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임씨는 오래된 씨족으로서 주무왕 원년 당시 기자가 동쪽나라 조선에 성군으로 있을 때(기자27년) 비조이신 휘팔급공(諱 八及公)이 殷나라의 태보로서 원직을 성실히 수행한 공훈으로 팽성에 봉함을 받은후 이를 본관으로 하여 국중에 널리 퍼지니 기화려함이 역대를 헤아릴수 없음이라.
고구려 신라 천유여년에 태사공 양저(良貯)가 게시었고 또 상장군공 휘 무가 게시었는데 기사적이 밝게 나타나있다.
고려 공민왕조때에 이르러 諡 충선공 휘 彦修께서는 신라 태사공의 10세손이라 말하며 이는 곧 중간의 삼중공 휘 희 영삼사공 휘 면 시금위공 휘 득우 평찰사공 휘 몽주 문화시중공 휘 정 등은 다 우리의 선조이나 문헌에서 소목을 다 구할 수가 없어서 상세하게 알지 못하며 제파의 사록 또한 서로 착오가 있으니 가희 부끄러움을 이로 말할수 없으며
이미 모든 보첩들은 왜관들의 병난으로 보전되지 못하여 서울을 비롯한 시골에 이르기 까지 한사람도 보전한자 없음으로 조상의 위엄을 이어서 자랑할수 없게 된지라 정의가 구진하고 조경이 미치지 아니하니 고인이 말하는 바에 이르지 못함으로 보는 것을 길가는 사람같이 하는자가 어찌 드므랴. 생각건대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구려.
나의 선자 지평공이 족종형인 진사 무와 같이 개탄하면서 미급한 계보를 수집(搜緝)하여 기록하다가 先子 지평공이 별세하니 진사가 따라서 또 이 어려운 일을 이어 받았으나 이내 좋은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종제 영이 족보발간에 유의하여 참고가 될만한 것을 널리 탐방하여 어렵게 수집(蒐集)하여 가지고 바르게 고쳐 새겨서
오늘에야 이 보첩의 성과를 기대 할수있게 되었는지라 이와같은 일을 하는데 촉한 내가 서문을 쓴다는 것은 감히 못할일이나 조졸하고 노둔한 머리로 글도 얕으면서 역대를 고찰하여 본과 지의 원지류를 나누어서 벌림은 곧 높음을 자랑하는 말이나 아닐지
다만 자못 두려워 하면서 스스로 그 정성을 다하여 재개하며 꾸짖음을 취하였음이라 만약 우리 종인이 일람하고서 한사람의 몸에서 나무에 가지가 있음과 같고 가달의 물과같이 각파의 흐름이 나무의 뿌리와 같고 흐름의 근원과도 같이 정세하게 되어있어 일목요연하여 의심함이 없으니
곧 소명윤이 말한바와 같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화목할것이며 산사람은 진실로 나 자신을 속이지 아니하면 역시 어떠한 어려움도 면할것이라 하였으며 무릇 구양자가 금수라 꾸짖었음이라
오호라 錦湖公과 松坡公의 절의와 문장은 세보의 으뜸인바 년전에 홍성 나주 두파에서 먼저 이 보첩을 이미 발간하였음으로 이제 특별히 화두로 내 세울 필요는 없으나 신창종인은 갈곡공의 손인 충헌공지자야나 遠譜가 밝지아니하여 빈번하게 왕래하였으나 끝내 합보 할바를 아지못하였으니
옛 일을 널리 아는 군자가 특별한 안목으로 그렇게 억울하고 또 간사한말이 아니거든 거듭보지 아니한다 하였으며 사람으로서 아는 것은 안다 하고 아지못하는 것은 아지못한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함은 곧 공자께서 말씀하신 것이나
그러나 의심나는 것은 원보가 세월따라 만연하게 될것인즉 오랜 세월이 흐르게 되면 그 가히 아는바도 아득하게 잃게될까 근심하지 아니할 수 없는지라 이에 밝히는 바는 근조 전객령공을 처음자리로한 오늘날 소홀한 곳 생략된곳 망영되고 경솔하다고 의심나는 곳을 알기는 하지만 래세에 미자 우손이 되지 아니하게 하기위하여 본받음이니
기태보공 이하 10세에 걸처서 과연 궐루함이 있지 아니한가 됨이 있지 아니한가 의심되어서 모든 파의 사승과 열서를 찾아서 본보편수의 머리로 하였으니 후지인이다만 능히 불명한 계대를 밝혀 준다면곧 다행인지라 선자의 지(旨)를 따라 기장하다 보니 한스러움이 추감(追感)되어 그 대강을 간략하게 서술하여 동원지의(同源之義)임을 표시함이라
단군께서 천체의 주기적 현상에서 비롯되는 운기에 의하여 정리의 시대가 사라지고 비리의 시대에 접어들메 있어 승천하실 뜻을 굳히시고 후손 중에서 양위할 인물을 물색한바 봉국인 은나라 30대 주왕 신리의 6촌인 기자가 그 덕이 큼을 알고 불러드여 양위 봉왕하시고 장당경으로 옮기시였다가 후에 아사달로 오시어서 승천 하시었다.
