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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삶에 믿음 덧대기, 믿음에 삶 덧대기>의 줄거리 :
살면서 믿기와 믿으면서 살기의 차이를 아십니까? 살면서 믿기란 세상 사람과 똑같은 상태로 살면서 예수님 믿음을 덧대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믿으면서 살기는 아예 예수님 믿음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 세상을 사는 것이고요. 유대주의를 신봉하는 거짓 형제들로 인해서 오히려 참 믿음을 더 정확하게 구분하는 계기가 마련된 셈입니다. 유대 종교인, 천주교인, 기독 종교인 모두 다 살면서 믿기의 달인들이지요.
삶에 믿음 덧대기, 믿음에 삶 덧대기
(갈라디아서 2:15~21)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본문 15절을 보면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라고 하였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갈라디아의 교인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표현이 등장한다는 것을 의아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사도 바울의 생각이 아닌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생각을 인용하듯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등장한 것에는 특별한 의도가 들어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이었습니다. 그 증거로 할례를 행했고,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지켰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두었던 성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성전은 선민의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선민에게 허락되었던 할례와 율법과 성전이라는 요소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선민인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멸망이 결정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크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16절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율법과 할례와 성전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에게나 세 가지 요소가 없었던 이방인에게나 의롭게 되기 위한 단 하나의 길이 제시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일과 구원은 할례나 율법이나 성전의 유무와는 무관해 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유대주의를 신봉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장점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율법과 할례와 성전은 선민이 이방인들에 대해 우월감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위해서는 이러한 선민의 요소들이 아무 소용이 없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으라고 하니 불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곧 내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동일시입니다. 이것이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이지만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는 갈라디아서에만 국한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믿음과 행위의 문제는 어떻게 보자면 사도 바울의 전 서신을 관통하고 있는 문제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로울까요? 개신교의 틀 안에서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현대의 기독교 종교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로운 것같이 보입니다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극복하고, 다 잘 알고 있고, 졸업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믿음과 행위의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왜 행위로는 하나님께 의롭다 여기심을 받을 수 없는가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만 합니다. 율법을 준수하는 상태, 행위 원칙을 따라서 행위를 하는 상태, 스스로 행위를 하는 상태는 모두 같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 알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16절을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실천적인 면에서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의롭다 여기심을 받을 수 없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여기심을 받을 수 없고 구원도 받을 수 없는 이유에는 실천적 차원이 아닌 근원적 차원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2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으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5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고, 27절에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잔과 대접의 겉”이란 겉으로 드러난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라고 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문자대로 잘 지켰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율법을 잘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의롭다 여기심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바리새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율법을 잘 지켰던 바리새인들에게 의롭다 여기심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저주를 받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27절에서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이들의 마음속에 더러움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었기에 마음에 죽은 사람의 뼈처럼 부정한 것들을 담았을 리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합당하게 여겨지는 것들만을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자기 몸이 소중하기에 몸을 담았을 것입니다. 가족이 소중하게 여겨지기에 가족을 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돈이 많은 자라고 지적하셨던 것처럼 돈이 소중하게 여겨지기에 돈을 담았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존경이나 권세가 소중하게 여겨지기에 그런 것들을 마음에 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들로 가득해진 마음을 시체를 담은 상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체는 하나님의 뜻이 더 이상 내려오지 않게 된 대상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만으로 채워지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돈을 담았다면 담아서는 안 될 대상이 담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시체를 담은 것과 똑같습니다. 돈 자체는 시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들어온 돈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시체가 됩니다.
이것은 비단 바리새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부모라면 마음에 자녀를 담기 쉽습니다. 물론 자녀는 시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담도록 지음 받은 마음에 자녀를 담을 때 썩은 시체와 같이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자녀를 담도록 사람을 지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나라를 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에 담긴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임할 수 없는 시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마음이 더러워진 사람과는 교제하실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마음에 품으실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마음에서 이러한 더러움의 상태가 고스란히 유지되는 가운데 행위로는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의롭게 여기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저주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행위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을 수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하는 행위는 예외 없이 이 세상 것을 마음속에 담았을 때 이루어집니다. 마음에 담은 소중한 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면 지키려 하고 늘리려고 합니다. 마음에 담은 소중한 것을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가지기를 원합니다. 이로부터 사람의 모든 행위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세상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좋다고 여겨서 마음속에 담을 때 스스로 행위를 하는 주체가 됩니다. 만약 사람이 마음속에 아무것도 담지 않았다면 어떤 행위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 행위를 해야 될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롭다 여기심을 받음의 핵심 요소는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너, 내 마음에 든다. 이제부터 나와 교제해도 되겠다. 이제부터 내가 너를 끌어안고 너도 나를 끌어안아도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상태입니다. 깨끗함은 의로움의 핵심입니다. 의롭다 여기심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끌어안으시고, 내가 하나님을 끌어안기 위해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하여 깨끗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의롭다 여기심을 받음은 하나님과의 결혼식과 같습니다. 결혼식은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 결혼식을 했으면 이제부터 결혼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실 만큼 깨끗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졌다면 이제부터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이 내 마음을 받아들이시는 교제의 생활이 이어져 나가야만 합니다.
