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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행 지 : 소백산 자락길 7, 8자락(영춘면사무소~주막거리) 충북 단양군, 경북 영주시.
산 행 일 : 2024. 10. 12.(토)
산행코스 : 영춘면사무소 ~ 느릅실고개 ~ 동대리 ~ 의풍옛길 입구 ~ 베틀재 ~ 의풍리(7,8구간 분기점) 의풍분교 ~ 삼도접경공원 ~ 마흘천 ~ 현정사 ~ 남대분교 ~ 주막거리 (7자락 18.2㎞ + 8자락 6.5km = 24.7km, 7시간 40분 소요)
산행참석 : 21백두.
▶ 즐산팀은 의풍리에서 7자락 종주를 마치고 김삿갓문학관 탐방.
<7자락 십승지의풍옛길 : 영춘면사무소~의풍리 (18.2㎞, 6시간)>
7자락은 남한강가에 깎아지른 석벽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장관을 구경할 수 있는 길이며, 정감록 십승지의 하나로 소개된 색다른 산골마을이다. 고려 때부터 소금을 운반하던 염로였고, 의풍리에는 정감록 십승지를 찾아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인근에 조선후기 방랑시인 김삿갓을 만날 수 있다.
<8자락 삼도화합길 : 의풍리~주막거리 (6.5㎞, 1시간 50분)>
8자락은 영월군 김삿갓면, 단양군 의풍리, 영주시 남대리를 거쳐 봉화군 생달마을로 이어지는 3도 4개군을 연결하는 삼도화합의 길로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자유롭게 걷는 길이다. 8자락에서는 영남지방에서 한강으로 흐르는 유일한 강물인 남대천이 흐르고, 사람과 자연,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지는 생명과 화합의 길이다.
<산행지도>
대개 10월 중순이면 소백산이 단풍 절정기로 접어드는 시기인데, 금년 여름의 더위는 끝날 줄을 모르고 길게 이어져 10월에 접어들었음에도 겨우 설악산 정상부에만 단풍이 찾아든 상태라고 한다. 사실 10월 중순에 김삿갓이 그러하였을 것처럼 단풍 든 산하를 감상하며 정처없는 걸음으로 유량의 맛을 느껴보리라던 기대는 고스란히 다음 산행을 기약하며 집에다가 내려놓고 차가운 얼음물을 잔뜩 넣은 배낭을 메고 산행 버스가 출발하는 양재로 향한다.
지난 세 번의 소백산자락길은 종주팀과 즐산팀이 시간과 장소를 따로 하여 출발하였기에 종주팀은 도둑고양이 마냥 배낭만 들고 숨소리조차 죽이며 실내등조차 켜지 않은 버스에서 내려야 했는데, 이번에는 모두 함께 출발하여 즐산팀은 7자락을 걷고 김삿갓 기념관 등을 탐방하기로 함에 따라 모처럼 다함께 출발하기로 한다.
소백산자락길 7자락의 출발지는 영춘면사무소이지만 버스가 주차하기에는 장소가 협소하여, 인근의 단양소백농협 주차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두어 시간의 새벽잠을 더 청하다가 일어나 모처럼 버스 실내등을 밝히고 산행준비를 하여,
7자락 출발지인 영춘면사무소를 향해 단양소백농협 주차장을 뒤로하고,
영춘면119를 거느린 영춘면사무소 앞에 도착하여 소백산자락길 7자락 트레킹을 시작한다.
<영춘면(永春面)>
충청북도 단양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으로, 동쪽은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丹山面), 서쪽은 어상천면(魚上川面), 남쪽은 가곡면(佳谷面), 북쪽은 강원도 영월군 남면(南面)·김삿갓면과 접한다.
단산면과의 경계에 형제봉(兄弟峰, 1,178m), 강원도 및 경상북도와의 접경에는 어래산(御來山, 1,064m), 가곡면과의 경계에는 신선봉(神仙峰, 1,389m)이 솟아 있다. 남한강이 중앙부를 북쪽으로부터 남서류하면서 동대천(東大川) 등 지류를 합친다. 비교적 넓은 하안단구가 발달되어 있고, 곳곳에 카르스트 지형이 나타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을 비롯하여 특산물로 잎담배와 고추·마늘·참깨·콩류를 생산한다. 면의 중심지인 상리(上里)와 하리는 남한강의 곡류부에 발달한 취락이다. 현재 상·하·남천리 등의 14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문화재로는 하리(下里)에 사적으로 지정된 단양 온달 산성(溫達山城 사적 264),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온달동굴(천연기념물 261)이 있고, 구인사(救仁寺), 단양 구인사 금동 9층 소탑(丹陽救仁寺金銅九層小塔, 충북 유형문화재 209), 단양 구인사 아미타 회상 탱화(丹陽救仁寺阿彌陀會上幀畵, 충북 유형문화재 210), 단양 구인사 청자 소문 발우(丹陽救仁寺靑瓷素文鉢盂, 충북 유형문화재 211), 북벽 각암(北壁刻岩) 등이 있다.
오늘 걷는 소백산자락길 7자락은,
- 영춘면에서 영월로 넘어가는 차도가 새로 생기면서 이용하지 않게 된 구 도로를 이용하여 조성되었는데, 시멘트 포장 임도에 이어 비포장 임도를 따라 완만하게 150 고지 정도의 느릅실고개에 오른다.
- 느릅실고개에서 동대리로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는 잡초가 잘 정비된 내리막길이 이어지는데, 올랐던 150 고지를 고스란히 반납하고 내려서게 된다. 시원한 숲길에는 다양한 야생화들을 만나게 되고 서늘한 숲속에서는 새소리가 어우러져 들려오는 생명의 길이다.
