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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60년대 성인음악
1. 또 하나의 성인 음악
우리는 지난 시간에 트로트라는 우리 성인 문화의 양식이 어떻게 탄생했고, 또 60년대 어떻게 확대되었는지 검토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성인 세대의 음악은 트로트만이 아니다. 성인 세대나 요즘의 젊은 세대들은 어른들이 좋아하는 음악은 전부 트로트, 즉 뽕짝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러나 사실 트로트는 성인음악 양식 중에서도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2박자 계열의 리듬을 가진, 단조계열의 5음계 음악일 뿐이다.
트로트(Trot)
한국 대중 가요의 일종. 4/4박자의 강/약/강/약 리듬으로 일정하게 진행하며, 주로 오음음계의 사용이 많음.
한복이나 빤짝이 드레스를 입고, 나이 드신 분이 나와서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모두 트로트는 아니다.
예를 들어, 90년대 성인 음악 중에 크게 히트했던 노래 중에 김수희의 ‘애모’라는 노래가 있다. 그건 성인 음악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트로트라고는 할 수가 없는 서양음악 계열의 음악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음악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트로트 말고 다른 다양한 성인 음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그래서 오늘 4번째 시간은 트로트가 아닌 다른 성인음악은 어떻게 탄생하고, 또 어떤 스타를 만들어냈으며, 그 음악문화가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인지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2. 60년대 한국 대중 음악의 2가지 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어른 세대와 젊은이 세대의 세대 분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은 60년대말 70년대초라고 첫 시간에 말씀드렸다.
그 시기 전, 전쟁에서 좀 회복되기 시작해서, 경제개발계획에 돌입하여, 본격적으로 국가근대화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 60년대에 우리나라 대중 성인음악의 틀이 만들어진다.
1960년대에 대중음악의 틀이 만들어짐.
그 하나는 지난 3번째 시간에 이야기했던, 이미자, 남진, 나훈아로 대표되는 ‘트로트’라는 거대한 산맥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 봉우리에 미8군 무대 출신의 음악가들에 의해 서양음악적인 ‘스탠다드 팝’이라는 음악 문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 또한 트로트와 자웅을 겨루는 성인 음악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1960년대 한국 대중 음악의 틀 1)트로트 2) 스탠다드 팝
트로트 쪽에 이미자, 남진, 나훈아가 있었다면, 스탠다드 팝 쪽은 한명숙, 최희준, 패티김, 현미가 있었다고 생각하시면, 언뜻 어떤 음악인지 감이 잡히실 것이다.
3. 일본과 미국의 영향
이러한 성인 음악의 두 갈래는 어찌 보면 20세기 우리나라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나라의 문화를 각각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는 20세기 전반,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결정지었던 일본이라는 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트로트라는 음악이었다. 또 그 반대편에는 해방이후, 특히 50년 한국전쟁이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나라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20세기의 강대국 미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스탠다드 팝(standard pop)이라는 음악이다.
그리고 트로트와 미8군 무대 출신의 음악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스탠다드 팝이라는 2개의 양대 성인 음악 문화가 60년대에 자리를 잡게 된다.
일본과 미국의 영향을 받은 2개의 음악축은 그때부터 지금 이순간까지 우리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4. 60년대 3대 문화 형성 조건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미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스탠다드 팝 문화의 형성 과정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지난 시간에 60년대의 우리 음악 문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야기하면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먼저 KBS, MBC 그리고 여타 FM 라디오 방송의 출현을 이야기했었다.
60년대 문화 형성 조건 1) 방송국의 개국 2) 메이저 음반사의 출현 3) 미8군 부대의 문화 유입
그리고 2번째는 지구레코드와 오아시스레코드라고 하는 메이저 음반사 문화들이 만들어지면서 음반 시장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이야기했다.
3번째 변수가 될만한 것은 바로 미8군 부대라는 한국사의 특수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5. 미 8군 무대
이 문화를 이야기하자면, 필연적으로 50년 한국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
우리는 전쟁이 일어나면서 모든 것을 다 잃었다. 그래서 우리가 먹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군이라는 존재였다. 미군이 주는 구호물자로 꿀꿀이 죽을 끓여서라도 먹고 살아야 했고, 미군이 주는 텐트라도 치고 살아야 했고, 미군 군복을 물들여서 우리는 먹고, 입고, 살아야 했다.
