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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타고 온 크루즈선이 안전하게 스톡홀름 항구에 정박하자 우린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배에서 내렸다. 크루즈 터미널 밖으로 나오니 스톡홀름 현지가이드 이인자씨가 우릴 반갑게 맞이하고 그녀를 따라 버스를 타러 간다. 버스를 타고 바사호 박물관으로 가는 도중 현지가이드인 이인자씨가 스웨덴과 스톡홀름에 대해 설명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인자씨는 스톡홀름에서 32년간 거주했다고 자기소개를 하면서 <이곳에서 노르웨이 스타방게르 공항까지 앞으로 5일간 계속 이용할 버스는 Latvia에서 온 버스로 기사도 Latvia 사람으로 이름은 카스티스”이다. 여행하는 동안 편의를 위해 스웨덴말 몇 가지를 소개하면 사람을 만났을 때 보통 영어로“하이”를 여기 사람들은 “헤이”, 고맙다는 뜻의 영어“Thank You”는“탁탁(Tack Tack)”이라고 말하니 식당이나 호텔에서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오늘의 일정은 바사호 박물관을 먼저가고, 다음엔 노벨상 디너파티를 하는 스톡홀름 시청사를 본 다음 12시 30분경 점심식사로 청어요리를 드신 후 구시가지인 감라스탄으로 가 스웨덴 왕궁 주변을 돌아 본 다음 14시 30분경 칼스타드로 떠나게 된다. 칼스타드는 여기서 300km떨어진 곳으로 약 4시간 걸릴 것이며 칼스타드의 Karl은 왕이란 의미로 KARSTAD는 “왕의 도시”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북유럽은 과거엔 여름에 선풍기도 없이 살았으나 요즘 지구 온난화로 여름에 기온이 30~33도 까지 올라가 각 가정 및 사무실에 선풍기와 에어컨을 설치하기 시작했고 숲 속이나 호수로 여름휴가를 떠난다. 1995년 유럽연합(EU)에 가입했으나 유로화를 쓰지 않고 자국 화폐인 스웨덴 크로나(SKR)를 사용하는데 1SKR은 한화로 약 130원 정도다.>라고 소개한다.
스웨덴은 남북 약 1,600km, 동서 약 500km인 아주 긴나라로, 노르웨이,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남쪽 끝은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덴마크와 마주하고 있다. 루터파 개신교가 다수이며, 국가원수는 국왕이며, 정부수반은 총리로 의원내각제가 혼합된 입헌군주국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회보장 및 부의 평등 분배와 같은 준(準)사회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복지국가로 사회보장제도는 거의 무제한적 혜택을 주며 진료비의 거의 전액을 부담한다. 스웨덴은 세계에서 가장 포괄적 사회복지제도를 수립했는데 비용은 개인소득에 대한 세계 최고 세율(국민 일인당 세금 부담률 55%)에 의해 충당된다.
스웨덴에는 BC 9000년경부터 인간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9~10세기 스웨덴 바이킹들은 발트지역과 동부러시아에 터전을 잡고 남쪽으로 드네프르 강과 볼가 강을 따라 비잔티움과 중동에 이르는 교역로를 장악했다. 1397년 덴마크는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3국의 왕이 되어 3개국을 통치했으나 1523년 스웨덴의 구스타프 1세 바사는 독립국가 스웨덴 통치자로서 왕위에 올라 1720년까지 지속되었던 바사왕조의 계보를 확립하고 루터교를 국교로 삼았다. 17세기에 스웨덴은 발트지역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바사 왕조의 군주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인물인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독일과 연대해 로마 가톨릭교회와 전쟁을 벌였다. 1709년 러시아 침공에서 무참히 패배한 대(大)북방전쟁에서 카를 12세의 죽음으로 유럽 열강으로서 지위를 잃었고 이후 몇 년 동안 영국의 동맹국으로서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했으나, 구스타프 4세의 지도력 부족으로 1808년 러시아에게 핀란드를 내어주고 말았다. 1809년 구스타프 4세는 퇴위하고 왕위 승계를 둘러싼 위기 상황 속에서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 육군원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카를 요한이란 칭호를 갖게 되었으며, 1818년 카를 14세로 왕위에 올라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1809년 입헌군주제를 도입했으며 1814년 노르웨이와 통일했으나, 1905년 노르웨이 독립을 승인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중립을 선언했지만 무역이 큰 타격을 입어 극심한 식량부족을 겪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립을 공포하고, 전쟁 중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스웨덴은 2번의 세계대전 기간 중립을 유지하면서 전쟁에 필요한 철 수출로 떼돈을 벌어 세계 3위의 부국으로 성장했다. 2차대전 후 스웨덴은 UN에 가입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 러시아의 침략에 대응해 2023년 NATO 회원국이 되었다. 1975년 제정된 새 헌법에서 왕은 공식적 국가원수의 권한만 갖도록 하는 등 왕의 권력을 축소했다. 1997년 논란이 되었던 원자력 산업시설이 폐기되기 시작했다. 21세기 초에 이르러, 스웨덴은 전자통신과 정보기술 분야에서 유럽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스톡홀름(Stockholm)은 스웨덴의 수도이며 스칸디나비아반도 최대 도시로“북방의 파리”로 불린다. 