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은 아내 학비로…인세는 이웃돕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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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는 시인 전남진(38)씨는, “현재란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란 공식을 버리면 당신도 나처럼 즐거운 소풍을 떠날 수 있다”며 웃었다.
그는 지난해 12년간의 직장생활을 청산했다. 다섯 살 난 다온이, 세 살 난 세온이 때문이었다. 견고한 시멘트 벽, 살아있는 놀잇감이 없는 아파트 놀이터가 아이들의 숨을 짓누를 것 같아서, 불안한 미래에 발목 잡혀 현재를 희생하며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아서. 아내는 물었다. “뭐 먹고 살 건데?” 말문이 막혔지만, 딱 2년 만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와 세온이는 용인에 남고, 우선 다온이의 손을 잡고 고향인 경북 칠곡군 기산면 봉산리로 내려왔다. 일명 ‘가시막골’로 불리는 고향에선 칠순이 다 돼가는 부모가 양봉을 치며 구십이 넘은 조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낙향한 장손을 보고 어른들은 혀를 찼다. “일 안 하고 사람 구실을 어찌 하려고….” 40년을 ‘장돌뱅이’로 살며 3형제를 키운 부모이니 그럴 수 있었다.
그때마다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또 언제 고향 내려와 할머니 할아버지 품속에서 살 날 있겠어요. 아이들 학교 들어가면 오고 싶어도 못 온다고요. 마지막 소풍이라고 생각하세요. 이 장손과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나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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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것과 실천하는 것엔 차이가 있었다. 세상에 가장 흔하다고 생각했던 흙은 생각처럼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황토와 적토 사이쯤 되는 연분홍빛 흙! 돌로 기초를 놓을 때부터 허물고 다시 쌓기를 반복하더니, 돌에 치여 엄지발톱이 빠지고 지붕에서 떨어져 서까래에 가슴을 다쳤을 때는 눈물이 다 쏟아졌다.
마침내 구들을 완성했을 때의 감격이란! “혼자서 맥주 한 잔 마시며 자축했지요. 나 어렸을 때 흙은 가난의 상징이었고, 그래서 신발에 흙이 묻지 않는 도시의 윤택한 삶을 얻기 위해 대처로 달려나갔던 건데, 흙반죽 위에 새로 돋는 새싹들 보면서 흙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정결하고 고귀한 존재라는 걸 알았어요.”
숲속에서, 흙 위에서 다온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벌이 꽃을 사랑하는 이유,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이유, 가오리연이 바람에 춤을 추는 이유를 아이는 저 혼자 터득해갔다. 흙집 또한 온전히 다온이의 것이었다. 네모난 창문과 삼각형 쪽창이 있는 동그란 방에서 뒹굴며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아이. 창문 가득 스며든 달빛에 잠 못 이루는 아빠가 술 한 잔 들이켜는 날이면 벽에 걸린 기타를 끌고 내려와 노래를 불러달라고 졸랐다.
돈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쓸 일도 없었지만, 꼭 필요한 돈은 열심히 글을 써서 벌었다. 퇴직금은 아내를 위해 썼다. 올 초 춘천교대에 편입한 아내를 위한 학비. “아내는 다온이 세온이 잘 키우는 게 자신의 꿈이라고 하지만, 아이들이 엄마 품 떠나도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마구마구 설득했어요.” 이 낭만적이고 욕심없는 남자와 사는 이유에 대해 전미향(32)씨는 “정이 들어서”라며 웃었다. 첫시집 ‘나는 궁금하다’의 인세 전액을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했을 때에도, ‘어느 시인의 흙집 일기’로 번 인세의 일부를 다시 재단에 갖다줬을 때에도 그 표정이 너무 행복해 불평 한마디 못했단다. 식구들에겐 ‘다온이가 유치원 들어갈 때까지만’이라고 다짐했지만, 전남진씨는 이 잠깐의 소풍을 매일매일 연장해나갈 계획이다. “아내에게 부탁해 강원도 오지 학교로만 다니려고요. 그때마다 저는 흙집을 한 채씩 지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