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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득실을 따지되 대상은 바꿔라>의 줄거리 :
생각과 행동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득실입니다. 득이 되는 일을 하고, 실이 되는 일은 피합니다. 그러나 세상 적인 득실에 촉각을 곤두세우면 반드시 나를 위해 세우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서 이탈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절대 손해입니다. 득실을 따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따지는 적용 대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뭡니까? 세상 적인 이익과 손해에서는 그토록 강력하게 활성화되는 소중함과 아까움의 느낌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해선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득실을 따지되 대상은 바꿔라
(룻기 4:1~22)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7.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8.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1~8절에는 보아스와 기업 무를 우선권자가 엘리멜렉 가문의 땅을 무르는 것에 대한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아스가 엘리멜렉 가문의 땅을 무르는 자가 되어서 룻과 계대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은 엘리멜렉 가문에 입적되어야 했습니다. 일찍이 엘리멜렉 가문에는 말론과 기룐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고 룻은 말론과 결혼했습니다. 후에 말론과 기룐이 모두 죽고 기룐의 아내인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고 룻만 남았습니다. 보아스가 이러한 과거를 가진 룻과 결혼을 하게 되면 태어난 첫아들은 룻의 남편이었던 말론의 아들로 입적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엘리멜렉 가문의 땅을 보아스나 우선권자가 무르게 되더라도 룻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죽은 말론의 아들로 입적이 되어서 그 땅은 엘리멜렉 가문으로 귀속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결혼해서 태어난 아들이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8~22절을 보면 다윗의 계보를 언급하며 보아스가 다윗의 증조부가 되고, 룻은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음을 밝힙니다. 사사 시대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이 시대에 룻은 오직 하나님이 창세 전에 세워두셨던 다윗으로 상징되는 계획을 이루는 일에 전심을 다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룻기의 메시지입니다. 본문 중심으로 <득실을 따지되 대상은 바꿔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가 읽은 부분에는 그야말로 세기적인 합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합의입니다. 누가 엘리멜렉 가문의 땅을 무르고 룻과 계대결혼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창세 전에 다윗이 이 땅에 태어나리라는 하나님의 계획과 또한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시리라는 계획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가담할 자가 결정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합의에 도달하기까지 보아스와 기업 무를 우선권자의 사이에 심리적인 긴장 상태가 어떠했겠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보아스는 우선권자가 어떤 마음을 먹을 것인지에 대해 무척 조마조마했을 것입니다. 우선권자가 엘리멜렉 가문에게 할당되었던 모든 땅을 사서 돌린다 하더라도 당사자인 엘리멜렉의 두 아들이 죽었기에 관리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다만 이것은 엄청난 이득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내에서 모든 토지의 거래는 땅을 샀더라도 50년 째 희년이 되면 주인에게 돌려줘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당사자가 모두 죽었기에 희년이 되어도 돌려줄 필요가 없이 자기가 관리하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선권자가 땅을 무르겠다고 나서는 상황에서 보아스는 무척 조마조마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보아스는 ‘당신이 그 땅을 기업으로 무르는 것은 좋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문의 며느리가 살아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며느리와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은 엘리멜렉의 아들인 말론에게 입적되어야 한다. 결국 당신이 무른 땅은 말론의 명의로 변경될 것이다.’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러자 우선권자는 땅만 이야기할 때는 무르겠다고 하였으나 계대결혼법대로 룻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서 입적해야 하고 땅까지 엘리멜렉의 가문에 돌려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손해라고 생각해서 우선권을 포기하고 보아스에게 넘깁니다.
만약 우선권자가 계대결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아마 보아스의 심정은 무너졌을 것입니다. 보아스가 추수 때 타작마당에서 자고 있을 때 룻이 이불 발치에 누운 것은 계대결혼법에 의한 청혼 과정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단순히 자기를 좋아해서 결혼을 요청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룻은 엘리멜렉 가문의 두 아들이 죽어서 대가 끊기게 된 상황이 하나님이 창세전에 세웠던 뜻과 계획이 이 땅에서 끊어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룻은 하나님의 뜻이 끊기는 것이 너무 마음 아파서 시아버지 나이 또래인 보아스에게 청혼했습니다. 이처럼 룻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란 마음 채움을 위한 하나님 좋아하기와 그렇게 좋은 하나님을 위하기입니다. 보아스는 이처럼 하나님을 좋아하면서 하나님을 위하는 모압 출신의 젊은 여인의 마음을 예쁘고도 고맙게 여겼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당시는 사사 시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압 출신의 룻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 땅에서 끊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젊거나 돈이 있고 없고의 여부를 떠나서 시아버지뻘 되는 보아스에게 계대결혼의 청혼을 합니다. 보아스는 이처럼 하나님을 위하기에서 앞서가는 젊은 여인의 마음이 너무나 귀하고 소중하였기에 간절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위하는 여인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결혼하여 엘리멜렉의 가문을 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세워두신 계획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마음으로 합의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선권자가 기업도 무르고 계대결혼도 하겠다고 했다면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보아스의 마음은 애처로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우선권자는 계대결혼법을 깨닫고 기업 무르기를 포기합니다. 모압 출신의 룻과 계대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으면 엘리멜렉 가문의 장자로 입적을 시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른 땅도 다 돌려줘야 했습니다. 이 점이 마음에 걸려서 기업 무를 우선권을 보아스에게 넘긴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권자는 기업 무르기를 포기하였고 덕분에 보아스는 쾌재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한편 기업 무를 필요가 없어진 우선권자도 책임을 면했다고 여겨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둘 다 이긴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둘의 차이는 엄청나게 갈립니다.