또한, 1,800여개의 섬을 끼고 있어 또는 "북방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린다.‘스톡홀름’은 Stock은 통나무, holm은 섬 또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이 이름은 이 지역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이 멜라렌호(Mälaren) 상류에서 통나무를 동동 띄워 땅에 닿는 곳에 도시를 짓기로 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철광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멜라렌 호와 발트해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로 개발되기 시작해 칼마르 동맹(Kalmar Union)의 덴마크 왕들 사이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1523년 구스타브 1세 바사(Gustav Vasa) 왕이 즉위하며 중심 도시로서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하였고, 17세기 스웨덴이 북유럽의 강국으로 떠오르면서 1634년 공식적으로 스웨덴 왕국의 수도로 선정되었다. 18세기에는 흑사병과 대북방 전쟁으로 인해 도시 일부가 파괴되는 등 침체기를 맞았으나, 여전히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로서 역할해 왔으며 지금은 시 구역 내 약 98만 명, 스톡홀름 주에 180만 명, 수도권엔 대략 250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스톡홀름은 치안이 그리 좋지 않아 절도강간폭력사건 등의 발생비율이 OECD 2위로 한국의 10배 이상 치안이 불안하며 성폭력 범죄도 OECD 2위로 유럽 최고 수준으로 난민을 많이 받아들이고 조직 폭력배들이 집시들을 집단으로 이주시켜 소매치기 사고가 많이 발생하고 있어 휴대폰, 지갑 등 소지품 도난에 주의해야 하며 특히 가방은 반드시 앞으로 메고 다녀야 한다. 또한 스톡홀름 증후군의 유래가 된 곳으로, 스톡홀름 증후군이란 인질로 잡힌 사람이 범인과 같이 오래 있거나 학대를 오래 받다가 보면 범인이나 학대하는 사람에게 동화되고 감화되어 그들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는 현상으로 1973년 은행 강도가 인질들을 6일간 붙잡고 있는 과정에서 범인과 동화가 되어 범인을 감싸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현상을 보고 범죄 심리학자가 붙인 현상이다.
스톡홀름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바사전함박물관으로 간다. 박물관 앞에서 이인자씨는 <스톡홀름은 도시 규모에 비해 박물관이 많은 문화도시로 박물관이 83개나 있는데 그 중 관람객이 가장 많은 바사전함박물관(Vasamuseet)은 바사 왕가의 구스타프 2세가 재위하였던 1625년에 건조돼 1628년 8월 10일 처녀항해 때 침몰한 전함 바사호가 전시된 곳이다. 스웨덴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참나무로 만들어진 호화 전함으로 길이 69m, 높이 48.8m, 탑승 인원 450명, 탑재 대포 64개에 이르는 거대한 배로, 동시에 300kg 이상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강력한 화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국내외 귀빈 등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수식을 하고 만으로 나가자 말자 돌풍이 불어 배가 기울자 열린 포문사이로 물이 스며들어 수분 만에 침몰하고 말았다. 이 사고로 배에 승선하고 있던 150여 명 중 30여 명이 익사했다. 침몰한 정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렇게 큰 배를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해서라고 한다. 1956년 해양고고학자인 안데스 프란첸에 의해 발견되어 1961년에 인양되었는데 1962년부터 임시박물관에 있다가 1988년 바사호에 맞춰 새로 만든 현재의 박물관으로 이전했다. 뱃머리 보우 스피릿에 붙어 있는 사자상은 구스타프2세를 상징한다. 이 배가 바다에서 안 썩고 이렇게 오래 있었던 것은 스톡홀름 항구의 염분이 옅고 수심이 얕은 갯벌 속에 박혀 있어 목선을 갉아먹는 조개가 접근을 할 수 없고 갯벌이 냉장고 역할을 해서 미생물의 번식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한다.>고 설명한다.
배에 실려 있었던 대포나 기구류도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배의 전후좌우의 장식을 보면서 '호화찬란'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바사호의 인양과정을 세세하게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으며, 벽에는 바사호의 후면 인물 장식을 복원해 놓았는데 그 다양함과 정교함이 돋보인다. 인양해 복원해 놓은 바사호 전함을 보면서 저렇게 멋지게 만들어진 전함이 있을까? 비운의 아름다운 황후 같은 운명을 지녔던 바사호 전함이란 생각이 든다.
