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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휘는 준룡(俊龍), 자는 수부(秀夫), 성은 김씨로 본디 신라 왕의 후예이다. 고려 때에 이부 상서(吏部尙書) 거공(巨公)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원주(原州)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하고 원성백(原城伯)에 봉함으로써, 자손이 드디어 원주 사람이 되었는데, 원주 김씨는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며 대대로 현달(顯達)한 사람이 많았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원도공(元度公) 김해(金晐)라는 분이 있었고 그 5대 손에 절도사(節度使) 김말손(金末孫)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는 절도사 박영(朴英)과 명망(名望)이 같았던 벗이었다. 당시에 대성(臺省)에 발탁하여 쓰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기묘년에 많은 사람이 몰락함으로써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의 휘는 안우(安祐)인데 젊어서 명예가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남으로써 성취하지 못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조부의 휘는 영(瑛)인데 전설사 별좌(典設司別坐)로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의 휘는 두남(斗南)인데 선조(宣祖) 때의 명인(名人)으로서 남보다 뛰어난 치행(治行)이 있어 귀하게 되고, 89세에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어머니 정부인(貞夫人)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담양 도호부사(潭陽都護府使) 휘 희필(希弼)의 딸이다.
공은 헌칠한 외모에 어려서 장난칠 때부터 벌써 보통 아이와는 같지 않았으므로, 보는 이마다 거는 기대가 컸다. 만력(萬曆 명 신종(神宗)의 연호) 36년, 아조(我朝) 선조 41년(1608)에 공이 23세에 무과(武科)로 출세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또 관무재(觀武才)에 장원하여 훈련원 주부에 올랐다. 법성 수군만호(法聖水軍萬戶)를 거쳐, 28세에 마량 첨절제사(馬梁僉節制使)가 되어서는 재능(才能)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인동 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가 된 지 2년 만에 영천군수 겸 조방장(榮川郡守兼助防將)이 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이 폐위되고 사방에 기강이 없어지자 상(上 인조를 말함)이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각 군현의 불법을 살피게 하였는데, 공은 특별한 치적(治績)으로 표리(表裏 안팎 옷감)를 하사받았고, 그 다음해에 북도 병마우후(北道兵馬虞候)로 전직하였다가, 그해 겨울에 다시 회령 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로 옮겼는데, 또 치적이 많아서 상으로 표리를 하사받았다. 인동, 회령에 모두 정청비(政淸碑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가 있는데, 백성이 추모해 마지않았다.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8년, 우리 인조 6년(1628)에 공이 43세로 서해 절도사(西海節度使)가 되었다가 곧 교체되고, 겨울에 중화 도호부사(中和都護府使)가 되어 1년, 영남 절도사(嶺南節度使)가 되어 3년 만에 절충장군이 되었는데, 발탁되어 북도 절도사(北道節度使)에 제배(除拜)되었다.
공이 북관(北關 함경도를 일컬음)을 출입한 지 전후 10년에 그의 위명(威名)이 이미 널리 알려져서 군리사(軍吏士)가 크게 기뻐하였다. 3년 만에 정부인(貞夫人)이 돌아가니, 공은 50세가 넘었지만 여묘살이 3년 동안에 지나친 슬픔으로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상(喪)을 마친 뒤에는 기보우방어사(畿輔右防禦使)가 되었다가, 곧 호남 절도사(湖南節度使)로 전직하였다. 그해 겨울에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대거 침공하였는데, 우리 국경에 들어온 지 3일 만에 선발대가 이미 서울을 육박하자 상이 급히 궁궐을 떠나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다. 이어 적의 대병(大兵)이 이르러 남한산성이 포위당하고, 오랑캐의 위세가 더욱 강성해지자 군사 모집이 하루가 급했다. 