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응접실>
The Korea Times Los Angeles Edition
1981년 7월25일 (土曜日) 한국일보 L A 특집 판
시 쓰는 농부
詩集 “江 마을‘펴낸
온타리오 善農場의 鄭用眞씨
키 큰 단풍나무 밑, 그늘진 우리에서 날개를 펴 보이는 햇볕 뜨거운 7월 여름 한낮, 씨를 쓰는 농부의 채소밭에선 고향의 맛, 노란 참외가 달게 익어가고 있었다. 정용진씨(42)의 온타리오 선(善. Sun) 농장은 LA 다운타운에서 동쪽으로 1시간쯤 30에이커의 채소밭에선 풋 배추와 조선무, 고추와 호박, 열무와 부추가 1년 내내 번갈아 여물어간다.
가파른 뒷산
트인 앞벌
끝없는 지평선은
고향으로 가는 가
...........................
고향의 서러운 소식도
내 농원에 와서는
꽃이 되어 자라는.......“
지난번 출판한 시집 강마을“에 실린 ”온타리오의 봄“에서 정씨는 지난 4년 동안 땀 흘려 가꾼 자신의 농토를 이렇게 노래했다.
작업복에 무릅 까지 올라온 고무장화가 온통 흙투성이가 된 채 아내 정선옥씨(36)와 함께 온종일 뜨거운 햇볓에 그슬린 정씨는 “이젠 흑인처럼 새까매졌다며” 웃는다.
강마을 여주가 고향인 정씨는 여주농고를 다니며, 또 성균관대 법대를 다닐 때엔 정신여고에서 원예반을 지도하며 흙과 함께 사는 것을 배웠다.
“10년 전 미국 올 때도 전정가위 하나와 정원설계책을 꾸려 넣었죠, 지금처럼 농사를 지으리라고 까지는 생각을 못 했지만 학비를 벌 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서였어요” 첫 2년 동안엔 우드버리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다음 3년간은 작은 식품점을 경영했다.
도시에 갇혀 시간에 쫒기고 사람들에 시달리며 메말라가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든 것은 77년 이었다.
식품점을 정리하고 작은 집이 달린 2에이커 반의 농토를 마련했다. 에이커 당 4만 달러짜리 농토는 이름만 농토였지 말을 키우던 빈터였다.
“한마디로 말해 고생의 시작이었지요,” 마구간은 철거하고 농업용수 시설을 손수 묻으면서 진종일 온 식구가 밭에서 살았다.
안개 걷혀가는 이른 새벽 農園을 바라보면
소리 없이 자라는 生命의 神秘가 보이는 듯
아이들은 밭고랑에서 뒹굴며 자라났고 생전처음 흙을 일구는 것이 너무 힘에 겨워 눈물을 흘리던 아내의 손은 농부의 손처럼 마디가 거칠어졌다.
“첫해엔 총각무를 한밭가득 심었습니다. 다행이 대 풍작이었지요” LA 시내로 배달을 안 나가도 한국식품점 주인들이 실으러 올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당시 온타리오의 한국인을 1백여 세대, 그중 8가구가 농사를 짓고 있었다.
본격적 농사가 아니라 남편이 회사에 나가면 아내가 뒷밭에 미나리를 심어 팔고 아내가 재봉 일을 하는 집에선 남편이 풋 배추를 심는 정도의 소규모 부업이었다.
정씨는 농사를 시작하면서 단지형성을 계획했다. “비료와 씨앗을 공동 구입했고 농작물을 분할재배하기로 했습니다. 한집에선 배추만, 한집에선 총각무만 심는 식으로요. ”남가주 한인 협동농장“이라는 이름까지 지어놓았지요.”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조선무가 잘 팔리면 배추 심는 집에서 섭섭해 했고 미나리가 잘 팔리면 고추 심던 집에서 나도 미나리를 심을 걸...하고 후회하는 기색 때문이었다.
협동농장은 결국 흐지부지되어 버렸어요. 지금껏 가슴 아픈 일중 하나입니다. 농사란 워낙 힘든 일이지만 채소농사는 더욱 힘들다. “기계문명이 발달했지만, 일일이 사람손이 가야합니다. 잡초 뽑기, 단 묶기, 떡잎 따기, 거기에 박스 패킹까지죠, 난 내가 교포들에게 내손으로 재배한 채소를 공급하는 것이 스스로 대견하고 즐겁습니다. 그래서 정성을 다하지요., 정성을 다한다는 자부심 때문에 판매에서 덤핑도 절대 안합니다.
한여름 땡볕에 채소들의 잎이 타버린 적도, 장대 같은 겨울비에 밭이 침수된 적도 있지만 정씨의 농장은 온가족의 정성에 “무럭무럭”자라왔다.
농사는 내 肉身이, 詩는 내 영혼이 쓰지요
풋 배추. 호박. 참외, 달게 익어가는 故鄕의 맛을 가꾸며
“대학시절부터 흥사단에 가입, 도산 안창호선생의 정신을 배우며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명감을 키웠습니다. 지금도 내 농토가 한 치 넓어지면 우리의 국토가 한 치 넓어졌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첫 2.5에이커의 농토가 4년 반 만에 열배도 넘는 30에이커로 늘어났고 12명의 인부를 데리고 부지런히 키워가는 채소는 뉴욕, 알라스카에서도 공급주문을 받고 있다.
정씨는 매일 새벽 5시면 밭에 나간다. “새벽, 안개가 걷혀가는 농원을 바라보면 소리 없이 자라는 생명의 신비, 신의 섭리가 보이는 듯합니다.” 이때에
가슴에 차오르는 뿌듯한 환희가 나를 지난 몇 년 동안 흙에 붙잡아매 놓은 것 같아요.“ 여름이면 한 밤중에도 정씨 부부는 번갈아 2시간마다 한 번씩 농업용수에 스위치를 바꿔주기 위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채소밭에 물을 주는 이한밤중이 바로 자신의 영혼을 키워나가는 시간이라고 정씨는 말한다,
“산천과 농원이 다 잠들어있는 그때, 내 영혼은 깨어서 기도하는 심정이 됩니다. 나의시란 바로 이때엔 간구하는 나의마음과, 흙과 사는 매일의 생활에 대한 소박한 노래일 따름입니다.”
지난봄 출판한 첫 시집에 이어 다음 가을쯤에는 수필집을 묶을 예정이다. 휴일이 없이 바쁘게만 살아온 자신의 지난 10년을 정리해보는 셈치고 다.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요. 그 유명한 디즈니랜드를 바로 몇 주 전에 처음 가보았습니다. 캘리포니아 밖은 나가보지도 못했구요.” 그저 새벽부터 밤까지 흙에 묻혀서 사는 생활, 남들이 그렇게 바쁘면서 언제 시를 쓰느냐고 물어오면 “농사는 내 육신이하고요, 시는 내 영혼이 쓰지요.” 라고 대답한다.
신이 허락한 땅을 부지런히 갈고 거두며, 두 아들 지신(6)과 지민(5)에게 밝은 내일을 남겨주는 것이 바램 이라고 정씨는 말한다.
미주한국일보 박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