- 동대리를 지나면서부터는 935번 지방도를 따라 의풍옛길 입구까지 진행하게 되는데, 도중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용의 한이 서인 용소 마을을 지나서, 의풍옛길 입구로 들어서면 다시 자라난 잡초가 말끔히 정비된 그림같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약 450 고지 정도를 올라 베틀재에 도착하게 된다.
- 베틀재 정상의 '삼풍정(三豊亭)'에서 잠시 쉰 뒤, 의풍1리로 내려서는 7자락길은 '영부로' 아스팔트 길을 따라 꾸준히 내려서게 되는데, 즐산팀들은 의풍1리에서 김삿갓문학관까지의 진행하여 탐방을 종료하고, 종주팀은 8자락을 이어 걷게 된다.
<하리>
고려때는 원주목 영월군의 속현이었다. 고종 32년(1895) 영춘군으로 승격되어 영춘군(永春郡) 군내면(郡內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대(新垈), 방대(房垈), 유곡(愉谷), 율수동(栗修洞)을 병합하여 하리(下里)가 되었다. 1985년 하1리와 하2리로 분구되었다. 조선시대 수로 발달로 사창(社倉)이 있어 남진으로 유명했다. 영춘군(永春郡) 군내면(郡內面)의 지역으로 영촌 읍내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말 또는 하동(下洞)이라 하였다.
영춘면사무소 표지석 건너편의 '하리' 표지석을 뒤로하고 지나 '하리 경로당' 앞 도로를 따라 진행하여,
마을의 밤길을 걸을 때면 으레 들려오던 개들의 아우성이 들리지 않는 마을 안길을 지나 가로등이 밝혀진 농로를 따라,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측 임도로 들어서서 조금 더 진행하다가,
하1리 공동묘지이므로 외지인은 사용하지 말라는 요상한 경고판까지 있는 갈림길에서 우측 오름길로 들어서면,
완만하고 호젓한 비포장 임도가 길게 이어지다가,
좌측에 산악기상 관측장비가 설치되어 있고 동대리까지 3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떨어져 있는 느릅실 고개에 도착하여, 잠시 배낭을 내리고 여장을 정비한다.
<느릅실 고개>
단양군 영춘면 하리와 동대리를 연결하는 고개다. 고개 아래 하리 느릅실골 상부에 느릅나무가 있다고 하여 느릅실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느릅실 마을 위에 있는 고개라 하여 느릅실 고개라 불리는 듯하다.
느릅실고개를 뒤로하고 동대리를 향해,
최근에 정비를 한 듯 임도를 뒤덮었을 웃자란 잡풀이 제거된 임도를 따라,
산모롱이와 골짜기를 연이어 휘돌아 이어지는 호젓한 임도길을 따르다가,
좌측으로 크게 꺾이는 골짜기에 세워진 동대리가 1.0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면,
완만하던 임도길이 시멘트 포장으로 바뀌며 가팔라지더니,
좌전방 아래로 동대리 마을이 내려다보이고,
<동대리>
고종 32년(1895) 영춘이 군으로 승격되면서 용진에 있던 동면 소재지가 광무 10년(1910) 동대리로 옮겨와 영춘군 동면의 소재지 지역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용소동, 점촌, 기촌, 회곡, 현곡을 병합하며 동대리라 해서 단양군 영춘면에 편입되었다. 1971년 동대1, 2리로 분구되었다.
소백산 형제봉(1,177m)과 옥녀봉은 좌측으로 배틀재와 수리봉(1,014m)은 우측에서 옥녀직금형 명당 형극에 위치하며 배틀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1957년 동대초등학교가 개교하고 1996년 39회까지 졸업생 1,447명의 인재를 배출 후 폐교되었다. 충청, 경상, 강원 3도가 연접한 마을이다.
산을 덮은 나무들은 푸르름을 잃지 않았는데 콩밭은 노랗게 변한 콩잎을 떨군 채 수확을 기다리고 있고,
말끔한 가옥들이 옹기종기 들어찬 동대리 마을 안길을 통과하여 나가면,
935번 지방도에 접속하여 전봇대 옆 이정표의 의풍옛길 입구(2.7km) 방향으로 우틀하여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차량은 물론 농부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935번 도로를 따라 '소백산자락길 의풍옛길 2.7km' 표지판을 지나,
다른 교회건물과는 달리 제법 그럴듯해 뵈는 감리회 평화교회 앞을 지나고,
여느 지역과는 달리 넓게 펼쳐지는 콩밭 사이로 이어지는 영부로 도로를 따라,
은빛마을 양로원과 한사랑교회 앞을 지나,
용소동 마을회관 앞을 지나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용의 한이 서려있는 용소동(龍沼洞)>
단양군 영춘면 동대리에는 용소동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다른 말로 용솟말이라고도 하는데, '용소(龍沼)'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 용소의 물은 수질이 좋아 예로부터 동네 사람들의 식수로 쓰였는데, 지금은 동네의 간이 상수도의 수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용수동 앞에는 형제봉이 높이 솟아 있는데, 형제봉에는 큰 바위 두 개가 마치 의좋은 형제처럼 나란히 서 있어 그것을 형제바위라고 부른다. 옛날 형제봉의 한 굴에는 커다란 이무기가 살고 있었는데, 몇 백 년을 굴속에 살면서 용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무기는 마침내 용으로 화신하여 승천하게 되었다. 벽력과 같은 굉음을 내며 용으로 변한 이무기는 굴에서 나와 승천하기 시작했다. 파란 구름이 쫙 갈리면서 용은 그 속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광경을 산에서 나무를 하던 나무꾼이 보게 되어 그만 부정을 타고 말았다. 하늘로 오르던 용은 그만 땅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때 용이 떨어지면서 오줌을 쌌는데, 그것이 떨어져 괴인 곳이 지금의 '용소'라고 한다.