공은 즉시 자기의 군영하에 친히 거느리던 군사를 동원하고, 각 군현에 있는 병사를 두루 모아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구하였다. 척후병을 멀리 내보내고 대오(隊伍)를 정돈하여 규율 있게 행동하니, 오랑캐의 유격병((遊擊兵)이 사방에 있었으나 관망만 할 뿐 감히 접근을 하지 못하였다. 직산(稷山)에 이르렀을 때에 죽산(竹山)에 있는 호서(湖西)의 군사를 오랑캐가 맹렬히 공격하므로, 체찰종사(體察從事) 박서(朴遾)는 죽산을 우선 구출하려고 하였지만, 공은 ‘임금을 모시는 일이 시급하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왕명을 받고 13일 만에 용인(龍仁) 광교산(光敎山 지금의 수원시(水原市) 광교동의 뒷산)에 이르러 험한 곳에 의지하여 진을 쳤으나, 임금을 모시던 모든 군사가 패전한 뒤였고, 호남 군사만이 남한산성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 기세를 몰아 날랜 병사를 내어 오랑캐의 유기(遊騎)를 격파하고 수많은 적의 목을 베니, 오랑캐가 이를 우려하여 몽고의 공유덕(孔有德), 경중명(耿仲明)의 군사 수만을 모아, 안개 낀 새벽을 틈타 일격에 격파하려 하였는데, 그 형세가 풍우(風雨)와 같았다. 그러나 공은 칼을 짚고 화살이 쏟아지는 곳에 서 죽을 각오로 싸울 태세를 보이니, 모든 군사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오랑캐도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며 종일토록 온 힘을 다해 싸우다가 날랜 말을 타고 몰래 뒷재를 넘어 먼저 상봉(上峯)을 점거하였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 공이 급히 용사(勇士) 수백 명을 선발하여 앞을 다투어 올라가면서 말하기를,
“지금이 바로 충신이 보국(報國)할 때이다.”
하니, 전투에 임했던 군사가 모두 한 사람이 1백 명을 당해 냈다. 오랑캐 중에 갑옷을 입고 기(旗)를 들고 있던 자가 말을 봉우리 위에 세운 채 큰 깃발을 들고 무리를 호령하자 무리가 모두 집합하는 것을 본 공은, 그자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놈을 죽이지 않으면 적이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더욱 힘써 전투를 독려하면서 모든 포(砲)를 일시에 발사하니, 기를 들고 무리를 호령하던 자와 좌우에 서 있던 추장(酋長) 중에 탄환(彈丸)에 맞아 죽은 자가 여러 사람이었고, 죽어 넘어진 오랑캐의 수는 헤아릴 수 없도록 많았지만, 전사한 아군은 겨우 수십 명뿐이었다. 크게 패한 오랑캐는 산에서 내려오면서 곳곳에 쌓인 시체를 불태우느라 적진은 온통 울음바다였으며 밤은 2경에 가까웠다. 이에 공이 군중을 검열하니 포탄과 군량은 벌써 다 떨어져 날이 밝으면 반드시 몰려올 수많은 오랑캐를 감당할 수 없을 듯했다. 그래서 진지를 이동하여 사병을 휴식케 하려고 곧 횃불을 벌여 놓아 의병(疑兵)을 만들고서 밤에 몰래 행군했다. 아침이 되어 과연 오랑캐가 몰려왔는데 보루(堡壘)가 비었는데도 복병이 겁나서 감히 추격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오랑캐가 패망할 때에 죽은 장수 백양고라(白羊高羅)는 오랑캐에서도 귀한 장수로서 전투를 잘하여 공로가 많아서, 선칸(先汗)이 사위로 삼아 중히 여겼던 자이다.
이때에 우리 군사가 밤에 행군하던 도중 놀라 군중이 소란해지면서 큰 소리로 외치기를,
“주장(主將)을 위해 힘껏 싸워 승리했는데, 창졸간의 변란으로 부질없이 죽는 것은 무익하다.”
하고, 모두 흩어졌다. 공이 휘하의 기사(騎士) 수백 명과 더불어 수원(水原)에 이르렀으나 군사가 없는 것이 걱정되어, 남쪽으로 내려가 다시 군사를 모아 계책을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감사(監司) 이시방(李時昉)이 오랑캐가 두려워서 전란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내심 부끄러워하고, 또 절도사(節度使 공을 가리킴)의 공을 시기하여 이간하는 말로 계문(啓聞)하였고, 종사 박서(朴遾)도 마음속으로 자기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노여워했던 터라 상(上)에게 헐뜯는 말을 하였다. 공이 죄를 받게 되자 대신(大臣) 이성구(李聖求), 최명길(崔鳴吉)이 승전한 상황을 극론하면서 아뢰기를,
“공(功)은 많지만 실로 죄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 때문에 이시방이 귀양 가고, 공은 벗어났다. 공은 일이 평정된 뒤에도 늘 어영청 중군으로 있었으나, 수년 동안 병으로 인하여 나가지 못하고 자택에 있었는데, 위문 오는 손마다 그가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였다. 그런데 이명(李溟) 공은 본디 좋은 사이라 자기 아들에게 사사로이 이르기를,
“그가 어찌 중국(中國 명(明) 나라) 공격하는 것을 도울 사람인가, 그가 병든 것은 사실이다.”
