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소설>
진주 조개잡이
-변화-
김 광 욱
1
손님을 두 명 실은 마차가 말발굽 소리를 따각따각 울리며 지나갔다. 그 소리는 초겨울 해변에 여자의 냉소처럼 시무룩하게 울려퍼졌다. 오후 되어 바람이 조금씩 불며 모래먼지가 거리로 날아왔다. 마차에 탄 두 손님은 젊은 엄마와 어린 아들이었다.
그는 그 모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주말이면 해변에 찾아와서 천원짜리 마차를 타고 호텔 앞까지 와서는 포장마차에서 오뎅국을 사 먹고,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빼먹고, 모래사장에서 해질녘까지 천진난만하게 장난을 하다가, 삼거리 약국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그 엄마와 아들이라는 걸.
엄마와 아들은 군고구마장수 앞을 지나가면서 한 번도 군고구마를 사 먹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그들 모자의 따뜻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왜 그들은 주말에만 바닷가에 올까? 왜 아빠와 동행하지 않을까? 거기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빠가 함께 올 수 없는 사정이 있거나, 엄마가 아들을 사랑하여 아들과 단둘이만 이 바다에 오고 싶어서일 거라고 하는.
그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엄마와 아들이 평화롭게 광활한 해변을 휘젓고 다니며 뛰어노는 그 모습이 좋아 보이는 것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평화로운 추억거리가 별로 없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날이면 날마다 욕질하고 싸우시던 어머니와, 우글거리던 다섯 형제들의 가난의 기억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선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와 다정히 손잡고 가는 아이들을 보면 그렇게 부럽고, 그렇게 상냥하고 부드러운 엄마를 가진 가정은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다. 그가 있는 곳이 마차의 종점이었다. 마차는 두 마리가 교대로 운행하는데 비수기라서 손님이 뜸뜸했다. 두 모자가 오후 되어 첫 번째 마차 손님이었다. 마차는 해수욕장 입구에서 출발하여 숙박촌 상가가 끝나는 호텔 앞까지 왔다가 되돌아갔다.
엄마와 아들은 호텔 앞에서 내려 긴 백사장을 왔다 갔다 하며 놀다가 돌아갈 때는 소리없이 사라졌다. 그들은 비가 오는 날도 왔다. 비가 오는 날은 군고구마 장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해변에 와서 쓰적거리는데(그는 쉬는 날도 여기에 와서 쓰적거린다), 저녁때 돌아갈 때 엄마와 아들이 탄 시내버스에 함께 탔었다.
그는 여인을 보고 인사했었다. 추운 날도 모자는 바닷가에 왔다. 모자는 지쳐서 몸을 잘 가누지도 못했다. 아들은 다리를 절뚝거리는 병자였다. 엄마는 아들의 다리를 낫게 하려고 그렇게 힘든 운동을 반복적으로 시키는 것 같았다. 아들은 때로는 운동을 안하겠다고 떼를 쓰면서도 엄마 명령에 고분고분 순종했다. 그러나 날이 가도 아이의 다리는 좋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더 악화되지 않게 하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하는 거야.)
그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어느 날은 팔리지 않은 군고구마가 많아서 식당 주인들에게도 나눠 주고 두 모자에게도 주었더니 여자는 기어이 군고구마값을 주었다. 그는 오전에 땔감을 구하러 돌아다니고 오후부터 나와서 장사하는데 원래 비수기 철이라 군고구마를 사 먹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루 수입 2, 3만원, 많을 때는 5, 6만원이 고작이었다. 해수욕장이 성업하는 여름철에는 더워서 군고구마를 팔 수 없고(지난 여름엔 아이스크림 장사를 해서 톡톡히 재미를 봤다) 겨울철을 택하다 보니 해수욕장이 문 닫은 비수기였다.
군고구마 장사는 이곳에 와서 처음이었다. 겨울에 무슨 장사를 할 게 없을까 하고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해소병에 걸려 콜록거리는 군고구마장사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 노인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배운 기술이 이 군고구마장사였다. 노인이 몸이 아파 장사를 못하게 되자, 그는 노인한테서 싼값으로 고구마통을 샀다. 드럼통을 개조해서 만든 녹슨 고구마통이었다.
