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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문학기행을 다녀와서
임선희
2024년 10월 29일 화요일, 장소는 목포 일원
월천문학기행 안내를 받은 후 출발 2주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렘이라기에는 이상하리만큼 꽤 묵직한 심장의 떨림이 있었다.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는 항구다’ 노래가 맴돌았다.
월천문학은 월천문예창작지도교실에서 정군수 교수님의 지도를 받고 있거나 받았던 회원들로 이루어진 문학동인회이다. 전북대평생교육원에서 시작됐지만 현재는 신아문예대학 강의실에서 문예창작수업과 문학 활동을 하고 있다. 월천문학에서는 해마다 문학기행을 다녀온다. 강의실을 떠나 새로운 세계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의 다리 역할을 하는 문학창작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이다. 나는 여러 해 기행 중에 필요한 먹거리를 담당하였다. 아침 8시에 출발해서 저녁 7시에 도착할 예정이라 중간 간식을 위한 과자와 사탕, 견과류, 귤 등을 사서 소분했다. 몇 번 했던 일이라서 내 손은 마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포장한 간식을 거실 한가운데 모아 놓고 보니 뿌듯했다. 하지만 쌓인 지퍼백을 보니 비닐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는 생각에 ‘미안하다. 지구야“ 말하고 잠을 청했다. 일찍 나서야 한다는 긴장감 때문이었을까? 새벽이 오도록 물고기 눈 마냥 눈꺼풀은 내려오지 않았다.
전주종합경기장 동문에서 출발하는 관광버스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7시 30분, 나름 일찍 출발했는데 문우님들은 벌써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며 생수와 간식을 차에 옮기고 떡과 통닭을 준비해 오신 문우님께 감사하다는 말도 했다. 정리가 끝나고 나도 자리에 앉았다. 전주종합경기장은 학창 시절 육상선수 생활을 하면서 나의 땀 냄새가 배인 곳이다. 그 냄새가 새벽 바람에 코끝을 스치는 듯했다.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처럼 많이 낡아버린 경기장이 곧 철거가 된다는 생각에 유난히 무릎이 시큰거리는 듯 했다.
버스는 중간 휴식처인 백양사휴게소를 향해 달렸다. 늘 그랬듯 한 명 한 명 짧은 인사와 자기 소개를 했다. 예전과 다르게 노래와 시낭송이 없어서 아쉽기도 했지먼, 마이크 울렁증이 있는 나는 속으로 참 좋았다.
마이크가 한 바퀴 돌고 나서 잠시 휴식을 하고 은경창 이사님께서 동학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가난했지만 한문을 읽고 쓸 줄 알아서 서당을 차려 마을 아이들을 가르쳤다는 이야기, 옛날 고부는 기름지고 넓은 농토와 해안을 끼고 있어 탐관오리들이 눈독을 들였던 곳이었다는 이야기. 고부에 부임한 조병갑이 만석보를 허물고 새로운 보를 쌓으며 농민들에게 강제 부역을 시키고 세금을 거뒀다는 이야기, 그것도 모자라서 모친이 죽자 2천 냥이나 되는 조의금을 거둬들이기도 한 이야기, 화난 농민들이 고부 관아로 쫓아가서 매를 맞고 사발통문을 써서 고부 군민의 한을 풀어주고자 했다는 이야기,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갔다가 다시 고부로 돌아온 이야기 등을 해주셨다. 그중 내 귀에 들어왔던 것은 전봉준이 순창에서 체포되었고 그 과정에서 다리가 부러졌다는 이야기였다. 전봉준 장군의 압송 장면이 떠 올랐다. 안도현 시인이 압송 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아썼다는 <서울로 가는 전봉준>의 시 한 구절도 생각났다.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게 참 어렵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요즘 세상에 태어난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고맙고 감사했다. 그리고 오래전에 있었던 웃픈 추억이 떠 올랐다. 동학혁명에 관한 시를 쓰겠다고 기계치이며 길치인 내가 친구와 함께 황토현에 가는 길이었다. 지름길로 가겠다며 들어선 농로에서 차가 고장이 나서 렉카에 거꾸로 메달려 전주까지 왔던 일이 있었다. 그 후 다시 가지는 못했지만 은이사님의 이야기로 그때 쓰지 못했던 동학혁명 시를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버스는 달리고 달려 드디어 목포에 도착했다. 해설사님과 문우님 한 분을 해상케이블카 승강장에서 만나 옥단이길과 시화 마을로 갔다. 