바사전함박물관 입구에는 스웨덴의 문화사를 전시한 북방박물관(Nordisk museet)이 있는데 우린 그 박물관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버스에 오른다.
스톡홀름 시청사로 가는 버스 안에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사람들의 조상은 북 게르만족으로 지금도 이들은 언어도 비슷하고 큰 키와 체격에 힘이 좋고 털이 많은 얼굴 모양 등 닮은 점이 많다. 이들의 조상인 바이킹은 8세기~11세기 배를 타고 무역이나 약탈로 살아가던 북게르만족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틀란드 반도에 한정되어 살고 있던 이들은 8세기 말부터 강력한 철기 무기를 갖추자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서서히 남하했다. 발트 해와 북해는 물론, 지중해와 흑해 심지어 카스피해 등 바닷가라면 유럽 어디든 배를 타고 약탈했으며, 브리튼제도, 프랑스,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등 지중해권과 유럽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전성기에는 잉글랜드의 7왕국들을 모두 멸망시킬 뻔 했으며, 서프랑크 왕국의 수도 파리를 함락 직전까지 몰아넣어 당시 유럽인들은 바이킹을‘신의 진노’라고 불렀다.>라고 설명한다.
바이킹이 등장하게 된 원인은 첫째 8세기 이후, Medieval Warm Period라고 불리는 따뜻한 기후에 힘입어 인구가 급증하자, 한정된 자원을 넘어서까지 계속 인구가 늘어나자 새로운 식량 공급원과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서게 되면서 조직적으로 전 유럽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둘째 이슬람 세계와 유럽 세계의 동반 성장 덕분에 유럽은 갈수록 부유해졌지만 지나치게 북쪽에 자리해 아직 그만큼의 부를 획득하지 못했던 바이킹들은 잉글랜드와 서유럽 해안가에서, 심지어 동유럽과 중동까지 가서 해적질을 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셋째 8세기에 들어 더 거대한 돛의 도입, 태킹, 24시간 항해와 같은 발달된 항해술이 도입되었고, 배도 이전보다 훨씬 정교해져 신속하게 멀리까지 원정해 약탈과 무역을 할 수 있었으며 넷째로는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잉글랜드는 체계적인 방비체계가 없어 부를 지킬만한 무력이 부족했던 반면 스웨덴과 덴마크, 노르웨이 등에서는 점차 중앙집권화를 이룬 왕들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많은 토착 유력자들을 억압하자 이들은 해외로 눈을 돌려 브리튼 제도나 서유럽을 약탈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킹들도 유럽 각국에서 더 이상 치고 빠지는 전술이 통하지 않을 만큼 해안 방비가 강화되었고, 말을 타는 기사들의 등장으로 보병 위주의 바이킹들의 공격력이 상대적으로 크게 약화되었으며, 결정적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기독교화(같은 기독교도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걸 금지한 교리 때문에 바이킹들이 가장 큰 이익을 봤던 노예무역이 더 이상 불가능)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왕국들이 세워지면서 자국민들이 함부로 타국을 약탈하는 걸 엄격히 금지시켰고 결국 1066년 스탬퍼드 브리지전투에서 노르웨이계 바이킹 군대가 패배하면서 바이킹시대의 종말을 맞이했다. 해적으로서의 야만스러운 바이킹의 인상이 깊게 남아있어서 '거대한 도끼를 들고 뿔 투구를 쓴 잔인하고 마초적인 바바리안'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탁월한 항해사이자 탐험가, 상인이기도 했다.”고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위 내용에는 내가 공부한 바이킹에 대한 것도 추가되어 있다.
시청사가 가까워지자 현지가이드 이인자씨는<스톡홀름 시청은 쿵스홀멘 섬 동쪽 끝에 위치하는데 노벨상 기념 만찬이 열리는 장소로 19세기말 스톡홀름이 급속하게 팽창하면서 큰 장소와 공간이 필요해져 건축가 라그나르 오스트베리가 설계해 시민들의 기부금을 받아 1911년 짓기 시작하여 1923년에 완공되었는데 약 800만개의 벽돌과 1,800만개 이상의 타일이 사용되었다. 시청사에는 시청직원 일부만 근무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공간은 행사장과 시의회로 쓰이고 있다. 르네상스양식의 걸작으로 손꼽히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청이란 찬사를 받고 있는 건물 내부는 청색 홀, 금색 홀로 나뉜다.>고 설명하며 우리 일행을 시청사 청색 홀(블루 홀)로 인도한다.
