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육체 관련 껍데기로 하는 사람 차별>의 줄거리 :
사람을 차별하는 마음 상태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외모, 인종, 집안, 재산 유무, 사회적인 신분과 지위 등등 육체 관련 껍데기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지옥으로 가게 되는 심각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낮고 천한 십자가의 자리에서 보좌 우편 영광의 자리로 가신 예수님을 따라가야만 하는 "자유의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는 긍휼 대신에 차별하는 마음은 절대로 생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 관련 껍데기로 하는 사람 차별
(야고보서 2:1~13)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육체 관련 껍데기란 육체와 관련된 모든 항목들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보자면 육체 관련 껍데기로 사람을 차별하면 심판을 받아서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 차별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 장로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한다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상태임을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야고보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믿음이 내 안에서 작동 중이라면 절대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야고보서는 윤리적 행위를 강조하는 서신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도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윤리적 항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사람을 차별하는 행위가 나오지 않도록 믿음의 끊김을 막으라는 요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나 사람을 대합니다. 이때 악한 생각으로 판단함으로써 나타나는 일이 차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만나는 순간에 믿음이 끊기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이 끊기지 않았다는 증거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음으로 나타납니다.
차별을 위한 판단이 생기는 이유는 육체 관련 껍데기에 마음을 두기 때문입니다. 육체 관련 껍데기라 하면 먼저 외모나 피부색 같은 외형적 요소가 떠오를 것입니다. 외모나 체형 등은 육체를 이유로 삼는 직접적인 차별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피부색, 인종, 국적 등도 육체와 관련된 일입니다. 좀 더 범위를 좁히자면 집안, 지위, 신분, 등도 결국 육체에 얹힌 부가적 항목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 또한 육체적 차원과 관련된 껍데기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이러한 육체 관련 껍데기로 사람을 판단하며 차별하는 것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악행임을 강조합니다. 차별하는 것 자체가 지옥에 가는 이유는 아닙니다. 영광의 주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차별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기에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예수님을 영광의 주님이라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창조주이시며 우주 전체를 모아놓아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좋음이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진정한 영광이란 가장 좋으신 하나님 우편에 자리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측근이 되는 일이야말로 영광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대통령의 측근이 되었다면 대단한 영광으로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주님이신 이유는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란 가장 낮고 천한 자리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가장 영광된 자리에 앉으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읽지 않은 12절을 보면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살펴본 1장에서도 예수님을 따라감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예수님을 따름이 ‘자유의 율법’이라는 표현으로 언급됩니다. 예수님 따름이 율법에 비유된 첫 번째 이유는 반드시 행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이 편지가 유대인들을 향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율법이라는 단어 자체는 유대인들에게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곧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까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가는 과정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이 과정이 우리 생활 속에서 무르익어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사골 뼈를 우려내는 것에 비유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믿음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고, 이 편지가 유대인들을 향한 것이기에 율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믿음은 곧 예수님을 따라가는 마음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마음의 행위라는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7절에서는 ‘믿음의 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또한 로마서 8장 2절에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 또한 6장 1절에서 ‘그리스도의 도’를 언급했습니다. 야고보 장로 또한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율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까지의 과정을 마음의 행위인 믿음으로 강조합니다.
그런데 ‘자유의 율법’이라는 표현을 좀 더 풀어보자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르는 것이 자유를 주는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동일시의 믿음을 통하여 시작됩니다. 나는 마음이 있고 육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와 관련된 사항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내가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십자가는 마치 과일을 깎는 과도처럼 작용합니다. 내 마음에서 육체 관련 껍데기를 다 벗겨냅니다.
이것이 몸과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해 마음이 죽는 것입니다. 육체의 껍데기를 다 벗었으므로 알 마음이 됩니다. 알 마음이 되면 예수님의 몸을 입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입는 마음의 옷은 육의 몸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죽은 예수님 몸속에 있는 우리의 마음 또한 같이 부활하게 됩니다. 또 예수님은 승천하셨기에 우리의 마음도 같이 승천하게 됩니다. 또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르셨기에 우리의 마음도 보좌 우편에 같이 있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의 측근이 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야고보 장로는 믿음을 ‘자유의 율법’으로 언급한 것입니다.