하였다. 이때에 임경업(林慶業), 유림(柳琳)은 모두 내몰려 가도(椵島)와 금주(錦州)의 전투에 나아가게 되었다.
숭정(崇禎) 12년, 우리 인조(仁祖) 18년(1640)에 김해 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가 된 지 1년 만에 영남 절도사(嶺南節度使)로 재임하였으나, 군중(軍中)의 일은 먼저 있었을 때의 약속을 다짐할 뿐이었다. 다음해에 심한 병환으로 소(疏)를 올려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고, 병든 몸으로 수레를 타고 10여 리를 달려오다가 관차(館次)에서 객사하니, 그의 나이 57세였다. 이때 남방(南方)에 큰 별이 떨어졌는데, 의정(議政) 김류(金瑬), 원두표(元斗杓)가 묘당(廟堂)에 있다가 부음(訃音)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천명(天命)이구나. 남방에 큰 별이 떨어지더니, 과연 한 훌륭한 장군을 잃었도다.”
하였다. 상(上)이 특별히 명하여 오는 길가의 고을로 하여금 상여(喪輿)를 호송하도록 하고, 유사(有司)에게는 의례(儀禮)에 의하여 부의(賻儀)를 보내게 하였으며, 제문(祭文)을 내려 그의 공로를 칭찬하기를, ‘장성(長城)과 같이 의지해 왔노라. ……’ 하였다. 공은 만력 14년(1586, 선조19) 12월 23일에 탄생하여 숭정 15년(1642, 인조20) 11월 5일 세상을 떠났는데, 그해 12월 12일 양천현(陽川縣) 남산(南山) 종산(宗山)에 안장하였다.
공은 침착하고 굳센 데다가 대략(大略)이 많았고 또 겸손하고 공순한 마음으로 군사를 사랑했으므로,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사람을 얻을 수 있었다. 이천석(二千石 절도사(節度使)를 가리킴)에서부터 잇달아 원수가 되기까지 어군(禦軍)이 수십 년이었는데, 약속을 엄수하여 상벌을 공정하게 하고, 법을 신중히 적용했고 권세 있는 이에게 아첨하지 않고 개인의 의사를 따르지 않았다. 관청을 자택처럼 여겼던 것은 돌아가도 거처할 만한 집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며, 거처하고 입고 먹는 것은 소박하기가 열사(列士)로 있을 때와 같았다. 세상을 떠나고서야 집으로 돌아갔으나 가난하여 모든 상사(喪事)를 남의 힘에 의해 준비하게 되니, 그를 어질다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광교산(光敎山)에서의 대첩(大捷)을 많은 사람이 칭찬하였지만 공은 말하기를,
“임금이 치욕을 당한 그때에 군사를 거느린 신하로서 산성(山城) 아래에서 죽지 못한 것이 죄인데, 오히려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하였으니, 그 마음에는, 불행히 변란을 당하여 임금이 항복하는 마당에, 신하로서 몸을 희생했어야만 부끄러움이 없었을 것이니, 오랑캐를 격파한 것은 자랑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비록 임무 맡기를 사양하지 않았으나 개연히 공업(功業)을 자처하지 않고 죽음으로 선도(善道)를 지키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으니, 이야말로 충신의 의리이다. 공은 평생 집에서는 효도로 어버이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겼고 남과 사귐에 신의가 있었다. 이는 선대부(先大夫)가 올바른 행실로 얻은 이름을 공이 이와 같이 잘 지켜서 잃지 않았던 것이니, 대체로 그의 어짊은 유래가 있다고 하겠다.
