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Pan Ku , 班固
요약 반고는 기전체 역사서의 모범이 된 <한서>의 저자로 유명하다. 기전체는 역사 사실을 본기, 열전, 표, 지 등의 체제를 갖추어 서술하는 방식을 말한다.
사마천의 <사기>를 계승할 역사서를 쓰기 위해 자료들을 수집했던 아버지 반표가 죽자 역사편찬 작업의 뒤를 이었다. 16년에 걸쳐 편찬된 <한서>는 철저한 고증과 완벽한 객관성이 돋보이는 정사류의 전형이 되었다. 이 책은 비록 〈사기〉를 모범으로 삼았지만, 이 광범위한 역사서의 단순한 보완물이라기보다는 한 제국이 일어난 뒤부터 왕망이 AD 9년 신나라를 세울 때까지의 시기를 다룬 새롭고도 포괄적인 역사기록이었다. 사실상 그는 역사가라기보다는 사료편찬가 정도로 인식되어질 수도 있다. 그는 기존의 사료들을 잘 정리하고 요약함으로써 한나라 황실과 제국 전체를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다.
반고(班固)1세기경의 중국 후한의 역사가 ⓒ Hannah/위키피디아 | Public Domain
그가 쓴 〈한서 漢書〉는 이후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의 모범이 되었다. 아버지인 반표(班彪:3~54)는 호고적(好古的) 취미가 강한 지식인으로서 한 황실이 재건되었을 때(후한) 광무제(光武帝)에 의해 서령(徐令)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관직을 사퇴하고 독자적으로 역사연구에 몰두했다. 3황5제(三皇五帝)로부터 시작하여 전한시대 중간에서 끝을 맺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를 계승할 역사서를 쓰기 위해 자료들을 수집했다. 반표가 죽은 뒤 반고는 그의 뒤를 이어 역사편찬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사(國史)를 함부로 개작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에게는 반초(班超)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반초는 중국 서쪽 변경을 파미르 고원까지 넓히는 데 공을 세운 뛰어난 무장이었다. 반고는 동생의 탄원으로 옥에서 풀려났을 뿐만 아니라 명제(明帝)의 눈에 들어 난대령사(蘭臺令史)라는 관직까지 얻었다. 그후 반고는 16년에 걸쳐〈한서〉를 편찬했다. 〈한서〉는 후대의 각 조가 전대(前代)의 정치를 기록한 정사류(正史類)의 전형이 되었다. 이 책은 비록 〈사기〉를 모범으로 삼았지만, 이 광범위한 역사서의 단순한 보완물이라기보다는 한 제국이 일어난뒤부터 왕망(王莽)이 AD 9년신(新)나라를 세울 때까지의 시기를 다룬 새롭고도 포괄적인 역사기록이었다. 반고는 한대초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사마천이 그 시기를 다룰 때 사용한 대부분의 사료를 섭렵했다. 또한 장황한 부분을 삭제하고, 어색하고 모호한 부분을 단순명료하게 바로잡았다. 그당시 교육의 보급, 관료기구의 확대, 문서기록 기술의 향상, 서체의 통일 등으로 인해 그는 더 많은 양의 최근 자료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약 200년간의 역사를 다룬 〈한서〉는 3,000년을 망라했다고 하는 〈사기〉보다도 분량이 훨씬 많다. 사마천과 반고는 둘다 사관(史官)이었으므로 불가피하게 관찬(官撰) 기록들을 사용했다(역사편찬). 이를 통해 황제와 황족의 생활(그들의 민정·군정상의 중요한 활동을 포함)을 인물별·연대기별로 기술했다. 이것이 〈한서〉의 첫번째 부분인 본기(本紀)이다. 반고는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사마천의 〈사기〉 체제를 따랐다. 2번째 표(表)에서는 사건·가계·인물 등에 관한 도표를 만들었다. 3번째 지(志)에서는 교사(郊祀)·예악(禮樂)·식화(食貨) 등과 같은 광범위한 주제들을 다루었다. 4번째 열전(列傳)에서는 황제 이외의 중요한 인물들에 대해 1명씩 또는 몇 명을 1전(傳)으로 묶어 서술했다. 