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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을 따라 모래는 떠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면서 데칼코마니 수채화 같은 흔적을 남긴다. 지율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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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강한 일행은 물가를 따라 다시 걸었다. 사진을 찍는 이는 사진으로 기록하고, 동영상을 찍는 이는 동영상으로 기록하며 걸었다. 나는 글로 기록하며 걸었다. 마음으로만 기록하는 이들이 가장 앞서 걸었고, 사진과 동영상으로 기록하는 이들이 가장 뒤에서 걸었다. 나는 중간쯤에서 걸었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어느덧 종심은 200m 이상 길어졌다. 물길이 다시 휘도는 지점에서 맨 앞의 일행은 목측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돌아보니 맨 뒤의 일행도 곧 나를 보기 어려울 듯싶었다. 기록할 것은 많았고, 물길은 거듭 휘돌았다. 내성천을 제 집처럼 오가며 사진을 찍는 ‘서풍’(작가명)씨가 “평은면에서 금강마을을 거쳐 무섬마을까지가 사행천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띤다”고 일러주었다. 봉화 농민 문종호씨는 “이 구간 아홉 굽이를 중국 무위구곡을 본떠 운포구곡이라 부른다”고 말을 보탰다.
물길이 제방 쪽으로 바짝 다가와 붙으며 일행의 앞길을 막아섰다. 내성천이라 해도 비 온 뒤 물이 휘도는 곳은 수심이 제법 깊다고 했다. 운포구곡을 물길로 다 살필 기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일행은 대열을 이룬 왕버들 사이로 여린 풀숲을 헤쳐 제방 위로 올랐다. 제방 너머로는 빗살무늬토기를 뉘어놓은 형상의 분지가 논과 밭과 과수원 따위를 옴팡하게 품고 있었다. 물의 길과 사람의 터전을 제방이 경계 짓고, 물과 사람은 무심하지도 살갑지도 않은 표정으로 서로 기대어 있었다. 사람의 터전에도 봄이 차오르고 있었다. 제방 위는 사람과 수레 정도가 오갈 수 있는 흙길이었다. 일행은 길을 따라 빗살무늬토기 주둥이 쪽을 향해 걸었다. 비탈로 군데군데 노란 애기똥풀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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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양조장단으로 흐르는 내성천에 지리 검정교과서에서 기술하는 지천 상류의 소란한 풍경은 없다. 서풍 |
그 다리가 사라질 거라고 했다. 발목께를 겨우 적시는 내성천의 흘수선은 사방 눈에 들어오는 산자락의 중턱까지 밀려 올라갈 거라고 했다. 다리 앞에서 지율 스님이 그렇게 말했고, 사진 찍는 서풍씨도 농사짓는 문종호씨도 거듭 확인해주었다. 평은철교 몇km 아래에 영주댐이 완공되면 내성천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감할 수 있는 전언이 아니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사자성어보다 이미지 조형력이 크게 떨어지는 말이었다. 일행이 걷고 있는 길은 봄 햇살에 보송보송 말라가는 흙길이었다. 길 왼쪽으로는 큰비 오고 사흘 만에 허벅지 깊이로 흐르는 내성천이었고, 오른쪽으로는 군데군데 모내기를 앞두고 논물이 찰랑거리는 들이었다. 그러나 일행이 걷고 있는 곳은 수몰예정지구였다.
▲ 제방을 사이로 물과 사람은 무심하지도 살갑지도 않은 표정으로 서로에게 기댄다. 서풍 |
금강마을은 물을 따라 걷기 시작해 처음 만나는 마을이었다. 장씨 고택은 몇십 호가 사는 마을 한가운데서 내성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선 선조 때 지어진 이 집은 경북 문화재 자료 233호로 지정되어, 아쉬운 대로 관의 관리를 받고 있는 듯했다. 마을에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건 농사일을 나가서일 터였다. 모란꽃만 가득 피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마을 뒤로 고샅길을 올랐다. 뒷동산 중턱쯤에 쓴 무덤 앞에는 이장 공고가 붙은 말뚝이 박혀 있었다. 금강마을도 수몰예정지구였다. 고택도 유택도 모두 물에 잠기면 더는 농사일로 마을을 비울 일도 없을 것이다. 금강마을은 축산과는 거리가 먼 듯, 소 한두 마리가 들어설 만한 우리가 몇 군데 보였을 뿐, 그마저 텅 비어 있었다. 수몰과 구제역은 모두 사람의 일이었다.
