진후(振後) : 채진후(蔡振後, 1602~?)로, 자는 계창(季昌)이다.[주-D019] 시상(時祥) : 채시상(蔡時祥, 1636~1718)으로, 자는 문징(文徵)이다.[주-D020] 노직(老職) : 노인직(老人職)으로, 실직(實職)이 아닌 고령자를 우대하기 위한 뜻에서 주어진 관직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노인직조(老人職條)에 의하면 “나이 80세 이상이면 양인(良人)이나 천인(賤人)을 막론하고 1품계(品階)를 수여하고 원래 품계가 있는 자에게는 1품계를 더 수여하며, 당상관(堂上官)은 왕의 전지(傳旨)가 있어야 수여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주-D021] 공령문(功令文) : 과거 보는 데 소용되는 여러 가지 문체의 글, 즉 과체문(科體文)을 말한다.[주-D022] 경조 아윤(京兆亞尹) : 한성부의 좌윤과 우윤을 뜻하는데, 채성윤은 한성부 좌윤을 지냈다.[주-D023] 성윤(成胤) : 채성윤(蔡成胤, 1659~1733)으로, 자는 중미(仲美), 호는 구봉(九峯)이다.[주-D024] 정윤(禎胤) : 채정윤(蔡禎胤, 1666~?)으로, 자는 중응(仲應)이다.[주-D025] 팽윤(彭胤) : 채팽윤(蔡彭胤, 1669~1731)으로, 본관은 평강, 자는 중기(仲耆), 호는 희암(希菴)ㆍ은와(恩窩)이다.[주-D026] 선생이 희암공과 …… 표정이었다 : 1688년 10월 숙원(淑媛) 장씨(張氏)가 왕자 이윤(李昀) 즉 후일의 경종(景宗)을 낳자 1689년 1월 10일 숙종이 왕자의 명호를 정할 것을 거론하고, 1월 15일 왕자를 원자(元子)로 봉하고 종묘사직에 고하였으며, 이에 대해 축하하는 과거인 경과(慶科) 증광시(增廣試)를 열었다. 이때 채팽윤은 갑과에 급제하고, 채명윤은 병과에 급제하였다. 《肅宗實錄 15年 1月 10日, 11日, 15日》[주-D027]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 인현왕후(1667~1701)는 숙종의 계비(繼妃)이다. 1681년 가례(嘉禮)를 올려 숙종의 계비가 되었으나 왕자를 낳지 못해 왕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는데, 1688년 숙원(淑媛) 장씨(張氏)가 왕자 이윤을 낳자, 1689년 1월 11일 숙종은 즉시 그를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도 희빈(禧嬪)으로 삼았으며 남인들의 주장에 따라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1690년 10월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肅宗實錄 15年 1月 11日, 15日》[주-D028] 우인(郵人) : 찰방 아래의 여러 하급 관리를 말한다.[주-D029] 참판공(參判公)이 …… 논하였고 : 채명윤의 조부 채진후(蔡振後)가 1635년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하고 있었는데, 유생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서 이이(李珥)의 문묘 배향 건의를 반대하다가 성균관에서 퇴교를 당하고,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처분을 받았다. 사후에 손자들이 현달한 덕분에 이조 참판 행 화순 현감(行和順縣監)에 증직되었다.[주-D030] 희암공이 …… 지났다 : 기사년(1689)에 이현령(李玄齡)이 이이와 성혼(成渾)을 문묘에서 출향하도록 상소하였는데, 채명윤의 셋째 아우 채팽윤이 이 일에 참여하여 홍문록에서 삭제되었다. 《承政院日記 肅宗 15年 3月 12日, 20年 11月 7日ㆍ8日》[주-D031] 남강(南康)의 황정법(荒政法) : 주희(朱熹)가 1179년 지남강군(知南康軍)에 제수되어 시행한 황정에 관한 법규를 말한다. 그는 황정을 시행하여 굶어 죽는 백성이 생기지 않게 하였다. 《宋史 道學列傳 朱熹》[주-D032] 하남(河南)에서 …… 의리 : 법규와 절차보다 굶주린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의리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 하남 지방에 화재가 나서 1000여 가호가 불에 타자, 무제가 급암(汲黯)에게 살피게 하였는데, 급암은 백성들이 수재와 한재로 비참한 상황에 처한 것을 보고 임의대로 부절(符節)을 사용하여 하남 창고의 관곡(官穀)을 풀어 빈민들을 진휼했다. 돌아와서 조칙(詔勅)을 가탁한 죄를 청하자, 무제가 어질게 여겨 그를 용서하였다. 《史記 汲鄭列傳》[주-D033] 임공 수간(任公守幹) : 임수간(1665~1721)으로,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용여(用汝), 호는 돈와(遯窩)이다. 1708년 4월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서 출향할 것을 청하는 상소에 참여한 채팽윤을 소통(疏通)시킬 것을 청하였다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는 처분을 받고 조태구의 탄핵을 받았다.