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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는 하나님 좋음을 믿는 증거>의 줄거리:
십자가만 알고 다 몰라도 됩니다. 아니, 십자가만 알고 다 몰라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좋음을 내 것으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좋음은 우리 감각에 가려져 있지요. 그렇게 가려진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실제로 나타나셨을 때와 같이 누리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오직 십자가 예수님 안에서만 주어질 수가 있지요.
십자가는 하나님 좋음을 믿는 증거
(고린도전서 2:1~5)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는 하나님 좋음을 믿는 증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좋음을 믿는 증거”
2절의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는 내용은 우리 평생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믿으신다면 그 믿음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증명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음이고 하나님이 좋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음입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생활화가 중단될 때에 나타나는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고 좋음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말과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1장 23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앞선 1장 17절에서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면 십자가 사건이 상실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사람을 설득하거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에서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사도 바울이 가진 십자가에 대한 견해나 이해는 전달될 수 있어도 십자가 사건이 재현될 수는 없었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본문 1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란 헬라 문화권의 특징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헬라 문화권에서는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하고 공감을 불러일으켜서 동조하게 하고 찬성하게 하는데 동원되는 언변이 아름다운 가치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도 언급되었던 “말의 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증거를 전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신비함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신비한 이유는 우리의 오감에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비함에는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신비한 이유는 마음의 의식작용 때문입니다. 인간은 의식으로 무엇인가 있다는 존재감을 느낍니다. 다시 말해 존재감의 무게가 닿아야 있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공백으로는 좋다고 느낀 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육체의 오감을 통해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이 육체의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게 드러난다면 지구의 75억 명 중에서 하나님 이외의 존재감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자아의식이 없는 아기조차도 그럴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에 대해 “계시다”라는 존칭을 쓰지 않고 굳이 “있다”라고 하는 이유는 존재감의 의미를 훨씬 더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게 나타나시면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도 더는 아기에게 관심을 둘 수 없습니다. 고속도로를 120km로 달리던 운전자도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느라 운전하는 상황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고 핸들을 놓아버리게 될 것입니다. 암으로 극한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도 하나님을 실제로 눈앞에서 본다면 고통스러운 육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재벌 총수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실제로 나타나시면 기업의 있음에 대해 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이든 왕이든 대통령이든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느라 직책의 존재감을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의 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도록 나타나신다면 그 하나님의 좋음 앞에서 건강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승진 따위를 좋아할 사람도 아무도 없고, 대통령 따위를 좋아할 사람도 없습니다. 재벌 총수가 되고 싶어 할 사람도 없고 돈 따위를 좋아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있음과 좋음이 바로 하나님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오감에 가려져 있기에 하나님의 신비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믿음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당신의 있음과 좋음을 가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와 똑같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해 믿음을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오감에 포착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은 우리 오감에 가려져 있을 뿐이지 엄연한 사실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신에 믿음으로 포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은 신비하고도 강력합니다. 우리의 의식에서 모든 있음을 죽여 버리는 유일한 있음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모든 좋음을 사라지게 만드는 유일한 좋음입니다. 이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을 믿음으로 포착할 수 있습니다. “내가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가졌다!”라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낀다면 돈이 절대 좋게 느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에 나타나지 않고 가려져 계십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돈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믿음으로 돈과 관계하라는 것입니다. 건강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감각에 가려져 있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믿음으로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에 돌에 맞아 죽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붙잡았습니다. 믿음을 작동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 앞에서 돌에 맞아 죽는 몸의 있음은 의식될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 정도로 강력하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믿음으로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와 똑같은 효과를 위해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습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그들 앞에 노출되어 있기에 믿음을 가질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로 살고 있는 동안에 천사들이 느끼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믿음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특권이 우리가 천사보다 나은 점이고 천사들이 하나님의 일꾼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의 기회를 천사들은 해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은 강력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려져 있기에 전달할 때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전할 때에 말로 설득하여 공감과 찬성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신비함에 대한 사도 바울의 증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2절을 보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려져 있는 강력한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좋음을 전달할 때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만이 하나님을 전달하는 증거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특이한 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사건을 따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알기로 작정하였다.”라고 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굳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할 때 십자가를 빼놓고는 언급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굳이 구분을 둔 이유는 십자가 사건을 제외하고도 얼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 속에서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을 제외해 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러한 경우는 십자가를 배반하는 방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지금의 사건으로 믿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사건은 지금 일어나는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2000년 전에 일어났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제 영적인 믿음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말할 때는 지금의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로써 십자가 사건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예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얻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말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만나려면 십자가 사건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하면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구분하여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 이미 십자가 사건이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조하기 위하여 별도로 빼서 언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란 우리의 오감에 가려져 있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의 강력함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증거 하는데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사람들을 설득할 수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의 강력함에 대한 증언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언으로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믿음 안에서 누리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상황을 믿음으로 누리게 해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 이외의 있음과 좋음이 죽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맞닥뜨리면 있게 된 모든 것들의 있음과 좋음은 죽어버리게 됩니다. 