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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후명(厚命), 자는 천휴(天休), 호는 임하당(林下堂)이다. 그 선조는 평산인(平山人)이니 고려조의 공신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의 후예이고 우리 세종조의 명재상 문희공(文僖公) 개(槩)의 9대손이다. 증조의 휘는 여길(汝吉)이니 증 좌승지이다. 조부의 휘는 상철(尙哲)이니 호조 정랑 증 이조 참판이다. 부친의 휘는 형구(衡耉)이니 부호군 증 호조 참판이다. 모친은 증 정부인 창녕성씨(昌寧成氏)이니 참의 시헌(時憲)의 따님이다.
공은 숭정 무인년(1638, 인조 16)에 상주(尙州) 영순리(永順里) 집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단아하고 정중했으며 기국과 도량이 있어서 문사가 일찍 이루어졌다. 14세에 동당시(東堂試)에 들어가 대책(對策)을 작성함에 마치 미리부터 구성했던 것처럼 능숙하니, 목재(木齋) 홍공 여하(洪公汝河)가 보고 칭찬하기를, “나도 이만큼 지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현종 병오년(1666)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정미년(1667, 현종 8)에 승문원에 들어가 부정자가 되었다. 기유년(1669, 현종 10)에는 외직으로 나가 율봉도 찰방(栗峯道察訪)이 되었다. 신해년(1671, 현종 12)에는 전적으로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ㆍ병조ㆍ호조의 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 임자년(1673, 현종 13)에는 나가서 무장 현감이 되었다가 계축년(1673, 현종 14)에 전주 판관으로 옮겨서 번잡하고 힘든 일을 능히 다스려 듣고서 처리함에 막힘이 없었다. 병진년(1676,숙종2)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가 병조 정랑이 되고 직강으로 옮겼다.
정사년(1677, 숙종 3)에는 정언 겸 지제교에 임명되었다가 이윽고 지평에 임명되었는데, 같은 직위에 있는 한모(韓某)가 일찍이 크게 탐욕스럽기로 호가 났다. 공은 휘장을 사이에 두고 논박하여 관리의 명부에서 그의 이름을 빼 버릴 것을 청하니, 주상이 종신토록 서용(敍用)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상서(尙書) 오정위(吳挺緯)가 전에 한을 이끌어 나오게 하였으므로 모면하기를 도모하고자 했는데, 한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만 나의 벌을 무겁게 하기에 족할 뿐이다.” 하고 힘써 그치게 했으니, 공이 공정ㆍ정직함으로써 남을 복종시켰던 것을 볼 수 있다. 겨울에 나가서 해운 판관(海運判官)이 되었다가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옮겼다. 나주는 본디 다스리기 힘들다고 호가 난 곳으로 문서가 구름처럼 많이 쌓였다. 비리로 배척을 당한 자가 1년 후에 이름을 바꾸어서 다시 소송을 제기했는데, 공이 그 간특한 정상을 적발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놀라고 감탄하여 감히 기만하지 못하매 읍이 크게 다스려졌다. 고마(雇馬)40여 필을 세워서 늑정(勒定)한 쇄마(刷馬)의 폐단을 제거하고, 또 자신의 봉급 수천 석을 덜어서 기민(飢民)을 구휼하고 세역(稅役)을 보충하였다. 이에 어사와 도백이 연이어 포장하는 장계(狀啓)를 올리니, 주상이 의복의 겉감과 안감을 하사하여 장려하였다.
기미년(1679, 숙종 5)에 부수찬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논핵(論劾)을 받아 가지 않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이 되었다가 장령으로 옮겨서 자주 입시하여 계복(啓覆)하였다. 당시에 사람을 죽인 세 건의 큰 옥사가 있었는데, 공이 평반(平反)의 도리로써 아뢰니 주상이 가납하였다. 이윽고 수찬으로 승진되었다.
