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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등산로 만든 역사
설악산 명치의 유래
설악은 신라 때 처음 소사(小祀)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칭으로 설산(雪山)
설봉산(雪峰山), 설화산(雪華山) 등으로 불렀는데 그 어원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한가위 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이듬 해 여름이 되어야녹는 까닭으로 이렇게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 《新增東國輿地勝覽》권44, 양양산천조 “부의 서북쪽 50리에 있는 진산으로 매우 높고 가파르다. 중추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이듬해 여름이 되어야 녹는 까닭에 이렇게 이름지었다.”(在府西北五十里鎭山極高峻仲秋始雪至夏而消故名)
둘째는 암석의 색깔이 눈 같이 하얗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고
- 金錦園, 《湖東西洛記》“설악산을 찾으니 돌들은 불쑥불쑥 솟아 하늘에 닿았고, 산봉우리들 우뚝 벌려 있는데 돌들은 희기가 눈 같아 설악이라 이름했다.”(訪雪岳山石勢連天峯巒聳列石白如雪故名 雪岳也) 김금원은 원주 태생으로 자세한 이력은 알 수 없으나 14세 때인 1830년 봄 3월에 남장을 하고 처음 금강산을 여행하였다. 규당학사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으며 서울 용산에 있는 삼호정에서 박죽서, 김운초, 김경춘 등과 시문을 주고 받았다. 1850년에 유명한 여류기행문인 《호동서락기》를 썼다.
셋째는 신성한 산이라는 뜻의 ‘뫼’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 李殷相, 〈雪岳行脚〉《鷺山文選》永昌書館, 1958, 165쪽 “이 설악의 ‘설’이란 것은 결국 신성을 의
미하는 ‘’의 음역인 것임만은 介疑할 것 없는 일이라 봅니다”
조선중기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지행록(地行錄)》에 의하면 첫째와 둘째 유래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데 “설악산은 산이 매우 높아 음력 8월(중추)이면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이듬해 음력 5월(여름)에 가서야 눈이 녹기 때문에 설악이라 이른다.
또 그 바위 봉우리의 돌 빛이 희고 깨끗하기 때문에도 또한 설악이라부른다”고 하였다.
- 김윤우, 〈설악산의 산수와 명승고적〉《山書》제15집, 한국산서회, 2004, 20쪽
따라서 설악 명칭의 유래는 백설과 관련된 것, 암석과 관련된 것, 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외면적 양태와 정신적 세계관을 포함한 명칭으로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눈 설(雪)자를 사용한 ‘설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1965년 4월 속초에서 등산을 좋아하는 지역인사들과 함께 이기섭씨가‘설악산악회’를 만들었다.
1950년대 말 설악동에는 읍에서 경영하는 설악여관만이 한 곳 있었다.
1962년경에 영국황실 아시아학회 회원 90여명을 유치하려 했으나 자동차길이 없어서 못 온다고 하기에 국방부를 찾아가 일선군인들의 협조를 얻어 소공원까지 도로를 닦았다.
속초에서 신흥사까지 무려 8시간반이 걸렸다고 한다.
1960년대 중반에 설악산의 웬만한 코스는 등산이 가능했지만 가장 경치가 뛰어나 지금은 외설악의 주요등산코스가 된 ‘천불계곡’의 경우는 일반 등산객의 접근이 불가능했다.
당시 전문 산악인이라고 해도 대청봉에서 죽음의 계곡으로 자일을 타고 천당폭포까지 꼬박 하루가 걸려 하산하였고,
천당폭포에서 양폭 뒤에 있는 장폭으로 자일을 타고 내려서 길도 없는 천불동계곡을 따라 신흥사에 도착하는데 꼬박 2박3일이 소요됐다.
비선대의 경우 그 당시 탐방객이 많이 찾는 대표적인 관광코스였는데, 비선대에서 천불동계곡에 위치한 양폭까지 올라가려면 길이 험해서 하루 종일 걸렸다. 또 소나기라도 오면 물이 불어 도저히 건너갈 수 없었다.