룻과 결혼한 남자에게서 태어난 아기가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도록 하나님은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기업 무를 우선권자에게는 다윗의 할아버지를 낳고 예수님 탄생의 계보에 끼어들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선권자에게 먼저 주어진 권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선권자는 이 특권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 이유는 득실을 따졌기 때문입니다. 득실을 따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세전의 계획과 뜻에서부터 이탈하는 일이 생겨버리고 만 것입니다. 기업 무를 우선권이 주어진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득실을 따지자 하나님이 창세전에 세워두셨던 다윗의 출생 계획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탈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룻이라는 이방 여인은 어떡하든지 창세전에 세워두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 마음으로 산 결과가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와 우선권자의 합의는 결과적으로 다윗의 피에 누구의 유전자가 전달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합의였습니다. 이 합의에서 우선권자는 이탈하고 차순위였던 보아스가 다윗의 생물학적 유전자를 부여하는 자리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다윗은 우리 누구에게나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상징합니다.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태어날 것은 물론이고 내가 태어날 것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세 전 계획대로 내 인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인생의 매일매일은 다윗에 이를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보아스와 룻이 결혼함을 통해 다윗에게 이르는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매일매일의 삶에는 다윗으로 상징되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오늘 하루의 삶을 통해 도달하고 싶어 하시는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뜻과 계획에 도달하는 원리가 무엇일까요? 본문이 보여주는 것은 세상적인 득실을 따지면 반드시 창세 전에 세워두신 다윗에게 이르는 하나님의 계획의 과정에서 이탈된다는 것입니다.
우선권자는 세상적인 득실을 따집니다. 내게 이익이 되는 것과 손해가 되는 것을 엄밀하게 따집니다. 한편, 보아스도 득실에 의해 움직였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보아스가 따진 것은 세상적 이익이나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아스와 룻이 따졌던 득실의 내용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세워두신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이익이고, 그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고 버려지는 것이 손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우선권자나 보아스나 득실의 원리로 움직였던 것은 같습니다.
지구상 모든 사람이 득실을 따라 움직입니다. 내게 이득이 되는 것은 끌어당기고, 내게 손해가 되는 것은 피합니다. 이것은 경건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원리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득실을 따지면서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득실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적인 득실을 따집니다. 세상적으로 내게 이득이 되고 손해가 되는 것을 따라 본능적으로 움직입니다. 어떤 경우는 깊이 따져봐야 알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즉각적으로 득실을 따질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은 세상적 이득이 있는 쪽으로 움직이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손해가 되는 일에서는 피하려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화를 내고 분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손해가 되는 쪽으로 이끌려 가면 화가 납니다. 세상적 득실이란 금전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명예나 자존감에 상처를 입힌다면 결국 나의 존중됨이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득실이란 금전뿐만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득실의 원칙이란 성공과 실패, 금전적 손익 계산, 좋음과 나쁨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굉장히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오늘을 위하여 세워두신 뜻과 계획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돈은 너무 아깝습니다. 누가 내 자존감을 해치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납니다. 인정의 욕구도 있습니다. 회사에서 승진을 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나에게 이로운 것이냐 해로운 것이냐를 따지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사장님께 굽신거리는 이유는 사장님이 나를 좋게 보는 것이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면 좋은 이유는 돈이 많이 들어오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돈이나 승진 혹은 물건을 비롯한 세상 가치들에 대해서는 마음에서 분명하게 이익과 손해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해서는 말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돈을 벌어서 이익을 봤을 때처럼 기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포기되거나 중단되었다고 해도 돈을 잃어버렸을 때처럼 손해 의식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큰 문제입니다.