[주-D034] 조태구(趙泰耈) : 1660~1723.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덕수(德叟), 호는 소헌(素軒)ㆍ하곡(霞谷)이다. 소론의 영수로 신임사화를 일으켜 사촌 조태채 등 노론 사대신을 역모죄로 죽이고 영의정에 올랐다. 영조가 즉위한 뒤 신임사화의 원흉으로 탄핵을 받고 관작이 추탈되었다.[주-D035] 오징(吳澄) : 송말 원초의 문신이자 학자로, 자는 유청(幼淸), 호는 초려(草廬)이다. 송나라가 망한 뒤 원나라의 국자감 승(國子監丞)이 되고 경연강관(經筵講官)을 지냈다. 저서로 《의례일경전(儀禮逸經典)》, 《오문정공집(吳文正公集)》, 《초려정어(草廬精語)》 등이 있다. 한족 출신으로 원나라에서 벼슬했다고 비난을 받았는데, 조선에서는 송시열(宋時烈)이 그가 호족(胡族)인 원나라에서 벼슬하였다고 하여 문묘에서 출향하였다.[주-D036] 심공 득원(沈公得元) : 심득원(1644~1709)으로,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선장(善長)이다. 1694년 갑술옥사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 1706년 조정에서 장령, 필선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주-D037] 여산(礪山) :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이다.[주-D038] 홍주(洪州) :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이다.[주-D039] 동추공(同樞公) : 채명윤의 아버지 채시상(蔡時祥)이다.[주-D040] 구수(九數) : 고대의 수학(數學)에서 아홉 가지의 산법(算法)을 말한다. 《주례》 〈지관(地官) 보씨(保氏)〉에 “여섯 번째는 구수이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씨(鄭氏)의 주에서 “첫 번째는 방전(方田), 두 번째는 속미(粟米), 세 번째는 차분(差分), 네 번째는 소광(少廣), 다섯 번째는 상공(商功), 여섯 번째는 균수(均輸), 일곱 번째는 방정(方程), 여덟 번째는 영부족(贏不足), 아홉 번째는 방요(旁腰)이다.” 하였다.[주-D041] 황극(皇極) :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바른 법으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표준을 세움을 이른다. 《서경》 〈홍범(洪範)〉에 “다섯 번째는 세움을 황극으로써 함이다.[次五, 曰建用皇極.]”라고 하였는데, 채침(蔡沈)은 《집전(集傳)》에서 “황극은 군주가 극을 세우는 것이다.[皇極者, 君之所以建極也.]”라고 설명하였다.[주-D042] 종률(鍾律) : 황종(黃鍾)과 율(律)로, 음악을 뜻한다. 황종은 악률 12율 가운데 제1율을 말하고, 율은 음악의 육률(六律)과 육려(六呂)인 십이율(十二律)을 말한다.[주-D043] 설시(揲蓍) : 시초점(蓍草占)을 칠 때 산가지를 세어 괘(卦)를 배설(排設)하는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주역대전(周易大全)》 권수 서의(筮儀)에 실려 있다.[주-D044] 지경(持敬) : 공경하는 마음을 항상 지니고서 지켜 나가는 것을 뜻한다.[주-D045] 존성(存誠) : 성실한 마음을 보존하는 것을 뜻한다.[주-D046] 사단이발(四端理發)과 칠정기발(七情氣發)의 설 : 이황(李滉)이 사단과 칠정에 대하여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주장한 것을 말한다. 《退溪集 卷36 答李宏仲問目》[주-D047] 단전밀부(單傳密付) : 종지(宗旨)를 뜻한다. 단전은 불교에서, 경전에 의지하지 않고 정법(正法)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말이고, 밀부는 불교 선종에서 조사(祖師)가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심인(心印)을 제자에게 맡기는 것을 말한다.[주-D048] 혼륜(渾淪) : 이(理)와 기(氣)가 원래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이와 기가 합쳐진 상태를 말한다.[주-D049] 고봉(高峯)이 …… 까닭이다 : 고봉은 기대승(奇大升)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559년부터 1566년까지 이황과의 사칠논변(四七論辯)을 통해 조선의 유학 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저서에 《고봉집(高峯集)》이 있다. 사칠논변의 초기,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을 나누어 보아야 한다는 이황의 의견에 반박하였으나, 논변의 마지막에 이황의 호발설을 받아들였다.