이에 1964년 이기섭이 회장으로 있는 관동산악회는 양양관광협회와 함께 비선대에서 천불동계곡을 거쳐 대청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처음으로 개설하였다.
병풍바위와 양폭 암벽에 나무사다리를 놓고, 천당폭 밑에는 철삭으로 출렁다리와 나무사다리를 놓아 양폭까지 갈 수 있게 했다. 가야동에서 소청에 이르는 등산로도 개설했다.
이런 연유로 나중에 사람들은 비선대, 천불동계곡, 양폭, 무너미고개에 이르는 이 길을 ‘이기섭코스’라고 이름을 붙였다.
설악산관광협회는 신흥사에서 설악산의 최고봉인 대청봉(1,708미터)까지의 코스 중 험준한 곳에 새로운 통로를 마련했는데 첫째 신흥사에서 비선대까지 사이에 ‘콘크리트’ 교량 1개소와 비선대를 지나 귀면암 사이의 암벽에 목조 사다리를 1개소 마련했다.
그리고 설악산의 가경(佳景)인 귀면암을 지나 오련폭 사이의 말똥바위 지점에 80미터의 난간 철조와 목조 사다리로 완전한 통로를 이어 놓았으며, 오련폭을 지나 양폭에 이르는 사이에 절벽에 또한 목조 사다리 3개소를 마련했다. 세째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우던 양폭과 천당폭 사이의 계곡에 구름다리를 놓았고, 천당폭과 난폭(亂瀑) 사이의 암벽에 난간 2개를 완공함으로써 난폭포에서 소청봉 능선을 통해 중청봉-대청봉까지 무난히 오르게 되었다.
이같이 새로운 통로가 마련됨으로써 종전에는 산악반원들만이 신흥사에서 대청봉까지 이틀을 걸려 최고봉을 정복하던 것이 이제는 일반 관광객도 6시간이면 신흥사에서 대청봉까지 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설악산악회는 1967년 일본 경응대학 산악부 학생들과 함께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비선대에서 금강굴을 거쳐 유선대에 오르는 등산로도 개설했다.
이전에는 굴양암에서 장군봉 뒤를 돌아야만 유선대에 오를 수 있었으며, 유선대에서 굴양암으로 하산해서 비선대를 보려면 지친 몸이라 대단히 힘이 들었다.
화채능선에서 양폭으로 빠지는 길도 새롭게 개설했는데 지금은 입산통제지역으로 묶여 있다.
1965년 봉정암에 약 1백명이 이용할 수 있는 산장(대피소)을 짓도록 했으며, 다음해인 1966년에는 양폭에도 산장을 짓도록 했다. 이 양폭산장은 1969년 2월 한국산악회 해외원정대 조난사고 당시 구조 활동의 기지 역할을 했다.
강원도지사는 1967년 백담사에서 대청을 거쳐 천불동, 신흥사에 이르는 등산로와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지나 오세암을 거쳐 금강굴, 비선대에 이르는 등산로를 개설하고 정비하였다.
이 결과 내설악과 외설악을 잇는 설악산 횡단도로는 1968년 10월에 완공
1955년 최초의 설악산 학술답사 이후 설악산은 빼어난 자연경관만이 아니라 무수한 희귀종 동ㆍ식물이 서식하여 있는 것으로 밝혀져 국제자연자원보존연맹의 보존 의견에 따라 1965년 11월 5일 설악산 천연보호구역 163.4㎢가 천연기념물 제171호로 지정되었으며, 1970년 3월 24일 설악산 전지역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천화대의 ‘석주길’
아래는 루머라고 하네요..!
<1969년대 고(故) 엄홍석, 신현주 두 분의 이름 끝자를 따서 명명된 것입니다.>
설악산에 하늘에서 꽃이 내려와 앉았다는 천화대(天花臺)에 석주길 이라고 하는 릿지코스가 있습니다.
