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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나는 샤론의 장미요, 골짜기들의 백합화로다.
2:2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처럼 나의 사랑도 딸들 가운데 그러하도다.
이 두 구절은 솔로몬이 화자이지만 1절의 첫번째 언급, "나는"(I AM)은 솔로몬의 범위를 넘어서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계시하신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출 3:14).
요한복음 8:58에서 예수께서는 이 "나는 있느니라"(I AM)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그것은 여호와로서의 신성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나는 있느니라.”고 하시니라(요 8:58).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체포하러 온 유다와 병사들 앞에서 짧은 순간 그 이름의 위대한 능력을 나타내셨다.
주께서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뒤로 물러서서 땅에 엎드리더라(요 18:6).
요한복음에서 7회(중복된 표현은 하나로 간주하고), 주께서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I A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1) "내가 생명의 빵이니라...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요 6:35, 51)
2)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 8:12, 9:5)
3) "나는 양들의 문이라."(요 10:7)
4)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
7) "나는 참 포도나무요...나는 포도나무요"(요 15:1, 5)
주께서는 계시록에서도 똑같은 I AM이란 표현을 쓰셨다.
1)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나는 처음과 마지막이요"(계 1:8, 11, 17, 22:13)
2) "나는 살아 있는 자며, 죽은 자였으나,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계 1:18)
3)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며, 또 빛나는 새벽별이라."(계 22:16)
따라서 솔로몬의 노래 2:1에서의 I AM는 솔로몬을 통해 예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이 언급한 "샤론의 장미"가 어떤 꽃인지에 대해 많은 주장들이 있지만 우선 "장미"에 대해서 성경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장미라는 꽃은 솔로몬의 노래 외에 한 곳에서 더 등장하는데 이사야 35:1에서이다.
광야와 메마른 곳이 그들을 기뻐하고, 사막이 기뻐하며 장미처럼 피리라.
그것이 무성하게 피어 기쁨과 노래로 즐거워할 것이요, 레바논의 영광, 곧 칼멜과 샤론의 아름다움이 그것에게 주어지리라. 그들이 주의 영광과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사 35:1-2).
많은 예언 주석가들이 사 35:1을 현재 이스라엘에 과수원과 농지가 늘어난 현상으로 해석하고 끝내 버린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재림 후 천년왕국 때 땅이 변화되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1절의 "사막"은 단지 사해 근방의 유대 광야만 말하는 게 아니라 고센 지역의 나일 강 어귀에서 유트라테스(창 15:18)까지의 공간에 있는 모든 사막들을 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그 땅을 물려받았다.
게다가 이 땅은 현대 과학 영농법으로 "장미처럼 피어나지" 않았는데 샤론의 장미는 그의 말씀의 능력으로 생명이 자라나게 하기 때문이다. 창 1:11-13에서 그분께서 재창조하셨던 방식과 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샤론의 장미"라고 밝히셨으므로 여러분이 그런 꽃을 찾는다 해도 아마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샤론의 장미"의 뜻은 약속의 땅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능력을 묘사한 것이다. 그 능력에 대해서는 신명기 11:9-12를 보라.
또 주님께서는 "나는...골짜기들의 백합화로다"라 말씀하셨다. 물론 여기서 영감받은 찬송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본문에는 단수 골짜기가 아닌 "골짜기들"이라 말씀하고 있다. 성경의 단.복수 표현에 유의하는 것은 중요한데 때로 생사를 가를 만큼 중요하다.
예를 들면 이런 일이 있었다. 왕상 20:1-20에서 시리아인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다 패하는데 시리아인들이 패하고 나서 두번째 쳐들어올때 이렇게 말한다.
한편 시리아 왕의 신하들이 왕에게 말하기를 “그들의 신들은 산의 신들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더 강하였으나 우리가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우리가 반드시 그들보다 더 강하리이다(왕상 20:23).
