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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요즘입니다.
문명이 발달한 요즘은 날씨가 춥고 눈이 오는게 삶을 불편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100년 전만 하더라도 겨울이 춥지 않고 눈이 오지 않으면 그 것 또한 삶이 불편한 것이었지요.
특히 겨울에 얼음을 저장해야 하는 것이 국가의 중대사였으므로 날씨가 춥지 않으면 국가로서는 큰 걱정거리였을 겁니다.
그래서, 겨울에 날씨가 춥지 않아 농사에 지장을 주고 얼음이 얼지 않으면 사한제(司寒祭)라고 하여 임금이 몸소
하늘에 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요즘 같은 날이 지속이 된다면 얼음 채취에는 문제가 없을 듯 합니다.
왕족과 귀족들의 한 철의 시원함을 위해 겨울을 저장해야 했던 수많은 범부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지난 여름 답사때 제가 준비했던 석빙고 자료를 올려봅니다.
안동 석빙고
종목 : 보물 제305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 : 1기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경북 안동시 성곡동 산225-1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안동시
1. 석빙고의 역사
빙고(氷庫)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조선말기 양빙고제가 없어질 때까지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실생활에 이용되어 왔다.
옛날에는 능음(凌陰)이라고 하였는데 겨울에 얼음을 채집해 두었다가 여름에 사용할 수 있게 한 시설이었다.
당시로서는 일정기간 얼음을 잘 보관하기 위한 첨단기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빙고는 시대별, 지역별 형식상 다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얼음을 효과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독특한 구조적 특징을 갖고 발전해 왔다.
중국의 경우 이미 전국시대에 쓰인 「예기(禮記)」에 이와 비슷한 기록이 보이는데, 겨울에 얼음을 저장해 두었다가 여름에 쓰는 집을 ‘난빙지가(奻氷之家)’라 불렀다.
우리나라 장빙제도(藏氷制度)의 기록은 「삼국사기」 제4권의 「신라본기」에 소개되어 있는데 지증왕 6년(505)에
“겨울에 해당 관서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토록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국가에서 정식으로 얼음을 저장하게 하였으며,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녹지 않게 효과적으로 보관하였다가 이듬에 여름에 사용한 예가 적어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려주는 기록있다. 이러한 장빙제는 조선말기 광무2년(1898) 양빙고가 폐지될 때까지 계승되었다.
신라 지증왕 6년에 장빙법이 제정되고 내성에 소속된 빙고전(氷庫典)이라는 관청을 두고 빙고를 관리하였다. 그러나 관청에서
빙고를 관리 하였다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뿐 그 상세한 제도와 운영 실태는 전하지 않고 있다.
고려 시대에는 수도 개성은 물론 평양에도 내빙고와 외빙고가 설치되었다. 정종 2년(1036)에는 입하절(立夏節)에 얼음을
진상케 한 기록이 보이고, 문종 3년(1049)에는 반빙제도(反氷制度)가 정해져 매년 6월에서 입추까지 최고급 관리에게는 3일에 두 차례, 좌우북시, 육부의 상서 등 고급관리 에게는 7일에 한차례씩 얼음을 나눠주어 영구한 제도로 삼았음을 보여준다.
얼음을 나눠주는 반빙간은 해마다 음력 6월부터 입추(立秋)까지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5년(1396)에 중앙에서 예조의 속아문(屬衙門)이 직접 관리하는 동빙고(凍氷庫), 서빙고(西氷庫)의 양빙고를 설치, 관리하는 관청을 두어 얼음을 관리하였고, 창덕궁 안에 내빙고(內氷庫)를 두어 궁궐부엌의 얼음수요를 맡았다.
중앙이나 지방관의 관용으로만 빙고제도를 운영한 것만이 아니고 일부 계층이기는 하나 개인도 간단한 저장시설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구조는 알 수가 없다.
원칙적으로 빙고의 얼음 저장과 반출은 예조에 소속된 종5품 아문인 ‘빙고’(氷庫)에서 관장했으나 동빙고에 얼음을 저장할 때는
제사를 맡아보는 봉상시(봉상시)의 관원도 감독했으며 그 얼음은 왕실의 제사를 지낼 때만 쓰였다. 이 때문에 좀 더 깨끗한
얼음을 얻기 위하여 저자도(楮子圖), 즉 지금의 뚝섬까지 나가 얼음을 채취하게 되니 자연 빙고도 당시로는 교통이 불편한
한강 상류에 위치하게 되었다.