고구마를 굽는 기술은 어렵지 않았다. 화덕 아궁이 위에 있는 다섯 개의 원통 안에 고구마를 서너 개씩 밀어넣고 이삼십 분 가량 장작불을 지피면 군고구마로 변했다. 고구마의 크기와 장작불의 열기에 따라 고구마가 익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고구마통에서 익는 냄새가 나면 원통을 열어 보고 감촉으로 익었는지를 판단했다.
예상과 달리 군고구마 손님이 많지 않았다. 이곳이 관광지여서 겨울에도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기 때문에 장사가 잘 될 줄 알고 해수욕장 상가에다 터전을 잡은 것이었다. 식당과 모텔, 호텔로 저녁때가 되면 관광객들이 제법 찾아왔다. 군고구마장수에게 눈길을 주는 관광객은 드물었다.
그는 해수욕장으로 가면 재미없을 거라고 충고하던 노인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한번 자리잡은 터전을 떠나기가 싫었다. 이 겨울을 이 바닷가에서 버틸 생각이었다. 수입이 전무한 것은 아니고 세 가족이 목구멍에 풀칠할 정도는 되니까 수입의 액수에 구애받지 않고, 식당 사람들에게 군고구마로 인심 쓰고 관광객들에게 친절을 떨면서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그는 어느 식당의 음식이 맛있고 어느 모텔과 호텔의 서비스가 좋고 저렴하다는 걸 알아내서 호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관광객들에게 친절히 귀뜸해 주었다. 그러면 관광객들은 고맙게 생각하고 다음에 또 찾아와서 군고구마를 사 먹기도 했다. 이곳에서 장사하려면 돈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2
마차에서 내린 엄마와 아들이 포장마차에서 오뎅을 사 먹고, 커피를 빼먹기 위해 자동판매기로 손잡고 걸어가는 것을 부러운 눈길로 보면서, 그는 아궁이에 장작을 깊이 밀어넣었다. 장작불이 이글이글 타면서 불꽃이 드럼통 아궁이의 천장을 가열했다. 고구마통에서 군고구마 냄새가 달콤하고 고소하게 풍겨 나왔다.
“냄새 좋다!”
식당 앞에서 물청소를 하던 남자 주인이 돼지 같은 배를 흔들며 헤벌죽 웃었다. 군고구마장수도 씨익 웃었다. 공짜로 선사한 군고구마가 인연이 되어 그들은 친하게 지내는 처지였다.그 집 식당 음식이 싸서, 집에서 밥을 먹고 나오지 않은 날은 점심을 뚱보 식당에서 단골로 사 먹었다. 오늘은 땔감을 구하는 데 시간을 많이 허비해서 점심을 군고구마로 대신했다.
“오늘은 날씨도 좋소!”
군고구마장수는 장작불을 들여다보느라 식당 주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원통을 열고 익은 고구마를 꺼내어 손끝으로 눌러 보았다. 열을 더 가해야겠다. 손님은 없어도 항상 사전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언젠가처럼 갑자기 손님들이 몰려와서 줄을 서서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지. 그때처럼 미안할 때가 없거든. 뚱보에게 한 개 잡수라고 드리고 싶지만 아직 첫마수를 하지 않아서 공짜로 드릴 수는 없다. 돈을 준다면 군고구마를 싯가보다 넉넉히 드리겠지만 군고구마를 돈 주고 사 먹을 위인이 아니다.
바람이 약간씩 불어도 날씨가 포근했다. 바람의 방향이 일정치 않아서 장작불 불꽃이 그의 얼굴로 날아왔다. 순간 장작불이 꺼질 듯 춤을 추면서 연통에서 연기가 약간 피어올랐다. 그는 설익은 고구마들을 다시 원통 속에 밀어넣고 불이 타는 동안 장작단을 풀어 나무에 박힌 못을 뻰치와 장도리로 일일이 뺐다. 공사장과 쓰레기장에서 주운 헌 목재들이었다. 목재에 박힌 못을 빼는 이유는 더 잘 타게 하기 위해서였다.
