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27일, 부산 북구 구포시장 앞 놀이마당에는 낙동강을 등지고 굿청이 마련됐다. 굿청 주위는 온통 꽃으로 장식했다. 진설한 제물 중앙에 촛대와 향로를 놓고, '남당산신 신위'와 구포별신굿의 당산신 '대리당산고모령신 신위'를 모셨다. 전국 오일장 중에서 규모도 크고 역사와 전통에서도 첫손가락에 드는 구포장에 아케이드 공사를 끝내고 준공식을 하면서, 시장 상인의 안녕을 빌고 찾아오는 손님의 건강과 복을 축원하는 구포별신굿 한마당이 열릴 참이다. 색동저고리 붉디붉은 치마 위에 오방색 쾌자를 걸치고, 흰 고깔 쓰고 붉은 띠를 맨 이미자(李美子·57) 만신이 오방기를 손에 들고 굿청에 나왔다. 동서남북에 절하고 양팔을 펴 가만가만 춤을 춘다.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곱게 춤사위를 펼쳐 보인다. 이제 신 내림을 받으려 도약을 시작한다. 쇄납과 아쟁이 울고, 북과 장구, 징과 태징이 한바탕 바라지(굿의 흥을 돋우기 위해 악기를 동원하는 것)를 하면 만신네 하얀 버선의 잔영이 굿청에 가득 찬다. 양손에 나눠 쥔 깃발도 오방색 물결을 이루면서 무지개를 그린다.
어느새 당산 신위 앞에 다소곳이 앉은 만신이 태징을 나직하게 울리면서 축원을 한다.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당산님네
낙동강 천삼백 리 용왕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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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산신님네 고모령신님네
용왕님네요 오늘날에 이 정성 들일 때에
구포시장 상인 여러분 문전마다
장사에 복이 오고 모든 액을 걷어 주시어
오는 복만 있으소서."
만신네의 낭랑한 목소리가 태징의 울림과 묘하게 어울려 하늘에서 내리는 소리로 들린다. 굿청에 오르기 전 감기 기운으로 목을 걱정하던 염려는 벌써 잊은 지 오래고, 당산신께 축원 소망 이루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당찬 목소리만 굿청에 울려 퍼진다. 신딸 장지영도 만신 곁에서 조용히 두 손 모으고 기도에 힘을 싣는다.
어린 시절 어머니 여의고 이혼 아픔 후 건강 악화
36세 때 산 기도서 신 내림 경험, 무당 공부 매진
보존회 회장 맡고 매년 3박 4일간 '굿 잔치' 재현
"당신 몸이 신기로 가득 찼으니…" 만신 이미자. 만신은 여성 무당을 대접하여 이르는 말이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랐다. 6·25전쟁 때 인천에서 부산으로 피난 와 동래 명륜동 동래중학교 앞에서 자동차부품 공장을 했던 2대 독자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다.
하지만 슬하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것을 걱정한 할머니가 이웃집 과부댁도 들이고, 금정산 고모령신에게 10년간 치성도 들였지만, 과부댁도 딸을 낳고 늦게 회임한 어머니도 딸(이미자)을 낳는다.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린 어린 미자는 남의 집 음식을 먹지 못했다. 굿 음식이나 제사 음식은 먹기만 하면 급체했다. 병원 약도 효험이 없어서 할머니가 칼 따위로 굿을 해야 나았다. 어느 해 새벽 잠결에 일어난 일이다. "엄마 누가 왔다." "야가 뭐라 카노? 잠이나 자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공장에 도둑이 들어 값나가는 부속품을 죄다 훔쳐가고 말았단다. 여섯 살 때는 아이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온 식구가 찾아 나섰다. 동래 수안동 시장터에서 지신밟기 구경 재미에 넋이 나갔던 미자를 발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접신(接神)의 감응과 징후가 있었던 거다. 내림 무당이 흔히 앓는 신병(神病)이 어릴 때부터 있었다.
그녀는 열다섯 살 때 생모를 여의었다. 브니엘고를 졸업하고 서울의 간호전문대로 진학했다. 스물다섯 살에 서울의 건축회사에 다니는 사내와 결혼했다가 딸이 여섯 살 때 헤어졌다. 그녀는 이 일도 신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 믿는다.
이혼한 뒤 몸도 마음도 편할 날이 없었다. 시름시름 앓았다. 용한 곳을 찾아서 장래 운수를 알아봤더니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한다. "당신 몸이 신기로 가득 찼으니 신 내림을 받아야 살 수 있느니…." 하지만 딸을 모른 척하고 '신의 길'인 무당이 되는 것은 사람으로서 못할 짓이라 생각했다. 하여, 무당 되기를 접었지만, 급기야 수족마비 현상까지 찾아왔다.
단 한 명의 식구이자 유일한 혈육인 유치원생 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으니?" "엄마! 엄마가 사기 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떻노, 아픈 사람 낫게 해준다는데 어떻노, 차라리 백일기도해서 신을 받는 것이 좋겠다." 일곱 살 먹은 아이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곤 믿기지 않는 딸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
마흔다섯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어머니가 그리워 강원도 삼척의 원덕 해신당에서 기도드릴 때 외가가 평안도인 줄도 알았다. "손녀 손녀 내 손녀야, 내가 왔다. 성수대신 내 아니냐." "누구시냐?" "외조부 손길 잡고 내가 왔다.외조모 내 아니냐."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음성을 기도 중에 들었던 거다. 이들이 평안도에서 왔다는 공수(무당의 입을 빌려 인간에게 전하는 일)를 들었다. 기도를 끝낸 뒤 곧장 무구용품점에 들러 방울이 아흔아홉 개 달린 대신방울을 샀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신력을 가슴속에 품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지금도 이 방울을 소중히 여기고 중요한 굿에만 활용한다.