처음 동서 빙고는 나무를 재료로 한 목빙고였으며, 갈대, 솔가지, 짚 등을 이용하여 얼음을 보관하였다. 그러나 이런 구조는
매년 얼음을 저장할 때마다 보수를 해야 했고 얼음도 빨리 녹아 아무래도 비효율적이었으며, 보수할 경우 그 비용과 노동력을
경기지방 백성들이 부담해야했으므로 민폐 또한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종 2년(1420)에는 동서 양 빙고가 석빙고로
개조되었으며 이후 이것이 빙고의 일반적인 형태가 되었다. 그 밖에도 고관들의 집에는 하사 받은 얼음을 보관하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빙고가 있었을 것이고, 18세기 영. 정조 이후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한강을 비롯한 전국 여러 곳에 생선 보관용 얼음을 공급하던 사빙고(私氷庫)가 존재 했다. 그러나 민간에서 만든 빙고는 현재까지는 전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다만 국가기관 운영하던 관영의 빙고, 그것도 틀을 이용하여 축조한 석빙고(石氷庫)만이 몇몇 남아 있어 이를 통해 그 형태와 구조를 살펴볼 수 있을 따름이다.
현존하는 석빙고는 대개 18세기 초 영조대의 것이 남아있다. 석빙고 주변에는 대부분 석비(石碑)가 건립되어 있어 석빙고 건립과
관련된 내용을 알 수 있게 했다. 특이하게도 현존 석빙고는 영남지역에만 남아 있고, 영조연간에 축조되거나 개축된 것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석빙고로는 경주석빙고(보물 66호), 안동석빙고(보물 305호), 창녕석빙고(보물 310호), 현풍석빙고(보물673호),
영산석빙고(사적 169호)등이 있고, 북한지역에는 해주석빙고가 있다.
2. 석빙고의 구조와 원리
석빙고의 얼음저장은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1단계는 얼음저장에 앞서 겨울 내내 내부를 냉각시키는 것이고, 2단계는 얼음을
넣은 뒤 7~8개월 동안 차갑게 유지하는 것이다.
석빙고는 겨울철에 개구부를 개방하여 자연대류 환기 및 전도에 의해 돌을 냉각시키고, 냉각된 돌에 얼음을 넣어 장기간
저장했던 구조로 생각되며 저온의 실내기온을 유지하기 위해 적용된 구조별 기능은 다음과 같다.
가) 출입구
출입구의 크기는 작업자가 겨우 들어갈 만큼의 최소개구부 크기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봉분형태로 구성하였으며, 또한 출입구를
통한 열손실을 최소화 하였다. 출입문은 바깥 지반서보다 낮은 위치에 설치되고 문턱과 빙실의 지반차이는 계단으로 처리하였다.
또한 출입구에는 날개벽이 있어 겨울에 부는 찬바람은 날개벽에 부딪쳐 소용돌이로 변한다.이 소용돌이는 빠르고 힘차게 석빙고
내부 깊은 곳까지 밀고 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겨울에 찬기운을 유지한다. 실험에 의하면 겨울철 일반 지하실 온도는 15도인데
반지하정도인 석빙고의 평균온도는 0.5도~ 영상2도이다.
나) 통풍구
석빙고 내부에서 발생될 두 있는 습기 제거와 겨울철 축냉에 유리하도록 통풍구를 최상부 내측에 위치시키고, 통풍구의 재료를
흙과 바위로 구성함으로써 재료별에 따른 열전달율의 차이를 이용하여 환기효과를 극대화하였다. 그리고 직사광선이나 우수를
차단하기 위해 환기통보다 다소 큰 개석을 탈착이 가능한 조립식 구조로 설치하였다.
다) 바닥의 구조
바닥은 수분의 흡수가 가능하도록 흙다짐이나 흑다짐위에 평평한 돌을 경사지게 깔아놓아, 얼음이 부분적으로 녹을 때
발생되는 수분이 바닥으로 원활하게 배수되도록 하였다.
라) 외부식재
강우에 토사가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고 또한 태양열의 복사열을 최소화 하기 위해 외부에잔디로 식재를 하였다.
마) 외부형태
외부의 바람에 의함 표면 열전달 손실과, 석빙고 내부의 공기유동현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외부 형태를 유선형으로 하였다.
바) 외피 마감재료
석빙고의 외피 마감재료는 바위와 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흙은 열차단 성능이 양호한 건축 재료이며, 바위는 겨울철
축냉하기에 용이한 재료이다.
사) 천장 및 벽구조
석빙고의 내부공간은 길이 12미터, 폭 5미터, 높이 5미터 안팍이다.
빙실의 벽은 장대석을 지대석으로 놓고 그위에 다듬은 화강석으로 5개의 홍예를 틀고 홍예사이에 장대석을 올려 지붕을
구성하였다. 홍예들이 있는 벽면은 내부로 약간 돌출되어 있고 지붕면에는 장대석이 있는 부분의 벽면은 외측으로 후퇴되어 있다. 냉기에 의한 전열면적과 공기체적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 천장은 요철이 있으며 얼음저장과 작업자의 작업을 원할히 하기 위해
내부는 기둥이 없는 구조다.