<용소에 전해내려오는 또다른 전설 "아기장수 이야기">
용소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도 전하고 있다. 이 마을이 처음 생겨날 무렵, 이곳에는 한 내외가 노부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내외의 금슬은 퍽 좋았으나 아들을 두지 못해 걱정이었다. 그래서 부인은 우물가에 정화수를 떠 놓고 아들을 점지해 주십사 백일치성을 드렸다. 부인은 치성의 효험을 보았던지 태기가 있었고 몇 달 후에 옥동자를 분만하였다. 그런데 낳은 지 삼일이 되던 날 어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기는 방 네 귀에 명주실을 매어 놓고 재주를 넘으며 명주실 위를 다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겨드랑이 밑에 날개가 돋아 나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어머니는 범상하지 않은 아이임을 알게 되고 이 사실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아기 아버지는 만일 장수가 되면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멸망하게 되는 것이니 이에 겁이 나 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아이를 엎어 놓고 등 위에 콩 한 가마니를 올려놓았으나 죽지 않자 다시 한 가마니를 더 올려놓았더니 삼일 만에 죽고 말았다. 아이가 숨을 거두자 별안간 하늘에 먹구름이 일고 천둥이 요란하더니 동네 밖에 있는 늪[沼]에서 용마 한 필이 튀어나와 삼일 동안 마을 안을 헤매다 신기 터에 가서 죽고 말았다. 장수 나오기만 기다리던 용마가 장수가 죽자 같이 죽은 것이다. 그래서 용마가 나온 늪을 용소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용소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를 따르면,
우측 형제봉(1207.0m)에서 발원하여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동대천 개울을 넘는 동대교를 건너게 된다.
자락길 표시목이 드문드문 이어지는 완만한 오름길 도로를 따라,
아이와 젊은이가 떠나버려 침묵만이 흐르는 농가들을 지나,
예전 이름이 '베틀말'이었다는 동대 2리 표지석과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에서,
도로변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사과에 시장끼가 돌아,
<동대2리 마을 자랑비>
삼국시대부터 촌락이 형성된 마을로 마한, 백제, 고구려, 통일신라, 고려시대에 이르렀고, 조선 태조 13년(1413) 영춘현의 동면소재지 지역이었으나, 1941년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영춘군 전체가 단양군에 합병되면서 영춘면 동대리로 부르다가 1971년에 동대 1, 2로 분구되었다.
소백산 주지봉, 형제봉, 흰봉, 옥녀봉, 수리봉, 매봉산, 용가산, 가마봉, 염산, 빠주봉등 1,000m 이상 되는 산이 48개소가 있으며, 거무실, 점터, 배틀말 말등바위 등 76개 골짜기가 있다. 소백산 원시림 벌채 때는 100여 가구가 살았고, 형제봉 아래까지 트럭이 올라가 전국의 산판꾼들이 모여들던 곳이다.
구한말 김상태 의병장이 대밭골서 일제 헌병과 싸우다 전사했고, 6.2 5 사변 때는 인민군 빨치산 부대가 형제봉에, 회실에는 인민군 연대가 주둔하여 동학, 의병, 6.25 등 3번의 사변을 거친 격전지역이며 교통로다.
우리 마을은 소백산의 개발되지 아니한 청정한 천연자원과 깨끗한 환경이 마을의 자랑이다. 충청, 강원, 경상 3도를 연결하는 옛 교통로였고, 염로였던 옛길이였으나, 개발과 보존이 함께 한다는 중부내륙권개발에 붐을 타고 있는 우리 마을 천혜의 좋은 환정자원 우리 모두가 보존하여 후세에 길이 물려주어 민초들의 휴식터로 가꾸어 갑시다.
2006. 6. 영춘면 동대 2리 주민 일동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마땅한 식사자리를 찾아보는데,
마침 좌측 동대천 건너편의 동대2리 경로당 옆 기촌정(機村亭)이라는 정자가 눈에 띄어,
아침식사를 하고 자락길을 이어가기로 한다.
간단한 행동식으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는 다시금 동대천을 건너,
935번 지방도인 '영부로'를 따라 잠시 진행하다가,
대규모 양계 농장을 끼고 우틀하여 '영부로'와 이별하고 시멘트 포장 도로로 들어서서 오르면,
베틀재가 4.3km 남았다는 분홍의 자락길 이정표를 지나게 되고,
금방 식사를 해서 그런지 제법 가파른 오름길이 힘겹게 느껴지는데,
농가주택 입구의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린 솜사탕 모양의 정체가 거미줄에 맺힌 이슬이라는 것에 놀라기도 하며,
잠시 더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서다가,
이정표가 있는 'ㅜ'자 삼거리 갈림길에서 배틀제 방향의 좌측 임도로 들어서면,
임도 차단기와 각종 안내판과 경고판이 즐비한 '의풍옛길' 입구를 지나 비포장의 호젓한 임도로 들어서게 되는데,
멋들어진 임도길을 후딱 지나기가 아까운 즐산팀들이 천천히 진행하겠다기에,
영춘면 사무소에서 함께 걸어온 분들이 기념촬영을 하고는,
싱그러운 임도를 즐기며 오겠다는 분들을 뒤로하고 8자락까지 걸어야 하는 종주팀들이 앞서 진행하기로 한다.