블루 홀이란 방 이름은 건축가 오스트베리(Östberg)의 첫 번째 초안에서 유래하는데 뒤에 색을 바꾸었다. 벽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벽에 궁중 문양으로 장식을 하였다. 멜라렌 호수 밑의 진흙으로 800만 개의 벽돌을 만들었고 그중 100만 개는 수제인데 그 색이 주는 감이 좋아서 건축가는 차마 푸른색을 칠하지 못했다고 한다. 블루 홀은 청사, 행사장, 연회장의 기능을 갖는다. 시청사의 가장 큰 행사장으로 매년 12월 10일 노벨상 수상식 후 축하 만찬회가 열리는 장소이다. 노벨상 수상자 가족과 스웨덴 왕실의 왕족 등이 참석한다. 노벨상 시상식 만찬에는 1200명 정도가 참석한다고 한다. 스웨덴의 대학들이 이곳에서 입학식과 졸업식을 하고 기업행사도 많다고 한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드레스를 입고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낮고 넓게 설계되어 있다. 계단 좌측에 10m 길이의 10,270개의 파이프와 135개의 스톱을 갖춘 북유럽에서 가장 큰 사이즈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오르간은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큰 오르간이라고 한다.
왼쪽으로 장식물이 서있고 계단을 올라가니 시의회 회의실이다. 101명의 의원들이 있으며 남녀 비율은 1:1이라는데 좌에서 우로 진보정당에서 보수정당으로 정당별로 배열된 의원들의 좌석과 중앙의 의장석은 짙은 자주색 책상과 의자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고 책상위에는 의원들의 소속 정당명과 이름이 새겨진 명패가 놓여있는데 어쩐지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의장석은 무대처럼 보이고 뒤에는 동양의 창호문 같은 장식이 있다. 회의실 안에는 유명한 의원들의 흉상이 장식되어 있는데 우측 청동 흉상은 의장을 지낸 칼 알버트 앤드슨의 흉상이라고 한다. 의회 회의장은 평시 관광객에게 공개되며 회기 내에는 일반인도 방청이 가능하다. 회의실 천정은 독특한 모습인데 바이킹들이 타던 배를 뒤집어 놓은 모습으로 예전에 바이킹들은 육지에 도착하면 타고 온 배를 엎어놓고 그 안에서 생활한 것을 형상화했고 천장 가운데 파란색 부분은 바이킹들이 배에서 보던 하늘의 구름과 달과 별의 모습이라고 한다.
시의회 회의실을 나와 가이드를 따라가니 청색 대리석 기둥이 열주를 이루는 복도처럼 생긴 회랑이 나오는데 왕자의 방이란다. 이곳은 접견실로 사용되는데 벽면의 창을 통해 스톡홀름의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볼 수 없는 창을 등진 쪽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 스웨덴의 왕 오스카르 2세의 막내 아들인 유센 왕자가 직접 바깥 풍경을 프레스코화로 그려서 보여 준 것이라고 한다. 배려라는 것이 이런 것이란 걸 느끼게 해 준다.
골든 홀 입구 시계 아래에 청사 건축가 라그나르 오스트베리의 부조가 있다. 건축 모형을 들고 고민하는 모습이다. 2층 발코니의 난간은 황금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1800만개 이상의 금박 모자이크로 장식된 골든 홀에는 스웨덴의 역사를 소재로 한 금박타일 모자이크 벽화가 설치되어 있는데 하나하나 모자이크로 처리된 모습을 보니 입이 딱 벌어진다. 정면에는 동양과 서양 사이의 중심을 나타내는 멜라렌 호수의 여왕이 황금빛 모자이크로 둘러싸여 있으며 좌우 벽에는 스웨덴 역사상 유명 인물과 사건들을 형상화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방은 노벨상 수상자들의 만찬 후 무도회가 열리는 장소로 700명을 수용한다고 하는데 나야 직접 참석할 수 없으니 마음속으로라도 무도회에 동참한 걸 상상해 본다.
다시 계단을 내려와 시청사 밖으로 나오니 남동쪽에는 106m에 달하는 높이를 가진 탑이 설치되어 있는데 탑의 꼭대기에는 스웨덴을 상징하는 3개의 왕관이 장식돼 있다. 이 탑은 엘리베이터 또는 365개의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으며 탑 안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서 스톡홀름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하나 우린 올라가지 않고 시청사 앞 공원으로 간다.
시청사와 멜라렌호 연안 사이 공원에는 15세기 칼마르 동맹 때 덴마크에 대해 최초로 반란을 일으켰던 스웨덴의 혁명가 엥엘 브렉트손의 동상, 스웨덴의 조각가 칼 엘드가 제작한 조각 작품이 설치되어 있으며 공원 앞 쪽에 수로가 있어 매년 12월에 노벨상 수상자들이 이곳을 통해 배를 타고 입장한다고 한다. 공원에서 멜라렌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후 버스를 타고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