경신년(1680, 숙종 6)에 사간에 승진되고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가 이윽고 병조 참지로 옮겼다. 당시에 영상 허적(許積)이 주상으로부터 궤장(几杖)을 받고 잔치를 열었는데 친지들이 다 모였으나 공은 홀로 참석하지 않고 대궐 안에 입직하였다. 이날 밤에 허 영상의 서자 견(堅)의 옥사가 일어나니, 잔치에 참여했던 이들이 연루된 사람이 많았다. 허 영상은 곧 공의 계모(季母) 허씨의 아우였으므로 본디 정의(情誼)가 매우 돈독했는데, 그 서자 견이 호횡(豪橫)함으로부터 점차 소원하여 멀리하게 되었다. 이 때에 허 영상이 동문 밖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공이 입직하던 도중에 나아가 문후하니, 허 영상이 놀라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지금이 어느 때인데 자네가 와서 문안하는가.” 하여 듣는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공은 시사가 위태함이 많은 것를 보고 외직으로 나가기를 구하여 충주 목사가 되었다. 신유년(1681, 숙종 7)에 어사 김두명(金斗明)의 무고로 체직되었는데, 주상이 무고임을 살펴서 특명으로 방면하고 이윽고 울산 부사에 임명되고, 임술년(1682, 숙종 8)에 청주 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계해년(1683, 숙종 9) 봄에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고, 을축년(1685, 숙종 11)에 복을 벗고는 안주 목사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무진년(1688, 숙종 14)에 강릉 부사가 되었고, 기사년(1689, 숙종 15)에 강원도 관찰사로 승진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체직되어 돌아와 은대(銀臺)에 들어가 연이어 승진하여 좌승지에 이르렀다가 이윽고 병조 참의로 옮겼다. 경오년(1690, 숙종 16)에 청 나라 칙사가 옴에 평양 연위사(平壤延慰使)가 되었는데, 어명으로 그대로 평양에 머물러 있다가 칙사가 돌아갈 때 별문안사(別問安使)로서 의주에 나아가 어첩(御帖)을 드리고 돌아와 병조 참지, 병조 참의를 지냈다. 외직으로 나가 장단 부사가 되었는데 치적이 크게 드러났다.
이듬해 7월에 주사(籌司 비변사(備邊司))의 천거로 가선대부에 올라 관서 절도사에 임명되어, 군졸을 어루만지고 갑옷과 병기를 수리하여 군정(軍政)이 크게 닦였다. 공은 강변(江邊)의 제치(制置)가 조밀하지 못하다고 여기어 글을 올려 창성(昌城) 좌방영(左防營)을 내지로 옮기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강계(江界) 우방영(右防營) 이하로 적이 오는 길목이 적유령(狄踰嶺), 우현(牛峴), 차령(車嶺), 완항령(緩項嶺), 막령(幕嶺), 계반령(谿盤嶺)에 불과한데 6령이 모두 험준한 지형이니 이곳의 방수를 제대로 하면 적의 편갑(片甲)도 돌아가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창성이 강에 임하여 영(營)을 설치했으니 적의 기병이 밤중에 습격하여 얼음을 타고 건너오는 것이 한 번 눈 깜짝할 사이에 있습니다. 주진(主鎭)이 먼저 패하면 누가 능히 열진(列鎭)을 지휘할 수 있겠습니까. 창성의 옛 치소(治所)는 완항령 안에 있었으니 마땅히 이곳으로 영을 옮겨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읍을 옮기는 것을 어렵게 생각한다면, 구성(龜城)이 계반령 안에 있으니 옮겨서 방영(防營)을 삼는 것도 또한 하나의 방도일 것입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산(理山)의 고리산(古理山)과 창성의 당아성(螳蛾城)은 매우 험준하니, 마땅히 성을 쌓고 양식을 비축함으로써 변방의 백성이 병화를 피할 장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고, 또 ‘성에 장정이 없어 군역에 종사할 사람이 없는 폐단’을 말하고 이를 혁파하기를 청하여,
“변방 백성들의 문건 왕래는 각 진보(鎭堡)와 군읍(郡邑)의 번졸(番卒)을 시키거나 혹은 파발마로 차례 차례 교대하여 전송함으로써 변방 백성의 힘을 쉬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니, 일이 모두 착착 규모에 맞아 들어갔다.