아사달은 지금의 구월산이며 구월산에는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삼성사가 전래되어 오고 있다.
기자께서는 서기 기원전 1,127년에 단군의 뒤를 이어 즉위하신 분으로서 동방의 성군이시다.
기자가 즉위하여 국호를 단군에 이어 조선이라 하였으며 연인 위만에게 폐망한 기준에 이르기까지 42세 역년 1,058년에 달하였다.
자1세조로 지우3세조까지 묘소 실전됨은 千萬後孫에 죄상이라 아니할수 없으므로 조상님에 추모숭의심을 앙양하고 명복과 영령께옵서 영안하시기를 기원코져 충주 단월동 충렬사 후편에 숭묘각을 근수하고 세세년년 매4월 1일(양력)자로 봉향하니 후손된 자여 위선사업에 전력을 경주하고 유적이 영세유전토록 면전하여야 할 것이다.
서기 1970년 3월 10일
후손일동
◆ 임씨(林氏)의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은 당(唐)나라 문종(文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였는데 간신(奸臣)들의 참소가 있자 동래 8학사(東來八學士) 중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팽성(彭城)의 용주방(龍珠坊)에 정착(定着)하였다.
그후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평택 임씨(平澤林氏)는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고려 말(高麗末)에 세자전객령(世子典客令) 겸 연희궁 부사(衍禧宮副使)를 지낸 임세춘(林世春)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한 평택(平澤)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세춘(世春)의 아들 재(梓)가 예의 판서(禮儀判書)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고, 증손 정(整)이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라 성종(成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현손(玄孫) 명산(命山)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빛냈다.
평택 임씨(平澤林氏)의 대표적인 인물 조선의 명장(名將) 경업(慶業)은 세춘(世春)의 12세손이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황(篁)의 네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달리기에 뛰어났던 그는 무과에 급제,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첨지중추 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이 괄(李 适)의 난 때에 공(功)을 세워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이 되었으며 후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겸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도처에서 적군(敵軍)을 무찔러 영웅적(英雄的)이고 전설적(傳說的)인 용명(勇名)을 떨쳤으며 그의 무용담(武勇談)을 소재로 한 고대소설「임경업전(林慶業傳)」이 있다.
경업의 형(兄) 형업(亨業)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모친상(母親喪)을 당한 관계로 피난을 못 가 청군(淸軍)에게 붙잡혔으나. 청군(淸軍)이 「효자는 해칠 수 없다(孝人不可害)」라고 찬탄할 정도로 효성이 뛰어나 효자(孝子)·충신(忠臣)의 정문(旌門)이 고향에 세워졌으며, 숙종(肅宗) 때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어 명망높은 평택 임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