그들이 이 말을 했기에 주께서는 또 이스라엘이 이기게 하신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이 와서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시리아인들이 말하기를 ‘주는 산들의 하나님이요, 골짜기의 하나님은 아니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모든 큰 무리를 네 손에 넘겨주리니,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리라.” 하더라(왕상 20:28).
벤하닷이 실수한 것은 하나님께서 "산들"의 하나님일 뿐 골짜기는 아니라고 한 것이었는데 그 사소한 표현 실수로 인해 127,000명의 시리아 군사가 죽었다(왕상 20:29-30).
이런 가사를 가진 옛 산골 민요가 있다: "산들의 주이신 하나님께서는 골짜기들의 하나님이시네...그분은 좋은 시절에도 하나님이시고 나쁜 시절에도 하나님이시네, 낮의 하나님이신 그분은 밤에도 하나님이시네"
이 구절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영적 적용은 헤아릴 수 없이 풍성하게 할 수 있다. 그분은 "골짜기들의 백합화"라 말씀하시는데 당신은 일생 살면서 하나의 (고난의) 골짜기만 통과하지 않을 것이다. 즉 당신이 거쳐가는 모든 골짜기들마다 백합화인 그분은 계신다.
이제 "백합화"에 대해 알아볼까? 성경에서 단수, 복수 포함해서 15회 등장한다. 호세야 14:5을 제외한 모든 구절들이 어떤 식으로건 솔로몬과 관련된 내용이다. 솔로몬은 성전의 여러 부분에 백합화 문양을 새겨 넣게 했다(왕상 7:19, 22, 26:2, 대하 4:5). "백합화"나 "백합화들"은 솔로몬의 노래에 여덟 번 등장한다. 주께서는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를 생각해 보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내가 말하노니 모든 영광을 누릴 때의 솔로몬이 차려입은 것도 이 들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눅 12:27)라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백합화는 일반적으로 결혼식과 장례식에 사용된다. 부활절 행사에도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되어 장식되곤 한다. 즉 백합화는 죽음이나 결혼과 관련된 꽃이라는 것인데 이 두 의미를 다 충족하는 분이 그리스도시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신부를 얻으셨다. 또 백합화는 부활과도 관련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결혼은 영구적인 결합이다. 롬 7:2에서 "남편이 있는 여인은 그 남편이 살아 있는 한 그에게 법으로 매여 있으나 남편이 죽으면 그녀는 그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라 증거하기 때문에 크리스챤은 주께서 살아계신 한 그에게 결합되어 있다.
1절에서 자신을 백합화라 말씀한 주님께서 2절에서는 신부를 백합화라 말씀하기 때문에 여기서 신랑과 신부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인데 단순히 흉내낸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자신을 "세상의 빛"(요 8:12)이라 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세상의 빛"(마 5:14)이라 하셨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분이 하나님의 어린양인 것 같이 우리도 그분의 양이며 그분의 어린양이기도 하다(요 21:15-17). 그리스도인은 그의 주와 닮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의 원래 뜻은 "작은 그리스도"이다.
2절의 상황을 더 살펴보면 백합화인 신부는 가시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가시"의 성경적 의미는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이다.
이는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에게 적합한 농작물을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으나,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서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기 때문이라(히 6:7-8).
그러나 벨리알의 아들들은 모두 내다 버린 가시나무 같으리니, 이는 손으로 그들을 잡을 수 없음이라.
그들을 만지려는 사람은 철과 창자루를 갖추어야 할 것이요, 그들이 그 자리에서 완전히 불태워지리라.” 하더라(삼하 23:6-7).
그들 가운데 가장 선한 자도 찔레나무 같고 가장 정직한 자도 가시울타리보다 더 날카롭도다. 네 파수꾼들의 날과 네 감찰의 날이 오나니 이제 그들이 당혹해 하리로다(미 7:4).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면서 땅을 저주하셨을 때(창 3:17-18) 땅에 가시나무가 자라났다. 따라서 가시나무는 땅에 임한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을 가시, 가시나무라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저주받은 세상인 "가시나무"로부터 분리되어, 그러나 그것들에게 아직 위협적으로 둘러싸인 채로 땅에 머물고 있다.
