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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군의 휘(諱)는 주원(胄源), 자(字)는 원보(元甫), 성은 정씨(鄭氏),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여말(麗末)에 어사(御史) 휘 택(澤)이 상주목(尙州牧)의 일을 맡았을 때 자신의 한 아들을 머무르게 하면서 상주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후로 관직은 비록 빛나지 않았지만 대대로 유자(儒者)의 소양으로 계승하였으니, 사람들이 이들을 미소(眉蘇)와 서채(西蔡)에 비견하였다.
부군의 고조(高祖) 휘 경세(經世)는 관직이 천관경(天官卿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이상(貳相 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경세는 도덕과 문장이 퇴계(退溪)의 재전(再傳) 가운데 적통(嫡統)이 되었으니, 세상에서 우복(愚伏) 선생이라 일컫는다. 증조(曾祖) 휘 심(杺)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지냈다. 조부 휘 도응(道應)은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자의(咨議)를 지냈고 대망(臺望)을 거쳤다. 부친 휘 석교(錫僑) 또한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바로 육품직(六品職)에 제수되었고 현감(縣監)으로 생을 마쳤다. 비(妣)는 공인(恭人)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니, 문희공(文僖公) 개(槩)의 후손이며, 정랑(正郞) 상철(尙哲)의 손자 호군(護軍) 증 이조 참판(贈吏曹參判) 형구(衡耉)의 따님이다. 부군은 숭릉(崇陵) 병인년(1686, 숙종12) 4월 8일에 상주 율리(栗里)의 옛집에서 태어났다. 원릉(元陵) 기유년(1729, 영조5)에 인재(人才)로 천거되어 장릉 참봉(章陵參奉)에 배수되었고, 수개월 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병자년(1756, 영조32) 2월 18일에 우산(愚山)의 서실(書室)에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향년 71세이다. 이해 모월 모일에 사계(沙溪) 건좌(乾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군은 어릴 적에 재주가 뛰어나 일찍 성취하였다. 부친 지현공(知縣公)이 병상에 누워 여러 해를 지냈는데, 부군의 나이 겨우 14, 15세에 좌우에서 부축하고 간호하며 잠시도 부친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약물과 음식을 모두 집 안의 시렁 위에 높이 모셔 두고서 손수 봉하고 열어서 제때에 내어 드림에 한 가지도 남에게 맡긴 적이 없었고, 선비(先妣)와 조비(祖妣)를 섬기는 것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그 마음에 순응하여 맞출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부모상에는 송종(送終)의 예에 슬픔을 다하여 모두 유감없이 치렀다.
문장공(文莊公) 이상 여러 대 선영(先塋)에 표석(表石)이 없자 부군이 이를 위해 도모하여 결국 표석을 세웠고, 이어서 제전(祭田)과 재사(齋舍)를 두어 오래도록 제사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선조의 기일(忌日)과 모든 제사 때마다 여러 제수를 반드시 기일 전에 갖추었고, 엄숙하고 공경하게 자리에 임하여 갖추되 풍성하고 정결(精潔)하게 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절하고 꿇어앉고 걷는 등의 동작을 참으로 신(神)이 위에 임한 것같이 하였으며, 자신이 노쇠하다는 이유로 혹시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부군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어 가업을 계승하였고 잇달아 또 상을 당하는 등 초년에 몹시 불우하게 지냈다. 부군은 절약하고 검소하게 지내어 넉넉하고 부유해지는 데에 이르렀다. 먹여 살려야 할 많은 식구들은 겨우 목숨만 이어 나갈 뿐이었지만, 친척과 벗 가운데 가난하여 혼사ㆍ장례를 치르거나 병 치료를 어려워하는 이들을 보면, 반드시 힘을 다해 베풀어 주어 비록 자신의 곳간을 비워 내더라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무신년(1728, 영조4) 변란이 일어났을 때, 서원(西原)에 살다가 뜻밖의 재앙을 입어 본주(本州)에서 형벌받아 죽은 어떤 신씨(申氏)가 있었다.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지만 부군만은 그의 무고함을 애처롭게 여겨 집안의 하인에게 시신을 거두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었으니, 부군의 효심과 화목, 기백과 의리가 보통을 넘어서는 것이 이와 같았다.
부군은 타고난 자품이 강직하고 위엄이 있어 시속을 따라 영합하려 하지 않았다. 재랑(齋郞)으로서 사은(謝恩)하기 위해 도성으로 들어갔을 때, 마침 당시 재상의 소행에 불평스러운 점이 있자 즉시 선비 차림으로 가서 만나 보고는, “공은 어찌하여 그러십니까. 어찌하여 그러십니까.”라고 하였으니, 말이 기휘(忌諱)에 저촉되었지만 거리낌이 없었다.