목재는 운반하기 좋게 미리 일정한 크기로 자르고 쪼개서 다시 손볼 필요가 없었다. 시집간 여동생이 강릉 시내에서 식품업을 하고 있어서, 화목을 운반할 때는 여동생의 차를 이용했다. 그가 강릉에 온 것은 그 여동생이 있기 때문이었다.
“장사가 잘 돼야 할 텐데, 유명한 경포대 해수욕장이 이래서야……”
식당 주인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얘긴지 군고구마장수에게 하는 소린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구마통 옆으로 와서 못 빼는 일을 도와 주었다. 오늘은 식당들도 한산했다. 지금이 오후 한 시니까 다른 때 같으면 손님이 밀릴 시간이었다. 날씨가 좋으면 바닷가보다 산이나 유원지를 찾는 행락객들이 많다는 걸 군고구마장수도 알고 있었다. 겨울 바다는 아무래도 쌀쌀하다. 하얀 파도와 광활한 백사장과 아득한 수평선은 따뜻한 계절에 더 어울리는 것이다.
식당 주인 말에 군고구마장수는 실실 웃으면서 백사장에서 소리치며 뛰어노는 모자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시선이 자꾸만 그쪽으로 갔다. 무성한 송림에 가려 모자의 모습은 숨바꼭질하듯 이따금씩 나타났다. 모자 외에 백사장 위에 한 여자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어슬렁거린다는 표현이 걸맞을 것 같았다. 군고구마장수가 아까부터 눈여겨 바라본 것은 그 카키색 바바리코트의 여자였다.
식당 주인이 식당으로 돌아간 뒤에 군고구마장수는 원통에서 다 익은 고구마들을 차례로 꺼내어 드럼통 뒤편에 붙은 보관통에 담아 놓았다. 보관통은 아궁이와 칸막이가 돼 있고 열기가 가지 않는 곳이었다. 식을 때까지 그곳에 보관해 두었다가 따뜻할 때 팔리면 다행이고, 식으면 데워서 팔고, 그래도 팔리지 않으면 인심이나 써야 한다.
보관통에 담아 둔 군고구마가 식을 때까지 군고구마를 사 먹을 손님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오늘 따라 호텔과 식당도 지독한 불경기였다. 어쩌다 식당 손님만 한두 명 가뭄에 콩나듯 보이고 호화롭게 지은 호텔과 모텔로 들어가는 손님은 눈에 띄지 않았다. 넓은 백사장이 더 쓸쓸해 보였다. 백사장 위에서 홀로 어슬렁거리던 여자가 호텔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여자는 호텔로 들어가지 않고 도로를 따라 얼마동안 걷다가 되돌아서 군고구마장수 쪽으로 왔다.
군고구마장수는 그 여자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주말은 그들이 만나는 날이다. 견우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듯 그들은 주말이면 꼭 만났었는데 그 여자는 지난주에 허탕치고 오늘도 기다리고 있다. 지난주에만 허탕친 게 아니라 12월 들어서 세 번째 허탕이었다.
3
바바리코트의 여자는 고구마통 앞을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수근에게 까딱 인사를 했다. 가까이서 본 여자의 얼굴은 큰 키에 비해 애띠고 귀여웠다. 얼굴만 본다면 십대의 동안이었다. 그러나 아가씨는 대학생이었다. 이곳에는 그렇게 소문이 나 있었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어떤 소문이 하나 나면 금방 퍼졌다. 그들의 유별난 행동이 소문을 자초하게 만들었다.
“서울의 판사와 딸 같은 여대생이 주말이면 밀회를 한다.”
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것은 아름답지 않은 소문이었다. 아름답지 않은 주위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판사와 여대생은 경포대 해수욕장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저 뻔뻔스럽게 딸 같은 아이와 불장난하는 것 좀 봐. 저게 법관이야? 저런 사람이 어떻게 죄인들을 심판한담? 그렇게 사람들은 숙덕거렸다.