한편, 가시나무 비유는 단지 구원받지 않은 죄인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사랑도 딸들 가운데 그러하도다. 는 무슨 뜻인가? 1:5에서 "딸들"은 예루살렘의 딸들이었다. 2:7에서 또 "예루살렘의 딸들"은 등장한다. 이 딸들은 3:5, 10-11, 5:8, 16; 8:4에서 계속 등장한다. 솔로몬은 신부를 "예루살렘의 딸들"보다 훨씬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주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부에게 "모든 구원받은 여인들(여러 시대의 성도들)"에게서 분리되어 있으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솔 6:8에서 이 여인들이 누구인지 언급된다. "왕후가 육십이요 후궁이 팔십이요 처녀들은 셀 수도 없으나"
따라서 사도행전 2장에서 교회의 휴거까지의 기간인 이 시대를 제외한 다른 시대들의 성도들은 6:8에 의하면 "왕후, 후궁, 처녀들"이다. 그들이 2절의 "가시나무"일 수 있다.
6:9에서 "나의 비둘기, 나의 더럽혀지지 않은 자는 오직 하나요, 그녀는 그 어머니의 외동딸이며 그녀를 낳은 어머니의 귀한 사람이라. 딸들이 그녀를 보고 그녀를 축복하니, 정녕, 왕후들과 후궁들과 그들이 그녀를 칭찬하는도다." 라 말씀하는데
6:8절에 있던 "처녀들"이 9절에서는 "딸들"로 대체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네 그룹, 신부, 왕후들, 후궁들, 처녀들은 바울이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가족"(엡 2:18)를 형성하게 된다. 하나님의 가족 중에서 교회가 차지한 부분은 "그의 몸"이다(엡 1:22-23).
교회를 제외한 다른 시대의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런 분류로 나눌 수 있다: 구약시대의 구원받은 이방인, 구약시대 구원받은 유대인, 이방인 환란성도, 유대인 환란성도, 천년왕국 성도. 주께서 보실 때 이 모든 그룹들 사이에서 "신부"가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2절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크리스챤인 여러분은 주님 앞에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것은 "순수하고 희게" 보인다. 그리스도의 몸에 비하면 다른 시대 성도들은 차라리 가시나무처럼 보일 정도다. 심지어 노아, 다니엘, 욥 같은 구약의 대표적 의인들조차도(겔 14:14) 그렇게 보인다. 다윗이나 사무엘, 모세도 마찬가지다. 제단 아래에서 통곡하고 기도하는 환란 성도들(계 6:9)도 그러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친한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을 다 "백합화"라고 부를 수 있는가? 정직한 마음으로 모세, 다니엘, 노아, 욥, 사무엘, 다윗 같은 성도들, 또는 대환란기 순교자들이 여러분 주변 그리스도인들에 비하면 "가시나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가지를 기억하기 바라는데,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개인적 의를 기준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으로 여전히 불의하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불에 의해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고전 3:15). 그럼에도 이 시대 성도들이 주 앞에 백합화로 보일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거듭남"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거듭날 때 주께서 당신의 몸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그분의 의를 전가시키신다. 동시에 죄의 몸으로부터 혼과 영을 분리시켜 당신을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시키신다. 또한 여러분은 주님의 영적 몸 안으로 침례받는다. 이렇게 된 이상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시는 시선은 "개인적 의"로 보시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기준으로 보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다른 시대의 나머지 성도들은 전부 "개인적 의"가 판단받는 데 있어 유효한 기준이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렇게 설명한다 해서 오해하지 말기를. 하나님께서 다른 시대 성도들을 거절하신다는 게 아니다. 천년왕국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솔로몬은 천 명의 아내를 두었고 성경은 그가 아내들 모두를 파라오의 딸과 마찬가지로 "사랑했다"고 말씀한다(왕상 11:1). 그러나 파라오의 딸은 솔로몬의 "O-A-O"(One and Only)였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의 관계와 같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원한 사랑으로"(렘 31:3) 사랑하시지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아끼는 사랑은 이스라엘의 경우보다 훨씬 친밀하고 특별한 것이다(엡 5:25). 다른 시대들의 여러 성도들, 이스라엘조차도 주님과 이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는 못했었다.