미군이 던져주는 달러를 가지고, 우리는 정말 나라의 경제를 근근히 이어나갔다. 따라서 전쟁이후, 우리나라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음악을 할 곳이 없었다. 이런 빈곤한 상황에서 어느 가서 노래를 부르면서 밥을 먹고 살 수 있었겠나? 불가능했다. 그래서 모든 사회는 미국, 정확히 말하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향해서, 모든 시선이 다 집중되어 있었다. 음악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시기인 1956년부터 우리나라에서 미군을 상대로 하는 방송이 시작된다. AFKN이 그것이다. 이제는 구걸을 하려고 해도 영어 한 마디는 해야하는 시기에 사람들은 모두 AFKN 방송을 들으면서 미국 문화와 만나게 된다.
AFKN(American force Korean Network) 주한미군방송
미군들은 우리와 틀려서 전쟁을 하는 도중에도 이른바 엔터테이먼트를 즐기면서 전쟁을 했다. 그렇지만 매일 미국의 스타들만 데리고 방송을 할 수는 없었다. 스타가 공연하는 경우는 아주 특별한 이벤트였다. 일상적으로는 자기가 주둔한 지역의 음악인들을 픽업해서 자기들의 음악을 연주하게 만들고 그것을 누렸다.
그래서 이들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엄격한 오디션을 보았다. 자기들이 주둔하는 지역의 로컬 미군 문화 담당자들을 선발해서 먹여 살려주었다.
그래서 먹고 살기 대단히 힘든 그 당시, 모든 음악인들은 전부 다 미 8군 무대에 서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다. 그것밖에는 먹고 살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미8군 무대에 섰던 원로 음악인들의 회고록들을 보면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내용이 많다. 8군 무대에 서면, 개런티도 개런티였지만, 일단 콜라와 햄버거를 주었다. 그런데 그게 목에 안넘어갔다. 왜냐하면 부대 바깥에서는 자기 가족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굶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물자가 픙족한 곳이어서 기름진 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지만 차마 먹지 못했다. 그래서 먹다말고 가지고 나가려고 자꾸 숨기게 되었다.
그런데 미군들이 보면, 먹어야 연주를 할텐데 먹지를 않으니깐 걱정을 했다. 그리고 나중에 가족을 가져다 주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걱정말고 먹어라. 나갈 때 또 싸줄게’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참으로 처참한 시대였다.
50년대 말에서 60년대 되기 전까지 미8군 무대에 소속된 음악인들은 한국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미군과 미군의 가족들을 위해서만 연주했다. 미군부대 안에서만 연주했다. 그렇게 연주를 하면서 개런티를 받았다.
그때 이들이 받았던 대우는 상당히 특권적인 것이었다. 제가 3번째 강의를 하면서 제1차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기 전까지 총 수출액이랑 미8군 무대 음악인들이 받았던 개런티 액수가 똑같다고 이야기했다. 그 당시 달러로 봉급을 받았기 때문에 대단한 개런티였다,
그래서 경쟁률이 치열했다. 게다가 미군들은 한국인 연주자들을 그냥 한 번 오디션에서 뽑으면 계속 가는 게 아니라 정기적으로 오디션을 봐서 등급을 정해주었다. 계속 연습을 해서 등급이 높아지면 개런티를 좀더 주었다. 처음에 높았어도, 연습을 게을리 하면 등급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늘 언제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연주를 하고, 훈련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실 이 미8군 무대를 통해서 한국의 대중음악에 있어서 연주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6. 노란 사쓰의 사나이
이 50년대가 끝날 때까지 미8군 무대에 섰던 한국인 음악인들은 오로지 미군들을 위해서만 연주했다. 쉽게 말해서 미국 음악만 연주를 한 셈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에 미8군 무대의 음악인들이 드디어 한국말로 된 대중음악을 가지고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낸다. 트로트 말고도 이런 음악이 있다는 것을 선언한 상징적인 노래가 있다. 바로 지금 듣게되는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이다.
한명숙(1935~)
가수. 대표곡 <노란사쓰의 사나이>, <눈이 내리네>
손석우가 작사 작곡을 하였으며, 트위스트 리듬에 밝고 경쾌한 곡으로 국민들의 사기와 의욕을 부추기는 노래임.
너무나 유명한 노래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난 3번째 강연에서 들었던 이미자, 남진, 나훈아의 노래와 이 노래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나?
첫 번째로 이 노래는 일단 앞의 트로트랑 달리 가수의 목소리가 다르다. 트로트 가수는 이난영부터 이미자까지 전부 다 꾀꼬리같은 목소리 즉 청성이었다. 그런데 이 한명숙의 목소리는 허스키한 목소리라는 탁성이다. 소리의 음색이 달라졌다.
