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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모세를 새로 빚어낸 살인자 트라우마>의 줄거리 :
애굽의 왕자 모세는 40세 때 애굽 사람이 동족 히브리인을 학대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그 애굽 사람을 때려죽입니다. 그리고 이 살인이 들통나자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 40년을 지냅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모세는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 명단에 있던 자들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교회를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어 출애굽의 대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광야 40년 양치기로 살던 모세의 내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현미경을 들고 들여다봅니다.
모세를 새로 빚어낸 살인자 트라우마
(출애굽기 2:11~25)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우리가 읽지 않은 16~22절에는 애굽에서 도망친 모세가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의 장녀인 십보라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양치기로서 처가살이를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3~25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고난을 보고 계셨다는 내용이 언급됩니다. 이로부터 본격적으로 모세를 투입하여 출애굽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모세를 새로 빚어낸 살인자 트라우마’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모세는 바구니에 담겨서 나일강에 던져졌습니다. 석 달짜리 아기 모세는 물살을 따라 흘러갑니다. 이 사건은 강물에 떨어진 하나의 버들잎처럼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사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왕명을 거역하고 아들을 살리고자 바구니에 담아 나일강에 띄워 보낸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다만 이것은 모세의 인물 됨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모세가 어떤 인물이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석 달짜리 아기가 바구니에 담겨서 나일강에 떠내려가는 것과 같은 삶을 산 사람입니다. 강물처럼 흐르는 하나님의 주권에 인생 전체를 띄워놓고 주권에 의해서만 말하고 행동하며 살았던 자입니다.
출애굽기는 시작부터 이러한 모세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것은 우리 또한 모세처럼 하나님의 주권의 강물에 떠내려갈 수 있어야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명단에 있는 자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드러나는 모세의 모습은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떠내려가는 석 달짜리 아기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 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스데반 집사님이 구약에 관한 내용을 설교하면서 모세를 언급했던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사도행전 7장 22절을 보면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굉장히 잘난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모세는 잘난 사람이었기에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라는 거대한 책들을 쓰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물론 모세가 성경을 기록한 것은 자기 잘남으로 쓴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모세는 애굽에서 왕자로 성장하며 엄청난 지식과 학문을 습득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인류역사상 가장 굉장하게 여겨지는 성경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난 모세가 동족 히브리 사람들을 학대하던 애굽인 감독관을 때려죽입니다. 이 분노와 혈기는 나일강에 떠내려가는 석 달짜리 아기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모세는 출중한 지혜와 말과 능력과 한편으로는 동족에 대한 사랑도 갖고 있는 영웅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세가 어떻게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자기를 던지는 석 달짜리 아기의 모습으로 돌이킬 수 있을까요?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선진 문명을 습득했고 모든 학문과 모든 지식에 능통했습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는 대로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호기롭고 영웅적인 모습도 보입니다. 동족을 압제하는 애굽인을 때려죽일 정도로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도 강했습니다. 그러나 동족을 사랑하는 한 동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는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는 이런 방식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애국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런 성숙한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는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 대상 앞에서 석 달짜리 아기가 되어 하나님의 주권의 강물에 떠내려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하여 갖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관계하는 대상들에 대해 석 달짜리 아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주권의 강물에 떠내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한 나와 관계하는 대상들에게 최선이란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호기롭고 영웅적인 모습에서 돌이켜 강물에 떠내려가는 석 달짜리 아기처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살인자의 추억입니다. 살인자의 추억은 왕자 모세, 능력 있는 모세, 동족을 뜨겁게 사랑하는 모세를 나일강에 떠내려가는 석 달짜리 아기로 돌이키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 살인자의 추억 속에서 끊임없이 대면하는 자기 모습은 모세를 주체성 제로의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처가살이를 하는 과정을 통해 모세 속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본문의 모세는 혈기방장하여 동족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으로 살인까지 저지릅니다. 그런데 3~4장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모세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애굽에 있는 내 백성들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리실 때 모세는 끊임없이 사양하고 거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제 하라고 하는데 모세는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못합니다.’라고 거부합니다.