2:3 숲의 나무들 가운데 사과나무처럼 나의 사랑하는 이도 아들들 가운데 그러하도다. 내가 큰 기쁨으로 그의 그늘 아래 앉았으니, 그의 과일은 내 입에 달콤하였도다.
2:4 그가 나를 잔칫집으로 안내하였으니, 내 위에 나부끼는 그의 깃발은 사랑이었도다.
2:5 건포도 과자로 나에게 힘을 돋우고 사과로 나를 위로해 주소서. 내가 사랑으로 병이 났나이다.
2:6 그의 왼손이 내 머리 아래 있고 그의 오른손이 나를 껴안는도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의 암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3절에서 다시 화자가 신부로 바뀌면서 2장 나머지 부분은 계속 신부가 말하고 있다. 참고로 10-14절은 신랑이 하는 말을 신부가 인용하는 형태이다. 2절에서 신랑은 신부를 다른 여인들과 비교했고 3절에서 신부가 신랑의 말을 받아서 이번에는 다른 남자들과 신랑을 비교해서 칭찬하고 있다. 숲의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들보다 열매를 맺는 사과나무인 신랑이 월등히 낫다는 말이다.
성경에서 사과나무는 과실수 중에서 최상으로 언급된다. 잠 25:11에서 솔로몬은 "적합하게 한 말은 은 그림들에 있는 금사과들 같으니라."라 언급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눈동자와 같으며(신 32:10; 애 2:18; 슼 2:8) 여기서 눈의 동공을 "apple"이라 표현한 것은 동공이 눈의 문이기 때문이다(마 6:22). 또 눈에서 중요한 부분이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처럼 보호하신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사과가 이렇게 중요하다보니 로마카톨릭은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가 사과나무였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남자의 목젖을 "아담의 사과"(아담이 선악과인 사과를 먹다가 목에 걸린 자리)라고 부른다. 이런 건강상식도 있다: 하루에 사과 한알 먹으면 병원 갈 필요가 없다.
물론, 신학자들이 성경에서 사과의 의미를 헷갈려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 학자들은 시장에 나가서 과일을 사기보다 연구실에 틀어박혀 성경의 "사과"가 진짜 사과인지 장미는 진짜 장미인지 상징적 장미인지 백합화는 어떠한지 고민하느라 더 바쁘다. 그들은 살아 움직이는 세상과 스스로 격리되어 있는 것이다.
카나안을 포함한 중동 일대에서 B.C.2000년경부터, 솔로몬 시대에서 거의 1,000년 이전에 몇 종류의 사과가 재배되기 시작했는데 사과는 감귤류가 아닌 과일 중에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대표 산물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어떤 멍청한 헬라어-히브리어 학자들이 솔로몬 당시 카나안에는 사과가 재배되지 않았다고 반론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식물학 지식과 원어 지식 몇개를 들고 와서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치려 하고 성령 대신 성경 해석의 왕좌에 앉으려 한다.
성경에서 사과라고 했으면 그것은 과일로서의 실제 사과를 말하는 것이지 다른 것의 상징이 아니다.
3절, 나의 사랑하는 이도 아들들 가운데 그러하도다.
