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지정 유형문화재
국가지정문화재國家指定文化財는 현덕면 덕목리에 있는 평택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 진위면 동천리에 있는 평택 만기사철조여래좌상, 도일동의 원릉군원균선무공신교서가 있다.
평택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불상의 조각수법, 법의法衣형식, 비로자나불이 유행했던 시기 등을 감안할 때 조성造成 연대가 신라 하대로 보이는 불상이다.
평택 만기사철조여래좌상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나말여초羅末麗初 평택지역의 정치변동과 호족관계를 연구할 때 중요한 근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유물이다.
원릉군원균선무공신교서는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내며 수많은 전공을 세우다 전사한 원균 장군이 권율·이순신과 함께 선무1등 공신에 녹훈된 사실을 증명하는 교서다.
[국가지정문화재]1)
번호명칭위치지정번호지정일시대
1 | 평택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 | 현덕면 심복사길 22 | 보물 제565호 | 1972. 3. 2 | 통일신라시대 |
2 | 평택 만기사철조여래좌상 | 진위면 진위로 181-82 | 보물 제567호 | 1972. 7. 22 | 고려시대 |
3 | 원릉군원균선무공신교서 | 원릉군길 96-3(도일동) | 보물 제1133호 | 1992. 4. 20 | 조선시대 |
평택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平澤 深福寺石造毘盧遮那佛坐像
지정번호 : 보물 제565호(지정일 : 1972. 3. 2)
소 재 지 : 현덕면 심복사길 22
평택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현덕면 덕목리 조계종 사찰인 심복사 대적광전大寂光殿에 있다. 불상 높이121cm, 대좌 높이 107cm, 상대직경113cm, 하대직경 115cm로 현재 광배光背는 없고 대좌와 불신佛身은 잘 보존돼 있다. 재료는 화강암으로 연화대좌위의 불상은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으며 굵은 나발螺髮에 육계는 낮고 평평하게 표현됐다. 타원형 얼굴에 가늘게 뜬 눈은 옆으로 길게 표현했으며 입은 단정하게 다물었다. 귀는 두텁고 크게 표현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어깨는 넓고 건장하며 법의法衣는 통견通絹을 하고 있다.
| 평택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 |
법의 좌우 옷자락에는 가슴 쪽으로 5단 옷자락이 흘러내리고 양팔에도 같은 형태로 옷 주름이 표현됐다. 옷자락 끝단에는 반원형 꽃잎을 두른 화문花紋조각이 어긋나게 표현됐는데 다른 불상에서 표현되지 않는 특이한 점이다. 대좌臺座는 8각을 기본으로 상·중·하대석으로 구분되며 하대석은 복련伏蓮을 표현했다. 중대석에는 두 마리 사자가 앙련仰蓮의 상대석을 떠받치고 있다. 대좌에 쌍사자를 표현한 것은 매우 특이한 형태로 주목된다.
불상은 신라 하대 것으로 판단되며 전체적으로 볼 때 어깨와 가슴이 벌어지고 신체 비례가 조화롭다. ‘일체의 무명번뇌를 끊고 부처님 지혜를 얻는다’는 비로자나불의 내면세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평택 만기사철조여래좌상平澤 萬奇寺鐵造如來坐像
지정번호 : 보물 제567호(지정일 : 1972. 7. 22)
소 재 지 : 진위면 진위로 181-82
평택 만기사철조여래좌상은 진위면 동천리 조계종 사찰인 만기사 대웅전 안에 있는 고려 초기 불상이다. 본래의 절이 폐사廢寺되고 옮겨지는 과정에서 광배光背와 대좌는 사라지고 양손과 오른팔도 떨어졌다.
| 평택 만기사철조여래좌상 |
현재의 불상은 양손과 오른팔을 접합하고 금金으로 개금改金해 본래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됐다. 나발螺髮의 머리에 둥글고 큰 육계가 얹혀 있으며 갸름한 얼굴과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반쯤 뜬 눈과 갸름한 코, 근엄하게 다물고 있는 입, 뚜렷한 삼도三道 등 이목구비가 나말 여초의 강건한 호족豪族 기상에서 점차 귀족화돼 가는 과도기적 양식을 느끼게 한다. 법의法衣는 우견편단을 하고 있다.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왼쪽 어깨에 걸쳐진 법의는 어깨 위에서 4단을 이루며 한번 겹쳐졌고 왼팔로 흘러내리는 옷 주름은 밀집되게 표현했다. 불상 크기는 높이 142.5cm, 어깨 폭 58cm, 무릎 폭 92㎝다.
철 불鐵佛은 시기적으로 나말 여초 시기인 9세기 중엽 이후 호족세력이 대두하고 선종禪 宗이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하면서 만들어진 불상이다.
| 원릉군원균선무공신교서 |
평택 만기사철조여래좌상은 철원도피안사의 철조여래좌상보다 제작 연대가 늦고 규모도 작다. 규모면에서는 훨씬 크지만(288cm) 시기적으로 비슷한 경기도 광주의 춘궁리 철불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철원도피안사의 철불이 강하고 단단한 근골, 강한 눈매, 강건한 기상으로 9세기 선종과 함께 유행한 비로자나불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비해 춘궁리 철불과 평택 만기사철조여래좌상은 10세기에 나타난 항마촉지인의 수인手印에 석가여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고 기상이 많이 부드러워진 것이 특징이다. 수인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라는 시대적 배경과 관련 있을 것으로 보인다.
원릉군원균선무공신교서原陵君元均宣武功臣敎書
지정번호 : 보물 제1133호(지정일 : 1992. 4. 20)
소 재 지 : 원릉군길 96-3(도일동)
임진왜란 당시 장군이며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전사한 원균이 전쟁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 37) 이순신·권율 등과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 일등에 책록된 사실이 기록된 자료다. 원균의 자는 평중平仲이고 본관은 원주다. 1540년 1월 5일, 아버지 준량俊良과 어머니 남원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산만호造山萬戶 시절,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워 부령부사富寧府使로 특진했고 1592년 경상우도慶尙右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임명됐다.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휘하에는 배가 3척 밖에 없어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해 옥포玉浦 앞바다에서 왜선 30여 척을 격침시켰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자 갈등이 있었으며 1595년 충청도병마절도사, 1596년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됐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수군통제사가 됐다. 7월 16일 출전했으나 칠천도漆川島에서 패전하고 전사했다. 1604년 이순신·권율 등과 함께 선무공신 일등에 봉해졌으며 좌찬성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추증됐고 원릉군原陵君으로 추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