공부해야 할 대학생이 아버지 같은 사람과 불장난을 한다고 아가씨에게도 손가락질을 했다. 남들이 비웃건 욕하건 그들의 열애는 두 해 동안 계속되었다. 수근이 이 해수욕장에서 군고구마장사를 하기 훨씬 전부터였으니까, 수근이 이곳에 왔을 때는 벌써 소문이 자자했다. 저 사람이 서울 모 법원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판사래.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듣고 판사와 여대생이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았다.
그 소문을 듣고 수근은 아무렇지 않게 한귀로 흘려 버렸다. 판사와 여대생은 주말이면 여기에 오는 그 모자처럼 누가 보건 말건 거리낌없이 애정 행각을 벌였다고 판단된다. 수근이 그들의 밀회 현장을 눈으로 본 것은 두 번이었다. 늦은 가을인데도 두 사람은 팬티를 입고 물 속에서 수영을 할 정도로 뜨거웠다.
수근은 그 판사의 얼굴이 기억에 아름하다. 어디에서 만난다면 모를 것 같았다. 아가씨의 인상만은 그 뚜렷한 이목구비와 함께 수근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런 얼굴은 그렇게 흔치 않다. 처음 그 아가씨를 본 순간 첫사랑의 여자를 연상했으니. 내 첫사랑을 닮은 여자. 그 여자에게 쏠리는 수근의 관심은 각별했다. 그는 그 첫사랑의 여자와 헤어지고 나서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그 영상에 사로잡혀 지금껏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바리코트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수근의 자유이고 사랑과는 무관했다. 관심과 연정은 다르다. 그는 그 첫사랑의 여자 말고는 다른 여자에게 진실로 마음 준 적이 없었다.
수근은 첫사랑의 여자가 행복하게 잘 산다는 풍문을 들으며 평생 독신을 고수할 생각이었다. 한 여자와 결혼해 봤지만 삼 년도 못 살고 성격이 안 맞아서 헤어졌다. 그뒤로 결혼에 치를 떨고 어떤 여자를 봐도 흥미가 없었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박하진이란 아가씨를 만나고 나서 그 장벽이 무너졌다. 미움이란 장벽이.
그 아가씨를 만나면 미움, 조소보다는 서글픔과 동정이 치미는 심정을 어쩔 수가 없었다. 앞에도 말했듯이 판사의 애완물인 그 아가씨에게 별다른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고 그냥 ‘내 첫사랑을 닮은 여자’란 점 때문에 쏠리는 자연 현상이었다. 하진이란 그녀의 이름은 그녀가 스스로 밝혀서 알았다. 하진과 수근은 지난 주말에 대화를 나누면서 통성명을 했다.
“저 박하진이예요. 이름 예쁘죠?”
“예쁜데요. 누가 지어 줬지요?”
“제가 지은 가명이예요. 학교에선 다르게 불렀어요.”
“그럼 본명은?”
“아저씨도 이름을 가르쳐 주셔야지요. 하모니카를 기막히게 잘 부시던데, ‘진주 조개잡이’ 한번 불러 주실래요?”
“본명을 가르쳐 달라니까 엉뚱한 소릴 하고 있어 이 아가씨가.”
“아가씨? 하하하, 아가씨란 소리 들어 본지 오래됐어요. 나 아가씨 아니에요. 아저씨도 아시잖아요? 내가 못된 가시내란 걸.”
“별소릴 다하는군. 본명이나 가르쳐 줘 봐요.”
“저 같은 것 본명 알아서 뭘 하시게 그럴까? 아, 이 군고구마 맛있다! 벌써 몇 개째라냐? 난 원래 군고구마 싫어하는데 경포대 해수욕장에서 금기를 깼네?”
그녀는 고구마와 원수진 이야기도 했다. 전라도 두메산골에서 살 때 집안이 가난해서 고구마로 세 끼니를 때운 적이 있었다고 했다. 말하면서 전라도 사투리가 튀어나오면 부끄럽다며 얼굴을 붉혔다. 사투리 버릇은 고칠 수가 없다고 하며 서울 표준어 쓰는 사람을 가장 부러워했다. 판사는 서울 태생이고 굉장한 갑부 아들이었다. 딸만 셋 있는 집의 외독자 장남이니까 부친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면 하진은 자연히 갑부 사모님이 된다. 하진은 판사의 부인이 된다는 신념으로 꽉 차 있었다.
