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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음악의 듀오
- 이길원 시인 인터뷰
임 경 하(시인)
태평양 그랜드
구월 첫 번째 화요일. 파주 출판단지에서 이길원 선생님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구월이 시작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아침, 평소에 뵙고 싶었던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설레기까지 했다. 북태평양 고기압이 평년보다 강하게 확장되어 37도를 넘나드는 고온이 지속되던 지난 팔월에 전화를 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너무 덥기도 하고, 내가 사는 안양에서 파주는 너무 머니 메일로 주고받자 하셨다. 메일로 답변을 받기는 했지만 이길원 선생님이 계신 곳도 궁금하고 날씨도 조금 선선해진 것 같아서 찾아뵙겠다고 했다. 초가을 느낌이 물씬 나는 파란 하늘이 펄쳐진 자유로를 달려서 출판단지에 들어섰다. 이름도 예쁜 책울림길을 지나자 직지길이 나왔다. “태평양 그랜드” 앞 나무 그늘에 차를 세우는데 선생님이 벌써 마중 나와 계셨다.
2층에 있는 사무실은 넓고 환했다. 벽면은 책으로 가득했다. 책장에는 사모님과 찍은 사진도 있었다. 인기가 많았던 대학 시절 제일 예쁜 여학생이었다고 하신다. 세월이 참 빠르게 흐른다고, 질풍노도 같은 젊은 시절이 선생님께도 있었다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지금은 그저 건강한 것이 부러운 때가 되었다고 하신다. 내가 보기엔 팔순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외모의 선생님이시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을 여쭈었다.
“국제 PEN 세계 본부 이사직을 끝으로 문단의 모든 직책을 내려놓은 지금은 홀가분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문단 행사도 특별한 역할이 없으면 참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침 5~6시경 일어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작업을 한 2~3시간 합니다. 늦은 아침을 먹은 후 별 약속이 없으면 출근합니다. 회사에 가 봤자 할 일도 없습니다. 플루트도 불어보고 책을 읽기도 하며 놀다가 점심 먹고 3시경 퇴근합니다. 그리곤 헬스클럽에 가서 한두 시간 놉니다. 뭐 대단한 운동을 하는 건 아닙니다. 걷기도 하고 동료들과 이야기하다가 힘이 생기면 아령도 들어보고 하는 정도이지요. 그러다가 저녁에 귀가합니다. 저녁 약속은 되도록 피합니다. 늦게 다니기가 이제 좀 거북해요.”
생텍쥐페리의 미소
지난 사월에 출판하신 「생텍쥐페리의 미소」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회사를 운영하는 분들은 수백 권씩 사서 직원들에게 주기도 하고 여러 단체에서 사 가기도 했다고 한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지혜와 성찰이 가득한 책이어서 나도 주변에 소개하고 선물을 했다. 내 주변의 시인들도 그런 분들이 많았을 것 같다.
“「화광신문」이라는 한 불교신문에서 6년 전에 칼럼을 부탁해 왔습니다. 몇 번 쓰다가 언제까지 쓰면 되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독자들 반응이 좋으니 한 3년 수고해 달라고 하기에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3년을 넘기고 6년째 쓰고 있어요. 원고료도 생각보다 많이 줘서 즐겁게 쓰고 있지요.
내 경험을 이야기 하자니 제 자랑이나 할 것 같아 그렇고, 머리에 든 것도 부족하니 자연 책을 읽으며 쓰게 되었습니다. 책을 구입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서점보다 도서관을 이용하고 있어요. 대한민국 좋은 나라입니다. 도서관에는 책들이 넘쳐 납니다. 80 노인이 책을 자주, 많이 빌려 가니 직원들이 친절하기도 하고 내가 못 찾으면 찾아주기도 하지요.
시간이 지나다 보니 원고도 많이 쌓여 단행본으로 묶고 싶었습니다. 7~80만 부 발행한다는 신문이니 그 독자 만 해도 괜찮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마침 한 출판사에서 관심을 보이기에 출판하기로 했지요.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습니다. 감사하게도 책을 읽은 지인들이 다수 구매해주고 주변에 추천하는 바람에 3개월 만에 초판이 완판되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재판을 찍었다는데, 지금은 판매가 좀 주춤하다고 합니다. 책을 사지 않는 세태에 그만해도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
이길원 선생님의 약력을 보면 특이하게도 연세대 화학과를 졸업하셨다. 이공계 학생이 어떻게 시를 쓰게 된 걸까.