즐산팀과 헤어져 새벽안개가 가시지 않은 호젓한 임도길을 따라,
원시의 숲이 펼쳐지는 골짜기와 산모롱이를 요리조리 넘나들며,
가끔씩 영춘면 새마을 남녀협의회에서 설치한 '소백산 7 자락길' 이정표와 쉼터 벤치도 지나고,
새벽에 눈 비비고 일어난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는 작은 지계곡도 지나며 호젓한 임도를 따르는데,
숲 지붕을 뚫고 햇살이 비춰들며 백두들의 길을 밝혀 주는 듯하다.
완만하게 이어지던 임도가 차츰 가팔라지며 베틀재가 가까워졌음을 짐작케 하더니,
숲속에 가득 들어차 있던 안개가 걷히며 건너편 산등성이가 모습을 나타내고,
멋들어진 숲길의 추억을 남겨보려 하였지만 셀카 쥔장의 의도는 여지없이 무시당하며,
이리도 멋진 숲길도 이제 곧 끝날 것이라는 염려가 스멀스멀 자라나더니,
닫혀있는 '임도 차단기'를 우회하여 나가니,
임도가 휘어져 내려가는 지점에서 배틀제는 우측 돌계단을 올라 숲길을 따라야 한다는 이정표를 따라 돌계단을 올라,
산허리를 따라 이어진 다소 거친 숲길을 따르는데,
좌측 아래로 정자와 '베틀재(651m)' 표석이 있는 베틀재 정상이 내려다 보이더니,
이내 따르던 자락길이 좌틀하여 배틀재로 내려서서,
<베틀재(651m)>
베틀재는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동대리에 위치한 고개로, 지방도 935호선인 '영부로'가 지난다. 모양이 마치 베틀 같다고 하여 베틀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강원도 삼도를 연결하는 고갯길이었으며, 고려 시대부터 이 고개를 이용해 소금이 이동했기 때문에 3대 염로(鹽路, 소금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고개를 넘어가는 길을 흔히 '의풍옛길'이라고 불린다.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 중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베틀재란 이름이 주변 산세가 베틀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또 다른 주장도 있다. 베틀은 [불+달]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말이며, 큰 땅이란 뜻이다. [불+달]에서 변음 되어 '배달, 배다리, 배틀'등의 지명이 된 것이다. '베틀'을 한자로 '機(기)'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음훈차다. 베틀재는 '아주 크고 높은 고개'라는 뜻이다.
<베틀재 개통 기념비>
삼도(충북, 경북, 강원)를 볼 수 있는 베틀재는 백두대간에서 동으로 뻗은 형제봉(1,177m)과 마대산(1,050m) 사이 해발 651m 재다. 정감록에 '求人兩白 求穀三豊'(사람은 양백에서 구하고 곡식은 삼풍에서 구한다)의 십승지로, 오르막길 30리 내리막길 30리다. 3도의 문물이 오고 간 역사 속의 대로로, 고려 시대 평구도의 역전마을인 의풍과 조선시대 연원도의 역전마을인 오사역을 연결하는 고갯길을 전국의 보부상들이 넘고 쉬어가며 성황당에서 제사 지낸 곳이다.
현대의 고속도로 격인 뱃길로 한양 왕래를 위해 경상도, 강원도 사람들이 넘어야 했던 우리나라 3대 염로로, 마포에서 온 소금을 용진 나루에서 내려, 지게 짐을 지고 베틀재를 넘어 강원도와 경상도를 왕래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전혀 피해가 없었고, 동학란 때에는 천도교 2대 교주인 최시형 처가가 있어 동학혁명군이, 의병 봉기 때는 도 창의대장 이강년, 중군장 김상태, 우 선봉장 권용일, 관동 창의대장 이인영, 김규철, 이명상 의병장과 의병들이 소백산과 의풍을 거점지로 활동하였다.
6.25 전쟁 때는 인민군 사단과 연대가 점령하였기에 국군의 인민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감행한 조국의 시련과 애환이 서려있는 곳으로, 해방 후 미 480호 법의 밀가루 공사로 소백산의 벌채용 산판 길을 G.M.C가 처음 열었던 사연이 많은 고개이기도 하다.
충북 최북단 동부에 위치한 베틀재는 3도 접경 태· 소백의 연접지로 충북 정도 100주년 사업으로 시작한 지 10여 년, 그리고 60년 숙원사업의 역사적인 도로가 개통됨으로써 영춘 면민들의 고마운 뜻을 기리고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개통 기념비를 세운다.
2009. 7. 22 영춘면 베틀재 개통 기념 추진 위원회 일동
<십승지 의풍 옛길>
영춘면 사무소 앞에서 출발하여 느릅실과 동대리 마을을 지나 의풍 옛길인 베틀재를 올라가 삼도 접경 오지인 의풍리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소백산 형제봉에서 마대산 쪽으로 베틀 모양을 하고 있고 베틀재의 정상이 베틀의 도투마리에 해당된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것입니다. 산의 형국을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이라고 하여 예로부터 명당이 있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의풍 옛길인 베틀재는 고려 시대부터 우리나라 3대 염로(鹽路: 소금을 운반하는 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이 강원도와 경상도로 넘어갔습니다. 베틀재의 아랫마을인 의풍리에는 정감록의 십승지를 찾아온 사람들이 많이 살았으며 이 인근에는 방랑 시인 김삿갓의 묘역과 유허지가 있습니다. (안내판)
베틀재의 팔각 정자인 '삼풍정(三豊亭)'에서 커피를 마시며 길게 쉬었다 가리로 한다.