4
하진은 끝내 자기 본명을 가르쳐 주지 않고 수근의 이름만 알아 냈다. 그녀는 깍쟁이였다. 군구고마를 사 먹어도 이천원어치 이상은 사지 않고, 남은 것은 봉지에 담아 호텔로 가지고 갔다. 호텔이 판사와 밀회하는 아지트였다. 하진은 대화하기를 좋아하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좀이 쑤신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와 단 한 번 만남으로 해서 판사와 하진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하단 것도 알았다.
하진은 판사가 오기를 기다리며 해질녘까지 고구마통 옆에 앉아서 종알종알 쉴새없이 나불거렸다. 기다림의 공허를 수근과의 대화로 다 채웠다. 덕분에 그녀는 그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았다. 판사는 끝내 오지 않았고 하진은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그녀의 셋방으로 향했다. 날이 어두워서 군고구마 손님도 없고 하진과 더 이야기하고 싶어서, 장사를 치우고 그녀와 함께 시내버스에 탔다. 시내버스에서도 재잘재잘 자신의 신상 이야기를 털어놓는 하진.
왜 택시를 타지 않냐고 하니까 ‘돈을 아끼기 위해서’라고 태연히 대답했다. 그것은 돈 많은 판사의 정부답지 않은 내숭이었다. 그녀는 귀부인처럼 값비싼 보석으로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귀걸이, 목걸이, 반지, 핸드백, 그리고 옷차림이 만날 때마다 바뀌었다. 모두 그 남자가 사 준 거라고 자랑했다. 정말 숨김없고 거리낌없는 아가씨였다. 어찌 보면 속없는 것 같고 어찌 보면 암코양이 같은 여자였다. 시내버스가 강릉 시내에 들어올 때까지 남이 듣건 말건 종알종알 수다를 떨어댔다.
“유방 없는 여자의 육체를 상상해 보세요. 그분의 부인이 바로 그런 육체의 소유자예요. 유방암 수술을 받았대요. 유방 없는 여자. 호호호 우습죠? 얼마나 앞이 허전할까? 그분이 저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하진은 자랑하듯 그녀의 큰 젖가슴을 흔들며 깔깔 웃어댔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이내 차가운 미소로 변하고, 부인께 죄스럽단 말을 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진은 감정의 기복이 심한 아가씨 같았다. 기쁨과 슬픔의 표현이 명료했다.
“수술 후에도 부인께서 완치가 되지 않아서 투병하고 있단 말 듣고 가슴 아팠어요. 암세포가 몸의 다른 부위까지 전이됐다나요. 부인은 지금 미국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요.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가 봐요. 부인이 돌아가시면 저를 부인 자리에 앉혀 주겠다고 하시기에 사양하는 척했죠. 금방석에 앉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하진이라고 다르겠어요? 그래도 웬지 죄스러웠어요. 지금 이 순간도……이렇게 기다림에 지쳐 돌아가면서도……”
수근은 왜 판사님이 약속을 어기고 나타나지 않는지 묻지 않았다. 알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그 대답이 두려웠다. 그들의 뜨거운 관계에 금이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슬퍼하는 걸 보면 결별할 만한 다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행동을 보였는지도.
남자들은 감정에 나약하다. 하진이 먼저 만나지 말자고 섭섭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의 직장에 좋지 않은 소문이 들어가서 승진에 지장이 있었던지. 남자는 또 출세에는 가장 약한 동물이니까. 하진은 스스로 화근을 만들어 놓고 행여나 행여나 하고 목마르게 기다리는지도 알 수 없다.
그녀는 그 남자가 강릉에 오지 않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고 수근도 주제넘게 물을 수가 없었다. 모른 체로, 그녀가 먼저 버스에서 내려서 속절없이 헤어졌다.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