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
요즘 나는 3월부터 한 달에 한 번 ‘더불어 숲 도서관’에 모여서 생활 글쓰기 수업을 듣는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선생님은 『작은 책』의 편집자 겸 발행인으로 오시는 날에는 내가 비서가 되어 픽업한다. 덕분에 이날은 자연스럽게 선생님과 동선을 함께 하는데, 선생님은 나에게는 낯선 삶의 길을 보여주셨다. 내가 알고는 있었지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삶의 모습이었다. 수업이 진행되는 ‘더불어 숲 도서관’ 근처에는 울산과학대학교가 있고, 그 정문 앞에는 10년 넘게 부당해고에 대해 抵抗(저항-어떤 힘이나 조건에 굽히지 아니하고 버팀)하는 용역업체 소속 청소노동자들이 있다. 나는 더불어 숲과 인연을 맺은 지 3년이 지났고, 그곳을 오고 가며 그분들이 농성하시는 것은 알았지만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수업하시러 오는 첫날 선생님은 그분들과 오랜 인연이 있다면서 인사를 드리러 가셨다. 나 역시 낯선 천막과 그 안의 낯선 사람들을 만나러 갔다. 천막 안에 들어가자마자 낯섦은 사라지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과 그분들의 오래된 인연은 덩달아 따라간 나까지 오래된 인연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곳을 방문하기 전에 선생님께 말한 내 이야기가 부끄러웠다. “저는 저렇게 할 시간이 없었어요. 불의를 보거나 불공정한 일을 당해도 맞서서 싸운다는 생각을 한 적이 전혀 없었어요. 내 삶이 워낙 바빴기에...”
천막 안에는 한 눈으로 봐도 고령인 분들이 계셨는데, 10년의 세월을 참고 견디는 모습과 아직 잃지 않은 미소와 친절함이 내게 여러 생각이 들게 했다.
그분들을 만난 지 얼마 후, 나는 경주에서 내가 경험한 부당함이 떠올려졌다. 2014년 우연한 기회에 경주에 있는 청소용역업체에서 환경미화원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약 1년 2개월을 일하는 중, 울산에 계신 부모님이 몸이 아프셔서 울산에서 부모님을 보살피며 직장을 찾다가 다시 청소용역업체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미 경주에서 일했던 경험으로 새벽에 일하는 환경미화원 일이 낮에 부모님을 보살피기가 좋았다. 같은 업종인데도 불구하고 울산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경주에서 일할 때는 휴일에 일하면 당연히 줘야 하는 특근 수당이 없었다. 연차도, 휴가비와 휴가, 안전화를 비롯한 안전 물품 등 아무것도 제공되는 것이 없었다. 내가 다닌 청소용역업체는 경주시의 하청 업체로 계약상 직원들에게 줘야 하는 기본적인 것들을 사장이 모두 착복했다. 지금 다니고 있는 울산의 회사에 다니면서 이 모든 것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내 월급은 180만 원과 식대뿐이었고, 나는 수입이 부족해 일을 2가지 더하며 힘들게 살았기에 화가 났다. 하지만, 난 뒤 늦게 알게 된 이 모든 부당함에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현실이 너무 벅차기에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다. 내가 살기에 급급해 잊고 있었던 부당함과 비슷한 맥락에서 10년 넘게 ‘저항’하고 계신 어르신들이 참 대단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노래방, 창고개방할인매장, 대형마트, 맥도날드, 약국, 용산전자상가, 단란주점, 나이트클럽, 룸살롱, 레스토랑, 재수생학원, 주유소, 가스충전소, 전단지 배포 및 포스터 붙이기, 개인과외, 가구점, 공업사, 전국 골프장 농약 뿌리기, 방수, 철거, 자동차 부품공장, 외국인 노동자 한글 선생님, 제약 영업, 이삿짐센터, 육묘장, 신문 배달, 우유 배달, 풋살구장 관리, 택배, 치킨 배달, 결혼식장 주차장, 새벽 세차, 대구 매천 도매시장(물미역, 나물, 채소), 학성 새벽시장 과일가게, 분식 배달, 서점, 미용실, 현대 자동차 2공장, 한약 도매상(약업사), 리드인(독서 학원), 환경미화원, 현장 도시락 배달, 석탄 및 사료 샘플링 작업, 작가...
지금까지 경험한 직업이 40가지가 넘는 나는 이건 아니다 싶으면 직업을 바로 바꾸곤 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태 들여야 했기에 내 나름의 빠른 판단이 필요했고, 이건 아니다 싶으면 이른 시간 안에 그 일을 접었다. 내 삶에 ‘저항’ 한다고 바쁘게 살았기에 사회와 그 부당함에 ‘저항’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다. 하지만 일흔을 넘긴 어르신들의 ‘저항’은 내 ‘저항’과는 차원이 다른 낯선 저항이었다. 나의 ‘저항’은 단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어르신들의 ‘저항’은 사회의 잘못된 관행과 불공정함에 대한 것이었다.
며칠 전에 우연히 알게 되어 읽은 책이 있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란 책이다. 거기에는 세탁소와 옷걸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세탁소에 새 옷걸이가 들어왔는데 헌 옷걸이가 말을 건다. “앞으로 너는 다양한 옷을 입게 될 거야. 하지만 그 옷이 너 자신이 아니라는 걸 기억해야 해.” 그게 무슨 말이냐고 새 옷걸이가 묻자 헌 옷걸이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그 옷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옷걸이를 너무나 많이 봤어.” 이 문구를 읽은 순간 꼭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나는 수많은 직업을 경험하면서 나 자신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저항’할 순간 저항하지 않았고, 불공정에 맞서는 것을 스스로 회피했다. 진짜 내 모습은 지나온 삶에서 수없이 세탁되었다. 어르신들의 10년 넘은 ‘저항’이 지난 내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