부인 임씨(林氏)의 관향은 순창(淳昌)으로, 군자감 주부 휘 계(繼)의 딸이다. 전현(前賢)의 언행을 많이 알아서 조금도 잘못이 없게 할 것으로 자신을 계칙하여 문에 포저(苞苴)나 여알(女謁)이 없었으니, 모두 부인이 어질기 때문이었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16년이 되던 해, 효종(孝宗) 9년(1658) 12월 18일에 부인이 76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다음해 2월 27일 남산에 부장(祔葬)하였다.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경문(金敬文), 김한문(金漢文), 김인문(金仁文), 김현문(金炫文)이요, 사위는 정상(鄭相)이다. 김경문은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을 지냈는데, 나이 80세에 수작(壽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서임되었으며,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춘장(金春章), 김진원(金振遠), 김형원(金亨遠)이요, 사위는 참봉(參奉) 이온(李蕰)이다. 김진원은 김몽협(金夢協)을 낳고, 김형원은 딸만 둘을 두었는데, 사위는 신필경(申弼卿), 이익휴(李益休)이다. 김한문은 해서 절도사(海西節度使)를 지냈고, 의금부 도사 김석(金碩)을 낳았으며, 딸 둘을 두었는데, 사위는 이진성(李震晟), 윤수손(尹首孫)이다. 김석은 김몽상(金夢商), 김몽량(金夢良)을 낳았는데, 김몽상은 생원(生員), 김몽량은 훈련원 정(訓鍊院正)이며, 사위는 안후선(安后宣), 엄집(嚴䌖) 둘이 있는데, 엄집은 진사(進士)이다. 김인문은 사복시 판관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아들 김덕원(金德遠)은 형조 판서이고, 이분이 낳은 아들 김몽양(金夢陽)은 사간원 정언이며, 딸이 둘 있는데, 사위는 유헌장(柳憲章), 한종범(韓宗範)이다. 유헌장은 진사(進士)이다. 김현문은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아들 김홍원(金弘遠)과 사위 윤해(尹楷)가 모두 진사이며, 김홍원의 아들은 김몽서(金夢瑞)이고, 사위는 성임(成任)이다. 정상은 통덕랑(通德郞)으로 정중희(鄭重煕), 정중윤(鄭重胤)을 낳았는데 다 진사이고, 사위는 정규제(鄭奎齊)이며, 이진성의 1남, 윤수손의 2남, 김홍원의 1남 1녀, 또 정중희의 2남, 정중윤의 1남 1녀는 모두 장성하지 않았고, 서출(庶出)의 자녀가 6인인데, 아들은 김내문(金乃文), 김전문(金全文), 김회문(金會文)이고, 딸은 군수(郡守) 박정상(朴廷翔), 감사(監司) 원만석(元萬石), 감목(監牧) 이익상(李益常)의 첩이다. 내외 적서 자손으로 증손(曾孫), 현손(玄孫)에 이르기까지 장성하지 않은 자를 합하면 1백여 명이 된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용맹있는 신하는 / 矯矯虎臣
공후의 간성이라네 / 公侯干城
쌓은 그 충의가 / 忠義之積
만인의 선망이 되니 / 萬夫之望
그 이름 백대에 전하리 / 百代之名
[주-D001] 기묘년에 …… 몰락함으로써 : 중종 14년(1519)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파의 무고로,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던 조광조(趙光祖), 김식(金湜) 등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이 사사(賜死)되었다.[주-D002] 관무재(觀武才) : 특별한 어명이 있을 때에 행하는 무과 시험이다. 초시와 복시 두 가지가 있는데, 초시는 2품 이상의 문무관 2명, 복시는 2품 이상의 문관 1명과 무관 2명을 보내어 시험 보였으며, 복시에는 반드시 임금이 친림하였다. 여기에 합격되면 즉시 각 지방의 수령이나 변장(邊將)에 임명하거나 그 품계를 높여 주었다. 《經國大典 兵典 觀武才》[주-D003] 공유덕(孔有德), 경중명(耿仲明) : 이 두 사람은 명(明) 나라를 배반하고 청(淸) 나라에 항복한 장수다. 《仁祖實錄 15年 2月》[주-D004] 선칸(先汗) : 칸(汗)은 청국에서 군장(君長)을 존칭하는 말이며, 여기에서 선칸이라 한 것은 누르하치[奴兒哈赤]를 말한다.[주-D005] 포저(苞苴)나 여알(女謁) : 포저는 뇌물 꾸러미를 말하고, 여알은 여자의 청탁을 말한다. “7년 가뭄에 탕 임금이 사람을 시켜 빌기를, ‘포저가 행해서인가, 여알이 성해서인가?’” 하였다. 《說苑 君道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