애굽에서 40살이었던 모세는 민족의 구원자가 되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25절을 보면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해석에 의하면 모세는 히브리 동족이 자기가 그들을 구원할 사람으로 받아들여 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기대는 동족에 의해 깨집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모세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온 천하에 퍼트렸고, 이 소식을 들은 바로는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애굽의 바로는 안 그래도 히브리 사람들이 늘어나서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선대 왕들의 계획을 이어서 히브리인들을 노역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세가 감독관을 때려죽였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제 모세는 애굽 국가 전체의 반역자가 되고 반드시 잡아 죽여야 하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광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를 만나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였습니다. 40년 왕자로 살던 자가 한순간에 처가살이를 하며 양을 치게 되었습니다. 혈기방장하던 모세는 살인 때문에 한낱 양치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레위 지파 사람입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축복이랍시고 해주었던 저주를 떠올려 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성 추장이 디나를 욕보인 사건을 계기로 세겜 성 사람들을 학살합니다. 동맹을 빙자하여 할례를 요구하였고 모든 남자들이 할례의 상처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을 죽였습니다. 야곱은 축복의 자리에서 이러한 시므온과 레위의 과거를 꺼내며 혈기를 되새기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향하여 주체성을 발동하는 혈기가 죽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보물로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때려죽인 모세는 이러한 레위 지파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노예를 감독하던 애굽 사람은 건장했으리라 추측됩니다. 다만 감독관이 왕자인 모세의 신분을 알았기에 속수무책으로 저항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를 통해 모세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났을 살인자의 추억을 그려 봅니다. 이 사건이 아니라면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자기 주체성을 제로로 놓을 수 있는 과정에 대해 다른 힌트가 없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도망친 이후 처가살이를 하며 고요한 광야에서 양을 칩니다. 그런데 환경이 고요하면 고요할수록 모세의 마음속에는 이 고요를 깨뜨리는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살인자의 추억입니다. 이 살인자의 추억은 혈기방장하던 40세의 모세를 강물에 떠내려가는 석 달짜리 아기로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이 사건 외에는 모세가 돌이킬 가능성을 제시하는 다른 사건은 없습니다.
애굽인 감독관은 왕자가 와서 자기를 때리는데 무척 놀랐을 것입니다. 얻어 맞으면서 ‘왕자님! 왜 이러십니까?’라고 외쳤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에는 이 광경을 모세가 쳐서 죽였다는 말로만 묘사하고 있기에 우리는 애굽인 감독관이 어디를 어떻게 맞아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세가 애굽인 감독관 위에 올라타서 맨주먹으로 죽을 때까지 내리쳤으리라는 것입니다. 애굽인 감독관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고 머리뼈가 함몰되는 지경에서 ‘왕자님! 왜 이러십니까?’라고 계속해서 외쳤지만 이윽고 죽었습니다.