이 당시에 민상 정중(閔相鼎重)이 벽동(碧潼)에 유배를 당했고 판서(判書) 이언강(李彦綱)과 참의(參議) 박태손(朴泰遜)이 모두 본도에 귀양을 왔는데, 세 사람은 모두 공과 오랜 교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에 공이 두루 이르러 찾아보고 이어서 음식을 보내준 일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상신(相臣)의 뜻을 거슬러 체직을 당하여 소(疏)는 미처 올라가지 못했으니, 식자들이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임신년(1692, 숙종 18)에 부총관이 되어 판결사로 옮겼는데, 적체한 의안(疑案)을 결재함이 마치 물 흐르듯 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원중(院中)이 고요해졌다. 겨울에 한성 우윤이 되었고, 이듬해인 계유년에 공조 참판으로 승진했는데, 이때 청 나라가 조선에서 해마다 바치는 공물 가운데 황금 100냥과 목면 600필을 감해주었다. 5월에 공이 호조 참판으로 사은 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연경(燕京)으로 갔다. 당시의 사행(使行)에 있어서는 으레 사적인 무역이 금지되어 압록강을 건너는 날에 반드시 물건들을 살피고 점검했더니 금망(禁網)이 점차 해이해졌다. 공은 의주에 머물면서 수역(首驛)으로 하여금 행장 속의 물건들을 서장관 및 부윤에게 들이게 하여 봉표(封標)하여 점검하게 하고 이 때에 봉표가 없는 것은 관물로 귀속시키니 현장에서 2천여 냥을 적발하였다. 공은 이 행차에 있어서 한 물건도 몰래 거래한 것이 없고 한 사람도 더 데려감이 없었으니, 뒷사람의 법이 될 만하다고 하겠다. 11월에 복명(復命)하여 병조 참판이 되고, 이윽고 외직을 구하여 청풍 부사(淸風府使)가 되었다. 갑술년(1694, 숙종 20) 가을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양근(楊根) 백운봉(白雲峯) 아래 우거(寓居)하였다.
병자년(1696, 숙종 22) 봄에 동추(同樞)에 임명되고 도 부총관이 되었고, 거듭 특진관으로 경연(經筵)에 입시하고 형조에 들어갔다. 당시에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함께 향사하는 일로 전국의 유생들이 다투는 이가 천여 명이었으니 크게 시론(時論)을 거슬러 연명으로 상소한 유생들 가운데 우두머리는 유배를 보내고 나머지는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하고 홀로 상소한 사람에 대해서는 곤장을 치려 하였다. 공은 장차 상소하여 이들을 구원하려 했는데 형조 판서 민진장(閔鎭長)이 급급하게 법을 행하여 공의 상소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한발의 재앙이 있어 정상을 살피라는 어명이 있었는데, 공이 수당(首堂) 이세화(李世華)와 함께 의논이 합하지 않자 곧 상소하여 많은 선비를 폐고(廢錮)한 잘못을 힘주어 말하여 아홉 번 올렸다가 아홉 번 기각당하였다. 마지막에는 후원(喉院 승정원(承政院))이 막혀서 가려진 정상을 겸하여 진달한 소장이 비로소 봉입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앞서 상소했던 유생들을 풀어주니, 사림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3월에 호서 관찰사가 되어 법을 집행함이 선을 그은 듯이 바르게 하여 정도를 지키고 굽히지 않았다. 이에 요로에 있는 고관의 형세에 의지했던 사람들이 쫓겨난 이들이 많았는데, 바로 공주 목사 조지정(趙持正), 대흥 군수 김만준(金萬埈)과 같은 이들이었다. 공의 사직소에 말하기를,
“형세를 가진 집은 한결같이 돌아볼 것이 없으니, 뭇 사람의 비방이 일어나는 것은 신이 진실로 감당하겠습니다.”