홍예사이의 움푹한 공간은 내부의 더운 공기를 잠시 보관하는 장소(에어포켓)이다.
아) 단열재의 사용
단열재로서 짚이나 왕겨 톱밥등을 얼음과 벽, 천장의 틈 사이에 단열재로 사용하였다. 짚은 공기구멍을 많이 가지고 있어
에어팩과 같은역할을 하였다.
3. 얼음의 채취와 저장
석빙고에 얼음을 저장하는 과정은 기한제(겨울날씨가 특별히 따뜻할 경우에 시행), 채빙, 운빙, 장빙제, 장빙의 순서로
이루어지고 개빙제(開氷祭)를 지낸 후 3월부터 얼음을 사용하게 된다.
■ 사한제(司寒祭) - 겨울 더위를 물리침
사한제는 겨울에 날씨가 춥지 않아 농사에 지장을 주고 얼음이 얼지 않았을 때 임금이 제를 지내 겨울 더위를 물리쳤다는
기록에 근거해 사한제를 지냈다.(성종6년, 영조45년)
■ 채빙(採氷) - 얼음을 채취함
채빙 날짜는 논의하여 추위가 심해질 때를 채택하였으며, 추워지지 않으면 여러 날을 기다렸습니다. 채빙은 하루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여러 날 진행되었다.
채빙은 국가부역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대상이 주로 군인들과 강촌 주민들이었다.. 서울에는 동빙고, 서빙고, 내빙고 등
국가에서 운영하는 석빙고가 있었고, 동빙고에는 10명, 서빙고에는 40명의 전임 노역군이 있어 이들에게 채빙 노역의 결과 1결의 토지를 내려주었다. 『세종실록』에는 장빙군(藏氷裙)에게 술 830병, 어물 1,650마리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나타나 얼음을 저장하는 사람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겨울에 채빙하는 일은 매우 어려워 군기사 등의 군인들과 강촌의 주민들 또는 노비와 역모의 죄가 있는 사람들, 때로는
서북지역의 얼음을 잘 관리하는 사람들까지 동원되었다.. 그럼에도 채빙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채빙의 노력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강촌에는 겨울만 되면 빙고부역을 피해 멀리 달아나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래서 소위 겨울과부라는 뜻으로
‘빙고과부’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때로 대신 노역을 해주고 돈을 버는 사람도 있었다..
채빙은 소한과 대한 사이에 주로 이루어졌는데 만약 이 때 얼음이 12cm 이상 얼지 않으면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빙고부역에 동원된 사람들은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고, 빙판에 미끄러져 찰과상을 입고 심지어는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실록에는 빙부(氷夫)가 동상에 걸리거나 물에 빠졌기 때문에 의원을 보내 치료케 하고 음식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채빙은 얼음 위에 새끼줄을 치며 시작됩니다. 먼저 얼음을 가로 70~80cm 세로 100cm 이상 되도록 일정한 규격으로 맞추어
톱으로 썰어 물 위에 띄우고 이를 다시 꺼내어 우마차에 싣고 석빙고로 향한다. 무거운 것은 얼음의 무게가 약 130kg 이상
되기 때문에 몇 사람이 들어야만 가능했다 이렇게 채빙된 얼음은 다시 석빙고에서 볏짚과 쌀겨 등으로 포장되어 층층이
쌓았다 이러한 얼음을 보통 1만개 이상 13만개까지 쌓았다고 하니 이 노역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이러한 노역의 폐단을 막고자 많은 뜻있는 관리들이 노역의 어려움을 상소하였고, 정약용은 얼음을 보다 쉽게
채취하는 방법을 개발 하여 자신의 저서에 기록하기도 하였다.
석빙고에 얼음을 넣기 전에 물과 비의 신인 현명씨(玄冥氏)에게 藏氷祭를 지내는데, 이는 국가적인 제사로 4배를 행하며
진실도와 축 들이 국가의전 책자인 [국조오례의]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얼음보관과 음기(陰氣)의 보존을 통해 우주의 질서가
잘 이루어지도록 비는 제사이다.
