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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조씨(趙氏)이고 휘(諱)는 원명(遠命), 자(字)는 치경(致卿)이며, 선조가 풍양(豐壤) 사람으로 고려(高麗) 태사(太師) 맹(孟)의 후예이다. 본조(本朝)에 들어 휘 희보(希輔)가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을 배척하고 혼미(昏迷)한 조정에 벼슬하지 않아 관직이 서궁 분승지(西宮分承旨)에 그쳤으니, 그가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인 휘 형(珩)은 행 예조 판서(行禮曹判書)를 지냈고 호가 취병(翠屛)으로, 중망(重望)을 짊어진 명경(名卿)이었다. 조부인 휘 상변(相抃)은 현감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부친인 휘 기수(祺壽)는 직장(直長)을 지냈고 문재(文才)가 있었으나 단명하였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모친 증 정경부인(贈貞敬夫人) 이씨(李氏)는 인평대군(麟坪大君) 휘 요(㴭)의 딸이다.
공은 숙종 을묘년(1675, 숙종1)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명민하여 계조(季祖)인 동강공(東岡公)이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아꼈다. 장성하여서는 문예를 일찍 이룩하여 동료들 가운데에서 독보적으로 빼어났으니, 종조제(從祖弟)인 풍릉공(豐陵公)이 변려문(騈儷文)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음에도 공을 치켜세우며 자신이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임오년(1702, 숙종28)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경인년(1710)에 증광 문과(增廣文科) 을과(乙科)에 뽑혔다. 승문원(承文院)에 분관(分館)되어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에 제수되었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였으며, 병조 좌랑(兵曹佐郎)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에 용강 현령(龍岡縣令)이 되었는데, 고을이 평소부터 넉넉함에도 맑고 깨끗하게 정사를 펼쳐 온 경내가 평온하였다. 또 그 이듬해에 체차되어 정언(正言)을 배수하였다. 이때 과옥(科獄)이 일어나자 공이 항소(抗疏)하고 변론(辯論)하여 끝까지 조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당시의 논의를 거슬러 삭출(削黜)되었다. 이윽고 서용되어 여러 번 병조 낭청(兵曹郎廳)과 간관(諫官)을 배수하였으나, 매번 병으로 해직되었다. 병신년(1716)에 홍문록(弘文錄)에 뽑혔으나, 어떤 사람이 권점(圈點)하는 일이 격식에 어긋났다고 하여 홍문록 전체에서 삭제하였다.
경자년(1720, 숙종46)에 왜인(倭人)의 접위사(接慰使)가 되었다. 임인년(1722, 경종2)에 다시 홍문록에 들어 수찬(修撰)과 교리(校理)를 배수하였고 사서(司書), 헌납(獻納), 이조낭관 겸 사서(吏曹郎官兼司書), 서학(西學)ㆍ남학 한학교수(南學漢學敎授), 교서(校書), 교리를 역임하였으나 모두 인의(引義)하여 나가지 않았다. 오직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의 실관(實官)이 제수되었을 때만은 바로 사은(謝恩)하였고, 매번 주연(冑筵)에서 물러날 때마다 기뻐하며 남들에게 “예학(睿學)이 고명(高明)하여 적이 십수 일 동안 문난(問難)하고 변해(辨解)하는 것을 살펴보면 나날이 진보하는 것을 문득 깨닫겠으니, 참으로 종묘사직(宗廟社稷)과 신민(臣民)들의 복이다.”라고 하고 이런 까닭에 반드시 열흘씩 시강(侍講)하며 차마 입직을 교대하지 못하였다. 북평사(北評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검상(檢詳)을 거쳐 사인(舍人)ㆍ겸필선(兼弼善)ㆍ겸보덕(兼輔德)으로 승진하였는데, 형제가 함께 세자시강원에 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군자감(軍資監)ㆍ장악원 정(掌樂院正),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사간(司諫), 집의(執義), 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 어사(御史)로서 강화도(江華島)에 나아가 시재(試才)하였다.