자유가 언급된 이유는 사람의 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일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시간과 노력을 바쳐 육체 관련 껍데기를 바꾸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은 부유해지고자 합니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높아지고자 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고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젊은이들은 좋은 직장을 갖고 멋진 배우자를 찾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람은 하나도 예외 없이 육체가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들입니다. 전부 육체 관련 껍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돼지껍데기가 인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껍데기에 대한 선호는 돼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는 아담 타락 이후로 육체 관련 껍데기만을 좋아했습니다. 평생의 노력과 시간을 들여서 육체 관련 껍데기를 바꿔보고자 합니다. 지금도 뉴스를 보면 육체 관련 껍데기에 대한 이야기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이와는 반대의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육체와 육체 관련 껍데기로 채워진 이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이 육체 관련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알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육체 관련 껍데기에 속해 있고, 매여 있고, 종속되어 있는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 십자가에서 육의 몸을 벗는 그리스도의 할례가 일어나면서 마음은 육체의 몸 대신 예수님의 몸을 입게 됩니다. 그럴 때 성령님이 내려오셔서 내가 벗은 몸을 장갑으로 끼십니다.
반대로 내 마음이 육체의 껍데기를 입고 있으려고 한다면 성령님이 내 몸을 장갑으로 끼실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육체를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육체를 빠져나가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영광의 자리에 이르면 성령은 임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일어나는 일은 예수님이 잘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 남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다섯 개의 조약돌로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일 또한 성령이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육체의 껍데기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조약돌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환경이 가난한 자의 어린아이 한 끼 식사에 불과한 오병이어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그것으로 어떤 일을 행하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성령님이 나를 통해 남북통일을 이루시고자 하신다면 그 어마어마한 과제를 이루기 위한 재료를 나에게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내게 돈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내게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내게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게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성령님이 필요한 대로 해나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부터 보좌 우편까지 이어지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알 마음이 되어 예수님의 몸을 입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육체 껍데기의 상황은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를 지배하신 분은 성령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 태어나셨고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지만,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은 사도 바울은 온 유럽을 복음화하고야 맙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육체의 껍데기를 벗어버린 스데반 집사님은 몸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하늘의 평강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 장로가 ‘자유의 율법’이라고 이야기한 믿음의 상황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볼 때는 육체 관련 껍데기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금가락지를 끼고 몸에 좋은 옷을 걸쳤다고 우대하지 않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형편이 가난하다고 해서 박대하거나 멸시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볼 때 육체 관련 껍데기로 판단하고 이로부터 우대하거나 멸시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내 안에 영광의 주를 따라가는 믿음이 끊어졌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중요한 표시입니다.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의 심판대를 통과할 때 나의 향방을 결정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육체 관련 껍데기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6~7절을 보면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부자들이 믿는 자들을 박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적대시하였다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는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와 같은 노골적인 차별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겉으로 박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부자라든지 기득권자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대했습니다. 더군다나 야고보서가 쓰인 46~49년 사이에는 국가적 차원의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부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대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자는 절대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깜짝 놀라실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다만 마음의 관점에서 부자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에서 알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돈이 많고 적음은 천국을 못 가는 이유가 아닙니다. 여기서 부자란 마음이 주어져 있는 재산에 스며들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십자가가 과도처럼 작동함으로 마음에서 육체 관련 껍데기를 깎아낼 수 없습니다. 실제로 돈이 있든 없든 마음이 돈에 스며들어 있고, 돈에 취해 있고, 돈 기운의 맛을 느끼고, 돈의 매력에 정복되어 있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돈이 있더라도 마음이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주어진 재산이 다 깎여 나가서 마음 바깥에 둘 수 있다면 부자가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재산에 대해 마음이 스며들지 않고 투입되지 않는다면 부자가 아닙니다. 반면에 실제로 내 명의의 재산이 없는 데도 마음이 돈을 소망하고, 열망하고 있다면 돈에 스며든 부자의 상태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 28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은 기준입니다.
사람이 부자가 되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주어져 있는 것들을 아까워하는 동안 부자가 됩니다. 그리고 주어져 있지 않은 것들을 열망하는 동안 부자가 됩니다. 그런데 주어져 있는 것을 아까워하는 부자이든,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을 열망하는 부자이든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배당 안에서 차별이 일어나는 이유는 육체 관련 껍데기에 마음이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육체 관련 껍데기에 근거된 사실들만을 중시하기 때문에 예배당 안에서조차 차별이 일어납니다. 제가 부목사로 섬기던 예배당에서 담임 목사님이 공공연하게 하시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각 구역을 맡은 부목사들은 유력자의 명단을 만들어 제출하라는 것입니다. 유력자라는 단어는 목회에서 나올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런데 담임 목사님은 아무런 가책 없이 유력자를 언급하였습니다.