그 다음에 일단 반주를 시작할 때부터 바이올린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명백히 미국의 컨츄리 음악으로, 피들 주법이라고 한다. 물론 이 곡의 작곡자는 손석우라는 한국인 작곡자였지만 미국 음악적인 문법에 맞추어서 만든 노래였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말을 타고 등장하고, 바이올린을 켜는 그런 음악의 문법을 그대로 적용시켜서 만든 노래가 바로 이 한명숙의 ‘노란사쓰의 사나이’였다.
사실 한명숙은 미8군 무대에 섰던 연예인이었다. 그런데 이 한명숙이 한국말로 된 우리 노래를 가지고 60년대에 등장한다. 물론 64년의 이미자에 비해서 큰 파문은 아니었지만, 이 새로운 물결에 한국사회는 대단히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한명숙은 이 한 곡으로 순식간에 톱스타가 되었다. ‘노란사쓰의 사나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그 영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는 그런 인기를 누렸다.
7. TV와 스탠더드 팝
이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까지는 일본 문화에 대한 향수와 동시에 AFKN과 TIME지라는 미국문화에 대한 동경으로도 가득한 시대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 미국문화에 가까이 가고자 몸부림을 쳤고, 또한 그들은 그 미국문화를 통해서 사회에서 새로운 출세의 길을 만들기도 했었다.
이런 우리 사회의 풍토는 미국문화에 대한 거대한 선망을 낳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문화가 왠지 훨씬더 세련되고 우월해 보인다는 착각까지 가지게 만들면서, 미국식 스탠다드 팝 문화는 점점 확산 일로를 걷게 된다.
미8군 출신들이 가져온 미국식 스탠다드 팝 문화가 확산되는 데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곳은 바로 우리나라의 TV방송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트로트가 대중적으로 훨씬 더 인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막 출발했던 TV방송인 KBS, MBC의 음악프로그램들에서는 스탠다드 팝을 하는 미8군 무대 출신의 가수들을 선호했다.
사실 지금의 TV는 워낙 대중화되어 있지만, TV방송이 처음 시작하는 60년대 전반기만 하더라도 사실 TV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다. 너무 비쌌다. 제가 기억하기로 60년대 우리 동네에 TV가 딱 2대밖에 없었다. 그래서 보통 TV가 있는 집에는 온동네의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인기있는 프로그램을 하면 수십명이 몰려서 ‘안방극장’이라는 말이 있었다.
TV가 결정적으로 대중화되는 것은 70년에서 71년사이에 박정희 정권이 TV의 특소세를 인하하면서, 대중적으로 보급하기 전까지 60년대에는 TV라는 것은 사회의 특권적인 계층들만이 보는 문화였다. 그래서 사회의 내노라하는 집안은 트로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새롭게 등장한 미국문화를 대단히 선호했다. 그게 뭔가 있어 보인다. 트로트는 없는 사람들의 문화라는 생각을 했다.
거기다가 이 프로그램을 만드는 PD들은 당연히 좋은 대학을 나온 그 당시의 엘리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은 성인대중의 문화보다는 미국의 문화를 좀더 선호했다. 그래서 스탠더드 팝은 사실 그 대중적인 영향력이나 인기도에 비해 TV와 FM 라디오에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8. 페티김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페티김이었다. 요즘도 오디오형 가수, 비디오형 가수가 따로 있지만, 한국 최초의 비디오형 가수는 패티김이었다.
패티김(1940~)
가수, 본명은 김혜자, 대표곡 <못잊어>, <빛과 그림자>
패티김은 이미자와 똑같이 59년도에 가수 데뷔를 한다. 지금도 화려한 무대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만, 젊어서는 더 멋있었다.
실제로 그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보면, 패티김은 우리나라 가수 중에서 처음으로 서구형 마스크와 몸매를 가진 가수로 소개되었다. 키도 후리후리하게 크고, 얼굴도 서구적으로 시원시원하고, 선이 굵었다. 그래서 카메라의 입장에서 보면, 한복을 입고 나오는 이미자에 비해서는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이미자가 자신의 노래로 ‘임이라 부르리까’ 그리고 64년도에 ‘동백 아가씨’로 폭발을 할 때, 패티김은 자기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주로 미국과 유럽의 번안곡들을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은 ‘패티김 스페셜’이러고 해서 1시간짜리 패티김의 무대를 만들었다. 어쩌다가 미국을 가면 ‘이한기념 스페셜’을 했고, 미국에서 공연이 끝나고 오면 ‘귀국기념 스페셜’을 했다.