고요한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의 머릿속에는 이 살인자의 추억이 매일 되살아났습니다. 모세는 그 사건의 결과로 애굽의 왕자 자리를 잃고 양을 치게 되었기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양을 치며 40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는 동안 모세의 마음속을 지배한 자아의식이 무엇일까요? ‘나는 무방비 무저항의 속수무책인 사람을 죽였다. 그는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런 사람을 분노에 휩싸여 얼굴의 형체가 없어질 정도로 치고 또 쳤다. 나는 끝내 그의 목숨을 끊어버렸다.’라는 자아의식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세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사전에서는 트라우마를 정신에 지속으로 영향을 주는 강렬한 감정적 충격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외부의 충격이 지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안에서는 어떤 기억이 계속되는 충격으로 작용합니다. 모세는 40년 왕자로 사는 동안 화려한 궁정 생활과 예절에 익숙해 있었고 귀족다움이 넘쳐흘렀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세가 한순간의 분노와 혈기를 참지 못하여 애굽 사람 위에 올라타서 얼굴이 피범벅이 될 정도로 주먹으로 내리치고 내리쳐서 죽게 했습니다. 이 살인자의 추억이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내 속 어디에 그런 괴물이 있다가 튀어나온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살인자의 추억과의 대면이 40년 동안 모세를 괴롭힙니다. 이 자아의식이 없었다면 혈기방장하고 모든 일에 능력이 있었던 모세가, 강물에 떠내려가는 석 달짜리 아기처럼 하나님 주권 앞에서 자기 주체성을 제로로 돌리는 사람으로 변하는 과정을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성경에서 모세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적습니다. 그러나 살인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히 언급됩니다. 성경은 살인자의 추억을 제시하며 모세가 석 달짜리 아기로 돌이키게 되었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민수기 12장 3절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애굽인 감독관은 히브리인들을 압제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애굽인으로서는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애굽의 왕자라는 모세는 분노와 혈기로 감독관을 쳐서 죽입니다. 이러한 살인자인 모세에게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는 설명은 어울리는 것일까요?
모세의 온유함이란 사람을 향한 따듯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아닙니다. 온유함이란 결국 마음의 수용성입니다. 뻣뻣하여 거부하는 일이 없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살아계셔서 이 세상을 향하여 당신의 주권을 흘려보내시고, 그 주권으로 세상을 휘감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온유함입니다. 당시 사람에 대한 관계에서는 모세보다 더 온유한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권자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서는 모세보다 더 온유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다 받아들이는 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계기는 말씀드렸듯이 살인자의 추억 때문입니다. 살인자의 추억이 모세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내 속에 살인을 저지르는 괴물이 있다는 충격이 모세를 주권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온유한 자로 만든 것입니다. 주권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가장 뻣뻣함이 없고, 가장 거부감이 없고,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모세의 광야 40년 처가살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효력을 발휘하는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을 향해 주체성을 발휘하려는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40년 동안 살인자의 추억을 통해 모세에게서 십자가의 효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와 같은 트라우마 없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처세로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삶의 기술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나 자신 속에 있는 괴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에 대해 충격을 받는 트라우마가 있어야만 기술과 처세로써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나를 죽이는 것으로 붙잡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는 트라우마가 있습니까? 내 모습에 대한 충격적인 경험이 있습니까? 자기 주체성을 드러내면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자기 뜻대로 밀칠 때도 있고, 자기 뜻대로 당길 때도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좋아하기도 하고, 자기 뜻대로 불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모세의 살인자의 추억처럼 자기 주체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게 하는 트라우마가 있습니까? 이 트라우마가 없이 십자가를 붙잡는 것은 신앙이 아닌 기술이자 처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기 위해 모세처럼 살인이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고 뼈가 함몰될 정도로 사람을 때리고 또 때려서 죽여야만 나의 괴물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모세의 살인 사건은 상징입니다. 참새 한 마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것처럼 애굽인 감독관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히브리인들을 학대했든 어쨌든 그의 생명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 19절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라고 하였던 바가 이와 같습니다. 원수를 살려두시는 자가 하나님이시기에 내 앞에 원수가 살아있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현상입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애굽인 감독관을 때려죽인 것은 그를 살려두신 하나님의 주권에 올라탄 행위였습니다. 모세가 피범벅으로 만들어 죽인 것은 단순히 애굽인 감독관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본문 24~25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약속이 다시 언급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후손들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노릇 할 것을 예고하셨기에 히브리인에 대한 탄압은 계획하신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 명단에 있던 자들은 모세를 지도자로 삼아 함께 떠날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똑같이 취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주권의 이끌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이게 하는 버들잎입니다. 