차에 오른 해설사님은 목원동 골목이 ’옥단이 길‘이고 노적봉 예술공원으로 걷다 보면 고흐, 샤갈, 뭉크, 칼로 등의 예술 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걸으면서 봐야 볼거리가 더 많다고 했다. 지금은 유달예술타운이 된 옛날 달성초등학교 아래 골목은 소설가 박화성의 단편 소설 ’하수도 공사‘의 실제 배경이 되는 공간이라고 했다. 우리는 버스 창을 통해 눈으로 보며 목포 출신 극작가 차범석이 집필한 희곡 속 실존 인물인 옥단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달산 자락에서 물을 길어주며 물지게꾼으로 살았던 여자 옥단이는 천대를 받으면서 웃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차창 밖으로 혈관처럼 이어진 골목길이 살포시 보였다. 작가가 쓰지 않았다면 옥단이길이 있었을까? 가을 햇살 아래 편안히 쉬고 있는 옥단이가 보였다. 어쩌면 작가라는 직업은 메스 대신 펜을 들고 죽은 심장을 살려내는 최고의 문학 의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유달산 노적봉 주차장에 내린 우리는 노적봉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유달산 바위를 노적처럼 짚풀로 덮어 군량미로 위장을 했다는 봉우리에 단풍이 쌓이고 있었다. 우리는 노적봉 옆 산책 길을 따라 옛 일본영사관을 향해 걸었다. 중간중간 문우님들과 사진을 찍고 꽃과 나무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걷다가 기묘한 나무 앞에 멈췄다. 안내판에는 ’여자의 몸을 닮아서 쳐다봐도 아이를 가질 수 있어 다산목으로 불렀고, 임진왜란 때 염탐하러 왔던 왜군이 여자의 자태에 눈이 팔려 정보 수집을 못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쓰여있었다. 이번 월천문학 14호 특집 주제가 ’인구감소‘인데 시를 쓰기 위한 소재로 입맛이 다셔졌다. 나는 ’시를 순풍순풍 낳을 수 있게 해주세요‘ 기도했다. 분명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생각하니 배가 살살 아파지는 것 같았다.
혼자서 우스운 상상을 하며 목포근대역사관에 도착했다. 옛날 일본영사관으로 사용했다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이었다. 1층 입구로 들어섰는데 낯설지가 않았다. 내가 일제시대에 살았던 것도 아닌데 왜 건물이 눈에 익을까 생각하던 찰나, 드라마 ’호텔 델루나‘ 촬영지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 인생 드라마 중 공유가 주인공으로 나온 ’도깨비‘ 다음으로 재미있게 봤던 터라 나의 눈썰미를 스스로 칭찬하면서 전시관 구석구석을 돌았다. 목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지어진 곳에는 목포 도시의 변천사가 들어와 있었다. 100년이 넘은 건물인데도 상태가 좋아 보여 공들여 관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 관계상 2관은 포기하고 방공호를 돌아보는 것을 끝으로 점심 예약이 되어있는 유달만호횟집으로 향했다. 산책길을 돌아나오면서 해설사님이 ”동백꽃은 일 년에 몇 번 필까요?" 하고 질문을 했다. 정답은 세 번이었다. 나무에서 피고 땅에서 피고 가슴에도 피는 꽃이었다.
목포에 오면 꼭 먹어야 하는 목포 9미가 있다 한다. 세발낙지, 홍탁삼합, 민어회, 꽃게무침, 갈치조림, 병어회, 준치무침, 아구탕이다. 이 중에 우리의 점심 식사는 민어 코스였다. 서민들은 먹기 힘들었다는 민어를 회는 물론 껍질, 부레, 뱃살, 지느러미까지 다양한 부위를 맛보고 마지막 탕까지 시원하게 즐겼다. 여러 문학기행을 다녀봤지만 민어회는 처음이라며 문우님들과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음 행선지인 목포문학관에 가기 위해 버스에 탑승했다.
목포문학관은 극작가 김우진, 차범석, 소설가 박화성, 문학평론가 김현 등 총 4개관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우리는 시청각실에서 목포 출신 작가를 소개하는 영상을 봤다. 그리고 해설사와 함께 차례로 전시관을 둘러봤다. 먼저 차범석관은 요즘 시대에 맞게 디지털 아카이브 월을 통해 터치로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원고지에 쓴 작품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지우고 다시 쓰고 했던 흔적을 보고 있으니 편하디편한 컴퓨터 자판도 두드리지 못하고 있는 내 손가락이 부끄러웠다. 발을 옮기니 굵은 글씨로 써진 전원일기 원고가 눈에 들어왔다. 내 어릴 적 국민 드라마 전원일기, 얼마 전 일용엄니 역할을 맡았던 연기자 김수미님이 영면에 들어갔다.’ 노인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풀리지 않은 문제를 만났을 때 어른의 경험이 만든 지혜가 간절할 때가 있다. 내 나이만큼 시간 계단을 오를 때마다 주변 어른이 한 명씩 사라지는 건 참 서글픈 일이다.
