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신앙이나 이념이라는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안전함을 느낍니다. 정해진 교리와 율법, 혹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익숙한 계산법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편안함을 얻습니다. 하지만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라는 현대 철학자의 시선과, 오늘날 교회가 마주한 거대한 위기를 함께 직시할 때, 우리는 이 안락함 뒤에 숨겨진 거대한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1. 바디우의 핵심 개념으로 바라본 세상과 자본의 감옥
바디우 철학의 언어는 처음에는 낯설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구조를 아주 날카롭게 해부해 줍니다.
사건(Event): 일상의 지루한 반복과 자본주의적 계산법을 완전히 깨부수며 돌발적으로 찾아오는 거대한 파열구입니다. 매일 굴러가는 뻔한 시스템 속에서는 진리가 태어날 수 없기에, 이 낯선 충격(사건)은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며 다가옵니다.
주체(Subject): 사건을 마주했을 때, 그저 방관하거나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진리가 있다”고 눈을 뜨고 스스로 결단하는 실존적 존재를 뜻합니다. 주체는 미리 완성되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통과하며 비로소 새롭게 태어납니다.
정체성과 자본의 착취: 바디우는 현대 자본주의가 소수자들의 ‘차이’와 ‘정체성’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사람들을 잘게 파편화하고 고립시킨다고 비판합니다. 세상이 ‘알록달록하다’는 천진난만한 다원주의 뒤에서, 자본은 이 파편화된 집단들을 새로운 ‘틈새시장’으로 삼아 이윤을 창출합니다. 결국 각자의 특수한 정체성에 갇힌 이들은 세상의 거대한 구조적 야만(자본의 폭력)에 맞서 연대하지 못하고 시스템 안으로 흡수되고 맙니다.
2. 성경의 비유로 만나는 바디우: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고
이러한 바디우의 비판은 놀랍게도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던지신 말씀, 즉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라는 질책과 깊이 통합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과 개교회주의는 세부적인 교리나 율법, 혹은 우리 교회만의 생존과 개개인의 사후적 복락(하루살이)에 집착하느라, 세상이 고통받는 구조적 불평등과 시대의 야만(낙타)에는 눈을 감아버리곤 합니다. ‘정교분리’라는 미명 아래 세상의 모순을 외면하고 내세의 구원만을 외치는 태도는, 역설적으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의 계산법에 아주 충실하게 순응하는 꼴이 됩니다.
3. 종교의 성채를 넘어, 온전한 인간으로의 졸업
안전했던 담임목사직이라는 성채에서 쫓겨나는 고통과 추방을 겪으며 비로소 가스 구름에 가려져 있던 ‘진정한 지성소’를 보게 되었습니다. 원죄의 낙인으로 이웃을 심판하던 종교의 먼지를 걷어내자, 그 너머에는 예수님이 강조하셨던 ‘진실과 자비’라는 참사람의 도리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종교라는 이름의 배타적 울타리와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탈종교인’으로서의 결단일지도 모릅니다. AI의 급격한 발전과 교회의 해체라는 거대한 전환기(사건)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낡은 기득권과 형식에 매몰되어선 안 됩니다.
맺음말: 진리의 편과 주체의 편에 서기
안락한 일상과 기득권의 논리에서 벗어나, 진리의 편과 주체의 편에서 엄격한 대가를 감내하며 시대의 야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것이 바로 바디우가 말하는 영웅적인 주체성의 회복이자, 율법의 감옥을 넘어 참된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는 구도자의 길입니다.
종교의 성벽을 넘어, 진정한 ‘나’로 깨어나는 아침. 이 거대한 전환의 시대 속에서 우리는 이제 낡은 껍질을 벗고 참된 보편적 진리를 향해 홀로, 그러나 함께 걸어 나가는 새로운 주체로 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