배틀재의 시원한 팔각정자는 함께 했던 즐산팀의 준족들에게 맡기고,
십승지 중 한 곳이라는 의풍리를 향해 '935번 지방도인 영부로'를 따라 긴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넓은 2차선의 포장도로임에도 차량 통행이 뜸하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전방에서 느닷없이 나타날 자량을 살피며 조심해서 내려가는데,
앞쪽으로 7자락 종점이자 8자락의 시작 지점인 의풍리가 가늠되더니,
이내 좌측 김삿갓 문학관으로 이어지는 28번 지방도인 '김삿갓로'가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나서,
<김병연(金炳淵)>
김병연(1807~1863, 순조7~철종14)은 조선 후기의 풍자 시인으로 유명했던 방랑 시인으로 흔히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선천의 부사였던 조부 김익순이 경래의 난 때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게 되자 노목 김성수의 구원으로 형 김병하와 함께 황해도 곡산에 숨어 살았다. 그러나 김익순에 대한 문제는 본인에게만 묻고 가문을 폐문한다는 조정의 결정이 알려지면서 모친과 함께 황해도 곡산을 떠나 할머니가 계시는 광주를 거쳐 이천, 가평을 전전하다가 평창을 거쳐 영월에 정착하게 되었다.
당시 반역죄로 인한 죄는 거의 연좌제로 처벌을 받아 가문의 3대를 멸족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이들 모자가 처벌되지 않았던 것은 당내 실권 세력이 안동 김씨였기 때문에 이들 모자가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김병연의 모자는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으나 떳떳한 사대부로 지낼 수 없는 실정이었다. 명색이 반역죄로 조부인 김익순이 능지처사를 당하였고 집안에 배척을 당했기 때문이다. 문중에서 거의 추방된 이들 모자는 위와 같은 이유로 산속 깊은 곳에서 권문세족임을 밝힐 수 없이 살아가야 했다. 영월에서도 가장 인적이 드문 곳을 택하여 생활하면서 반가의 기풍과 안목을 갖춘 김병연의 어머니 함평 이씨는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가문의 내력에 대한 소상한 진상을 알지 못한 채 학업에만 정진을 하여온 김병연은 훗날 영월도호부 과거(백일장)에 응시하여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이라는 시제 아래 글을 지어 장원급제를 하였다. 위와 같이 시제로 뛰어난 글을 지어 장원급제를 하게 된 난고 김병연은 어머니로부터 집안 내력에 대한 일들을 전해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과 폐문한 집안의 자손이라는 멸시로 인해 20세 무렵 처자식을 둔 채 방랑의 길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난고 김병연은 죄의식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없다 하여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금강산 유람으로 방랑의 생활을 시작하여 서울,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제주도를 돌았으며, 도산서원 아랫마을과 황해도 곡산 등지에서 몇 해 동안 훈장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전라도 동복땅에서 한 많은 삶을 마감하였다. (마대산 김삿갓 묘소와 생강)
<의풍1리 마을 자랑비>
의풍1리는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3도 접경 마을로 충청북도 최북단 동부에 위치하고, 삼한 시대에는 마한에, 삼국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의 영토였고, 고려 때에는 강원도 원주에 속하였으며, 고려 말부터 정감록 파들이 양백 지간과 삼풍 지간을 연유로 산속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아왔다.
조선 초기 충청도에 이속되면서 영춘현의 사단(社壇)이 있었으며, 조선왕조실록 연산조(1502년)에 왕명으로 약효가 으뜸인 의풍 대추를 진상토록 명하였고,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의 분기점이라 예부터 풍진이 많은 지역이었다. 동학혁명 때에는 최시형 교주의 처가 마을로 의병 난리 때에는 의병들의 은신과 훈련장이었으며, 우리 마을 성황당은 세 번 참배 시 한 가지 소원을 이룬다는 설이 있다.
의풍은 산 좋고 물 좋고 땅이 좋아서 정감록에 '삼풍'이라 하였으며, 곡식의 씨를 구하는 활인지지(活人之地)의 풍수를 따른 것이 역사가 증명해 준다. 들어오는 길은 세 갈래이지만 나가는 곳이 팔목이라서 십승지를 증명케 하며, 생산된 농산물마다 특산물이라 생산하기 무섭게 팔려나 3도에 모두 집을 가지고 사는 부자마을로 번창하고 무병장수하는 것이 우리 마을의 큰 자랑이다.
2005. 4. 의풍1리 주민 일동 (표지석)
의풍1리 버스정류장가 옆 '의풍마을 느티나무 쉼터'에 도착하여 소백산자락길 7자락을 마무리하고,
잠시 쉼을 하며 8자락 걷기 준비를 한다.
간식을 나누며 10여분을 쉼으로 원기를 보충하여 남대리 주막거리를 향해 8자락 걷기 길로 들어서서,
<의풍리 안내>
의풍리는 세 갈래의 시내가 있고 산이 높고 아름다우며 땅이 걸어서 사람이 살기에 매우 좋으므로 삼풍리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저(松底), 어은동(漁隱洞), 장항(獐項), 와동(瓦洞), 고사동(高寺洞)을 병합하여 의풍리라 해서 단양군 영춘면에 편입되었고, 1972년 의풍 1, 2리로 분구되었다.