갑진년(1724, 영조 즉위년)에 영묘(英廟)께서 즉위하시자 가장 먼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뽑혔다가 승진하여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는데, 번개가 치는 재이(災異)가 있자 진계(陳戒)하여 “궁위(宮闈)의 오래된 공물(供物)에 절약을 하여 검소의 미덕을 밝혀야 하고, 신하를 부림에 염치를 길러 대방(大防)을 보존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상께서 가상하게 여겨 채납하셨다. 겨울에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의 죄를 밝혀서 바로잡으려 할 때 그 일당인 이명의(李明誼)의 무리가 승정원에 있으면서 역모를 덮으려고 하였는데, 공은 정색하며 거절하고 바로 옷을 떨치고 나갔고, 마침내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배수하였다. 이듬해에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배수하였다가 소명(召命)을 어겨 파직되어 동교(東郊)로 나갔다. 이때 조정에 큰 변고가 있어 어떤 이는 출척(黜斥)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삭직(削職)되기도 했다. 그래서 공의 친우들이 근교에 많이 살며 왕래하면서 술 마시고 시를 읊었는데, 매번 공을 초대하였지만 공은 이미 고요하게 처신하고 자적(自適)하며 산림에서 글과 술을 즐기는 모임일지라도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정미년(1727, 영조3) 가을에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배수하였다가 호조(戶曹)로 옮기고 다시 이조(吏曹)로 옮겼는데, 동당(同堂)의 형제로서 후임자가 되었다 하여 인의하여 체차되었다. 그 뒤로 여러 번 제수되어 억지로 잠시 나가기는 했으나 불과 두세 번 정사에 참여하고 체차되었다.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배수하였을 때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문제를 상께서 선정전(宣政殿)에 납시어 신하들을 나오게 하여 당부를 하문(下問)하셨다. 공이 “결포(結布)와 호포(戶布)에 대한 논의는 예로부터 갑론을박해 왔습니다. 그러나 전결(田結)에는 이미 결세(結稅)가 있으니 결포도 내게 한다면 이는 세금을 더 부과하는 것이고, 호구(戶口)의 수가 고르지 않은데 구별하지 않고 세금을 징수한다면 이는 공평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구전(口錢)만이 그나마 괜찮은데, 위로는 귀근(貴近 신분이 높은 근신(近臣))에서 아래로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인구(人口)를 헤아려 전(錢)을 내게 하여 이를 경외(京外)에 아울러 시행한다면 혼란스러워 시행하기 어려운 데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전황(錢荒)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저폐(楮幣)와 포폐(布幣)를 부활시켜서는 안 되고 오직 동전(銅錢)을 더 주조해야 할 뿐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얼마 뒤에 부제학(副提學)을 배수하였고, 판결사(判決事)ㆍ대사성(大司成)ㆍ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이듬해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뽑혔는데, 큰 흉년이 들자 녹봉을 덜어 온전히 살린 사람들이 수천 명이었고, 양전(量田)을 다시 하여 경계(經界)를 바루되 관아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개성의 백성들이 철비(鐵碑)를 세워 은혜를 칭송하였다. 임기를 채우고 체차되었고, 이듬해인 신해년(1731, 영조7)에 장릉(張陵)으로 자리를 옮겨 공사를 감독한 공로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이듬해에 다시 부제학이 되었다. 