지금 눈앞에 배우자가 있고 사장님이 있어도 우리가 우선적으로 있음을 느껴야 할 대상은 몸의 세포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사장님을 눈으로 보고 있는데 그 눈을 누가 주관하십니까? 몸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몸으로 살아가지만, 몸으로 만나는 어떤 대상보다도 하나님의 있음을 더 먼저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몸의 세포까지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론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피조물도 조물주의 좋음보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조물주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내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전제를 놓고 보면 조물주이신 하나님보다 더 가질만한 피조물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죄의 체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좋음의 강력함을 이론으로 알고 있어도 죄의 체질 때문에 그 이론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조물주이신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의식과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이론으로는 압니다. 그런데 실제로 돈 문제나 건강 문제가 생기면 이것들을 우선하게 되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들이 생기면 그것을 원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의 체질입니다. 이 죄의 체질 때문에 의식과 마음은 이론적으로 인정하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우선되어야만 한다는 이론은 틀리지 않습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가 되어야만 합니다. 의식과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실제로 인정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죄의 체질이 없어져야만 합니다. 죄의 체질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있음보다 보이는 세상 것들의 있음을 먼저 의식하게 합니다. 또한 가려져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좋음보다 보이는 세상 것들의 좋음을 소망하게 합니다. 이러한 죄의 체질을 갖고 있는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기를 바란다는 것은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을 이론이 아닌 실제로 믿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님들과 교인들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이론으로는 인정합니다. 그 이론이 아무리 세밀하고 강력하고 아름다울지라도 실제가 될 수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죄의 체질은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을 따라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에 십자가 사건이 제시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좋음이 이론적으로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기 위해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 동일시가 곧 믿음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죄의 체질은 이러한 이론을 따라가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 이외의 감각을 통해 만나는 것들을 향해 가게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실제로 믿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손으로 만질 수 없고 귀에 들리지 않아도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믿어지기만 하면 실제로 가진 것과 똑같은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신비한 베일에 감춰져 계신 하나님이 실제로 나타나신다면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에 대해 있음과 좋음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사장님이 앞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사장님을 의식할 수도 없을 것이며, 몸이 아프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몸을 의식할 수도 없을 것이고, 돈 문제가 생겼다고 하나님 앞에서 돈 문제를 의식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론으로 맞는데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붙잡으면 의식과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한 믿음이 실제로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동일시의 믿음이 생기면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라는 믿음이 생겨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만져질 수 없이 가려져 계심에도 그 있음과 좋음을 믿음 안에서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타난 고백이 하박국 3장 17~18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만날 수 있는 세상 상황에서는 깡그리 없어도 마음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나타나셨던 것은 아닙니다. 한여름에 바가지로 찬물을 퍼서 등에 부으면 시원함이 확실하게 느껴지듯이,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을 그런 육체적 경험을 통해 느꼈던 것은 아닙니다. 욥도 그렇게 경험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나 스데반 집사님이나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도록 나타나셨던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믿음을 작동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가려져 있던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마치 실제로 나타나신 것처럼 느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로또에 당첨되어서 20억이 수중에 들어왔다면 엄청나게 기쁠 것입니다. 믿음이란 로또에 당첨되어서 20억을 손에 든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실제로 얻은 것과 같이 느끼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솜털 하나하나를 세고 계시며, 육체의 오장육부와 사지백체를 이루고 있는 세포 하나하나까지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있음을 이론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론으로 알고 있어도 몸에 이상이 생기고, 돈 문제가 생기고, 사장님 앞에 있다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은 나중이 되어버립니다. 사장님의 있음과 건강 문제의 있음과 돈 문제의 있음을 더 먼저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있음은 거부되고 부인되고 잊히는 것입니다. 이론으로는 알지만 실제 믿음의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있음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실제로 믿으려면 십자가 사건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전했습니다. 지금 십자가로 들어와 예수님과 하나 되지 않으면 아무리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좋음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실제 믿음의 차원에서는 의식과 마음이 삼천포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감이 바로 죄입니다. 이러한 죄의 체질이 있기에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이론적으로 받아들여진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실제로 믿기 위해서는 십자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십자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감각에 대해서 가려져 계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의식과 마음으로 믿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허락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때 지금 믿음 안에서 그 있음과 좋음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의 있음을 다 죽이는 존재감입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도록 허락받은 아들들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이 지구 전체를 준다고 해도 하나님에 비하면 휴지처럼 보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이러하신 하나님을 오늘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의 좋음의 증거를 이론이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헬라 문화권에서는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아름답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4~5절을 보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전했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자기 죽음으로 인정하면서 십자가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사건만을 전했습니다. 그 십자가 사건 속으로 뛰어들어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해 실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신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으로 믿는 믿음도 설득력 있는 말이 아니라 실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십자가 사건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설득하려 하지 않았고 지혜롭게 말을 함으로써 동조하게 하지 않았고 십자가 사건만을 전했습니다. 그 십자가 사건 안에 뛰어들 때 의식과 마음은 실제로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을 믿게 되고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의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난 하나님과 쉬지 말고 대화하고, 그 하나님의 주권이 이끌어 가시는 생의 모든 문제에 대해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의 증거 그리고 십자가 사건이 전부인 것을 공감할 수 있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실제로 십자가 사건 안으로 뛰어들게 하시고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좋음에 대하여 믿음을 작동시킬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