정작 그녀가 신 내림의 영험을 본 것은 서른여섯 살 때 올린 산 기도에서였다.
법화종단 관음회 총무를 맡아 한 달에 세 번(초하루, 보름, 관음일)은 절에 기도하러 다니던 어느 날, 한 신도의 권유로 경남 양산 물금의 함박산 기도에 동행했다. 토굴 안에서 산 기도를 하는 용한 보살(신녀)과 함께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의 눈이 열렸다. 토굴 사방에 빙 둘러앉아 계신 부처님이 보였다. 어느 날엔 휘황찬란한 촛불 속에 둘러싸여 앉은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몸이 저리고 헛것이 보였다. 그런 마음 앓이가 바로 신을 경험하는 것임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신(神) 수업을 받기로 했던 것.
함박산 보살을 신 어미로 삼아 산 기도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만들어 보내온 방짜 촛대 3개와 옥수 그릇, 향로를 신당에 올리고 정성껏 치성을 드리는데, 옥수 그릇 위에 좌정한 백발노인이 보였다. 영적인 통신(通神) 감각이 절정에 올랐을 때 나타나는 화경(畵境)을 본 것이다. 신 어미에게 물으니 그게 백마장군이란다. 무(巫)에서 백마장군은 옥황상제를 호위하는 근위대장군으로, 인간을 지켜주는 최고의 신격을 지닌 수호신이다.
3개월 후 함박산 산신에게 하직 인사하고 하산했다. 신 어미를 자처했던 노보살과 함께하는 동안 체계적인 무녀수업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굿에 필요한 문서와 춤, 소리를 익히는 무수업(巫授業)을 제대로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동문화원, 2006년 보존회 결성
조선 시대엔 수로 교통의 시발점이었던 구포는 감동진, 감동나루로 불리면서 각종 선박과 일꾼 그리고 객주들로 넘쳐났다. 정부에서 거둬들이는 조세(租稅) 창고인 감동창까지 설치된 구포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사람이 모이고 물류가 거래되는 곳이면 으레 끼는 재액(災厄)을 미리 물리쳐야 했다. 조상들은 이를 굿으로 풀었다. 낙동강 뱃일로 희생당한 고혼(孤魂)들을 불러 위로하고 천도했다. 피리 불고 장구 치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한바탕 잔치를 벌여, 서로의 안녕을 빌고 축복했다. 그렇게 사전에 잡스러운 기운을 쫓아내고, 복을 빌었다. 낙동강 만신이 당주가 되어 각지에서 이름난 무당을 불러들여 몇 날 며칠 질펀하게 굿청을 열었다.
대리당산과 최 씨 할매당산에서 강신(降神)의례를 치르고, 동구 앞 솟대와 장승에게도 제물을 갖추는 것을 시작으로 동네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빌었다. 뱃길에서 사고 없이 재물을 많이 가져오기를 소원했다. 이것이 바로 구포별신굿, 감동진별신굿이었다.
구포별신굿에 대해서는 일제 강점기 구포 출신 손진태(孫晋泰·1900~?)를 비롯한 민속학자들이 연구를 해왔다. 1938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해 간행한 '석전(釋奠), 기우(祈雨), 안택(安宅)'이라는 책에도 그 내용이 소개돼 있다. 최근 고려대학교 최광식 교수(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는 손진태 선생 유족으로부터 '구포별신굿 사설'을 인수받아 '남창 손진태 선생 유고집 3'을 펴냈는데, 그렇게 해서 손진태 선생이 1920~30년대에 무당으로부터 직접 채록한 자료를 볼 수 있게 됐다.
지난 2006년 낙동문화원(원장 백이성)은 구포에서 유래한 구포별신굿을 재현하고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구포별신굿보존회를 결성했다. 손진태 선생 유고에 게재된 한순이와 석씨 성을 가진 무당의 구술을 토대로, 굿을 연구하는 민속학자와 한국무속학회, ㈔대한경신연합회(부산경남본부장 최태완) 등이 참여했다. 보존회는 문화원 내 부설연구회로 뒀다. 대리당산신을 받은 이미자 무당을 보존회 회장(당주)으로 위촉했다.
"별신굿 문화재적 가치 높이는데 혼신"
만신 이미자는 대신할매를 몸주신으로 모신다. 민락동 당산할매를 모시고 광안리 용왕제를 크게 올렸다. 2006년 용두산 산신제에서는 당산을 지켜주는 수호신인 당산천황굿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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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업 |
"금정산 고모령신은 저를 낳기 위해 어르신이 공을 들인 영험산 신이지요. 아버지가 사시는 이곳 구포 대리당산도 금정산 고모령신을 모십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모시는 고모령신이 정주하는 구포는 저에게 아주 소중한 곳입니다. 낙동문화원에서 구포별신굿보존회를 설립하고 저에게 당주(회장)를 맡겼을 때 바로 이 일이야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고, 당산신령께서 내게 점지하신 일임을 알게 되었지요."
당주가 된 그녀는 그해 2006년부터 전국의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구포 강변에서 3박 4일씩 굿 잔치를 열고 있다. 구포별신굿을 재현하는 것은 물론, 별신굿의 문화재적인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다. 그리고 낙동강을 울타리 삼아 살아온 낙동강 사람들에게 금정산 고모령신의 크고 넓은 보살핌으로 항상 복된 일만 있어 주십사하고 빌고 또 빈다. 부산민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