여기서 "아들들"은 실제 아담의 자식들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백열 전구와 태양의 차이만큼이나 사람의 아들들과 차이가 난다. 모세, 엘리야, 다윗은 위대한 성도이지만 당신을 위해 그들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 모세는 우리에게 율법을 남겨줬고, 다윗은 시편을 남겨주었다. 그 사람들 자체는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과 다르다. "내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 10:10)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모세가 하늘에서 그 빵을 내려 너희에게 준 것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참된 빵을 내려 너희에게 주시나니
이는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분이기 때문이니라.”고 하시니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명의 빵이니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며, 또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2-33, 3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들이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요 15:5).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라.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이것이 숲의 모든 나무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점이다. 특별히 벌레먹고 썩었으며 텅 빈 마호메트 같은 나무와 대조되는 점이다. 나는 모슬렘 중 한명을 만나 그의 선지자가 개인적으로 그에게 뭘 해줬는지 간증해 달라 부탁했다. 그의 대답은 마호메트가 그에게 코란을 줬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질문하기를 "그게 아니라 그 선지자가 당신에게 해준 게 뭐냔 말이오"라 물었다. 그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선지자께서는 나를 위해 죽으셨는데, 당신의 선지자는 당신을 위해 뭘 해줬는가 말이오"라고 다시 물었다. 그는 더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이 모슬렘이다.
마호메트와 그의 "알라"는 추종자들을 위해 해준 것이 없기에 그들은 말할 것이 없다.
3절, 내가 큰 기쁨으로 그의 그늘 아래 앉았으니,
"주께서 나의 도움이 되셨으므로 내가 주의 날개 그늘 안에서 기뻐하리이다."(시 63:7) 다윗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의 과일은 내 입에 달콤하였도다.
"오,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여기 또 대응되는 구절이 있다.
주를 맛보는 방법은 그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게 함으로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느니라(벧전 2:2-3).
카톨릭이 "주를 맛보는 것"에 대해 가진 왜곡된 생각은 요한복음 6장에서 나왔다. 거기서 그들은 미사의 근거를 찾는다. 물론 6장 본문에서 주께서는 "주의 만찬" 혹은 "미사"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말씀하고 있다. 그럼에도 카톨릭은 이 본문에서 실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하는 근거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
이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임이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며 나도 그 사람 안에 거하느니라(요 6:53-56).
이제 카톨릭이 가르치는 대로 하자면 이렇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 안에 머물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미 승천해서 하늘의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데(요 6:62)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단지 검은 망토를 두른 아프리카 마술사들이 등장해 태양 과자와 발효된 포도주에 대고 몇 마디 라틴어 주문을 외우면 된다. 그러면 갑자기 2천년 전 갈보리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여러분 앞에 등장할 것이다. 과연 요한복음 6장이 그런 흑마술을 통해 매주일 아침마다 식인, 뱀파이어식 흡혈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인가? 성경에서 피를 마시는 행위는 세 번이나 금지된 불법이다(창 9:4; 레 3:17; 행 15:20).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 역시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7).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를 먹는다는 말로 보이는가? 절대 아니다.
아직도 불확실해 보인다면 요 6:63에서 주님 자신이 본문을 해석한 말씀을 보도록 하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즉 당신이 성경을 믿을 때 영적으로(육체적이 아닌) 주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전까지 당신은 절때 그분이 얼마나 좋은 분이고 은혜로우며 달콤한 분인지 알지 못한다.
미국인들은 이런 영적 문제를 판단함에 있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류에 속한다. 가령 어떤 제조사가 신제품을 개발할 때는 먼저 샘플을 제작해서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테스트하게 나눠준다.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샘플을 받아서 제조사가 말하는 스펙대로인지 시험해 본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라고 하면 사람들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피한다.