했으니, 대개 그 실제의 일이었다. 도민(道民) 손창호(孫昌浩)라는 자가 백성의 밭을 빼앗아 궁가(宮家)에 팔았는데 궁노(宮奴)가 세를 거두는 것이 부당하기가 매우 심하자 공이 창호를 잡아 가두고 글을 올려 시비를 따져 간쟁하니 주상이 특별히 명하여 궁가를 그르다고 판결하였다. 겨울에 은미한 일로 좌의정 윤지선(尹趾善)을 거슬러 파직되어 돌아왔다.
무인년(1698, 숙종 24)에 거듭 기근이 들어 청 나라에 곡식을 청했는데, 4월에 청 나라에서 이부ㆍ호부 시랑을 보내어 수로와 육로로 5만 석의 쌀을 운반하여 의주 중강(中江)에 정박시켰다. 공은 좌윤으로서 접반사가 되고 우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총사사(總使事)가 되었는데, 호부 시랑 도대(陶大)가 성격이 사납고 무례했으나 공이 일을 따라 선처하니, 두 사신이 공경하고 어렵게 여겼다. 요청한 쌀을 사기에 미쳐서 쌀값이 높이 뛰어 오르니, 공이 도 시랑(陶侍郞)에게 글을 올려 그것이 부당함을 변론하여 일이 모두 순조로이 이루어졌다. 도 시랑이 한 봉서(封書)를 최상(崔相)에게 주어서 주상에게 바치게 했는데, 최상이 받아 와서 공과 연명으로 아뢰고자 했다. 공이 말하기를, “서신의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갑자기 올리겠습니까.”라고 하여, 드디어 뜯어서 보니 서신 가운데 ‘권제(眷弟)’라는 글자가 있었다. 최상이 크게 놀라 어쩔 줄을 알지 못하고 공에게 간청하여 서신을 돌려 주자고 했는데, 공이 사양하지 않고 즉시 서신을 가지고 도 시랑에게 가서 말하기를,
“예에 인신(人臣)은 밖으로 사귀는 일이 없으니, 중국의 사신이 오면서 사사로운 서신을 우리 임금에게 드린 일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은 노야(老爺)에게 있어서 아마 대조(大朝)의 시비가 있을 듯하고, 배신(陪臣)도 또한 감히 사사로운 편지로 우리 군부에게 전할 수 없습니다.”
하고, 그 서신을 내서 돌려 주니, 도 시랑이 웃으며 사죄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듣고 훌륭하다고 여겼고, 양사(兩司)에서는 최상을 파직시켜야 한다고 논하였다. 공은 일을 마치고 돌아와 여주(驪州)의 원형리(元亨里)로 물러나 지냈는데, 또 우윤에 임명되어 상소하여 붕당과 과거의 폐단을 말하니, 주상이 넉넉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이에 사람들은 봉황이 조양(朝陽)에 우는 것처럼 상서로운 일이라고 하였다.
기묘년(1699, 숙종 25)에 다시 부탁지(副度支)가 되고, 이윽고 동지의금부사를 겸직하였다. 당시에 회양 부사 유신일(兪信一)이 수령의 말을 범했다는 이유로 유생 이우백(李友白)을 곤장으로 때려서 죽게 했는데, 주상이 반드시 법으로 처리하고자 하였다. 유(兪)는 요로를 거쳐 권세가 있었는데, 그 아우 득일(得一)이 공이 주상의 신임을 받고 있다고 여겨 참판 권환(權瑍)에게 요구하여 공에게 자기 형을 구해주기를 빌도록 하였으나 공은 들어환주지 않았다. 일이 노승경(魯承經)에게 관계되자 유가 또 그를 유인하여 반대로 말하게 했는데, 공이 품지(稟旨)하고서 엄중히 승경을 심문하여 옥사의 정상을 얻으니, 신일이 마침내 옥중에서 죽었다.