최초로 장편소설을 집필한 박화성관은 소설의 주인공인 백화가 움직이는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영상이 내 발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옆에 지나가는 문우님들을 불러 세워 사진을 찍어주면서 다시 감탄했다. 장편소설을 집필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작가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다. 전주에 돌아가면 꼭 읽어봐야겠다 생각하면서 수첩에 적었다.
문학평론가로 유명한 김현관에는 작품에서 발췌한 주옥같은 문장들이 영상과 함께 비쳤다. 생전에 사용하셨던 유품들이 잘 보관되어 있었다. 손때가 묻었는데도 빛이 났다. 문학관을 찾은 관람객들의 시선이 늘 먼지를 털어줬기 때문인 듯 했다.
김우진관은 유독 조명이 우울해 보였다. 1926년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고 있어서일까? 부유한 집에 태어나 부친의 유별한 애정이 훗날 김우진의 삶을 고통스럽게 한 원인이 되었다니 예나 지금이나 돈이 전부는 아닌가? 라는 질문을 내게 던졌다. 돈이 있어도 꿈을 이루지 못하고 꿈을 이루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하고 이건 모순이다. 30세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는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김우진 작가의 아들인 김방한(서울대교수 역임, 2001년 10월 작고)이 아버지의 원혼을 불러 초혼묘를 썼다는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은 남의 입을 통해 들은 님의 소식이라는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커서 넋을 불렀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렸다. 관람을 마치고 나왔다. 목포문학관은 전시 공간 자체가 미사여구가 필요없었다. 내가 어느 작가의 문학관을 설립하거나 관계할 일은 없겠지만 하나의 예술품 같은 목포문학관을 눈에, 가슴에, 머리에 담뿍 담아왔다.
우리의 버스는 마지막 행선지인 갓바위로 향했다. 도로는 한산했고 하늘과 바다는 누가 더 푸른지 경쟁하지 않았기에 하늘빛도 바다빛도 고왔다. 갓바위를 보려고 바다 위에 설치된 해상보도교를 따라 걷는데 햇살과 바람이 부드럽고 달달했다. 갓바위는 꼭 버섯처럼 보였다. 오랜 기간 바람과 해식 작용으로 만들어진 바위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삿갓 쓴 사람의 모양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도 하고 부처님과 일행이 잠시 쉬어가던 자리에 삿갓을 놓고 가서 중바위라고도 한단다. 나는 버섯으로 보였다가 사오정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내 눈은 보는 수준이 턱없이 낮은 모양이다.
갓바위를 마지막으로 해설사님과 마침 인사를 했다. 전주로 오는 길에 해설사님과 문우님을 오전에 만났던 자리에 내려주고 기사님이 목포에 와서 들리지 않으면 서운한 곳이라며 목포대교로 우리를 이끌었다. 세월호가 거치된 곳도 알려주셨는데 마음이 숙연해졌다. 아침과 다르게 유달산 뒤쪽을 감상하며 목포야 잘 있거라! 인사를 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았다. 에너지도 소진되었고 살짝 잠을 자보려고 했지만 가을을 받아들이고 있는 나무들이 휙휙 지나가면서 잠을 쫓았다. 내가 월천에 와서 갔던 첫 문학기행은 삼천포였다. 버스에서 시를 낭송하고 노래를 하면서 오가는 길에 마이크를 놓을 일이 없었다. 문우님들의 지치지 않은 체력에 놀라기도 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버스 뒷자리에서 문우님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웃고 계시지만 달라진 듯 달라지지 않은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전주에 들어서자 퇴근 시간과 맞물려서인지 도로가 복잡했다. 경기장 앞까지 무사히 도착한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뒷정리를 하고 헤어졌다. 콩나물국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하루를 복기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출발 전 묵직했던 심장 떨림의 이유도 알았다. 잊고 지냈던 아버지가 소환된 것이다.
아버지는 낚시터 관리소장이었다. 말이 소장이지 아침, 저녁 손으로 노를 저어 저수지를 돌며 낚시꾼에게 사용료를 받아오거나 원하는 장소에 실어다 주거나 그들이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서 팔았다. 잠시 쉴 때는 노트에 뭔가를 쓰고 지우고 찢던 아버지는 책 욕심도 많았다. 우리가 믿거나 말거나 글쓰기 대회에서 장원도 했었다고 말하던 아버지는 비가 와서 저수지에 사람이 없는 날이면 마이크를 대고 노래를 불렀다. ’목포는 항구다‘였다. 목포가 고향이 아닌 아버지는 이 노래의 어느 구절이 마음에 닿았길래 그렇게 ’목포는 항구다‘를 비만 오면 불렀을까? 타향살이가 힘들어서였을까? 꿈을 이루지 못한 설움이었을까? 가끔 삑사리났던 음정이 아버지의 눈물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한동안 이 노래가 귀에 쟁쟁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