득실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똑같은데 문제는 무엇을 이득이라고 생각하고 무엇을 손해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 것들은 그렇게 아깝고 소중해서 얻으면 기쁘고 잃으면 화가 치밉니다. 이득 의식과 손해 의식이 실감 나고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대해서는 이득 의식과 손해 의식이 밋밋한 것일까요? 이것이 우리가 룻이나 보아스와 같은 결심을 못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으심이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지만, 하나님이 유일한 좋으심이라는 사실을 삶에서 증명해 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으심이면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바람이 없어야 합니다. 내게 하나님이 좋음이라면 돈을 많이 벌어도 그것은 좋음이 아니기에 이득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좋음이라면 돈은 좋음이 아니기에 돈을 잃는 것이 나쁨이나 손해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돈을 버는 일에서 하나님 좋음이 증명이 되는 상태입니다. 문제는 우리 삶에서 하나님 좋음이 증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면 좋습니다. 돈을 많이 못 벌면 싫습니다. 죽고 싶을 정도입니다. 건강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면 건강은 좋음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건강해도 이득이 아니고 건강하지 못해도 손해가 아닙니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 내 건강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아프든 건강하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많이 가지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론적으로 하나님이 좋음이라고 말할 뿐이지 하나님의 좋음이 내 삶에서 증명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좋음이라면 바뀌어야 합니다. 자녀의 성공도 좋음이 아니고, 자녀의 실패도 나쁨일 수 없습니다. 이득도 아니고 손해도 아닙니다. 이때 바라는 것은 성공의 모양으로 보이든 실패의 모양으로 보이든 하나님의 뜻과 계획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음이라면 돈이 벌려도 좋음이 아니고 돈이 안 벌려도 나쁨이 아닙니다. 이익도 아니고 손해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으로 믿는다면 돈이 벌리든 안 벌리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 좋음이 삶에서 증명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좋다는 말만 듣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생활화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삶에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고,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기도 생활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좋음이 삶에서 증명될 정도로 내 안에서 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죽는 일은 반복해서 잘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부활 승천했다는 의식만 갖고 있지 곧바로 내려와 버립니다. 올라갔으면 하나님을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 마주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마주하기를 이어갑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그 하나님의 좋으심이 삶에서 증명되기를 간구합니다. ‘아버지!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는 예수님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를 가질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고 있다면 ‘사업에서 돈이 벌렸다 해도 그것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하나님으로 기뻐하게 해주세요. 돈이 안 벌렸다고 해도 그것을 손해라고 느끼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말씀에 담긴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통해서 나 자신에게 하나님의 유일한 좋으심을 자꾸 확인시킵니다. 그럼으로써 내 의식 안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좋으심이 깨어 있어야 삶에서 하나님의 좋으심은 증명이 됩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올바른 득실의 원칙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세상적 득실을 따지느라 정신이 없을 때, 나는 홀로 득실의 원칙을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적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승진하면 성공이고 이득이라고 봅니다. 승진에서 떨어지면 실패로 보고 손해로 봅니다. 그러나 나는 승진을 하든 못하든 그것은 좋음이 아니라는 것을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좋음을 확보하면서 증명해 냅니다. 그렇게 증명해 내면 승진을 하든 못하든 내 마음의 바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계획이 이루어지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 승천을 따라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마주 봅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에 대한 존재감과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에 대한 만족감을 자꾸 확인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유일한 있음인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것들입니다. 뉴스를 보면 대통령이 어떻다, 민주당이 어떻다, 국민의힘이 어떻다, 트럼프가 어떻다, 시진핑이 어떻다, 북한이 어떻다는 등의 온갖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볼 때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 안에서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이끌고 계신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일한 좋음이기에 내가 세상에서 바랄 것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할 일은 유일한 좋음의 하나님을 크게 갖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말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백 번, 천 번, 만 번 들어왔습니다. 새로워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좋음이 내게 적용되는 정도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새로워짐이란 몇 년 전에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좋으심이 10% 정도였다면 이제는 40%나 50%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말을 들어도 마음에 하나님 좋으심이 10% 차 있을 때와 40% 정도 차 있을 때가 틀립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말이 새롭게 들립니다. 하나님을 가지는 양이 달라져야 말씀이 새롭게 들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하나님이 유일한 좋으심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바뀌고 여러분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안 되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함으로써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을 실제 좋음으로 가지는 시간이 없다면 달라질 것도 없고 새로워질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 룻의 마음에서처럼 소중하고 아깝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에게서 당시 여자에게 좋음이라고 여겨질 모든 것을 가져가셨습니다. 나오미는 남편을 잃었고 두 아들을 잃었으며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런데도 룻은 하나님을 붙잡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보면서 하나님이 남편보다 좋고, 두 아들보다 좋고, 재산보다 더 좋은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고향인 모압 땅을 떠남으로써 하나님의 좋음을 증명해 냅니다. 룻이 삶의 모든 기반을 다 버리고 떠날 정도로 룻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좋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러한 룻의 마음에서 제일 아까운 것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세워두신 뜻과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겠다고 결정을 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러한 룻의 마음을 탄복하며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세기적인 합의에 가담함에 있어서 우선권자가 있었기에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생명처럼 바라는 룻을 아내로 맞고 싶은 보아스는 거룩한 소원과 긴장감을 갖고 우선권자와 합의에 이릅니다. 그 결과 다윗의 증조부가 되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됩니다.
다윗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세워두신 창세전의 계획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창세전 계획인 다윗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득실을 따져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가장 소중하다는 득실의 개념과 득실의 기준이 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먹고 가지기 위하여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해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함으로써 마음에서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과 좋음으로 인한 만족감이 커지면 룻과 보아스처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따지는 득실의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가장 아깝고 한탄스러운 일로 실감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매일매일 내 앞에 놓인 다윗으로 상징된 창세전 계획에 도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이 기회를 충분히 살려서 날마다 창세 전 계획인 다윗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아까워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차피 사람이면 득실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룻처럼 보아스처럼 하나님을 무진장 좋아하여 이 세상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가장 아깝게 실감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득실의 원칙을 따라 움직일 때 반드시 매일매일 창세전 계획인 다윗에 도달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