2차선의 포장도로인 영부로 데크목 인도를 따르는데,
보통 담자락에 한두 포기 심는 수세미가 밭 한가득 심어져 있어서 '돈이 될까?'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하고,
좌측 고치도입구 버스정류장과 '삼도힐링길' 안내판이 있는 지점에서 다시 포장 도로로 내려서서,
<삼도 힐링 길>
삼도 힐링 길은 백두대간 아래에 있는 마을길로, 김삿갓 문학관과 삼도 접경 공원 간 5.84km 구간과 '용소 가는 길'인 의풍 1리 느티나무 삼거리에서 용소까지의 1.66km이다. (안내판)
좌측에 영춘초교 의풍분교장이 있었다는 안내판을 지나 마락천을 넘는 '의풍1교'를 건너고,
좌측 '의풍2리' 마을회관 방향 마포천을 넘는 의풍2교 입구의 '의풍2리' 표석이 있는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측 직진 방향의 영부로를 따라 계속 진행하다가,
<의풍2리 표석과 마을 자랑>
의풍 2리는 남으로는 경북, 북으로는 강원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태백산과 소백산의 경계지점에 자리 잡은 용담(龍潭), 어은동(漁隱洞), 송포동(松浦洞, 새마을), 송저동(松底洞) 네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었으며, 깎아지른 듯이 솟아오른 산과 마을을 굽이굽이 감아도는 하천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자연경관과 함께하여 왔다.
의풍(儀豊)은 영춘군 동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세 갈래의 시내가 있어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삼풍이라 하였는데, 1914년 의풍이라 이름하였고, 정감록에 이르기를 양백 지간(兩白之間)에 求於人(구어인)하고 三豊之間(삼풍 지간)에 求於種(구어종)이라 하였으니 예부터 피난처로 유명했었다. 또한 예전에는 삼도를 이어주는 이곳에는 褓負商(보부상)들이 모여 장이 섰다 하여 현재에도 장터거리라 불리고 있으며, 兩白(양백)의 정기로서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는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맛보지 않고는 모를 것이며, 공해가 극심한 지금으로선 따로 삼림욕(森林浴)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랑비 내용)
'마포천'을 넘는 '의풍3교' 앞 갈림길에서 우측 '솔밑생태체험마을' 방향 소로로 들어서는데,
<마포천(馬浦川)>
마포천(馬浦川)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에서 시작하여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를 지나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서 옥동천으로 합류하는 한강수계의 지방하천으로, 옥동천의 제1지류로 하천연장은 12.82km다.
베틀재에서 헤어졌던 즐산팀들이 '7자락 종점에 도착하여 김삿갓 문학관 탐방이 아닌 8자락을 걷겠다'고 연락이 와,
그늘이 드리워진 도로에 배낭을 내리고 즐산팀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예까지 걸어오는 도중에 즐산팀들의 마음이 바뀌어 8자락 대신에 '김삿갓 문학관' 탐방을 하겠다고 하여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는데, 오늘 모처럼 종주팀에 합류하여 걷던 몇몇 분들도 마음을 바꾸어 막걸리 주점이 있는 김삿갓 문학관으로 떠난다.
발길을 돌리는 즐산팀과 헤어져 길가에 떨어진 호두알도 한두개씩 챙기며,
깔끔한 펜션으로 보이는 '솔밑생태체험마을' 앞을 지나고,
<솔밑 생태체험 마을>
수달이 돌아다니고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청정지역 솔밑 생태 체험마을은 충청북도와 강원도, 경상북도가 바로 인접해 있는 어래산 삼도봉 아래 마을입니다. 사면 모두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대천과 마락천의 두 가닥 계곡이 모여서 김삿갓 계곡을 이루어 협곡으로 좁은 길이 나있습니다.
예부터 의풍은 삼풍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인심이 좋고 곡물 종자가 풍부하며 자연조건이 좋아서 사람이 피해서 살만한 곳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조 철학자 남사고가 지은 정감록에서 십승지 중의 한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친환경 재배에 관심이 많아 고추, 오미자, 옥수수, 콩 등을 친환경으로 재배하고 있으며, 이곳은 해발고도 400m 이상의 준 고랭지로 생산물의 품질 또한 최고입니다. 솔밑 생태 체험 마을에 오시면 옥수수 따기, 김치 만들기, 사과 따기, 고추 반찬 만들기, 생태체험학교 등의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단양군)
다소간 가팔라지는 포장농로를 따라 오르다가,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측 커다란 나무가 있는 정자 쉼터가 있는 직진 방향의 농로를 두고 좌틀하여 내림길로 들어서서,
내림길을 따르는데 우측 남대리 방향 넓은 밭에는 밑동이 잘려 건조되고 있는 고추밭이 자리하고 있고,
좌측 야생조수 방재용 울타리와 차양솔이 설치된 지점에 설치된 이정표에 따라 우틀하여 잠시 진행하면,
소백산 자락길 표지판과 이정표 그리고 '삼도 힐링길' 표시목이 있는 숲길로 들어서게 된다.
다소 거칠지만 아직은 길흔적이 뚜렷한 수레길이 이어지다가,
최근에 정비한 흔적은 보이지 않고 밟고 지나간 흔적만이 희미한 등로로 바뀌지만,
소백산자락길임을 알 수 있는 표식들이 연이어 나타나며 불안해지려는 마음을 누그려뜨려 주는데,
좌측 아래로 나란히 이어지는 '마포천'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서 보는 이를 더욱 편안케 하여,
커다란 바위 옆으로 이어진 거친 등로에도 환한 얼굴에는 걱정없는 상팔자의 모습이 역력하다.
다소 거칠지만 뚜렷한 등로를 따르다가 넓은 마당을 가진 전원주택 앞으로 이어진 천변길로 내려서서,
좌측 마포천을 건너는 갈림길에서 계속 제방길을 따라 진행하다가,
이내 나타나는 갈림길에서 직진의 제방길을 두고 우측 주택 방향 오름길로 들어서서,
길인지 주택 마당인지 분간이 어려운 지점에서 좌측 잡초지대를 더듬어 진행하면,
이내 다시 빛바랜 소백산자락기 표시판이 나타나는데,
잡초와 덩굴들이 들어차기 시작한 옛길에 떨어져 있는 알밤이 트레커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좀체 놓아 주지를 않는다.