"천 가지의 꽃이 피어있다" "바위에 피어있는 꽃" "하늘 꽃"이라는 숫한 설을 남긴 천화대는 그 만큼 아름답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 입니다.
천화대는 비선대에서 철 계단을지나 천불동 계곡방향으로 가다보면 우측에 초입이 시작됩니다.
끝 지점인 공룡능선에서는 비선대 방향으로는 동북쪽으로 연결되어 있고 외설악을 대표하는
30개 이상의 크고 작은 봉우리를 넘어야하는 구간 입니다
희야봉에서는 범봉을 앞에 두고 설악골과 잦은바위골 로 길이 갈라지고 맞은편으로는 범봉과 공룡능선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잦은 바위골에 다다르면 50m,100m 폭포는 장관을 이룹니다.
천화대에서는 화채봉과 동해바다가 보이며 북동쪽으로 울산암이 바라보이는 곳 이기도 합니다.
풍광과 조망 또한 좋아서 등반 내내 발길을 멈추곤 합니다.
이중 설악골에서 범봉사이에 성곽과도 같은 침니로 이어진 리지구간이 석주길 입니다.
석주길에 얽힌 가슴저린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요델산악회의 송준호, 엄홍석, 신현주 세 사람은 서로 자일 파트너였고 동시에, 절친한 친구이자 연인 사이 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송준호는 사랑보다는 우정을 지키기 위해 다시 말해 세 사람의 순수하고 소중한 관계를 지키기 위해 엄홍석과 신현주의 곁을 홀연히 떠납니다.
송준호가 떠난 얼마 후 엄홍석과 신현주는 연인 사이가 되었고, 두 사람은 설악산 천화대 천당폭으로 빙벽등반을 하러 갑니다.
그러나 빙벽을 오르던 중 신현주가 그만 실족을 하자 당시 빌레이(확보)를 보던 엄홍석은 연인인 그녀의 추락거리를 줄이기 위해서 빙벽 아래로 자신의 몸을 날립니다.
그러나 빙벽에 설치한 확보물이 하중을 견디지 못했고 두 연인은 한 자일에 묶인 채 추락하여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 후 두 친구를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송준호는 악우인 엄홍석과 신현주의 넋을 달래 68년 7월 지금의 천화대 석주길을 개척하며 엄홍석의 이름 끝 자인 "석"과 신현주의 끝 자인 "주"를 딴 석주길이라는 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산악계에서는 처음 길을 개척한사람에게 "명명(命名)권" 을 주게 되는데 송준호에게 명명권을 주어 두 사람의 석주길 이라는 길이 설악산 천화대에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석주길’이라고 새긴 동판을 만들어 천화대와 만나는 바위봉우리의 이마 부분에 붙여 두 사람의 영전에 바쳤습니다.
하지만 송준호 역시 1973년 초 토왕폭을 단독으로 오르다가 실족하여 먼저 간 두 친구의 영혼을 뒤따르게 되고 그의 시신은 그토록 사랑하던 친구인 엄홍석과 신현주의 곁에 뭍히게 됩니다.
그렇게 석주길의 신화가 설악산에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1973년 새해 첫 날밤 등반하루 전 그는 엄홍석과 신현주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깁니다.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번지 없는 주소로 엽서를 보냅니다.
받는사람 "석주 귀하" 주소는 "벽에서 노루목" 보내는 사람 "준" 그것이 전부인...
한편 서울에서는 토왕성폭포 등반을 마치고 돌아오겠다던 송준호의 애인은 1973년 1월5일 오후2시 서울 중앙극장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상영을 앞두고 그를 기다립니다.
그가 나타나지 않자 뇌리에 스쳐오는 송준호를 생각하며 극장가를 떠납니다.
송준호는 그녀가 짜준 목도리와 장갑 모자를 가슴에 품은 체 토왕폭에서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습니다.
송준호는 토왕폭을 등반 후 돌아와 그녀와 함께 스위스 등산학교를 유학 한 후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해 가을 산악회에서는 추모등반을 설악산 용아장성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동판은 제14봉에 부착했습니다.