겨울에 대신(臺臣) 이탄(李坦)이 과거(科擧)에 부정한 사람을 적발하여 아뢰었는데, 모두 고관의 자제였기에 옥사가 장차 무산될 형세였다. 공은 나아가 상소하여 송성(宋晟)의 시권(試券)에 제축(第軸)이 서로 틀리고 이성휘(李聖輝)의 문장에 부표(賦表)가 서로 바뀐 사실을 말하고, 국문하여 간사한 관리를 징계할 것을 청하니, 주상이 엄명을 내려 정상을 조사하게 하여 과거에 부정한 사람 8인을 적발하여 차례로 밝혀 냈다. 그 가운데 김인지(金麟至)는 공과 매우 가까운 인척이었으나 공은 조금도 두둔하지 않고 마침내 그 옥사를 이루었으니 공의는 쾌하게 여겼으나, 공은 이로써 요로에 있는 사람들을 크게 거스르게 되었다.
경진년(1700, 숙종 39) 봄에 좌천되어 안동 부사에 제수되어 이미 임지로 떠났는데 또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내외에 편하게 있을 수 없었다. 공은 이에 충주의 가호(嘉湖)에 우거하였다. 이윽고 서추(西樞 중추부(中樞府))에 들어가고, 12월에 삼척 부사에 제수되어 장차 숙배하고 행차하여 오갑(烏甲) 선산 아래 이르렀는데, 미질(微疾)로 당제인 정랑 후식(厚軾)의 집에서 세상을 마치니, 곧 신사년(1701, 숙종 27) 1월 16일이고 향년은 64세였다.
공은 도량이 굉원(宏遠)하고 기국이 준정(峻整)했는데 더욱 가정에서의 행실에 돈독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안색을 살펴 받들고 봉양함이 모두 지극하여 오직 어버이의 뜻만을 따랐다. 벼슬을 하기에 이르러서도 나가는 곳을 반드시 아뢰고 행하여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상에 있어서는 상례의 제도를 행함에 예제에 지나치게 하였다. 여러 여동생들에게는 은혜와 사랑이 지극히 돈독하였고, 권씨집으로 시집간 맏누님에게 후사가 없고 다만 전실에 어린 손자만 있었는데, 공이 데려다 기르기를 마치 자기 자식처럼 하여 성립시키기에 이르렀다.
조정에 서서는 임금을 섬기기에 한결같이 충실(忠實)하여, 현종의 상 때에는 전주 판관을 맡고 있었는데, 공이 슬픔으로 몸을 훼상하고 눈물을 비오듯 흘렸고 공제(公除) 이전에는 소식을 행했다. 낮은 관직에 있을 때부터 현종의 지우(知遇)가 매우 각별하여 승정원으로 품계가 오르고 형조와 호조의 참판이 된 것이 모두 말의(末擬)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매 말을 아뢰면 문득 장려하여 쓰고 봉사를 올리면 반드시 부드러운 비답을 내리며 사람들이 혹 공격하고 탄핵하면 밀어 둔 채 논하지 않고 혹 대신의 요청이 있으면 억지로 따랐다가 곧바로 풀어주니, 모두 특별한 대우였던 것이다.