선민이라면 버들잎과 똑같은 흐름을 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인자가 아니라더라도 모두가 모세와 같은 충격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내가 나에 대해 가져야 하는 충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세를 통해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든지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로서 자녀 문제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녀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주권을 침해하는 일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살려두신 애굽인 감독관을 때려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돈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고 불안해한다면 주체적으로 책임을 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삶의 경제적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은 침해받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때려죽여서 절대로 그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가 모세의 살인이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트라우마가 되는 충격의 필요성입니다. 모세는 살인자의 추억이라는 트라우마를 통해 자기의 주체성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주권을 때려죽이는 괴물 같은 모습을 보고 모세처럼 충격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가 트라우마에 의해 자기 주체성이 제로가 되었던 것처럼 석 달짜리 아기가 나일강에 떠내려가듯이 하나님 주권의 강물에 떠내려갈 수 있는 주체성 제로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꼭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을 해야만 내가 괴물의 모습을 깨닫고 충격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의 삶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불안해하고, 불만스러워하고, 만족하고, 좋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 모든 대상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은 침해받았습니다. 모세가 애굽인 감독관을 치고 또 쳐서 피투성이를 만들어 죽게 한 것처럼, 결국 그 모든 일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들을 다 죽여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동안에, 내가 싫어하는 동안에, 내가 불만을 갖는 동안에, 내가 걱정하고 근심하는 동안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살인은 일어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살인자였던 것입니다. 모세는 살인자의 추억을 트라우마로 삼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어느 정도로 괴물인가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충격을 받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내가 주체가 되어서 살던 동안에 생각만 해도 끔찍한 모습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끔찍한 죄악 된 나의 모습을 은혜의 도구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주체적으로 살면 나는 괴물이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살인자의 추억은 나의 가장 부끄럽고 추악한 기억을 상징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을 깨달았다면 ‘이제 나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트라우마가 있어야 십자가를 붙잡는 것은 신앙이 됩니다. 나의 모습에 대해 충격을 받는 트라우마가 없다면 십자가를 붙잡는 것은 삶의 기술이자 처세일 뿐입니다. ‘내가 죽는 대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원하는 좋은 상황으로 이끌어 주셨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종교인의 마인드이고 십자가를 붙잡는 기술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약속의 명단 속에 있는 자들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나는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자로서 교회를 세우려면 내 주체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만 합니다. 삶에서 건강 문제, 돈 문제, 사업 문제 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문제에 대한 내 생각과 고민의 자취는 없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미리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내 생각과 걱정이나 근심의 자취나 흔적이 남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동안 나는 괴물이 됩니다. 모세가 애굽인 감독관을 때려죽인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동안 당면한 삶의 국면에 대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을 때려죽이게 됩니다. 이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면 충격을 받고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고,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이라고 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이렇게 십자가를 강조한 것일까요? 죄악의 체질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대상들에 대한 주체성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본래 우리의 주체성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쏟아부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죄악의 체질은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주체성을 쏟아붓게 합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것들에 대해 반응하게 하며 주체가 되게 합니다. 이렇게 주체가 되게 하는 죄악의 체질을 묶으려면 날마다 죽어야 하고,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녀야 하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단짝이 될 수 있고,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의 흐름을 타고 흘러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 트라우마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세와 같은 살인을 저지른 적이 없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고, 모범적 시민으로 살아왔을지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주권을 죽여왔습니다. 모세가 애굽인 감독관을 피투성이가 되게 때리고 때려서 죽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제까지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을 때려죽여서 기어코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든 괴물들입니다. 이러한 괴물의 모습이 여러분에게 충격이 되고 트라우마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내 자발성과 주체성으로는 삶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석 달짜리 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아무쪼록 모세가 가졌던 살인자의 추억 속에서 발생하는 이 트라우마가 우리 각자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지독하게 죄인인 나의 모습에 충격을 받게 하시고 트라우마가 생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이 세상을 향하여 일말의 주체성도 표현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그러기 위하여 십자가를 심장 옆에 박아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