“사실 음악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귀가하는데 레코드 가게에서 피아노 소리가 울려오는 것입니다.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들어가 물어보니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이라는 거에요. 이튿날 그 엘피판을 샀어요. 이런 곡을 만드는 작곡가가 되자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곤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며 돈을 좀 달라고 했더니, “기집애 마냥 무슨 피아노니, 너는 과학자가 되어야 해” 하시며 안 주시는 겁니다. 집안도 넉넉한 편이었기에 당연히 허락할 줄 알았는데, 안 해 주시는 거예요. 잡지 「새벗」이나 「학원」 등은 정기 구독해 주면서 말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새벗」에 <피난길> 이라는 동시를 쓴 게 채택되어 잡지에 실리는 바람에 시골 동네에서 유명 학생이 되었었어요. 그 후 청주중학교를 거쳐 청주고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1960년대 학생들은 시집이라도 한 권 옆구리에 끼고 팝송이라도 흥얼거려야 그럴싸해 보이던 세대였습니다. 꼭 그 짝이었습니다. 당시 청주에는 고교생 중심의 ‘푸른 문’이라는 문학 동아리가 있었어요. 홍기삼 전 동국대 총장, 소설가 김문수, 신경림 시인, 신경식 전 국회의원(최금녀 시인의 남편), 박정희 시인 등이 주축이 된 문학 동아리입니다. 중학교 때부터 그런 선배들을 따라 다니며 시화전도 구경하고 시 낭송도 듣고 했었지요. 그러니까 문학에도 관심이 있던 셈이지요.”
말씀을 듣다 보니 나의 학교 시절도 떠 올랐다. 선생님 말씀처럼 두꺼운 영문판 「언더스탠딩 포에트리Understanding Poetry」를 꼭 손에 들고 다녔었다. 대학교 때 스승이신 정현종 시인께서 강의했던 책이다. 시를 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을 좀 잘했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과학자가 되기로 했지요. 그래서 이길상 선생이 있는 연세대 화학과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재학 시절, 공부보다 다른 취미에 눈을 돌렸어요. 촌놈이 서울 와서 눈이 뒤집힌 겁니다. 호기심 때문이지요. 학교 신문 만들기, 펜싱 배우기 등등…….
그러니 언제 공부합니까. 졸업 때 지도교수였던 최재식 대학원장님과 한치선 학장님이 유학을 권했습니다. 공부가 어려워 안 하겠다고 하니, 교수님은 제자 잘못 키웠다고 한탄하셨습니다. 그 교수님들은 제가 쓴 글들이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면 끝까지 읽고 격려하시기도 했습니다.”
시, 어렵지 않게 쓰자
여러 권의 시집을 냈을 뿐만 아니라 영역 시집, 불역 시집, 헝가리역 시집까지 출판하신 선생님께 특별히 애착이 가는 시집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한때는 미친 듯이 시를 쓰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다섯 손가락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 것 같아 대답하기 어렵다며 모두 감사하고 애틋하다고 하시는 선생님.
산문집도 여러 권 내셨다. 그중에서 「시 쓰기의 실제와 이론」에 대해 들었다.
“처음 시 공부를 할 때 국내에서 출간되는 시 쓰기 이론서를 거의 섭렵했었습니다. 그때 느낀 것인데 초보자의 입장에서 볼 때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한 10여 년 시를 써 본 사람이나 이해할 수 있는 딱딱한 이론서들이었지요. 오래 전에 양천도서관에서 <시 창작 강의>를 부탁해 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시 공부를 할 때 헤매던 생각을 해, 처음 시를 써 보려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시 쓰기의 실제>를 보여 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강의록을 정리한 것이지요. 책은 그간 읽었던 시 쓰기 안내서와 실제 내가 시를 쓰는 과정을 바탕으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한 초보자들을 위한 시 창작 다이제스트 digest입니다.
이 책을 처음에는 문학아카데미에서 출간했었습니다. 생각보다 솔솔 잘 팔렸다고 했습니다. 책이 품절 되자 박제천 형이 재판을 찍었어요. 그런데 그만 형이 우리 곁을 떠나면서 출판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사장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출판사 「윙스 펜」에서 수정 보완해서 재발행을 요청해왔습니다. 그래서 「시, 어렵지 않게 쓰자」라는 제목으로 재발행했습니다. 스테디셀러라고 할까요.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에서 그럭저럭 팔린다고 하니 다행이지요.”