또 그 이듬해에 천거되어 함경 감사(咸鏡監司)에 제수되었는데, 가장 먼저 전삼(田蔘)의 폐단을 바로잡자 백성들이 그 덕분에 편안해졌다. 함흥(咸興)에 있는 만세교(萬世橋)는 10리에 걸쳐 있는데 해마다 백성들을 동원하여 수리하니, 온 고을이 고통받았다. 공이 관전(官錢)을 내어 취한 이자로 품팔이를 고용하고, 민전(緡錢) 만 꿰미 남짓을 남겨 민고(民庫)에 저축하여 부족한 데 대비하였다. 이듬해에 직무로 인하여 파직되었고, 이윽고 서용되어 대사간, 대사헌, 도승지, 한성부 좌ㆍ우윤, 호조ㆍ예조ㆍ병조ㆍ형조ㆍ공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한 번은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으로서 연석(筵席)에 올랐을 때, 경장(更張)의 논의가 있어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진언(進言)하는데 공은 조용히 있었다. 상께서 돌아보며 “경(卿)은 어째서 혼자 말이 없는가?”라고 물으시자 “옛말에 ‘옛것을 바꾸지 말고 새것을 만들지 말라.’ 하였습니다. 신은 그저 옛것을 따라 허물이 없게 할 줄 알 뿐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상께서 매우 옳다고 여기셨다. 정사년(1737, 영조13)에 이조 참판을 배수하였다. 여름에 천거되어 평안 감사(平安監司)를 배수하였다. 이때 북사(北使 청(淸)나라 사신)가 곧 온다는 것을 듣고 배도(倍道)로 급하게 달려갔고 응접에는 조리가 있었다. 공사(公私)의 재물을 절약하여 백금(白金) 4만 냥(兩)을 따로 비축하여 천류고(泉流庫)에 보관하였고, 또 수천 금(金)을 내어 평안도 전체의 혼기(婚期)가 지난 이들을 혼인할 수 있도록 도왔다. 겨우 9개월 만에 파직되어 돌아왔고, 서용되어 부제학, 대사헌, 도승지, 여러 조(曹)의 참판을 배수하였고 비변사 당상,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ㆍ의금부사(義禁府事)ㆍ춘추관사(春秋館事)ㆍ성균관사(成均館事), 승문원(承文院)ㆍ사직서(社稷署)ㆍ상의원(尙衣院)ㆍ관상감(觀象監)ㆍ내섬시(內贍寺)ㆍ전설사 제조(典設司提調)를 겸임하였다.
공은 평소 영달(榮達)에 욕심이 없었고, 지위가 높아지고 이름이 나게 되자 더욱 행동거지를 다잡을 것을 생각하여 선량하지 않게 보일까 하는 근심에 억지로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였다. 평안 감사에서 해직되면서부터 양주(楊州)의 백석리(白石里)에 작은 집을 짓고 못을 파고 꽃을 심음으로써 늘그막을 보내며 제배(除拜)가 내려질 때마다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갑자년(1744, 영조20)에 공의 나이가 일흔이었는데, 아들 재덕(載德)의 벼슬이 시종신(侍從臣)이었으므로 추은(推恩)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었으며,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배수하고 공조 판서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해에 영묘(英廟)께서 숙묘(肅廟)의 고사를 따라 기로소에 오르고 기신(耆臣)들을 가자(加資)하시자 품계가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올랐다. 상이 기로소에 납시었을 때 공이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노좌(路左)에 엎드려 있었는데, 상께서 특별히 명하여 부축하여 들어오게 하시고 어제가시(御製歌詩)를 반시(頒示)하시자 공과 기신들에게 화답해 올렸다. 병인년(1746, 영조22)에 인원대비(仁元大妃)의 보령(寶齡)이 예순이 되자 또다시 추은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르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배수하였다. 기사년(1749)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배수하였고 5월 9일에 정침(正寢)에서 졸(卒)하니, 전례대로 부의(賻儀)가 내려져 장례를 치렀다.