정비를 않고 방치된 옛 자락길을 덮고 있는 잡초와 덩굴을 헤치며 희미한 길흔적을 더듬어 나가니,
야생동물 방제용 그물망 펜스와 넝쿨이 뒤엉켜 진행을 더욱 어렵게 하지만,
이보다 더한 진양기맥과 호미기맥도 걸은 사람들이라며 잡초와 넝쿨들의 태클을 뿌리치고 야생동물 방제용 그물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서 잡초가 제거된 옛길의 흔적을 따르는데, 햇살이 내리쬐는 자갈 위에서 몸을 덥히던 뱀이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황급히 몸을 숨기고,
분명 길로 보이는데 밭으로 가꿔지고 있는 자락길의 흔적을 더듬어 진행하여,
그물망 울타리를 넘어 시멘트포장 농로에 접속하니 삼도힐링길 이정표와 소백산자락길 이정표를 지나게 되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다가,
출입을 막는 경고판이 걸린 직진의 길을 두고 좌측 계곡을 건너는 숲길로 들어서서,
다소 거칠지만 제법 뚜렷한 길흔적을 따르면,
이내 다시 녹색 이끼에 싸인 바위들이 덮고 있는 계곡을 건너,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에 접속하여 자락길 표지기가 걸린 좌측길로 진행하게 된다.
언제부턴가 자락길이 마포천 건너편 2차선의 '영부로'를 따르도록 변경되어서 그런지,
옛 자락길은 정비되지 않은 채 족적의 흔적만이 희미하여,
군데군데 진행이 어려운 곳이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원시림을 걷는 듯한 느낌이 좋기도 하다는 예기를 나누며,
심산유곡의 등로인 양 호젓하기도 한 등로를 따르다가,
자락길이 시멘트 포장도로를 가로질러 이어진다는 자락길 이정표가 있는 도로를 건너 남대리 방향으로 진행하면,
제법 호젓하고 편안한 수렛길이 이어지다가,
호우로 수레길이 무너진 부분을 우회하여 어렵게 지나기도 하며,
좌측 울타리에 "화창농장←여명산책로→호지마을"이라는 이정표가 있는 캠핑장 울타리를 따라 우회하여 지나면,
출입금지 표시가 된 데크 탐방로 입구에 서게 된다.
데크목 탐방로가 유실되어 자락길 코스가 마포천 건너편 '영부로'를 따르도록 변경되었을 것으로 짐작하며 발길을 돌려 마포천을 건너 '영부로'를 따라 남대리로 진행할까 하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일단 어떤 상태인지 확인 후 어디로 진행할지를 결정하기로 하고 막아놓은 입구를 우회하여 데크목 탐방로를 따르니,
마포천변으로 이어진 데크 탐방로가 호우로 유실된 부분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집중호우에 따른 홍수로 마포천을 지나는 데크목 탐방로가 유실된 상태이지만, 마포천을 따라서도 쉽게 진행이 가능하고 유실된 데크목 등로 부분만 지나면 다시 정상 등로가 이어질 것으로 짐작하고,
마포천으로 내려서서 유실된 데크목 구간을 우회하여 진행하니,
정상 등로에서 데크목 교량 부분이 분리되어 유실된 부분이 나오는데,
경사가 가팔르고 토사가 미끄러져 내려 상부 등로로 올라서기가 무척이나 까다롭지만,
그간의 갈고닦은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조심스럽게 유실된 부분을 기어올라,
마침내 정상 자락길에 올라서서 "역시 백두!"임을 외치며 기념사진을 남긴다.
(앞으로는 이러지 마시고 따라하지도 마셈~~!)
다시 희미한 족적만이 옛길의 흔적임을 증명하는 등로를 따라,
오늘에만 벌써 세번째로 나타난 뱀이 무심코 걷는 트레커를 긴장케 하고,
맑은 시냇물이 졸졸 걸리는 마포천을 따라 편안히 이어지는 옛 자락길을 따르다가,
좌틀하여 징검다리가 놓인 마포천을 건너면 남대리까지 3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오지만,
이정표 뒤로 이어진 뚜렷한 길흔적을 따라 마포천을 건너지 않고 옛길을 따라 진행하기로 한다.
이정표를 따르지 않는 진행에 의구심이 들어 좌틀하여 마포천을 건너기로 한 백두들과 헤어져,
이정표 뒤로 이어지는 숲길로 들어서자,
이내 데크목 등로로 들어서게 되는데,
낙업이 수북이 쌓여 운치를 더하는 데크길이 예상과 달리 길게 이어지더니,
'자락길 민박'의 영역 안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데크길 날머리에는 '사유지 이므로 자락길 이용객들은 좌틀하여 남대리로 진행하세요'라는 표시판이 세워져 있지만,
우리는 기어코 옛 자락길의 흔적을 더듬어 남대천을 건너지 않고 직진의 '자락길 민박' 영내를 통과하여,
다시 희미한 족적을 더듬어 숲길로 들어서자,
자락길이 사태로 무너저내린 지점에서 선답자의 희미한 족적을 따라 우회하여 지나게 되는데,
가파른 비탈로 이어진 희미한 등로를 조심조심 진행하니,
다시 마포천을 따라 이어진 제법 뚜렷한 등로를 따르게 된다.
