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그야말로 눈부신 5월이 흐르고 있습니다. 계절의 여왕, 화창한 5월입니다.
엊그제 일요일은 5월 5일 어린이 날이었습니다. 내 나이 또래의 대부분은 손자, 손녀, 외손자, 외손녀 손을 잡고 놀이 공원이며 꽃동산이며 먹을 것 바리바리 싸들거나 아니면 소문난 맛집에서 오순도순 식사하며 즐거운 시간들을 가졌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힘들다 하면서도 지갑 꺼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흐뭇함을 느끼면서. 그러나 나는 마흔이 넘은 아들, 딸이 시집 장가를 가지 않았으니 손자 손녀도, 외손자 외손녀도 구경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이들 데리고 과천 대공원도 가고, 용인 에버랜드도 가고 안성 대림동산도 가고 하다못해 봉녕사 뒷산도 가고 그랬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들 나이도 가물가물합니다. 마흔 셋이던가, 넷이던가. 따라서 눈부신 5월 5일 상대적으로 컴컴한 방안에서 볼만한 TV프로그램도 없어 채널 몇번 돌리다 끄고 휴대폰에서 무료 무협지나 읽습니다. 그것도 한 두 시간이지 진력이 나서 그만두고 베란다 화분에 물주고 때이르게 포트에 서리태 콩을 심습니다. 게다가 와이프는 연휴라서 강의 휴강일 잡아 호주, 뉴질랜드로 해외 여행을 떠났으니 덩그머니 혼자입니다. 이런 날 친구들을 만날 수도 없으니 외출할 일도 없습니다. 간신히 점심 때를 기다려 콩나물 국 끓이고 고등어 한토막 구어 이른 점심을 깨작 거립니다. 맛이 있을 수 없지요. 이젠 식사량도 줄어 밥 한공기는 커녕 한공기면 세끼를 먹습니다. 식사를 준비하면서 이제는 습관처럼 맥주를 벌컥벌컥 마십니다. 두컵도 모자라 세컵, 네컵 마십니다. 식사를 시작 하면서 이번엔 소주를 마십니다. 때로는 석잔, 어떨때는 반병이나 한병도 마십니다. 대강 설거지하여 치우고 얼근히 취하여 낮잠을 한숨 잡니다. 그러고 깨어 봐야 세시, 한시간 쯤 빈둥거리다 운동 겸 올해 새로 얻은 텃밭에 갑니다.15분쯤 걸어 텃밭에 가서 완두콩 지지대에 묶어 주고 토마토 지지대 세우고 묶어 줍니다. 그리고 완두콩, 감자, 봄배추, 봄 무우, 열무, 쑥갓, 시금치, 고추, 토마토, 가지, 부추, 호박, 강낭콩 심은 곳에 물을 줍니다. 더하여 올해 새로 얻은 이웃의 고구마 심은 밭으로 가서 농수로에 흐르는 물을 물뿌리개와 주전자로 길어 올려 물을 줍니다. 물을 주고 나서 터덜 터덜 집으로 걸어 옵니다. 찬바람 부는 썰렁한 집에 밥을 렌지에 덥히고 반찬 대충 끄내고 사다 두었던 고기 한 조각을 굽습니다. 물론 맥주를 마시면서. 두세달 맥주를 장복했더니 배가 불쑥 나왔습니다. 맥주를 마시지 말아야할 텐데. 밥을 먹으며 또 소주를 마십니다. 대강 치우고 일찌감치 침대에 몸을 던집니다. 딱히 할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저녁에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습니다. 외출할 일도 별로 없습니다. 전에 저녁에 모이는 모임들도 대부분 점심 시간으로 바꿨습니다. 저녁에 음식점이나 당구장 등은 직장 다니는 젊은이 들에게 양보해야지요. 그렇게 누워 빈둥거리다 보면 잠이 들지요. 일찍 잠이 드니 자다가 깨어보면 대개 12시, 1시 입니다. 그때부터 4,5시 까지 TV보다 휴대폰으로 게임하다 무협지 보다 하며 시간 보내고 4,5시에 간신히 잠이들어 한기간 쯤 자고 6시쯤 눈을 뜹니다. 그러면서 긴 하루가 시작되죠. 하루는 길지만 일년은 왜 그리 짧은지요.
내일이면 5월 8일 어버이날입니다. 아버지는 내가 다섯살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20여년 전 돌아가셨으니 부모님을 모시려야 모실 수도 없고 게다가 아내는 아버지 얼굴도 못보고 자란 터에 어머니, 즉 장모님도 3,4년 전에 돌아가시어 이젠 세상 천지 부모님이 안계십니다. 하긴 내나이가 몇인가요.
일주일 전 쯤 나는 기다리다 못하여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들아 집에 언제 좀 오니? 아들이 대답합니다. 사실은요 7,8,9 그때 전주 국제 영화제가 있어요. 엄마도 해외에 가 안계시고 해서 그다음 주에 갈거예요. 사실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딸은 벌써 일년도 넘게 얼굴을 비치기는 커녕 전화도 없는 터에 엄마도 없으니 덩그러니 혼자 있을 늙은 애비 생각은 안하나 하고. 그러나 그런 내색을 자식에게 하기도 싫습니다. 그러냐? 그럼 다음 주 언제? 다음 주 목요일 쯤 갈게요. 제집에 오는 놈이 무슨 큰 선심이나 쓰는 듯 합니다. 이제 영화판은 집어 치웠나 했는데 아직도 영화판을 기웃거리나 봅니다. 사실 난 누구와 만났을 때 아들, 딸 자랑하는 사람이 정말 싫고 듣기 싫습니다. 내 아들도 S대 다녔고 딸도 E대 나왔습니다. 올해는 그런데도 아들 자랑, 딸 자랑 하는 사람을 둘이나 만나게 되어 정말 싫었는데 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얘기를 꺼냅니다. 걸핏하면 손자 손녀 얘기하는 걸 듣는 것도 정말 질색입니다.