부군이 장릉 참봉으로 있을 때, 입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 중사(中使)가 명을 받들고 와서 왕릉의 산목(山木)에 대한 죄상을 파헤쳐 적간(摘奸)한 일이 있었으니, 중사는 곧 대전(大殿)의 별감(別監)이었다. 이 일에 앞서, 죄상을 파헤쳐 적간할 때 중사가 견여(肩輿)를 타고 재랑은 걸어서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부군이 성을 내며 “이것은 신분의 귀천(貴賤)이 바뀐 것이다.”라고 하고는, 곧장 자신이 견여를 타고 중사에게 걸어서 따라오게 하자, 중사는 화가 나서 사건을 만들어 내고자 새로 베어 낸 산목을 구실 삼아 회계(回啓)하려 하였다. 그러자 부군은 온 산을 두루 살펴본 뒤 예전에 베어 낸 나무 뿌리 중 땅에 묻혀 있던 것을 다 파내어, 중사가 이제껏 부화뇌동하여 은닉해 둔 실상을 예조(禮曹)에 보고해서 법률에 따라 죄안을 조사하게 하려 했다. 이에 중사가 몹시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아리면서 애걸하자, 부군은 곧 이 사건을 그대로 두었다.
재상 민백상(閔百祥)이 영남 관찰사로 있을 때 검호(檢湖)에 있는 문장공(文莊公)의 묘소에 와서 참배하자, 혹자가 부군에게 “마땅히 나가서 맞이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군은 “나는 그에게 어른이고, 그는 어린아이였을 때 나의 차 심부름을 하던 자였소. 지금 그가 비록 신분이 높아졌다지만 이미 가까운 곳에 이르러서도 유독 나를 찾아와 보질 않는데, 내가 이에 가서 만나 보아야 한단 말이오.”라고 하고는 다만 서제(庶弟)를 보내 인사하게 하였다.
부군은 고을 학당에서 지낼 때에 풍의(風儀)가 정숙(整肅)하고 논의(論議)가 정대(正大)하였다. 견지한 뜻이 확고하여 남들이 어지럽히거나 빼앗을 수 없었으니, 비록 온 세상이 휩쓸려도 부군만은 홀로 우뚝하게 서서 한결같은 뜻을 행할 뿐이었다. 도리에 어긋나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면전에서 말하며 꾸짖었지만, 마땅히 포용해야 할 부분에 있어서는 도량이 크고 넓었기에 자신에게 손해가 될지언정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비록 혹 분별할 만한 것이 있다 해도 끝내 분변하지 않았다.
부군은 타고난 재주가 무리에서 빼어났고 굳센 기상이 남보다 뛰어났다. 일찍이 “나는 부모의 사랑에 의지했던 적이 적었고 장성해서는 다시 변고가 많아 결국 배움의 시기를 놓쳤다. 다만 《대학장구》만은 50번 읽었고 다른 서책은 모두 섭렵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오히려 세속 문자는 모두 지을 것이 못 되는 것처럼 여겼지만 수응(酬應)할 일이 있을 때면 모두 붓을 잡고 바로 써 내려가되 쓰임에 분명하고 실정에 꼭 맞았다. 이따금 예(禮)에 대한 질문에 답할 때에는 또한 고금에 근거하여 절충한 것이 많았다.
부군이 어릴 적 지현공의 상(喪)을 치를 때, 밤중에 홀로 여막(廬幕)에 있으면서 벽에 기대어 잠깐 졸았던 적이 있었다. 때는 마침 여름이라 하늘이 어둑하고 비가 많이 내렸는데, 창이 갑자기 저절로 열리더니 털이 나 있는 손처럼 생긴 어떤 물체가 부군의 얼굴을 거침없이 더듬었다. 부군은 요괴의 짓이라 여기고 즉시 목침으로 쳐서 쫓아낸 뒤 편안하게 잠을 잤다. 평상시에 무당을 통렬하게 끊어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부군은 인륜에 독실하고 의를 좋아하였으며 일을 처리하는 탁월함과 시원스러움 또한 이와 같았거늘, 당시에 때를 만나지 못하여 관직이 겨우 일명(一命)에 그친 채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은 어째서인가. 남야(南野) 박(朴) 아무개가 일찍이 글을 지어 부군을 제사 지냈으니, “혼탁한 풍조 온 세상이 다 이러하거늘, 공은 맑음을 드날리고자 하였네. 어두운 시대에 뭇사람들은 영리를 좇지만, 공만은 우뚝한 기상을 바꾸지 않았네. 간언을 받아들이는 밝은 시대 만났더라면 사대부들이 마땅히 공의 강직함에 힘입었을 것이고, 불행하게도 모함하는 혼란한 조정에 처하였더라면 또한 공의 강직함 쉽게 수용하지 못했으리라.”라고 하였고, 또 “뛰어난 논변, 탁월한 식견, 문물에 대한 의식, 빼앗기 어려운 역량은 백대 뒤에도 나는 다시 보지 못하리라.”라고 하였다.