데크 계단길을 올라서,
우측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계류를 건너고,
좌측 남대리 경로당으로 마포천을 건너는 비오면 잠기는 다리를 그냥 지나면,
계속해서 호젓한 숲길이 이어지다가,
빼곡한 전나무 조림지대도 지나게 된다.
편안한 숲길을 잠시 더 이어가다가 추락 방지용 가드 로프가 설치된 우측 비탈길로 들어서서,
작은 지계곡에 놓인 데크 다리을 건너서 내려서면,
다시 다소 거칠지만 제법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다가,
'남대교' 앞 넓게 조성된 '주막거리캠프'로 내려서니,
의풍리는 좌측 남대교를 건너서 이어지고 8자락 종점인 남대리는 직진 방향으로 0.3km 남았다는 자락길 이정표와 그 옆에는 묘한 얼굴을 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각종 시설물과 안내판이 자리한 '주막거리 캠프' 내로 이어진 길을 따라,
석장승이 지키는 영역을 지나면,
'남대궐 식당, 부석태 된장' 앞을 지나게 되는데,
10여 년 전 대간 남진길 마구령에서 트럭을 타고 하산하여 야외 목감을 하며 더위를 씻었던 마포천변에는 많은 장독들이 들어찬 장독대가 설치되어 있고,
바로 앞 소백산자락길 8자락의 종점인 '주막거리' 표석에서 소백산자락길 7, 8자락 이어걷기를 마감한다.
<주막거리>
마구령/메기재, 늦은목이, 의풍으로 향하는 세 갈래 길목이었기에 사람 냄새나는 주막들로 제법 흥청거리던 곳이다. 부석에서 이곳을 거쳐 영월 탄광촌을 찾아가는 사람, 충청도에서 이곳을 지나 부석이나 물야 쪽으로 넘어가던 길손, 오전 쪽에서 의풍, 영월로 향하던 보부상 등 숱한 사람들이 갈증을 달래가며 쉬어가던 길목이다. 길 양쪽에 늘어서서 길손을 맞이하던 주막집은 이제 그 건조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고 있다. (길 건너편 늦은목이 방향 들머리의 안내판)
<마구령(馬駒嶺, 810m)>
경북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에서 남대리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마구령의 유래는, 이 길이 충청도와 강원도를 잇는 관문으로서 장사꾼들이 말을 몰고 다녔던 고개라 하여 '마구령'이라 하였으며, 경사가 심하여 마치 논을 매는 것처럼 힘들다 하여 '매기재'라고도 불렀다 한다.
마구령은 고치령, 죽령과 함께 소백산을 넘는 세 개의 고갯길 중 하나였다. 영남 선비들의 과거길로는 ‘영남대로’라 불렸던 죽령길과 영월 하동과 이어지는 마구령길, 그리고 단양 영춘과 이어지는 고치령길 등이 있었다. 세 길은 모두 백두대간 주능선에 있다. 옛 기록에 馬兒峴(마아치)로 기록된 이곳이 마구령으로 불리어지는 것은 메기재의 차음설(借音說) 또한 그럴듯하다.
<교통의 섬, 남대리>
"경상도와 강원도 두 도의 틈서리를 비집어 자리한 이곳 남대리는 경상도 땅으로서는 유일한 한강수계로 외로이 타관에 떨어진 영남의 소중한 막내 격이다." 삼도공원의 경계석에는 남대리가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남대리를 포함한 의풍리, 와석리는 영남뿐만 아니라 영서, 강원에서도 외로이 떨어진 별천지임에는 변화가 없다. 영주 쪽에서는 남대리로 버스가 들어갈 수가 없다. 도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작은 승용차들만 좁은 구절양장의 마구령을 점점이 아슬아슬하게 넘는다. 단양에서 들어오는 마을버스는 행정구역을 넘을 수 없어 자기네 구역인 의풍까지 밖에 운행하지 않는다. 때문에 남대리 사람들은 통째로 걸어서 산을 넘든가 귀한 화물차를 얻어 타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설명판)
남대리는 남대궐이라고도 불리던 마을로 '단종이 쉬어 갔던 곳'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대천이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며, 산지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새터, 송내 등이 있다. 새터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송내는 낙락장송(落落長松)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난 5월 13일 개통한 마구령터널 입구로 진행하여,
영부로 도로를 따라 잠시 내려서니 주막거리캠프 버스정류장 공터에서 기다리는 애마가 보이고,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
마침 '김삿갓문화재'가 열리고 있어서 차량들이 정체를 빚고 있는 김삿갓문학관에서 즐산팀을 테우고,
영춘면소재지의 온달문화센터 목욕탕에서 땀을 닦고,
남천 계곡 입구의 '대일식당'에서,
쥔장 내외의 따스한 손맛과 함께 즐거운 뒤풀이 시간을 가지다가,
처음 본 우리를 가족인 양 환대해 주신 쥔장 내외분과 기념사진을 남기고는,
언제 다시 이어가게 될지 기약할 수 없는 소백산자락길을 뒤로하고 서울로 향한다.
이번 7자락과 8자락에서도 각각이 걷기 좋은 임도길과 숲길이 있어서,
삶의 무게를 내려놓으며 힐링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걸었다.
그런데 8자락길은 일부 구간이 홍수로 유실되었지만 아직 정비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어서,
걷는 이를 당황케 하며 혼란에 빠뜨린다.
자락길 홈피 등에라도 현재 상태와 우회로에 대한 공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첫댓글 소백산 산행에서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자락길의 여정,다시 한번 걸어 봤습니다.마을의 역사 기행과 함께 했습니다.즐감했습니다 감사 감사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