공은 자애롭고 어질며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니, 일찍 부모님을 여읜 것을 평생토록 애통해하였고, 고령으로 도성 밖에 사는 계부(季父) 후계공(后溪公)을 아버지처럼 모시며 매번 맛있는 음식이 생길 때마다 반드시 먼저 드리고 철마다 의복을 지어서 드렸다. 제사에 더욱 정성을 들여, 늙은 뒤로 혹 병이 나 제삿일을 보지 못하면 옷깃을 여미고 몸을 일으켜 앉아 있으면서 철상(撤床)을 알리길 기다렸다. 세 아우를 가르치고 길러 모두 장성하고 자립하게 하였다. 남의 어려움을 돕는 일을 급선무로 여긴 것은 참된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처음 벼슬길에 나갔을 때가 신축(1721, 경종1)ㆍ임인년(1722) 즈음이어서 당시의 나랏일이 몹시 어려웠는데, 흉당(凶黨)을 거절하고 문을 닫은 채 스스로 지조를 지켜나갔다. 갑진년(1724, 영조 즉위년) 이후로 조정의 절반이 급급하게 시의(時宜)와 타협하였는데, 공은 그저 마음을 다해 임금을 섬길 줄만 알 뿐 염량(炎涼)과 득실(得失)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군흉(群凶)이 위세를 떨치던 때에는 미온적이라 하여 배척당했고, 친척들이 지위가 높아지고 세력에 성대해진 때에는 도리어 준엄하다 하여 의심받았다. 이는 이른바 세상 사람들에게는 떳떳함이 없고 서공(徐公)에게는 떳떳함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눈을 흘기며 노려보는 곳에 들어가지 않고 언의(言議)의 주도권을 잡지 않으며, 오직 출세를 경계하고 물러날 뜻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선 50년 동안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치고 높은 자리에 오르면서도 훌륭한 명성과 굳은 지조는 시종일관 흠결이 없었다.
서북 지역의 큰 번진(藩鎭)을 역임했음에도 돌아올 때의 행장(行裝)은 단출하였다. 그래서 공의 뒤를 이어 관서 지방을 맡는 자가 평소 사이가 안 좋을지라도 모두 “말 한 마리로 대동문(大同門)을 나간 이는 조 아무개 한 사람뿐이다.”라고 하였다. 한 번은 “나는 청렴하고 결백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관아의 물건을 그 지방 사람들에게 주면 아깝지가 않으나 사사롭게 친한 이에게 주면 마음에 불안하다. 그래서 함부로 쓸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집에 거처할 때에는 시중드는 첩을 두지 않았고, 소병(素屛)과 지장(紙帳) 사이에 종일토록 편안히 앉아 있었다. 늘그막에 눈병이 생겨 거의 자손들을 구분하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칠정(七情)에 휘둘리지 않고 정신이 내면에 왕성하여 끝내 장수를 누릴 수 있었으니, 생기 있는 얼굴과 하얀 눈썹을 보는 이들은 노선(老仙)이라고 하였다. 병이 한창 위독해지자 풍원공(豐原公)을 보고자 하여 사람을 보내 재촉하게 하였다. 풍원공이 이르자 충성을 다해 임금에게 보답할 것을 면려하고, 사사로운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풍원공이 나와서 울며 “형님의 마음이 나라에 충성스러운 것은 평소부터 알고 있었거니와, 죽음을 앞두고 하는 말이 과연 그러하도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자신의 명(銘)을 짓기를 “성품이 본래 지나치게 인정이 많아 가혹하고 엄격함을 숭상하지 않았으나 어질고 너그럽지는 못하였고, 어렸을 적 병이 잦아 성색(聲色)을 멀리하였으나 수양하고 삼가지는 못하였다. 환해(宦海)를 대략 겪으며 너울을 돕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탁류(濁流)를 몰아내고 청파(淸波)를 일으키지는 못하였고, 지방으로 나가 번진에 임하여 간이(簡易)하게 거처할 뿐이었으나 청렴결백하진 못하였다. 문을 닫은 채 무능한 몸을 기르면서 교유를 즐기지 않았으나 고상하지는 못하였고, 병을 칭탁하여 시골에 돌아와 벼슬살이를 즐기지 않았으나 무욕하게 물러나지는 못하였다. 내가 나의 법을 지키며 시속(時俗)의 기호(嗜好)를 좇지 않았으나 정확(貞確)하지는 못하였고, 만나는 상황에 따라 편안히 여기며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으나 몸을 거두어 은거하지는 못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이 스스로를 서술한 것으로 그 평생을 개괄할 수 있다.