말이 나온 김에 시 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여쭈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도자기를 빚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도자기를 빚었더라도 내용물이 없으면 그냥 도자기일 뿐 시가 아닙니다. 빚어 놓은 도자기에 내용물이 있어야 감동할 수 있어요. 술을 담든지 향수를 담든지 과일을 담든지는 시인의 역량이고 능력이지요.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나열했어도 독자에게 느낌이 없다면 좋은 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어야 느끼고 감동합니다.
그러니까 시인 눈에 보이는 상황이 시로 옮기고 싶을 정도로 감격적이라도, 그 상황을 보이는 그대로 표현하려 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치장을 해도 그냥 그렇고 그런 시가 되고 말아요. 시인이 보고 느끼는 오브제를 내가 말하려고 하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형용사처럼 사용할 때, 시가 강렬해지고 감동과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서정주 선생님이 ‘국화 옆에서’를 쓸 때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의 상을 마치고 거울 앞에 앉아 이제는 과수가 된 누이의 슬픈 듯 청초한 모습을 보고 미당 선생님은 시로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비유할 오브제가 생각나지 않아 4년 동안 쓰지 못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십일월 어느 날 숙취 해소를 위해 물을 마시려고 밖에 나왔다가 달빛을 받고 곱게 핀 국화 한 송이를 보고 그제서 시를 완성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거울 앞에 앉은 청초한 누이를, 달빛 받으며 핀 아름다운 국화에 비유한 시입니다. 즉, 달빛 받은 국화가 청초한 누이를 표현하기 위한 형용사가 된 셈이지요.
시는 감동에 있고 산문은 설득에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독자가 공감해야 합니다. 그냥 주저리주저리 내 말이나 늘어놓으면 독자가 공감하지 않습니다.”
국제 PEN 클럽
시간이 오전 11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12시면 음식점이 복잡하니 점심을 먼저 먹자고 하셨다. 가끔 들리신다는 출판단지 안에 있는 보리굴비집으로 갔다. 예전부터 집에 온 손님을 그냥 보내면 어머님께 야단을 맞았다고 하신다. 어릴 때도 친구들과 놀다가 저녁이 되면 늘 밥상을 차려주셨단다. 선생님께서는 시원한 녹찻물에 밥을 말아서 맛있게 드셨다. 건강한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드시는 게 건강을 지켜온 이유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국제 PEN 총회를 경주에서 개최하신 얘기와 국제 PEN 세계 본부 이사로 계실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국제 PEN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자신의 글이나 행동으로 박해를 받는 작가를 위해 강력한 대변인이 되는 역할이 있습니다. 2012년 국제 PEN 경주 대회를 개최하려 할 무렵인데, 북한에서 글을 쓰던 작가들 중에서 한 20여 명이 북한을 탈출해서 한국에 와 있다는 정보가 있었어요. 나는 수소문해서 그들을 모아 북한 인권을 고발하기 위한 <망명 북한 작가 PEN 센터>를 구성하기로 했습니다.
마침 내가 2010년 국제 PEN 세계 본부 이사로 선출된 후라서 일의 진행이 빨랐지요. 국제 PEN은 7명의 국제이사와 회장, 사무총장, 재무국장 등 10인이 조직의 모든 일을 결정하고 진행합니다.
2011년 이사회에서 <망명 북한 작가 PEN 센터> 설립을 의제로 올렸습니다. 이사들은 망명 PEN 센터들이 대부분 제구실을 못하고 사라지는데 왜 설립하려 하느냐며 반대도 했습니다. 사무총장인 일본의 호리는 <망명 북한 PEN 센터>가 아닌 <망명 한국 PEN 센터>를 만들자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에 반박해서 나는 “한국에는 망명 작가가 없다”고 했어요. 탈북해서 남한에 정착한 작가들이 공산 북한 정권의 인권 개선에 한 역할 할 수 있도록 Korean PEN에서 돕겠다고 했어요. 표결에 붙이자 만장일치로 <망명 북한 작가 PEN 센터> 설립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2012년 경주 총회에서 <망명 북한 작가 PEN 센터> 설립이 통과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고문 역할을 하며 영문 잡지도 출간하고 그들과 함께 국제 PEN 총회에 참석하기도 했었습니다.