그는 지에 새로 천문지(天文志)·지리지(地理志)·예문지(藝文志)를 추가했다. 특히 황실도서관인 난대(蘭臺)에 보관된 서적들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예문지는 후대의 학자들이 문헌의 진위성이나 가전을 밝힐 때 반드시 참조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그는 중국이 당시에 더이상 제후 분립의 상태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사기의 편찬체제 중 세가(世家)를 없앴다. 반고는 기본적인 작업이 완성되었다고 느낀 다음 당시의 정치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교경전의 해석을 둘러싸고 일어난 논쟁에 말석(末席)으로나마 참여했다. 〈한서〉에는 그의 주관적 견해를 밝힌 글이 몇 안 되는데, 그 글 가운데 하나에서 이 논쟁은 단순한 호고적 취미에서 발단된 것이 아니며, 다분히 정치적 의미가 개입된 것이라고 평했다. 이 문제를 다룬 〈백호통 白虎通〉(白虎觀에서의 강론이라는 뜻)을 편찬한 사람도 반고였다. 40대 중반에 그는 더욱 모험적인 일에 뛰어들었다. 〈한서〉의 퇴고는 특출한 학자였던 여동생 반소(班昭)에게 맡기고, 장군 두헌(竇憲)을 따라 흉노(匈奴) 정벌에 나섰다. 변경으로부터 1,600km가량 떨어진 곳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비문을 남겼다. "우리 정병(精兵)은 오랑캐 무리를 정벌하러 이곳에 왔다. 우리는 서역인들의 무례함을 응징했고 먼 이역인 이곳을 평정했다. 그들은 이 거대한 평원을 지나 북쪽 고향으로 돌아갔고 장한 우리 군대는 이 전승기념비를 세우니, 위대한 천자(天子)의 업적이 앞으로 만대에 길이 빛나리라." 그러나 두헌의 조카이며 아직 14세에 불과했던 화제(和帝)는 두헌의 자만심을 경계했고, 그의 지나친 야심을 우려해 그를 고향 땅으로 유배시켰다. 반고도 상관의 몰락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문초를 당했으며, 60세에 옥에 갇힌 채 죽었다. 여동생인 반소는 예정대로 한서의 초고를 완성하고 그 내용을 다른 학자들에게 가르치도록 공식 승인을 얻었다. 여러 세기 동안 중국인들은 반고가 쓴 것과 같은 자기충족적인 단대사(斷代史)와, 여러 조대(朝代)에 걸쳐 주도권과 사회체제의 흥망을 기술함으로써 훨씬 효과적으로 역사의 교훈을 밝힐 수 있는, 비교적 드물게 씌어진 통사(通史) 중에 어떤 것이 더 우월한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일반적인 역사가들이라면 분명히 더 짧은 시기를 다룬 단대사에 의지할 것이나, 이 2가지 역사서를 단지 범위라는 근거에서 질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역사가 반고의 업적을 논할 때는 그의 선배인 사마천이나 1,000년 뒤에 태어난 사마광(司馬光)과는 다른 각도에서 평가해야 한다. 사마천과 사마광은 해석과 논평을 가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들의 글은 훨씬 다채롭고 때로는 흥미롭게 보인다. 반면에 반고는 철저한 고증과 완벽한 객관성이 돋보인다. 사실상 반고는 역사가라기보다는 사료편찬가 정도로 인식되어질 수도 있다. 그는 기존의 사료들을 잘 정리·요약함으로써 한나라 황실과 제국 전체를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다. 따라서 〈한서〉라는 제목도 문자 그대로 '한에 관련된 문서'라는 뜻이다. 반고는 책 중에 삽입한 문건들도 자기 문체로 다소 가필했는데, 그의 문체는 단순명료하고 기교나 분식(粉飾)이 없다. 