공은 본디 청백(淸白)하기를 스스로 힘써 아홉 차례 고을 수령이 되고 세 차례 관찰사ㆍ절도사 등의 직책을 맡았으나 돌아올 때는 살 집이 없었고 방에는 아무것도 없어 죽조차도 혹 잇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궁핍한 사람을 도와주기에는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 듯이 하였다. 곤궁한 친척이 공을 찾아와 모장(某庄)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살기를 원하면, 공이 말하기를, “이 땅은 나에게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 하고, 곧 그 문서를 주었다. 일찍이 성묘하기 위하여 문경으로 가다가 밤에 어떤 사람이 뵙기를 청하고 고하기를, “어머니의 병이 바야흐로 위독하여 장차 물소뿔을 써야 하는데 구하기 어렵다.”고 하자, 공은 칼자루의 물소뿔을 풀어서 주었다. 친소를 논할 것 없이 곤궁한 사정을 급하게 여기는 의로움이 이와 같았다. 집안에서는 작은 녹이라도 자매와 함께 하였고, 밖으로 나가서는 고을에서 얻은 것을 친척에게 나누어주었다. 흉년이 든 해를 만나면 인척이나 벗들의 여러 식구를 모두 집에 데려다 보살피고 때로 금권(金圈)ㆍ장복(章服) 등속을 저당잡히거나 팔아서 조석의 끼니를 제공하였다.
다른 사람이 혼례나 상사를 제때에 치르지 못하고 시기를 넘긴 것을 보면 민망히 여기기를 마치 자기 일처럼 하였다. 강릉 태수로 있었을 때, 떠돌다가 그 곳에 머물러 살게 된 선비 홍기연(洪基衍)이 모친상을 당하자 관청에서 그 치상(治喪)을 돕고 새 상여를 주어서 서울 집으로 반장하게 하였다. 또 서울 집 이웃에 두 규수가 과년(過年)토록 출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백금(百金)을 마련해 몰래 그 집에 주어서 혼사를 이루게 하였으나 끝내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으니, 이들은 모두 평소에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그 사람의 부유함과 곤궁함에 따라 베풀어주고 베풀어주지 않는 것을 판가름하기를 한 줄로 그은 듯이 하였으니, 관서 절도사로 있을 때 감사(監司) 권중경(權重經)이 딸의 혼사를 정해놓고 말안장을 구하고 도사(都事) 권적(權迪)이 또한 딸의 혼사를 위하여 가죽신을 구했는데, 공은 가죽신은 주고 말안장은 주지 않으며 말하기를, “감사에게야 누구인들 도와주지 않겠는가. 도사는 가난하기가 심하니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가죽신 안에 명주 10여 필을 채워 넣고 명주 안에 또 가벼운 보석을 싸서 보내 주었다. 그 집에서 열어 보고 놀라움과 기쁨이 기대 밖이었는데, 감사가 듣고 감탄하기를, “그 취사(取捨)의 절도가 참으로 옳다.”고 하였다.
공은 마음가짐이 화평하여 과격한 말이나 유별난 행실이 없고 오직 곧은 도리로 자임(自任)하였다. 강릉 태수로부터 승진하여 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조정의 의논이 장차 대사간으로 바꿔 임명하여 경신년(1680, 현종 6)의 일을 다시 조사해 올리려고 하였다. 당시에 공은 장차 숙배하기 위하여 서울에 들어왔는데, 이공 담명(李公耼命)이 공을 찾아와 울면서 말하기를, “원컨대 우리 원수를 드러내어 아뢰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 공은 “선공(先公 귀암(歸巖)이원정(李元禎))의 천고에 지극한 원통함이야 누구인들 알지 못하겠는가. 이로 인하여 영화를 탐하는 것을 어찌 감히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이 의리에 처하는 명백함을 볼 수 있다.
항상 붕당(朋黨)이 가정과 국가에 화를 끼치고 사람의 심술(心術)을 병들게 함을 통탄하여 친하고 두터운 사이라고 하여 더함을 두지 않고 취지가 다르다고 하여 배척하지 않았다. 갑인년(1674, 현종 15)과 기사년(1689, 숙종 15) 때에 공이 홀로 지론을 공평하고 너그럽게 펴니 시의(時議)에 기롱과 배척을 당하여 누차 청선(淸選)에 드는 길이 막혔으나 공은 도리어 다행으로 여겼다.