「감옥의 문은 밖에서만 열 수 있다」는 책은 그간 망명 북한 작가들과 만나면서 그들에게 들은 북한의 실상과 탈북 문인들의 남한 생활을 시로 쓴 것입니다.”
펜싱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건축 종합예술지인 「공간」에서 일했었다. 그때 교정을 보러 인쇄소에 가기도 했었다는 얘기를 하자 선생님께서 인쇄소 구경을 시켜주셨다.
첫 직장이었던 「주부생활」을 그만두게 되고 어려웠던 시절, 선생님은 주변의 도움으로 조그만 특수인쇄 회사를 설립하셨다. 엎어지고 넘어지며 고생해서 키운 회사를 지금은 아들이 맡아서 하고 있다고 한다. 1층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인쇄 기계들이 쉬지 않고 라벨을 찍어내고 있었다. 곳곳에 쌓여 있는 둥글게 말려 있는 커다란 인쇄물들이 마치 설치미술을 보는 듯했다. 2층으로 올라와 다시 기계들이 있는 방을 지나 문을 열고 나오니 선생님 사무실이었다. 인쇄소를 한 바퀴 돌면 사무실이 나오는 미로 같은 동선은 건물을 지을 때 선생님께서 설계하셨단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잠시 생각했다. 검의 발레라고 하는 멋진 펜싱도 하셨다니.
“1964년 제46회 전주에서 개최한 전국체육대회에서 <사브르> 부분에서 금메달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펜싱 인구가 많지 않았습니다. 대학 팀으로 고대, 연대, 한국외대, 대구대, 한국체대 정도였지요. 지금 모교 펜싱 동아리에는 100여 명 넘게 운동하고 있습니다. 시합 때는 후배들의 부름을 받고 그들을 격려하러 가기도 합니다.”
펜싱의 날카로운 찌르기, 정교한 발놀림은 예술에 가깝다. 그러나 펜싱의 진정한 가치는 기술에 있지 않다. 상대를 존중하고 승리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며, 정정당당함을 배우는 데 있다고 들었다. 명쾌해 보이는 선생님과 잘 맞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플루트flute
마지막으로 정말 내가 묻고 싶었던 음악에 대해 질문을 드렸다. 몇 해 전 숲속의 시인학교에서 가곡을 부르시는 걸 보고 감탄한 적이 있기도 하고, 배우고 계신다는 플루트의 소리가 너무 궁금했다.
“문단의 모든 역할이 끝나자 좀 한가로워졌습니다. 그래서 플루트를 배우기로 했지요. 그런데 배우면 배울수록 예쁜 소리를 내기가 힘들어서 이렇게 어려우면 안 배울 것 그랬다 싶었어요. 몸 컨디션이 조금만 나빠도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혹시 중간에 포기할까 봐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좋은 악기를 산 것을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제천 형이 있을 때 문학아카데미 시 축제 때 불어보겠다고 약속도 했었지요. 그런데 2년 전에 어깨 수술을 하고서 회복 기간까지 악기를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올해 4월 팔을 제대로 움직이게 되면서 제 소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배가 불러서 소리가 잘 안나올텐데 하면서 선생님은 3층으로 안내하셨다. 출판사를 하려고 했던 곳인데 플루트 연습을 할 때 쓰고 계신다고 했다. 한쪽 면이 전부 유리창인 연습실은 시야가 탁 트여서 시원해 보였다. 검은색 가방을 열고 은색 플루트를 소중하게 꺼내서 잘 닦아 조립을 하고, 거울 앞에 자세를 가다듬고 선 선생님은 멋진 플루티스트였다. 관객이 나 하나뿐인 게 아쉬웠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으로 시작해서 여러 곡을 들려주셨다. 처음엔 소리가 잘 안나오고 한참을 불어야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온다고 아쉬워하셨지만 플루트의 소리를 그렇게 가까이서 듣는 게 처음인 나는 귀가 호강한 날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이 계속 귀에 들리는 듯했다. 음악과 시를 사랑하는 이길원 선생님. 유쾌하고 젊은 날들이 선생님 곁에 오래 같이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6년 『문학과 창작』 등단
시집 『슬픔의 해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