의롭다 여기심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의 깨끗함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문제이기에 율법을 포함한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이 나를 끌어안으시고 내가 하나님을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깨끗해짐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율법을 지킬지라도 마음에 세상 것이 담겨있다면 더러움을 담은 채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돈을 담은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한 행위를 합니다. 마음에 자녀를 담은 사람은 자녀가 잘되기 위한 행위를 합니다. 무엇이든지 좋아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행위를 하게 됩니다. 이미 세상 것을 좋아해서 담게 되었다면 더러움이 발생한 상태이기에, 그로부터 나타난 행위를 통하여 깨끗하게 여기시고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행위를 하는 자는 이미 더러운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모르고 있었고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나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깨끗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 것을 마음에 담고 행위를 하며 살아갑니다. 세상 것을 마음에 담은 시점에서 이미 더러워진 것입니다. 이미 더러워진 상태를 모른 채 행위를 함으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여기심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한 바리새인들조차 의롭다 여기심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기독교 종교인들의 문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주의자들과 유대 종교인들과 똑같이 마음에서 좋아하는 대상이 세상 것들입니다. 돈, 건강, 성공, 존경을 좋아합니다. 마음이 회칠한 무덤처럼 썩은 시체가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행위를 잘함으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여기심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롭다 여기심을 하나님과 친해지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는 사람은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해주시고, 성공하게 해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돈 많이 벌고 성공하면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다고 확신했습니다. 내가 건강하게 장수하며 돈도 많이 벌었으니 하나님이 나를 의롭게 여기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벌고자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 종교인들의 모습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에 온갖 세상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마음에는 건강, 가족, 성공, 돈을 담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 의롭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모르던 이방인이었을 때와 똑같은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움직이던 삶에다 예수 믿음을 덧대고 있을 뿐입니다. 그 삶의 방식 안에서 회칠한 무덤 안에 썩은 시체와 온갖 더러운 것들이 있었던 것처럼 마음 안에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하나님 뜻이 아닌 것들을 잔뜩 들여놓고 있습니다.
자식은 내 마음에 들여놓을 대상이 아닙니다. 본래 자식은 시체가 아니지만, 마음에 들여놓았기에 시체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시체가 되어버립니다. 문제는 이렇게 썩은 시체들을 담고 있는 상태를 어떻게 해볼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 그것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구원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담은 마음은 썩은 시체와 온갖 더러운 것이 들어있는 무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더러워진 상태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의롭게 되었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20절을 보면 무척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깨끗해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친해짐이 곧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깨끗해져야 하고 의롭다 여기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 종교인들이나 개신교 종교인들이나 가톨릭 종교인들이나 똑같습니다. 유대인 종교인들은 마음에 세상을 담고 있는 상태에 하나님을 덧붙이려고 했습니다. 개신교나 천주교 종교인들은 예수님을 덧붙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덧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 것들을 담아서 회칠한 무덤처럼 되어버린 마음의 상태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세상 것을 단 하나라도 담고 있으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고 하나님과의 결혼생활에 들어갈 수 없는 더러운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무조건 죽어야만 합니다. 나의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을 향하여 갈 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결혼생활을 할 수 있는 깨끗함이 마련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보혈로 씻음 받았다는 사실을 내 죗값을 씻어낸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분명히 내 죗값은 씻겨나갔습니다. 다만 도덕적 윤리적으로 저지른 죗값이 씻겨나갔더라도 내 존재 안에 더러움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라면 하나님과 관계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여전히 마음에 자식을 담고 있다면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더러운 상태이고 의롭다 여기심을 받음은 깨져버린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을 만큼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세상 것들이 마음에 담기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세상에는 마음에 담을 것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짐으로써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상태, 깨끗해진 상태를 유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끌어안고 내가 하나님을 끌어안을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며 세상이 들어온 나를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예 세상이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영화에서 드라큘라를 쫓아낼 때 십자가를 들이대며 물러가라고 외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대상에 대해 십자가를 들이댈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를 보고, 자식을 보고, 돈을 보고, 내 몸을 볼 때 십자가를 들이대며 ‘내 마음에서 물러가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깨끗한 상태에서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20절을 보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은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가 내 마음을 담고 있는 캡슐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캡슐처럼 내 마음을 담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는 과정을 거치며 나의 마음을 하늘로 데리고 가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캡슐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캡슐이 되셔서 내 마음을 하늘로 끌고 가셨는데 또 육체 가운데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날마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믿음의 상황이 완전히 구축된 상태에 육체의 삶을 덧붙인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상황이 반대였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세상 것을 담고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굳어진 상태에서 예수님을 믿으려고 했습니다. 예배당에 갔고, 성경을 읽었고, 설교를 들었고, 세례를 받고, 헌금을 하고 기도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세상 것을 담아서 더러워진 상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아무리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덧붙이려 해도 하나님과의 교제는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더러움에 믿음을 덧대고 있었던 삶의 부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를 지속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캡슐이라도 되신 듯이 나의 마음을 품으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까지의 과정을 거치시며 나의 마음을 하늘로 데려가셔서 하나님만을 마주 보게 하십니다. 이로부터 우리의 마음은 비로소 하나님만을 소망할 수 있게 됩니다.
19절을 보면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소망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가 될 때 마음의 채움을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끌어당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상태이고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받은 상태가 될 때 육체의 삶이 덧붙여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사람들은 거꾸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기독교 종교인들은 도저히 의로움이 주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예수 믿음을 덧붙인 상태로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마음에는 온갖 세상 것들이 다 담긴 상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도저히 어떠한 교제도 일어날 수 없는 상태를 유지하며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을 뿐입니다.
삶에 믿음을 덧대는 상태를 십자가에서 종식시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마음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가 사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을 하늘로 데리고 가셔서 하나님을 대면하게 하십니다. 이 믿음과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육체의 삶은 믿음에 덧대게 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의 삶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이후부터의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고, 나의 마음을 하늘로 데리고 가시며, 그리고 나는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삶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주된 삶이어야 합니다. 육체의 삶이란 주된 믿음의 삶에 덧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객이 전도되지 않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삶에 믿음을 덧대던 시간들이 십자가에서 끝나게 하시고 오직 믿음에 삶을 덧대는 구원받은 자의 삶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