애인은 동판에 송준호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습니다. "고인의 뜻대로 강하게 살아가겠다고".
그 후 1974년 1월2일 1주기가 되던 해 송준호와도 산 친구는 설악의 노루목을 찾았습니다.
그는 산 친구인 송준호에게 절을 하며 약속합니다.
그녀와 함께 살아가겠다고...
그 이듬해 그들은 결혼해서 그들의 꿈이었던 목장을 이루고 살아가면서 설악가처럼 굽이져 흰띠두른 능선길 따라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설악산 노루목에 엄홍석 신현주와 함께 묻혀있으며 이들 세사람의 충혼비는 이러합니다.
"시간(時間)과 존재(存在)의 불협화음으로 공간을 활보하고 있는 악우(岳友)들이여!
철학적 경이로써 모둠된 그대들의 자취는 훗날 이 인자한 산정을 찾는 이들의 교훈일 것이다.
추억을 침묵으로 승화시킨 사람들, 그 대담한 의지로 회생하리라."
설악가는 세사람의 아름다운 사랑과 우정을 그리며 지어 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구전으로 대학 산악부에서 많이 불려지고 있습니다.
<난 바람 넌 눈물>로 가요계에 데뷔한 산악인 가수 신현대님의 목소리로 들어 봅니다.
마지막 3절이 찐하고 슬프네요.
송준호가 죽은 친구(엄홍석, 신현주)를 생각하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 설악가 - 신현대>
1.
굽이져 흰띠두른 능선길 따라, 달빛에 걸어가는 계곡의 여운을
내어이 잊으리요 즐겁던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다시 오리니~
2.
저멀리 능선위에 철쭉꽃 필적에 너와나 다정하게 손잡고 걷던길
내어이 잊으리오 꿈같던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다시 오리니~
3.
저높은 봉우리에 백설이 필적에 나는야 생각난다 친구의 모습
내어이 잊으리오 꿈같던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다시 오리니
(여기까지 이야기가 루머라 하네요..!)
*** 여기서 부터는 추가분
* 상기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고 루머라고 요델산악회가 해명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팩트(Facts)는 다음과 같습니다.
● 고 엄홍석, 신현주의 사고 및 관계
-1967년 하계 설악산 장기등반 종료 후 서울로 철수하기 하루 전 휴식일에 소토왕골을 하이킹 하던 중 비룡폭포 아래에서 실족하며 급류에 휩쓸린 신현주를 구하려다 엄홍석이 함께 사망
-두 사람은 단순히 산악회 선후배 관계로서 설악산 노루목의 산악인 묘소에 함께 묻힘
● 석주길 개척 및 명명 관련
-1968년 5월 백인섭, 송준호, 오세진은 현재 석주길이라 불리는 암릉의 대부분을(하단의 knife ridge부터 본회가 1967년 개척 및 명명한 ‘범봉’ 앞 V안부까지) 개척하고 특별한 명명 없이 ‘천화대 칼날능선’이라 불렀음
-1969년 10월 임청규, 박창희, 송준호 등이 1968년 개척된 주 칼날능선을 설악골부터 연결하는 완등 후 고 엄홍석과 신현주를 추모하기 위해 두 사람 이름 끝 자의 조합이면서 초입부 칼날능선의 붉은색 돌기둥의 의미를 함께 갖는 ‘석주길’로 명하고 추모동판을 설치. 이후 공식적으로 ‘석주길’이라 칭함
● 고 송준호 악우와 토왕폭 등반사고 관련
-1973년 1월 2일 송준호 악우가 설악산 토왕성폭포 상단을 단독등반 중 밑에서 등반을 보조하던 S대상대 산악회원이 미끄러지며 자일을 잡아채는 바람에 추락사(당시 S대상대 산악회원은 현재 미국 거주)
-고 송준호 악우는 토왕폭 등반 전날 절친한 친구이자 자일 파트너였던 고 엄홍석과 후배 고 신현주에게 토왕폭 등정 의지를 밝히는 간단한 메모를 남겼으나 결국 사고 후 노루목의 엄홍석, 신현주 곁에 묻힘
'설악가'는 산악인 이정훈씨가 1969년 설악산에서 발생한 10동지 조난사고를 추모하기위해 1970년에 만든 노래입니다.