번안곡
남의 작품을 그 구상이나 줄거리는 바꾸지 않고, 다른 표현 양식을써서 새로운 작품으로 고쳐 부른 곡.
그 당시의 TV 프로그램을 신문에서 보면, 정말 페티김, 패티김, 페티김으로 이어진다. 그 정도로 사실 방송국들이 미국 문화에 영향을 받았던 음악을 선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 스탠더드 팝의 특성
스탠더드 팝은 글자 그대로 가장 표준적인 대중 음악이라는 뜻이다. 그럼 이 음악이 도대체 어떤 음악인지 궁금하실 것이다. 방금 들었던 한명숙의 노란셔츠의 사나이도 스탠다드 팝이고,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발라드도 스탠다드 팝이다.
발라드(Ballade)
대중 음악 가운데 사랑을 노래한 감성적인 음악을 말함.
대중음악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에서 음반을 만들어서 판을 팔아보니깐, 가장 꾸준히 오랫동안 변함없이 팔리고, 우리를 즐겁게 해주면서 돈을 많이 벌게 해주는 음악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음악을 스탠더드 팝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표준이 되는 음악이라는 뜻이다.
그런 음악의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너무 자극적이고, 빠른 음악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바로 끌 수 있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 그래서 템포가 중용적인 음악이 오래 팔렸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음악이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으로 아주 극단적인 표현보다는 배웠건 못 배웠건, 가졌건 못 가졌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인 사랑, 이별과 같은 주제를 담고 있는 음악들이었다.
또한 동시에 음악의 연주 형태는 스윙밴드였다. 30, 40년대 미국영화를 보면, 나비 넥타이 메고 악단들이 앉아있고, 그 앞에 마이크가 하나 딱 있고, 드레스 입은 가수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런 밴드를 스윙밴드라고 한다.
스탠다드 팝의 특성
1. 중용적인 속도
2. 아름다운 멜로디
3. 공감적인 이야기
4. 스윙밴드의 연주형태
그런 재즈적인 스윙밴드의 반주자가 있고, 그 앞에 드레스를 입은 가수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전형적인 스탠다드 팝의 편성이다.
8. 밴드의 등장
미국의 그런 편성을 그대로 옮겨서 미8군 부대에도 악단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 밴드의 악단장들이 나중에 우리 60년대 한국 스탠다드 팝의 아주 중요한 지도자들이 된다.
바로 이봉조 악단, 길옥윤 악단의 밴드 마스터들이다.
이봉조 1930~1987
색스폰 연주자이자 작곡가 대표곡 <밤안개>
길옥윤 1927~1995
색소폰 연주자이자 작곡가 대표곡 <서울의 찬가>
이봉조와 길옥윤을 이야기하면 떠오르는 악기가 있다. 색소폰이다. 폼나게 색소폰을 불고, 몇 명의 소규모 악단을 지휘하다가, 가끔씩 폼을 내며 자기가 솔로연주를 한다. 무대에서는 최희준, 현미 같은 가수들이 노래를 부른다. 이런 그림이 떠오른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스탠다드 팝 음악의 편성이다.
1930년대에 공황을 벗어난 뒤에 미국 사회 성인들의 음악문화를 꽃 피웠던 것이 바로 이런 스윙이라는 재즈 밴드 문화였다.
스윙밴드(Swing Band)
재즈리듬의 특징을 살린 밴드, 소규모 독주자 형태
그런데 재즈곡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주요 고객이 아줌마들이었기때문에, 그런 아줌마들의 마음을 촉촉하게 감쌀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들이 필요했다. 머시멜로우 같은 말랑말랑한 목소리를 갖고 있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필요했다. 그런 목소리를 가진 전형적인 한국의 스탠다드 팝 가수는 최희준이었다. 들으면 너무나 따뜻하고, 안정적이고 사람을 푸근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목소리였다. 이것이 전형적으로 아줌마들이 좋아하는 목소리들이었다.
결국 이런 스탠다드 팝 문화에 새로운 가수들이 등장하면서, 10대 여고생들은 이런 노래에 발라드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면서 스타플레이어들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9. 귀족적인 이미지 생성
그러면서 악단과 그 악단를 대표하는 가수들의 콤비들이 등장한다. 길옥윤과 패티김, 이봉조와 현미가 그들이다. 60년대의 남진, 나훈아 라이벌 이후, 또 다른 라이벌이 된 이 팀은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았다.