부인 심씨(沈氏)는 청송(靑松)의 대성(大姓)으로 통덕랑(通德郞) 충(冲)의 딸이다. 두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재덕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이고, 재후(載厚)는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이다. 네 딸을 두었는데 판서 이춘제(李春躋), 도정(都正) 윤득운(尹得運), 현령 최수신(崔守身), 영의정 윤동도(尹東度)에게 시집갔다. 교리(校理 윤재덕)의 아들 정진(鼎鎭)은 호조 판서이고, 문학(文學 윤재후)의 계자(繼子)는 이진(彝鎭)이다. 이춘제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참판 창유(昌儒), 창좌(昌佐), 승지 창급(昌伋), 대사간 창임(昌任), 창륜(昌倫)이다. 윤득운은 후사가 없다. 최수신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좌종사(左從史) 홍간(弘簡), 현감 홍정(弘靖)이다. 윤동도의 계자(繼子) 광유(光裕)는 목사(牧使)이다. 정진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현감 운경(雲絅),운회(雲繪), 운계(雲繼), 운서(雲緖), 운소(雲紹)이고, 외동딸은 응교 정동관(鄭東觀)에게 시집갔다. 이진의 외아들은 운규(雲圭)이다. 내외의 손자와 증손들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나 양호(良浩)는 뒤늦게 태어나 공의 후진(後塵)을 밟아보지 못하고 의용(儀容)을 멀리서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적이 사대부들의 논의를 들어보면 모두 한결같이 근세의 맑고 삼가며 담박하고 지조 있는 공경(公卿)으로 공을 추앙하며 이견이 없다. 그리고 공의 계자(季子 막내아들)인 문학과 손자인 판서와 노닐며 집에 있을 때의 독실하고 근엄한 행실과 조정에 섰을 때의 공평한 지론(持論)을 더욱 잘 알 수 있어서 아직도 그 유풍과 여운을 볼 수 있었으니, 탄식하고 흠모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금 운경이 공의 사적(事跡)을 갖추고 와서 시장(諡狀)을 청하기에, 삼가 특출하고 밝게 드러난 것을 취하여 차례 지음으로써 태상씨(太常氏)의 채택에 대비한다.
[주-D001] 판돈녕부사 조공 시장(諡狀) : 조원명(趙遠命, 1675~1749)에 대한 시장이다.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치경(致卿),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702년(숙종28) 사마시와 1710년 증광 문과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갔고, 용강 현령(龍岡縣令)ㆍ부수찬(副修撰)ㆍ사간(司諫)ㆍ이조 참의(吏曹參議)ㆍ대사성(大司成)ㆍ이조 참판ㆍ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ㆍ공조 판서ㆍ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였다. 《정조실록(正祖實錄)》의 조원명에게 사시(賜諡)하였다는 기사를 볼 때 1796년 즈음에 저술된 것으로 생각된다. 《正祖實錄 20年 10月 16日》[주-D002] 혼미(昏迷)한 조정 : 광해조(光海朝)를 가리킨다.[주-D003] 동강공(東岡公) : 조상우(趙相愚, 1640~1718)로, 본관은 풍양, 자는 자직(子直), 호는 동강,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서예에 능하여 필적으로 〈충현서원사적비(忠賢書院事蹟碑)〉가 남아 있다.[주-D004] 풍릉공(豐陵公) : 조문명(趙文命, 1680~1732)으로, 본관은 풍양, 자는 숙장(叔章), 호는 학암(鶴巖), 봉호는 풍릉부원군(豐陵府院君),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문집으로 《학암집(鶴巖集)》이 전한다.