배위는 옥산 장씨(玉山張氏)이니, 문강공(文康公) 여헌(旅軒) 선생 휘(諱) 현광(顯光)의 후손이고, 통덕랑(通德郞) 대유(大猷)의 따님이다. 부군을 섬기는 데에 덕을 어김이 없었다. 병인년(1686, 숙종12) 9월 모일에 태어나 정미년(1727, 영조3) 5월 21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42세이다. 황림(篁林) 오향(午向) 언덕에 장사 지냈다.
4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인모(仁模), 그다음은 의모(義模), 예모(禮模), 생원(生員)으로 현감(縣監)을 지낸 지모(智模)이고, 딸은 유성헌(柳聖憲), 김제동(金濟東)에게 각각 시집갔다. 서녀(庶女)는 박재성(朴載性)에게 시집갔다. 인모는 부림 홍씨(缶林洪氏)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하나 낳았으니, 곧 불초손 종로(宗魯)이며 외람되이 지평(持平)에 배수되었다. 재취는 충주 박씨(忠州朴氏)이며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재로(宰魯)이고, 딸은 조명복(趙明復), 김경(金絅)에게 각각 시집갔다. 의모는 함양 박씨(咸陽朴氏)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익로(翼魯), 태로(泰魯), 명로(明魯)이고, 딸은 김상성(金相聖)에게 시집갔다. 재취는 강릉 김씨(江陵金氏)이며 1녀를 낳았으니, 이국배(李國培)에게 시집갔다. 예모는 고성 이씨(固城李氏)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성로(成魯)이고, 딸은 봉사(奉事) 오염(吳琰), 김원진(金原進)에게 각각 시집갔다. 서녀는 오성권(吳成權)에게 시집갔다. 재취는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며 자식이 없다. 지모는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영로(榮魯)이고, 딸은 조원성(趙元城), 황지희(黃趾煕)에게 각각 시집갔다. 유성헌은 1남을 낳았으니 굉(浤)이다. 김제동에게는 사자(嗣子)가 있다. 증손(曾孫)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내가 부군을 섬긴 것이 거의 10여 년이었지만, 그때는 어린 시절이라 내 귀와 눈으로 보고 기억하는 것은 겨우 열에 한둘일 뿐이니 하물며 이보다 앞선 일은 어떠하겠는가. 이로써 부군의 아름다운 행실과 훌륭한 규범 가운데 분명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 많지만 모두 이를 자세히 알 수 없으니, 다만 여러 사람들이 함께 알고 있는 것에 근거하여 삼가 이상과 같이 써서 후손들에게 보이노라. 아, 슬프도다!
[주-D001] 미소(眉蘇) : 미산(眉山)의 소순(蘇洵, 1009~1066) 부자를 의미한다. 미산은 송대(宋代) 사천(四川)의 고을 이름으로 소순의 고향이다. 미산에서 소순, 소식(蘇軾), 소철(蘇轍) 삼부자가 나오자 당시 사람들이 “미산에 삼소가 태어나자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眉山生三蘇, 草木盡皆枯.]”라고 하였다. 《古今合壁事類備要 後集 卷10》[주-D002] 서채(西蔡) : 서산(西山) 채원정(蔡元定, 1135~1198) 부자를 의미한다. 채원정의 자는 계통(季通), 호는 서산(西山), 시호는 문절(文節)이며 건양(建陽) 사람이다. 그의 학문은 아들 채연(蔡淵), 채항(蔡沆), 채침(蔡沈)에게 가학으로 계승되었다.[주-D003] 대망(臺望) : 대간(臺諫)으로 의망(擬望)되는 것을 말한다.[주-D004] 무신년 변란 : 1728년 3월 15일에 발생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가리킨다. 경종(景宗)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왕세제(王世弟)인 연잉군(延礽君)의 즉위로 인해 정권에서 배제된 이인좌 등 소론의 일부 세력과 남인의 과격 세력이 공모하여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증손 이탄(李坦)을 추대하고 무력으로 정권 쟁탈을 꾀하였던 사건이다.[주-D005] 재랑(齋郞) : 묘(廟)ㆍ사(社)ㆍ전(殿)ㆍ궁(宮)ㆍ능(陵)의 참봉 혹은 제향(祭享) 때에 향로(香爐)를 받드는 일을 하던 제관(祭官)을 두루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는 참봉을 가리킨다.[주-D006] 남야(南野) …… 못했으리라 : 남야(南野)는 박손경(朴孫慶, 1713~1782)으로,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희유(希有), 호는 남야이다. 저서 《남야집(南野集)》 권6에 〈제정참봉주원문(祭鄭參奉冑源文)〉이 수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