뒷동산 마루에 오르자 마을 반대편으로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올라가는 게 보였다. 영주댐 건설 현장이었다. 금강마을은, 뒤에 숨어 비밀공작을 펼칠 수 있도록 댐에 아지트를 내주고 있었으나, 정작 댐의 아가리에 갇힐 운명이었다. 이전 정부에서 건설 계획을 세웠다가 주민들이 반대하고 쓸모도 없는 것으로 평가돼 폐기됐던 사업이 이명박 정부 들어 4대강 사업과 함께 훨씬 큰 규모로 되살아났다. 애초 이름도 ‘송리원댐’이었으나, 영주시가 중앙정부에 청을 넣어 ‘영주댐’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곳 지방권력에게 댐 건설은 자부심과 긍지를 부르는 역사(役事)인지 모르겠으나, 마을 앞에 댐 반대 현수막을 내건 이들의 절박함은 지방권력의 자부심과 동행할 수 없을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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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포구곡 끝자락의 무섬마을(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은 금강마을에서 차로 한달음이다. 그러나 물은 두 마을 사이에서만 크게 일곱 번 굽어 흐른다. 금강마을 앞을 지난 물이 무섬마을 앞에 당도하려면 시간 위를 얼마나 흘러야 할지 알 수 없지만, 금강마을과 무섬마을은 하나의 물줄기를 두고 형성된 강마을이다. 물은 무섬마을이 금강마을보다 지척이다. 물은 마을 앞에서 크게 반원을 그리며 지나간다. 마을 앞 모래밭에는 내성천 쪽으로 좁은 섶다리가 놓여 있다. 그러나 섶다리는 물 건너까지 이르지 않고 물 가운데서 멈춘다. 건너다니려는 다리가 아니라 나들이 온 이들을 위한 다리다. 나들이 온 이들이 짝으로 혹은 떼로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는다. 봄 주말 오후, 내성천은 물비늘을 자잘하게 튕겼고, 사진 찍는 이들은 어금니까지 드러내고 웃었다. 우리 일행도 기념촬영을 했다.
무섬마을은 반남 박씨 입향시조와 그의 손자사위인 신성 김씨가 양대 성바지를 이룬 집성촌이다. 무거운 기와를 얹은 집들과 가붓한 짚을 엮어 얹은 집들이 지붕을 맞대고 이어져 있다. 유서 깊은 마을은 새로 단장하고 ‘민속마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해우당(海愚堂)만이 1879년 중수한 이후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상갓집 개’로 낭인 노릇을 할 때 들렀다 쓴 것이라고 문화관광해설사 김희옥씨가 설명했다. 김씨는 “무섬마을에는 세 가지가 없다”고 했는데, 첫째가 논밭이요, 둘째가 사당이며, 셋째가 대문이었다. 논밭이 없는 건 큰물이 지면 이 마을까지 내성천의 유역이 되기 때문이고, 사당이 없는 것도 같은 사정이라고 했다. 대문이 없는 건 인심을 은근히 뽐내려는 뜻일 터였다.
무섬마을엔 없는 것이 또 있다. 가게가 없다. 커피를 하나 사려 해도 내성천을 건너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한다. 46호의 마을 사람들은 이곳이 안동 하회마을처럼 번잡해질 것을 걱정한다고 김씨가 전했다. 마을 한쪽에 서 있는 ‘마을헌장’에는 물질의 탐심에 물들지 않고 두 성바지가 평화롭게 살 것을 다짐하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김씨가 말을 이어간다. “원래 해우당에서는 내성천을 볼 수 있었는데 제방을 쌓고 나서 조망이 막혔다. 제방을 걷어내고, 제방 위에 만든 주차장도 물 건너로 옮겼으면 싶다. 멀리 내다보면 그게 더 낫다.” 무섬마을은 내성천의 품성으로 조성된 마을 같았다. 평균 연령 78살의 주민들도 한평생 내성천을 보며 살다 내성천의 일부가 된 듯했다.
문화관광해설사 김씨의 바람에서, 적어도 기술적 장애는 사라질지 모른다. 영주댐이 완공되면 금강마을부터 위쪽으로는 물에 잠기겠지만, 댐 아래쪽은 건천으로 변할 것으로 보는 이가 많다. 영주댐은 영주 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깝게는 구미, 멀게는 대구의 상수원 구실을 할 것이라는 추론은 타당하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낙동강 본류는 이미 파헤쳐지고 여러 개의 보가 들어서 먹을 물을 길을 곳이 마땅치 않다. 구미 단수 사태는 그 뚜렷한 징후다. 영주댐은 늘 최고 수위까지 물을 가두고, 방류를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건천에 제방은 쓸모없는 흙더미일 뿐이다. 김씨의 바람은 푸석한 현실이 될지 모른다. 내성천의 절반은 수몰하고 나머지 절반은 말라, 내성천은 전체가 사라지는 셈이 된다. 댐은 2014년 완공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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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성천은 셀 수 없이 많은 물굽이를 그리며 100여km를 흐른다. 물이 돌아가는 지점 너머는 목측할 수 없다. 이강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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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우감마을에서 가까운 개포면 신음교 앞 내성천으로 갔다. 내성천에서 가장 너른 유역과 습지를 품은 그곳이 밤새 부산했던가 보다. 너구리 발자국과 왜가리 발자국이 총총했고, 말조개가 몸을 끌고 가며 남긴 줄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자국에 객들의 발자국이 보태졌다. 이제 지척의 회룡포만 들르면 내성천 답사도 끝나고, 자칫 내성천의 미래가 될지 모르는 낙동강 경천대와 상주보 일대로 한나절 강행군을 해야 한다. 지난해까지는 바지를 걷고 들어가기도 했지만 지금은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된 포클레인과 콘크리트의 유역을, 다만 먼발치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회룡포에서는 차로 불과 1시간 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