일단 두 사람 다 부부였다. 나중엔 둘 다 불행하게 이혼을 했다. 둘다 밴드마스터로 색소폰을 다루었다는 점도 같다. 그리고 둘 다 사실상 지식인이었다. 당시에는 많은 공부를 하더라도 먹고 살 방법이 다양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의 많은 똑똑한 엘리트들은 미8군 무대에서 자신들의 음악적인 재능을 꽃피웠다. 가수 중에서 최희준, 김상희와 같은 사람들은 유수의 명문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60년대초 ‘학사가수’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런 점들 때문에 60년대 사회는 트로트에 비해서, 스탠더드 팝을 하는 사람들을 더 우월하게 보았다. 일단 미국적이고, 작곡가들이나 가수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보는 명문대 출신들이었다. 이런 다양한 사회적 요소들이 결합되어서 트로트 진영에 비해서 스탠더드 팝 쪽의 문화가 훨씬 더 귀족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0. 다양한 음악의 등장
이런 스윙밴드들을 바탕으로 한 문화는 단순히 사랑의 음악들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전문적인 음악의 패턴들을 이때부터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음악이 다양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왜냐하면, 트로트는 형태가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다. 그 틀이 한정적이다. 80년대의 주현미가 부르나, 60년대의 이미자나 부르나, 30년대의 이난영이 부르나, 다만 화장품이 달라질 수는 있으나, 그 음악적인 형태는 고정되어 있는 음악이다.
그런데 미국은 인종들이 워낙 복잡하다 보니깐 다양한 인종의 감수성을 가진 음악이 분포하였다. 그리고 그 음악들을 50년대, 60년대에 걸쳐서 미8군 내의 음악인들이 받아들이고, 그걸 바탕으로 소화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한국적인 감수성을 더해 노래들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다 보니깐, 어떤 특정한 형태의 음악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음악들이 나오게 된다.
미국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샹송, 이태리의 칸소네 등과 같은 유럽적인 음악적 요소까지 들여와서 이런 노래들을 많이 만들어낸다. 이렇게 우리의 대중음악은 미8군 출신의 스탠더드 팝 밴드들을 통해서 대단히 다양한 음악적인 경험들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1. 싸롱 문화
여기서 이봉조, 현미 콤비의 ‘보고 싶은 얼굴’이라는 노래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대단히 익숙한 노래다. 동백아가씨와 같은 시대에 이런 노래가 나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놀랄만한 일이다. 이 노래는 아까 들었던 ‘노란사쓰의 사나이’와 또 다르다.
우선 연주가 대단히 정교해졌다. 옛날의 보통 반주와 달리, 아주 탄력적이고 약동적인 리듬이다. 베이스 악기와 선율 악기 사이의 이른바 인터플레이가 서로 호흡을 맞추는 연주의 표현이 엄청나게 세련되고 발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는 이 음악을 들으면 어떤 풍경이 떠오른다. 막걸리 집에서 연주하는 음악이 아니라, 어떤 유흥가적인 분위기가 있다. 앞에 조그마한 스테이지가 있어서, 춤도 출 수 있고, 뒤에는 막걸리나, 소주가 아닌, 최소한 맥주 이상의 술을 마시는 테이블들이 있다. 그리고 거길 돌아다니는 웨이터들이 있고, 스테이지 너머로 악단과 마이크 스탠드가 있어서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그런 싸롱의 문화가 그려진다. 이런 스탠더드 팝 문화는 싸롱의 문화이다.
사실 60년대 싸롱은 대도시의 고학력, 고소득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어른들만이 가는 성인유흥문화였다. 이제 성인들이 누리는 유흥문화의 패턴이 달라진 것이다. 사실 유흥문화가 서구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런 노래는 암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옛날 어른들은 유원지 같은 곳에 가서 ‘노세노세 젊어노세’하면서 낮술 취해 놀았다. 물론 여전히 그런 문화도 있었지만, 이런 싸롱의 문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60년대는 많은 가정을 도탄에 빠뜨린 카바레 문화와 같은 도시 변두리 문화도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일단 음악만이 다양해진다는 것은 결국, 성인들이 누리게 되는 문화가 다양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음악의 다양화는 문화의 다양화를 가져온다.