[주-D005] 홍문록(弘文錄) : 조선 시대 홍문관 관원을 선발할 때 먼저 7품 이하의 홍문관 관원들이 후보자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올리면 부제학(副提學) 이하가 모여 적합한 사람의 이름에 권점(圈點)을 찍어 후보자를 추렸는데, 이를 홍문록(弘文錄), 본관록(本館錄) 등으로 불렀다. 그 후에 이조(吏曹)를 거쳐 의정부(議政府)에서 본관록에 오록(誤錄)과 유락(遺落) 등이 없는지를 살펴 정부록(政府錄)을 작성하였다. 정부록은 도당록(都堂錄)이라고도 하며, 여기에 임금이 비점(批點)을 찍음으로써 홍문록이 확정되었다.[주-D006] 어떤 …… 삭제하였다 : 조원명은 본래 1716년 4월 27일에 홍문록에 선발되었고 이해 6월 22일에 도당록에 선발되었는데, 이때 같이 도당록에 선발되었던 조관빈(趙觀彬)이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된 후 대제학(大提學)이 도당록의 회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사직하였다. 숙종은 결국 권점을 다시 행할 것을 명하였고, 이해 11월 21일에 다시 발표된 홍문록에서 조원명은 제외되었다. 《숙종보궐정오실록(肅宗補闕正誤實錄)》에는, 조관빈이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이들이 많이 선발되자 관례적으로 대제학 없이 도당록을 행해왔음에도 이를 구실 삼아 상소하였다고 하였다. 《肅宗實錄 42年 4月 27日, 6月 22日, 10月 1日ㆍ7日, 11月 21日》 《肅宗補闕正誤實錄 42年 11月 21日》[주-D007] 형제가 …… 사직하고 : 이 시기에 아우인 조익명(趙翼命)도 세자시강원에서 겸사서(兼司書)ㆍ겸문학(兼文學)으로 재직하였다.[주-D008] 번개가 …… 채납하셨다 : 1724년(영조 즉위년) 11월 2일에 우레가 치자, 승정원에서 영조에게 궁위의 오래된 공물의 명색을 줄여 검약의 미덕을 밝힐 것, 신하들을 예우할 것, 형옥(刑獄)을 신속히 잘 처리할 것, 양역청(良役廳)을 설치하여 신역(身役)을 개혁할 것 등 8조(條) 3목(目)의 경계를 진달하였다. 《英祖實錄 卽位年 11月 2日》[주-D009] 김일경(金一鏡) : 1662~1724.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인감(人鑑), 호는 아계(丫溪)이다. 동부승지ㆍ대사헌(大司憲)ㆍ형조 판서를 지냈고, 경종 연간에 영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저지하고 노론 사대신(老論四大臣)의 유배와 사사를 추진하는 데에 앞장섰다.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이 집권하자 유배되었다가 국문을 받고 참수되었다. 문집으로 《아계집(丫溪集)》이 있다.[주-D010] 목호룡(睦虎龍) : 1684~1724.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남인 서얼 출신의 지관(地官)이다. 김일경의 사주를 받고 자신과 노론 일당이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고 거짓으로 고변(告變)함으로써 신임옥사(辛壬獄事)의 원인을 제공했고, 고변의 공로로 동성군(東城君)에 봉해지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영조가 즉위한 뒤 김일경과 함께 국문을 받고 참수되었다.[주-D011] 그 …… 하였는데 : 이명의(李明誼, 1670~1728)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의백(宜伯)이다. 경종 때 수찬(修撰)ㆍ교리(校理)ㆍ이조 정랑(吏曹正郎)ㆍ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냈다. 영조 즉위 후 노론이 집권하자 유배되었고, 뒤에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 사망하였다. 이명의는 1724년 11월 9일에 승지 이중술(李重述)과 함께 김일경을 비호하며 삭출(削黜)을 취소해달라는 청을 올렸다. 《英祖實錄 卽位年 11月 9日》[주-D012] 동당(同堂)의 …… 체차되었다 : 조원명의 전임자는 그의 6촌 동생인 조문명(趙文命)이었다.