故 엄홍석, 故신현주님과 관련이 없고 故 송준호님과도 관련이 없습니다.
4. 설악산 이름의 유래
지금의 설악산의 많은 명칭들은 대부분 4가지 부류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1)심마니,약초꾼,사냥꾼들-대부분 설악을 기반으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계곡이름들,봉정쌀너미재,탑골,잘루메기,곰의 모덤,앞문닫이골,초막태골,육동댕이날라리,안내피골,반내피골,말등바위, 상목,중목,하목,범이잔골,문바위골,봉정앞가슴이등등 셀수없이 많으나...많은 이름들이 그들만의 용어이므로 잊혀졌다)
2)설악산에 있는 사찰의 승려들-대부분 불교적 경전에 나오는 이름을 붙임
(집선봉,미륵봉,문필봉,석가봉,노적봉,달마봉,취적봉,천불동등등...)
3)초기 산악인들-설악산이 개발되고 등반도구와 기술이 발달하여 그동안 못가던 암릉과 계곡을 누비면서 이름을 붙임 (범봉,곰릉,용아장성,죽음의 계곡,오련폭,까치골,칠선골,공룡릉,모든계곡의 우골,좌골이라는 이름등등)
4)설악산초기 개발당시 사진사들-설악산을 개발하여 등로가 생기게 되고 멋진 명소를 사진에 담기 시작했지만 마땅한 이름이 없어 붙이게 된다.(귀면암,양폭,음폭,와선대,비선대,염주폭,천당폭,육담폭,비룡폭등 대부분의 관광명소의 이름이 여기에 해당된다)
- “설악산과 동해안”최구현씨 1969년 의 책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음.
위의 부류들은 같은 곳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 경우도 있고 ..먼저이름이 와전되어 다른곳에 붙이기도 하여 지금의 설악명칭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름이 지금까지 잘 보존된 내설악쪽과는 달리 들어가기가 어려웠던 외설악쪽 유명지명은 1962년부터 설악산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최구현씨가 많은 이름을 붙였다.
*천화대(현재 공룡능선)-마등령~무너미고개 까지를 금강산에 따와 천화대라 명명했으나 지금은 어찌된일인지 범봉까지의 암릉길을 말한다.
*귀면암-금강산에서 최구현씨가 따옴.
*양폭,음폭-음양오행설에 의해 주봉인 대청의 왼쪽, 오른쪽에 의해 명명.
*오련폭-57년 어느 화가가 화폭에 담고 오련폭이라 작품명을 붙인것을 보고 명명.
(오련폭이란 이름은 1955년 서울문리대산악회의 천불동 초등때 유홍렬 교수가 붙인 이름이라고 서울문리대산악부40년사에 나온다)
*염주폭-염주같이 골골이 엮어져 있다 해서 명명
*집선봉-권금성일대의 연봉으로 금강산에서 따옴.
*비룡폭-주민들이 기우제를 올린폭포로 용소폭이란 토속이름이 있었으나 좀더 화려한 맛을 주기위해 명명.
*와선대,비선대-옛날 향성사때부터 전해내려오는 이름으로 명명.
*문주담-당시 설악산개발에 큰 역할을 해준 이문주씨의 이름을 빛내주려 명명.
*이호담-그 위로는 물고기가 살수 없어 물고기가 사는물과 그렇지 않은 물의 경계가 된다하여 두이(二)자를 써서 명명.
*내,외설악-최구현씨가 첨으로 구분하여 명명.
*천당폭-대청에 가는 마지막 폭포이므로 명명.
[출처]설악산과 동해안-최구현|작성자기절거미
http://blog.naver.com/enry911/90139578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