[주-D050] 우계(牛溪)가 …… 일으켰는데 : 우계 성혼(成渾)이 이황의 학설을 지지하고 율곡 이이(李珥)와 문답 형식을 취하여 서로 의견을 교환했던 것을 말한다.[주-D051] 성정에는 …… 것이다 : 이기호발은 사단은 이가, 칠정은 기가 발한다고 하여, 이와 기가 각각 발한다고 보는 이황의 관점이다. 이황(李滉)은 사단과 칠정에 대하여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주장하였다. 《退溪集 卷36 答李宏仲問目》 반면 이이는 이황의 호발설을 비판하여, 사단과 칠정 모두 기가 발하여 이가 탄다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다.[주-D052] 적연부동(寂然不動) :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감응하면 마침내 통한다는 뜻의 감이수통과 대응되어 쓰이는 성리학의 용어이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역은 생각도 없고 하는 것도 없어서, 고요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감응하면 마침내 천하의 일을 통하나니, 천하의 지극히 신령스러운 자가 아니면 그 누가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易, 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非天下之至神, 其孰能與於此.]”라는 말이 나온다.[주-D053] 감이수통(感而遂通) : 감응하여 모든 이치에 통함을 현상 면에서 형용한 말이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역은 생각도 없고 하는 것도 없어서, 고요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감응하면 마침내 천하의 일을 통하나니, 천하의 지극히 신령스러운 자가 아니면 그 누가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易, 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非天下之至神, 其孰能與於此.]”라는 말이 나온다.[주-D054] 성에는 …… 있다 : 본연지성은 모든 사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착하고 평등한 천성(天性)을 말하며, 기질지성은 형태가 갖추어진 뒤에 있게 된 성인데, 기질지성을 잘 키워야만 본연지성이 그대로 있게 된다 하였다. 《張子全書 卷3 誠明篇 第6》[주-D055] 진안경(陳安卿)에게 …… 있고 : 《회암집(晦庵集)》 권57 〈답진안경(答陳安卿)〉에는 ‘不’이 ‘未’로 되어 있다. 진안경은 남송의 학자 진순(陳淳)을 말한다.[주-D056] 호광중(胡廣仲)에게 …… 있고 : 《회암집》 권42 〈답호광중(答胡廣仲)〉에 나온다. 호광중은 송(宋)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식(寔), 자는 광중이며, 문정공(文定公) 호안국(胡安國)의 조카이다.[주-D057] 황면재(黃勉齋)가 …… 하였다 : 《성리대전(性理大全)》 권2 주석에 나온다. 황면재는 송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간(榦), 자는 직경(直卿), 호는 면재,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주희의 제자이자 사위이다. 주희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를 완성하였다.[주-D058] 노이빙(盧履氷)이 …… 했는데 : 노이빙은 당나라 때의 학자로 유주(幽州) 범양(范陽) 사람이다. 이 말은 당 현종(唐玄宗) 개원(開元) 5년에 우보궐(右補闕)로서 복제(服制)에 대하여 건의하며 한 말이다. 《唐書 盧履氷列傳》[주-D059] 가례(家禮) …… 하였다 : 제자가 “자식이 어머니를 위해 대상 및 담제를 지낼 경우 남편은 이미 상복이 없는데 그 제사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子爲母大祥及禫, 夫已無服 其祭當如何?]”라고 질문하자, 주희가 “오늘날의 예법에 궤연은 반드시 3년이 지난 뒤에 치우니, 소상과 대상의 제사는 모두 남편이 주재하는 것이다. 다만 소상 이후에 남편은 상복을 벗으니, 대상의 제사는 남편이 또한 평상복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야 할 듯하다.[今禮几筵必三年而除, 則小祥大祥之祭, 皆夫主之. 但小祥之後, 夫即除服, 大祥之祭, 恐須素服.]”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家禮 附錄》[주-D060] 응손(膺孫) : 채응손(蔡膺孫, 1694~1756)으로, 자는 세언(世彦)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