오늘은 주민센터에서 영어 공부를 두시간 하고 병원에가서 혈압약을 처방 받습니다. 늘 다니던 병원의 의사가 무슨 다른 일로 통화를 하면서 참으로 무성의 하게 말합니다. 난 그동안 내가 유심히 관찰하며 매일 체크하던 혈압 상태를 말하는데 잘 듣지도 않고 오늘 따라 이상하게 낮게 측정된 혈압만을 가지고 처방합니다. 우루사 약 처방을 물어도 그냥 건성으로 대답합니다. 더이상 말해봐야 소용이 없을 거 같아 그냥 처방전 받고 약국에 들러 약릉 받아 옵니다. 오늘 점심은 뭘 먹나.
칼국수를 먹을까 집에 가서 국수 삶아 놓았던 것을 먹을까, 중국집에 갈까 해장국집에 갈까 망설이다 결국 신선 설렁탕 집에 가서 설렁탕 한 그릇과 소주 한병을 마십니다. 실은 오늘 서울 사당에서 3시 30분에 대학 동기들과 만나 당구를 치기로 한 날입니다만 요즘 부쩍 기력이 떨어져 거기를 가기가 겁나서 아픈 손목을 핑계로 포기합니다. 한잠 자고 밭에나 가 볼까? 그런데 그만 그것도 귀찮아 집니다.
내일은 처량한 어버이날, 주민센터에서 엑셀 공부하고 한의원 가서 침 맞고 밭에 물주러 갈 작정입니다. 눈부신 5월이 이렇게 속절없이 가고 있습니다.
8일 어버이날 입니다. 다행히 어제밤 아들이 전화를 해 주어 조금은 위로가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제 내 신변 처리가 점점 버거워 집니다. 일어나 우선 혈압을 재고 액상 위장약을 먹고 화장실. 면도하고 샤워하고 나와 혈압약을 먹습니다. 아침을 차려 대강 먹고 치우고 태운 냄비 닦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 며칠째 버려 두고 있습니다. 설거지 후에 양치질. 널어둔 빨래 걷어 개어 넣고 베란다 화분을 살피고 옷을 입습니다. 대략 한시간에서 한시간 반 걸립니다. 엑셀 책 챙겨 주민 센터에서 시간 보내기용 엑셀 공부를 더듬더듬하고 한의원에 갑니다. 열흘도 넘게 다녔는데 별 차도가 없습니다. 하도 답답해 분당 서울대병원 예약을 해 봅니다. 온라인으로 진료과와 의료진을 검색하니 그 분야 교수님들 예약 신청했다가는 부지하세월이라 수부강사? 이게 뭔지 예약을 하려니 5월 딱 하루가 가능한데 그게 5월 29일입니다. 그래도 예약을 합니다. 그때까지 나을 것 같지 않아서요. 한의원에서 침 맞는데 어느 부위에 침이 가면 견딜 수 없이 뻐근하게 아파 몸이 절로 움찔합니다. 비껴 맞았는데도 오늘은 맞은 후에 계속 뻐근합니다. 전기 자극, 부황, 침, 전기침, 찜질 이렇게 마치고 나옵니다. 늙은이라고 이렇게 하는데 1,900원입니다. 유**이 했다던데 참 잘한 일입니다.
한의원 뒤편 수원에서 제법 유명한 백** 칼국수집에 갑니다. 12시 10분, 점심시간이라서인지 들어서자 몇 명이냐고 묻습니다. 한명이라고 하니 노골적으로 탐탁치 않은 기색입니다. 안쪽으로 들어가 앉으려니 문가장자리에 앉으랍니다. 하긴 네명이 앉을 자리를 혼자 차지하고 앉으니 탐탁치 않을 테지요. 늙으니 별게 다 서운합니다. 앉아서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식당안이 온통 대국 놈 집에 불난듯 너무도 시끄럽습니다. 세 테이블 쯤에 여자들이 앉아서 고함을 지릅니다. 전에는 50,60대 아줌마들이 시끄러웠는데 이제는 30,40대 여자들이 더 시끄럽습니다. 이건 대화가 아니라 고함입니다. 웃음 소리는 더 더 요란합니다. 누가 더 크게, 더 시끄럽게 소리질러 웃는지 내기라도 하는 듯합니다. 뭐 조선 시대처럼 여자가 조신하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저 옆자리 사람들도 대화는 가능 하도록 조금만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뭐라고 했다가는 벼락 맞을 듯 무서워 말도 못합니다. 이번만이 아닙니다. 가는 곳마다 좀 맛있는 집이다 싶으면 여지 없습니다. 자리는 50%는 부모님과 자녀가 같이 식사하는 자리이고요 한 30%는 직장 사람들 점심, 나머지는 그냥 여자들 모임. 혼자 온 사람은 나 혼자 뿐입니다. 요즘 혼밥집들도 많다고 하는데 그런 곳은 대학가, 고시촌, 원룸촌 들이어서 젊은이들 위주이고요 늙은이 혼밥집은 찾기 힘듭니다. 가뜩이나 처량한 날에 식당에서도 눈치 밥이나 먹고 나옵니다. 처량한 어버이날입니다. 하기야 거동 불편한 분들도 많으니 난 이만하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라고 자위하며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