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득(安得) 13세
공은 가정(嘉靖) 을묘년(1555)에 태어났으며 자(字)는 중려(仲慮)요 호는 송와(松窩)이다.
공의 고조는 보(堡)이시니 분순분위(奮順副尉)셨고, 증조는 극성(克誠)이시니 좌통례(左通禮)에 이르렀으며, 조부는 수억(壽億)이시니 분순분위셨다. 부친은 경인(敬仁)이시니 참봉(參奉)이며, 모친은 의령남씨(宜寧南氏)이시다.
공께서는 천성이 평안하고 고요하였으며 이를 갈 나이인 칠세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일찍이 증자전(曾子傳)을 읽다가 “효자라야 임금도 섬기는 바니라.”는 구절에 이르러 문득 감탄하며 말하기를, “주자께서 이른바 대인의 학문이라고 하신 것은 이렇기 때문이다.”라고 하고는 빨리 지름길로 명예를 구하여 부모님을 영화롭게 하여 드리고 싶어 활쏘기와 말타기로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왜적이 부산과 동래(東萊)를 함락하고 곧장 금산(錦山)도 점거하니 임금이 탄 수레가 서쪽으로 피난을 가고 백성들은 어육(魚肉)이 되자 공은 칼을 쓰다듬으며 진작하여 말하기를, “임금과 부친이 어떻게 있는데 감히 목숨을 아끼겠는가.” 라고 하고는 종제(從弟)인 징(徵)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달려가서 금산의 웅치에 이르니 당시에 적장인 안국사(安國寺)가 전주(全州)를 습격하려고 만여 명을 거느리고 산과 들에 가득히 둘러차 형세가 마치 풍우와 같았다. 의병장인 김제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과 징(徵)은 모두 전사하였다.
공은 여러 순가들과 더불어 진지(陣地)를 맺고 산채(山寨)를 폐쇄하고 죽기를 맹세하고 물러가지 않으며 말하기를 “만약 웅치를 버린다면 전주는 없어질 것이고 전주가 후에 권율(權慄)공과 그리고 동복현감(同福縣監)인 황진(黃進) 공이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도착하자 공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국가의 치욕을 씻고 가문의 원수를 복수함은 바로 오늘에 있다.”라고 하고는 이에 여러 군사들과 더불어 용기백배하여 활쏘기를 비 오듯 하고 포화가 진동함이 우레와 같으며 한 사람이 백명을 당하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시체가 쌓여 피가 흘러 초목이 모두 붉게 물들었으며 안국사(安國寺)는 곧장 도망쳐 갔다.
권 공이 재빨리 조정에 보고하니 특별히 공을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승진시켜 표창하니 공은 더욱 감격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나라 일에 이바지하여 특별한 은혜에 보답하려고 도모하였으나 마침내 질병으로 이해 11월 7일에 돌아가셨으니 연세는 38세이었고 김제 아래 건동(乾洞) 동쪽 기슭 감좌원(坎坐原)에 장례를 모셨다.
배(配)는 보성오씨(寶城吳氏)이시니 그의 아버지는 참봉(參奉) 석령(碩齡)이다. 묘소는 공의 왼편에 부묘(祔墓)되었다. 아들은 대룡(大龍)이니 봉사(奉事)요,
손자는 흡(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