무릇 횡핵(橫劾)이 이름에 처하기를 여유있는 듯이 하고 또한 구차하게 해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안주 목사로 있을 때 순찰사 이세백(李世白)이 중군(中軍) 이광한(李光漢)을 공의 자리에 대신 앉히고자 하여 아사(亞使) 유집일(兪集一)을 사주, 고을의 재상(灾傷)으로 무고하여 파직시킨 일이 있었다. 후에 공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유가 금성 태수에 제수되어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을 품었으나, 공은 안색에 전혀 기미를 나타내지 않고 한결같이 대우하자 유가 그 덕량(德量)에 감복하였다.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여 관직에 있으면서 직분을 다하여 삼가 법도[三尺]를 지켰다. 성품이 비록 관화(寬和)하고 순근(醇謹)했으나 언로(言路)를 세우고 왕옥(王獄)을 평의하고 사명(使命)을 받들고 사송(詞訟)을 판결하고 출척(黜陟)을 맡기에 이르러서는 늠연(凜然)하여 범하지 못할 기상이 있었다. 외직으로 나가 다스림에 있어서는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행하여,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사랑하여 치적이 성대하게 드러났다. 율우(栗郵)ㆍ무장(茂長)ㆍ강릉(江陵)에는 모두 거사비(去思碑)가 있고, 관서 절도사가 되어서는 청북(淸北)의 7읍 백성들이 동비(銅碑)를 주조하여 삭주(朔州)에 세우기도 하였다.
공은 평일에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남보다 뛰어나 처음에 이홍발(李弘浡)과 민원보(閔元普)를 보고 “두 사람은 훌륭한 그릇이 아닌 듯하니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뒤에 모두 바르게 죽는 도리를 얻지 못하였다. 일찍이 막내 아들에게 말하기를, “너의 장인이 민씨와 함께 혼사를 맺었으니 민씨의 화가 갑술년에 그치지 않을 것이 두렵구나.”라고 했는데, 과연 신사년(1701, 숙종 27)과 무신년(1728, 영조 4)에 연이어 죄를 받아 형을 받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공의 감식(鑑識)에 탄복하였다.
아아, 공의 포부로써 능력을 자랑하는 세상에 자신의 광채를 감추어 숨기고 오로지 질투하는 시국에 핑계를 만들어서 피하여 그 포부를 크게 펼치지 못 하고 ‘혼탁한 세상의 완인(完人)’이 되는 데에 그치고 말았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부인은 정부인 선산김씨(善山金氏)이니 판결사 증 판서 하량(厦樑)의 따님이니,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고 여사(女士)의 기풍이 있었는데, 아우 대사간 원섭(元燮)과 담론함에 대사간이 항상 굴복하였다. 공보다 4년 뒤에 돌아가셨는데, 처음에는 여주 원형리에 안장했다가 나중에 충주 형천(衡川)에 배장(配葬)하고, 계묘년(1723, 경종 3)에 원주 애안(崖岸)으로 이장하고, 갑술년(1754, 영조 30)에 또 충주 개천동(開川洞) 을좌(乙坐)에 이장하였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 통덕랑 필훈(弼勛)과 생원 필문(弼文)은 모두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다 일찍 죽었고 막내는 진사 필인(弼仁)이며, 참봉 권응경(權應經), 승지 권부(權孚), 진사 홍만창(洪萬昌), 좌랑 이찬(李澯)은 그 사위이다. 통덕랑은 1남 3녀이니 아들은 사적(思迪)이고 딸들은 허해(許海), 강진휴(姜震休), 김복렴(金復濂)에게 출가했다. 