간결하면서 수식이 없는 그의 문체는 사마천의 경우보다 절제되어 있지만, 당시 그가 속한 사대부 계급에서 사용하던 구어체 중국어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반고의 문장은 수세기 후에 문체가 지나치게 기교적으로 흐르는 데 대한 반동으로, 고문으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을 때 소위 고문체(古文體)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반고도 그 시대의 주된 문학형태로서 운율이 있는 산문인 부(賦)를 지을 때는, 당시의 다른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화려하고 기발하며 과시적인 문장을 사용했다. 한의 전후 두 도읍의 장단점에 관해(물론 그가 살던 때의 도읍이 훨씬 좋다고했음) 논한 글인 〈양도부 兩都賦〉에는 생소한 글자도 많이 사용되었고 곳곳에 모방한 흔적이 보인다. 그는 또한 자기 시대의 속요(俗謠)를 본떠 몇 편의 가벼운 운문을 짓기도 했다. 한 무제(武帝)의 치세에 관한 일화들과 소문을 모은 책도 그가 지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출처 : 다음 백과 사전
<한서>의 저자 반고 반고(班固)의 부친 반표(班彪) 역시 역사 저술에 일생을 바친 저술가였다. 반고는 사마천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역사가의 길에 들어섰고 20여 년에 걸친 연구를 통해 《한서(漢書)》를 집필했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역사서 집필에 있어서 사마천의 뒤를 잇는 인물로 여겨졌으나 본인은 사마천의 기술 방식이 유교적 방식을 따르지 않고 여러 학파의 주장을 종합하였다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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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서》는 반고의 여동생인 반소(班昭)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반소 역시 문장력이 뛰어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대가(曺大家)'라 불리며 존경받았다. 조대가라 함은 남편 조수(曺壽)의 성인 '조'에 당시 여자의 존칭이었던 '대가'가 합해 생긴 이름이다. 반소는 역사서 집필 외에도 후비와 여러 귀인들의 교육도 맡았다고 전해진다. 《한서》는 서한(西漢)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그 문장이 우아하고 품위가 있어 서민적 풍취와 면모를 지닌 사마천의 《사기》와 자주 비교되곤 한다.
출처 :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반고 (후한)32개 언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반고 반고(班固, 건무 8년(32년) ~ 영원 4년(92년))는 1세기경의 중국 후한의 역사가이다. 자는 맹견(孟堅)이다. 부풍(扶風) 안릉(安陵, 지금의 섬서 성 함양) 사람으로 한 무제 때의 월기교위(越骑校尉)를 지낸 반황(班况)의 증손자이다.
생애[편집]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후한 이전 전한의 유사를 두루 채집하여 《후전(後傳)》 수십 편을 짓는 등 훌륭한 역사가로 이름 높던 아버지 반표(班彪)로부터 독서와 학문을 배웠다. 아홉 살에 문장에 능했고 16세의 나이로 수도 낙양의 태학(太學)에 들어 여러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고 한다.