물론 그런 단어 하나를 말했다고 해서 그분의 신앙적 인격 전체를 판가름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목사가 아닌 일반 성도일지라도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을 인용하는 수준에서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사람들을 유력자라고 생각하는 개념을 갖고 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믿음을 갖고 살면서 끊임없이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가진 자가 사람을 대할 때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어떠한 것일까요? 다시 12~13절을 보면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라고 ‘자유의 율법’에 이어서 ‘긍휼’이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영광의 자리인 하나님 보좌 우편에 머물게 됩니다. 긍휼이란 이러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육체 관련 껍데기에 갇혀서 그것이 자기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갖게 되는 마음가짐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늘과 땅의 격차에서 나타나는 마음이 긍휼입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 관련 껍데기를 입고 있는 사람들은 주렁주렁 매달린 것이 많을수록 마음이 높아집니다. 반대로 육체 관련 껍데기에 매달린 것이 없으면 마음이 낮아지고 비굴해집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 있는 사람이 이런 사람들을 볼 때는 기본적으로 긍휼한 마음가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하나님께서는 긍휼한 마음을 바탕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를 통해 당신의 뜻을 펼쳐나가시게 됩니다. 긍휼이라는 마음의 기본바탕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조금의 구애받음 없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활발하게 당신의 뜻을 표현해 가십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지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이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 하나님의 측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가 만나는 사람의 마음은 육체 관련 껍데기에 갇혀있습니다. 그것이 자기인 줄로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늘과 땅의 격차에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깁니다. 육체 관련 껍데기가 돈이 많든 적든 불쌍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이렇게 기본적으로 긍휼의 마음을 가졌을 때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행하심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뜻을 표현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가난한 자일수도 있고 부유한 자일수도 있고 심지어 범죄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육체 관련 껍데기에 갇혀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음이 분명하다면 이들을 대할 때 긍휼함으로 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격차에서 모든 사람을 대하실 때 긍휼로 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대하실 때도 긍휼한 마음을 바탕으로 대하셨으며, 막달라 마리아 여인을 대하실 때도 긍휼한 마음을 바탕으로 대하셨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인 여인에 대해서도 긍휼한 마음을 바탕으로 대하셨습니다.
한편 이러한 긍휼한 마음은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세력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제사장을 대하실 때도,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을 대하실 때도, 빌라도를 대하실 때도, 로마 군인들을 대하실 때도 언제나 예수님은 긍휼한 마음을 바탕으로 하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의 표현은 사람에 따라 달랐습니다. 제자들에게 뜻을 표현하실 때, 막달라 마리아에게 뜻을 표현하실 때, 바리새인에게 뜻을 표현하실 때, 빌라도와 로마 군인에게 뜻을 표현하실 때 방식이 모두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를 책망하셨을 때 단지 그에게 돈이 많았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라고 하는 육체 관련 껍데기에 갇혀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이 긍휼한 마음이 있으셨기에 부자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방해받지 않고 손상됨 없이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긍휼한 마음을 갖기 전에 내가 나쁘다, 좋다, 이렇다, 저렇다고 나의 뜻을 드러내며 판단한다면 하나님의 뜻은 결코 표현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을 향해서는 저주를 퍼부으셨고 간음한 여인은 보듬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차별하시지 않았습니다. 동일한 긍휼의 마음으로 이들을 대하셨고, 이러한 긍휼을 바탕으로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최선의 말씀을 하셨고, 바리새인을 위한 최선의 말씀을 하셨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최선의 말씀을 하셨고, 간음한 여인에 대해서도 최선의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서도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긍휼을 생각하기를 무조건 남을 보듬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긍휼의 마음은 모든 사람을 만나는 기본바탕입니다. 육체 관련 껍데기에 갇혀서 알 마음으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영광의 자리로 올라가지 못함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긍휼한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뜻과 입장을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마주하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긍휼은 기본바탕이나 긍휼을 바탕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은 다양합니다. 따라서 긍휼히 여김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오해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광의 주를 따라가는 믿음이 끊겨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 모든 사람에 대한 긍휼이라는 마음의 바탕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최선이 나를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한 인간관계를 맺어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한 가지 소원을 갖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마음의 흐름이 끊김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을 대할 때 하늘과 땅의 격차로부터 나타나는 긍휼의 마음이 바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이루어져야 될 하나님의 말과 행동이 표현될 수 있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