[주-D013] 전삼(田蔘)의 폐단 : 대동법(大同法) 실시 이후 공물(貢物)을 대동미(大同米)로 대신 납부하게 되자 공물로 인삼(人蔘)이 책정되어 있는 고을 역시 인삼 대신 대동미를 납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삼의 값이 크게 올라 고을에서 마련할 수가 없게 되자 백성들의 전결에 추가로 세금을 부과하여 모자란 액수를 채우게 되었다. 《日省錄 正祖 7年 11月 11日》[주-D014] 천류고(泉流庫) : 1623년(인조1) 평양에 설치한 창고로,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 사신에게 지급할 물자를 저장하였다.[주-D015] 영묘(英廟)께서 …… 오르고 : 1744년(영조20) 7월 29일에 여은군(礪恩君) 이매(李梅)가 영조에게 상소하여 기로소에 들 것을 청하였는데, 이날 영조는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기로소에 들고 싶다는 뜻을 보였다. 이를 두고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는데, 영조는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삼정승의 숙종조(肅宗朝)의 고사에 따라 기로소에 들라는 청은 사양하면서도 결국 많은 신하들의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이해 9월 9일에 기로소에 행차하여 영수각의 어첩(御帖)에 ‘지행순덕영모의열왕(至行純德英謨毅烈王)’이라고 적음으로써 51세의 나이로 기로소에 들었다. 《英祖實錄 20年 7月 29日, 8月 11日ㆍ16日ㆍ29日, 9月 9日》[주-D016] 후계공(后溪公) : 조유수(趙裕壽, 1663~1741)로, 본관은 풍양, 자는 의중(毅仲), 호는 후계이다. 희릉 참봉(禧陵參奉)ㆍ회양 부사(淮陽府使)ㆍ장악원 정ㆍ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등을 역임하였다. 이계가 지은 그의 묘갈명인 〈후계조공묘갈명(后溪趙公墓碣銘)〉이 본집 권30에 수록되어 있다.[주-D017] 이른바 …… 것이다 : 세태의 변화에도 지조를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서공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서막(徐邈)이다. 청렴한 사람인 모개(毛玠)와 최염(崔琰)이 위나라에서 권력을 잡자 선비들이 다 거마(車馬)를 검소한 것으로 바꾸어 청렴하다는 명성을 얻으려 하였고, 사치한 풍조가 일자 선비들이 또 다투어 그쪽으로 쏠려 갔지만 서막만은 늘 한결같이 지조를 지켰다. 이를 본 노흠(盧欽)이 “이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떳떳함이 없고 서공에게는 떳떳함이 있는 것이다.[是世人之無常而徐公之有常也]”라고 하였다고 한다. 《三國志 卷27 魏書 徐邈傳》[주-D018] 소병(素屛)과 지장(紙帳) : 소병은 그림이나 글씨 없이 흰 종이나 비단만을 발라서 꾸민 병풍이다. 지장은 등나무 껍질ㆍ닥종이 등으로 만든 방장(房帳)이다.[주-D019] 풍원공(豐原公) : 조원명의 6촌 아우인 조현명(趙顯命, 1690~1752)으로, 본관은 풍양,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ㆍ녹옹(鹿翁), 봉호는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문집으로 《귀록집(歸鹿集)》이 전한다.[주-D020] 너울을 돕는 데 : 원문은 ‘조란(助瀾)’으로 ‘양파조란(揚波助瀾)’의 준말이다. 작은 물결을 일으켜 너울을 돕는다는 뜻으로, 쓸데없는 사달을 일으켜서 큰 변고를 조장함을 이르는 말이다.[주-D021] 탁류(濁流)를 …… 일으키지는 : 원문은 ‘격양(激揚)’으로 ‘격탁양청(激濯揚淸)’의 준말이다. 탁류를 몰아내고 청류를 일으킨다는 뜻으로, 악(惡)을 몰아내고 선(善)을 선양함을 이르는 말이다.[주-D022] 태상씨(太常氏) : 중국 예부(禮部)의 관원으로 시호를 내리는 일을 담당하였다. 조선의 봉상시 정(奉常寺正)이 이에 해당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