4. 얼음의 사용
얼음을 빙고에서 처음 꺼내는 음력 2월 춘분에는 개빙제(開氷祭)를 열었다. 얼음은 3월 초부터 출하하기 시작하여 10월
상강(霜降) 때 그 해의 공급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이념적으로 얼음은 추운 겨울과 음(陰)을 상징한다. 따라서 음기가 가장 극성한 음력 12월에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였는데,
이는 동장군을 잡아 가두는 장동사한제라는 국가제의와 관련이 있다. 즉 조선시대의 장빙은 여름철의 얼음사용이라는 현실적
용도 이외에 한겨울의 극성한 음의 기운을 붙잡아 지하에 가둔다는 상징행위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한겨울에 저장되었던 얼음은 음기가 쇠하고 양기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한여름에 반빙한다. 한 여름에 얼음이 소용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는데, 이는 또한 극성한 양기를 음의 얼음으로 중화시킨다는 의미로도 이해되었다.
반빙에 대하여 [경국대전] '예전 반빙조'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해마다 여름철 끝달(음력 6월)에 여러 관사와 종친 및 문무관 중의 당상관(時祭에도 또한 지급한다.), 내시부의 당상관,
70세이상의 퇴직당상관에게 얼음을 나누어 준다(활인서의 병자들과 의금부 그리고 전옥서의 죄수들에게도 또한 지급한다.)”
즉 위의 규정은 당상관 이상의 고위관리들이 반빙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외에 환자들과 죄수들의 건강을 위하여도 반빙되었음을
보여준다.
반빙은 70세 이상의 당상관에게는 3일마다 한덩어리씩 이었다.
조선시대에 얼음을 하사받은 고위관리들은 보통 관혼상제에 필요한 음식마련 및 이 음식의 유지를 위해 사용하였다.
5. 석빙고와 생활문화
미국 여성의사의 조선기행문이 미국신문에 실린 적이 있다. 이때의 내용은 아시아의 작은 나라 조선의 문화에 대한 예찬이
그 것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조선에서는 한여름에도 얼음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의사이자 선교사로 조선을
방문하였는데 한국인을 치료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명성황후로부터 점심초대를 받았고 점심을 얻어먹고 후식으로 화채를
먹게 되었다. 그런데 화채에는 얼음이 동동 떠있었다. 이때가 음력 7월이었고 지금으로 보면 8월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였으니 미국인 여의사가 놀란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명성황후에게 얼음에 대하여 물으니 황후는 담담하게
조선에서는 일상적으로 여름에도 얼음을 즐긴다는 말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6. 안동석빙고의 신비
안동지역의 석빙고는 모두 2기가 있었으며 목조로 된 빙고를 포함하면 이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있는
석빙고는 안동시 도산면에 있었던 것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6년 현재 위치인 안동시립민속박물관으로 이건한 것이다.
이 석빙고는 원래 영조 13년인 1737년에 당시 예안현감으로 부임한 이매신이 당시 목조빙고를 개축하여 만든 것이다.
목조빙고는 삼한시대부터 활용되어 온 것으로 이매신은 이 목조빙고를 매년 관리함에 많은 부역이 들어가는 것을 염려하여
의지를 내어 고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목조빙고를 석빙고로 재건축된 예는 영조연간에 많이 보여 이 당시에 유행한
일들이 아닌가 짐작되며 이는 그만큼 얼음이 실생활에 많이 적용된 증거라고 여겨진다.
이매신이 석빙고로 개축한 또 다른 사연은 바로 안동 낙동강 은어를 임금님께 진상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당시 여름
임금님께 진상한 공물 중에는 지역 특산물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중 안동지역 낙동강 은어 30미도 함께 목록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음력 7월 낙동강 은어는 산란하기 전 시기이며 동시에 낙동강의 험한 물살을 헤치고 올라온 고기들이라
그 맛이 일품이었다. 따라서 이매신은 이러한 은어를 싱싱하게 임금님께 진상할 목적을 가지고 석빙고를 개축한 것이다.
이렇게 축조된 석빙고는 다른 지역 석빙고와 달리 측면이 동측으로 길게 나 있고 내부 출입을 위한 계단을 두었다. 내부는
길이 12.5cm 폭 5.9의 장방구로 입구와 맞은편의 벽은 수직에 가깝게 축조되어 있다. 홍예를 지탱해 주는 양측벽도 이와
비슷하다. 즉 수직에 가깝게 약 2.6cm 쌓아 올린 다음 반원형의 홍예를 들어 올렸으며 홍예보는 4개소로 가공된 화강암
장대석으로 폭 약 1.2cm - 1.3cm 정도로 구축하였다. 환기구 3개소를 설치하여 빙실내부의 공기를 유통시키고 온도를 조절하였다
세계적으로 얼음을 사시사철 즐긴 민족은 우리민족이 유일하다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예기」 등에 얼음과 관련된 제사
등의 자료가 보이기는 하지만 이를 실생활에 적용시킨 민족은 우리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참고
〮석빙고의 자연에너지 이용 (공성훈 계명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첫댓글 자료 준비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셨겠습니다.. 읽어보니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도움이 되신다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