사실 우리는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막걸리 집에서 트로트를 부르며 울분에 못이겨서 젓가락으로 두드리며 놀았다. 이런 것이 성인의 문화였다. 그런데 이제 스탠더드 팝 문화를 듣게 되면서 대도시야간의 유흥가의 싸롱 문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12. 댄스 문화의 등장
트로트를 들으면서, 춤을 추는 댄스 문화를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방금 들었던 ‘노란사쓰의 사나이’나 현미의 ‘보고싶은 얼굴’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몸을 움직이고 싶은 욕망이 생겨난다. 그렇게 해서 몸이 움직여지는 문화, 댄스의 문화가 어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흔히 우리나라에서 댄스라고 하면, 90년대 서태지가 나와서 우리 아이들을 다 버렸다고 한다. 마치 어른들은 춤하고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한다. 90년대 88올림픽 이후에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 이 나라를 망쳐놓았다고 한다. 자꾸 90년대 아이들과 댄스를 등치시킨다. 마치 어른들은 숭고하고 거룩하게 산 것처럼 몰고 간다.
하지만 사실 댄스 문화를 만든 것은 10대가 아니고, 바로 기성세대 어른들이었다. 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서 미8군 문화의 영향 아래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13. 맨발의 청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폭발하고, 현미의 보고싶은 얼굴이 음악팬들을 사로잡고, FM 방송이 시작되고, 도시의 싸롱 문화가 만들어지는 1964년에 우리 극장가를 강타했던 영화는 바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맨발의 청춘’이라는 영화였다.
그 맨발의 청춘은 두 명의 톱스타말고, 또 한 명의 세 번째 스타를 만들어낸다. 바로 트위스트 김이다. 영화에서는 카메오 정도에 불과한 조연이었는데, 유명한 트위스트 장면에 등장하면서 스타로 떠오른다.
그 장면을 보겠다.
놀랍다. 이게 1994년이 아닌 1963년에 찍은 영화 장면이다. ‘맨발의 청춘’ 중에서 저 장면은 그 당시 우리의 댄스 문화를 아주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4. 댄스 문화의 흐름
우리나라에서 폭발하기 시작한 춤 문화는 90년대가 힙합이라면,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까지 우리를 지배한 문화는 디스코였다.
힙합(Hip Hop)
1980년대에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다이내믹한 춤과 음악의 총칭.
디스코(Disco)
1970년대 후반부터 록(Rock), 소울(Soul) 계통의 댄스 및 리듬을 가리키는 말.
1970년대 초반에 우리를 지배한 것은 ‘고고’라고 부르는 사실 아무 법칙도 없는 막춤이 성행했다.
고고(gogo)
1960년대 후반에 유행하던 대중무용으로 허리를 흔드는 간단한 춤으로 자유롭게 출 수 있음.
1960년대 초반에서 중반 사이에 우리나라를 휩쓴 것은 바로 트위스트 김의 애칭을 만들게 해준 트위스트라는 미국 흑인들의 춤이었다.
트위스트(Twist)
1960년경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사교댄스 및 댄스리듬으로 손발을 흔들고 몸을 리듬에 맞추어 뒤트는 춤
60년대의 트위스트 문화만 하더라도 20대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문화였지만, 어른들이 만들어내는 댄스 문화의 원조는 트위스트 이전의 ‘맘보’라는 문화이다.
맘보(Mambo)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강렬한 음색과 신선한 음향 그리고 시원스러운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는 양식
50년대 우리나라 댄스 문화의 원년을 장식하는 이 문화는 완벽히 어른들의 문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 식민지 시대에 시작된 트로트라는 문화가 가장 강력하게 오랜 기간 가장 많은 사회적 영향력을 끼치면서, 우리 한국 성인들의 가장 보편적인 음악 문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50년대 말부터 미8군 무대를 중심으로 해서 미국 문화에 영향을 받은 싸롱 풍의 스탠더드 팝 문화가 트로트와 더불어서 한국 성인 음악 문화의 두 번째 얼굴을 구성한다.
이런 음악 문화의 반대편에는 전쟁직후인 1950년대, 한국성인문화가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충격적인 댄스 문화를 만들었다. 이미 1950년대에 댄스 1세대 문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에서 짚어봐야 된다.
결국 우리나라의 댄스 문화를 만들어낸 것은 10대 철부지 아이들의 광란이 아니다. 1950년대 중반 전쟁 이후 그야말로 생존이 처절했던 시절에 무너진 사회의 폐허 속에서 댄스 문화를 만들어낸 것은 어른들이다.
그러면서 드디어 우리가 어른 문화와 10대 세대의 문화가 만날 수 있는 접점이라고 할 수 있는 1950년대의 댄스 문화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다음의 다섯 번째 시간에 알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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