생원은 1남이니 사술(思述)이다. 진사는 4남 2녀이니 아들은 사손(思遜), 사수(思遂), 사우(思遇), 사억(思億)이고 딸들은 황기중(黃器重)과 권정균(權正均)에게 출가했다. 권 참봉은 2남 4녀이니 아들은 진사 세전(世銓)과 세현(世鉉)이고 딸들은 홍중겸(洪重謙), 이만정(李萬鼎), 직장 오필운(吳弼運), 참봉 이달중(李達中)에게 출가했다. 권 승지는 탐(耽)을 양자로 들이고 세 딸은 유경유(柳慶裕), 심집(沈㙫), 승지 홍량보(洪亮輔)에게 출가했다. 홍 진사는 1남 1녀이니 아들은 중희(重熙)이고 딸은 권보경(權輔經)에게 출가했다. 이 좌랑은 3남 1녀이니 아들은 현감 만협(萬協), 참판 만회(萬恢), 만희(萬憘)이고 딸은 정미에게 출가했다. 3대와 4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현손 치봉(致鳳)이 손수 공의 행장(行狀)을 엮어서 나에게 와서 부탁하기를, “선조께서 돌아가신 지 지금 거의 90년인데 언행과 사적이 실로 차마 민몰하게 둘 수 없는 것이 있으나 덕을 기술할 글이 하나도 없으니, 원컨대 묘지명을 얻어서 후손에게 고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다만 적임자가 아닐 뿐더러 어리석고 비루하며 노쇠하고 외람되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신군(申君)이 갔다가 다시 오기를 두 세 차례에 이르니, 돌이켜 생각하건대 묘지명을 짓는 일은 사실을 기록하기에 불과한 것인데 어찌 수식하기를 일삼을 것인가 하고 드디어 그 행장에 의거하여 말을 다듬어 서사를 짓고 또 명을 붙인다.
고인의 말씀에 / 古人有言
선비는 기국과 식견을 앞세운다 하였네 / 士先器識
아아, 아름다운 신공이여 / 於休申公
우뚝 빼어나 미혹되지 않았네 / 挺特不惑
세상은 바야흐로 명리에 치달리는데 / 世方奔騖
공은 능히 발을 멈추어 섰네 / 公能駐足
사람들은 모두 시비를 다투었으나 / 人皆傾戞
공은 가함도 불가함도 없었네 / 公無適莫
저기에 미워함이 없었고 / 在彼無惡
여기에 싫어함이 없었네 / 在此無斁
나의 마음 저울대처럼 공평하니 / 我心如秤
어찌 남에게 부림을 당할쏘냐 / 肯爲人役
말과 행실이 서로 돌아보니 / 言行相顧
흠잡을 만한 것이 없었다네 / 無可疵摘
때가 맞지 않음이 있어 / 時有不契
그 베풂이 넓지 못했네 / 厥施未博
공에게야 무슨 슬픔이랴만 / 在公何恤
이 백성에게 복이 없음일세 / 斯民無福
벼슬의 바다 풍파에 / 宦海風波
외로운 노로 안온히 정박했네 / 孤棹穩泊
기국이 크지 않고 / 非器之弘
식견이 높지 않다면 / 非識之卓
어찌 이와 같았으리 / 曷其如此
나의 명이 부끄럽지 않다네 / 我銘無怍
[주-D001] 고마(雇馬) : 조선조에 지방 관아에서 백성으로부터 고용하여 쓰는 말.[주-D002] 쇄마(刷馬) : 조선조에 지방에 배치하였던 관용(官用)의 말. 이 쇄마는 중국에 사신이 갈 때 방물(方物)과 관계 문서를 싣고 가는 데 쓰였음.[주-D003] 계복(啓覆) : 임금에게 상주(上奏)하여 사형수를 재심(再審)하는 것을 말함.[주-D004] 평반(平反) : 억울한 옥사를 자세히 살펴서 그 죄를 감면시켜 주는 것을 말함.[주-D005] 봉황이……우는 것 : 조양(朝陽)은 산의 동쪽을 말함. 봉황이 오동나무에 깃드는 상서로움을 노래한 것으로 《시경》 대아(大雅) 권아편(卷阿篇)에 “봉황이 우니 저 높은 언덕이고, 오동이 나니 저 조양이로다[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라는 시가 있음.[주-D006] 청선(淸選) : 청환(淸宦)의 후보자에 드는 것을 말함. 청환은 혹 청직(淸職)이라 하며,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에 속한 관직을 일컬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