건무 30년(54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반고는 태학에서 돌아와 삼년상을 치렀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서》(漢書 ) 1백 편의 저술을 계속했지만, 이 때문에 사사로이 나라의 역사를 짓는다(私修國史)는 고발을 당해 체포되어 구금당한다. 동생 반초(班超)가 나서서 황제에게 반고가 《한서》를 짓는 목적은 한 왕조의 공덕을 찬양하고 후세 사람들에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하여 교훈을 남기고자 함이지 조정을 비방하거나 할 뜻은 없음을 변론했다. 훗날 반고의 무고함이 밝혀지자 명제(明帝)는 반고의 집에 금과 전을 지급하고 역사책을 계속 저술하도록 허락했다. 어느 날 명제가 반고에게 "경(卿)의 동생은 편안한가?"라고 물었을 때 반고는 "관리가 되어 책을 베껴다 늙으신 어머니를 공양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명제는 반고의 재능을 높이 사서 그를 난대령사(蘭台令史)로 삼고, 조를 받들어 진종(陳宗), 윤민(尹敏), 맹이(孟異) 등과 함께 《세조본기》(世祖本纪) 및 여러 전기(傳記)를 짓게 했다. 반고는 후에 낭(郎)으로 옮겨지고, 전교비서(典校秘書)로서 다시 공신(功臣), 평림(平林), 신시(新市), 공손술(公孙述) 등의 열전을 짓게 되었다. 당시 반고와 같은 난대령사를 맡고 있던 부의(傅毅)도 반고와 함께 나란히 문장으로서 이름을 떨쳤는데, 반고는 반초에게 보낸 글에서 "무중(武仲)은 속문(屬文)에 능해서 난대령사가 되었는데 그 붓이 종이에 한 번 닿으면 쉬는 법이 없다"고 평한다. 반고 또한 조칙을 받들어 그 아버지가 해왔던 저술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장제(章帝)는 반고를 현무사마(玄武司馬)로 임명했다. 건초(建初) 4년(79년) 장제는 전한 선제(宣帝)의 석거각(石渠閣)의 고사를 본받아 여러 왕(王)과 조박(趙博), 이육(李育) 등의 유생들을 백호관(白虎觀)에 불러모아 오경(五經)의 다르고 같음을 강론하게 했는데, 이 대대적인 유학(儒學) 세미나의 토론 내용을 반고가 기록하여 지은 것이 바로 《백호통의》(白虎通義)였다. 건초 7년(82년)에 반고는 《한서》의 내용 대부분을 완성했다. 화제(和帝) 영원(永元) 원년(89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반고는 관직을 사임하고 집에 있었는데, 마침 두헌(竇憲)이 병사를 거느리고 흉노를 치게 되자 반고도 두헌의 군에 종군하여 중호군(中護軍)으로서 중랑장(中郎將)의 임무를 수행했다. 흉노를 크게 쳐부순 뒤 늑석연연산(勒石燕然山)에 그 공적을 새기는 명문을 짓고 쓴 것이 바로 반고였다. 반고는 또한 《두장군북정송》(竇將軍北征頌)을 지어 두정이 북쪽으로 흉노를 정벌한 사실을 크게 찬양하였다.
그러나 예전에 반고의 집안 노비에게 술에 취해 모욕을 당한 일로 앙심을 품은 낙양령(洛陽令) 충경(种競)이, 영원 4년에 두헌이 실세하여 자살에 이른 뒤 두헌의 측근으로서 관직에서 면관되었던 반고를 잡아다 태형을 쳤고, 반고는 옥사했다. 나이 61세. 이때 《한서》의 표(表)8과 천문지(天文志)는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였다. 화제는 그 여동생 반소(班昭)에게 명하여 황실 도서관인 동관(東觀)의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되어 있던 자료를 갖고 반고가 하던 일을 마무리 지어 완수하도록 했지만, 반소 역시 일을 마치지 못한 채 사망한다. 황제는 반고와 같은 군에 살던 마속(馬續)이 그의 문하 사람이었고 고금의 일에 두루 밝다 하여 그에게 《한서》의 반고가 완성하지 못한 부분을 완성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결국 한서(漢書)는 반표로부터 아들 반고, 그리고 딸인 반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족이 참여하여 집필된 것이다. 유일하게 반초는 언급되지 않는데, 반초는 평생 서역을 지키며, 흉노족과 서역을 개척하는 데 일생을 바쳤기 때문이다. 본기(本紀) 12편에 표(表) 8편, 지(志) 10편, 열전(列傳) 70편으로 되어 있던 원래의 《한서》 체제는 훗날 다시 120권으로 나뉘어, 《사기》(史記)의 체제와는 달리 세가(世家)는 모두 빠지게 되었다.
또한 반고는 한의 주된 시문학 양식이자 산문시의 일종인 부(賦)를 지었는데 일부가 후세에 출판되었다. 반고의 가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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