"성당 주임신부께서 아무도 그런 것은 알수 없다고 하셨어요"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카톨릭으로 태어났습니다(혹은 침례교, 루터교, 감리교 등), 혹은 저는 카톨릭으로 살다 죽을 겁니다(혹은 침례교, 루터교, 감리교 등)" "저는 그런 식으로 믿지 않습니다" "그건 너무 쉽잖아요"
들으라. 얼빠진 사람들아, 주의 말씀을 검증해 보라. 왜 잃어버린 자로 남으려 애쓰는가? 지금 당신들은 지옥으로 가고 있다(눅 13:5; 요 3:36). 내 말이 틀렸다 해도 당신들이 지옥에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성경이 말씀하는 바가 내 말대로라면(수십억의 사람들이 A.D.33년 이후로 나처럼 믿었다면), 당신의 선행, 당신의 종교, 교회, 또는 부모를 거역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의 대속을 신뢰함으로써만 여러분은 하늘의 본향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한가지 장담하는 것은 당신이 계속 자기 종교대로 믿고 고집하겠다면 그렇게 할수 있다는 것이고 지금처럼 무지하고 멍청하며 혼을 잃어버린 상태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거부한 불가지론자는 단지 멍청할 뿐 아니라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다. 만일 정직했다면 그는 주의 말씀을 입증, 또는 반증해 보려 했을 것이다. "저는 성경을 검증해 보았는데 말씀들이 거짓임을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했을 것이다. 불가지론자가 주를 시험해 보지 않는 이유는 그가 잘난 체 하는 이기적인 위선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 그런 사람도 아니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열린 마음의 지성인으로 봐 주기를 기대한다.
"그의 과일"(3절)은 갈라디아 5:22-23에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그러한 것을 반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이 열매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구령하고 찬양하고 구제할 때, 즉 그들이 개인적인 의를 행할 때 나오는 열매들이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게 아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한 상태에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를 사용해서 이루어내는 열매들이다.
4절, 그가 나를 잔칫집으로 안내하였으니, 내 위에 나부끼는 그의 깃발은 사랑이었도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자신에게 인도하려 할 때 그는 죄인에게 달콤한 두 가지를 제시하신다. 사랑과 음식.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혼인시킨 어떤 왕과 같으니(마 22:2)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복음의 초청으로 부르시는 것을 이렇게 비유하신다.
다시 그가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초대받은 자들에게 말하라. 보라, 내가 만찬을 준비하였고, 내 소와 살진 짐승을 잡았으며, 또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혼인식에 오라 하라.’고 일렀느니라(마 22:4).
"혼인식"과 "만찬", 즉 초청받은 자들에게 제공되는 것은 사랑과 음식이다.
그때 그가 내게 말하기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 그들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라.” 하고 또 내게 말하기를 “이것들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들이라.”고 하더라(계 19:9).
여기서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매력적인 두 가지가 있으니 "사랑과 좋은 음식"이다.
사람이 사랑과 음식, 둘다 충족되었다면 만족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땅의 것들로 비유되었기는 해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영적 교제"의 그림이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 3:20).
잔칫집(4절)은 에스더서에서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이 잔치는 "포도주 잔치"이다(에 5:6, 7:2). 의심된다면 다시 3절의 "과일"을 보라. 그것은 "포도 열매에서 난 것"(마 26:29)이다. 5절의 "건포도과자(flagons)"를 보라. 그것들은 포도주를 담는 병이다(삼하 6:19; 대상 16:3; 사 22:24; 호 3:1).
(역자 주: 한글킹제임스 성경은 flagon을 여기서 "건포도과자"로 번역했다. 아마도 성구사전을 따른 것 같은데 Young의 성구사전을 보면, 이사야 22:24에서 포도주 병으로 간주한 경우 외에 삼하 6:1, 대상 16:3, 호 3:1, 솔 2:5에서 "포도 과자(cake)"로 주석해 놓았다. 어쨌든 성구사전대로 따랐기 때문에 한킹이 번역상 실수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솔 2:5 외의 다른 flagon들은 포도 과자라 하지도 않아서 일관성 문제가 있다. 필자의 의견은 5절의 flagon이란 단어는 건포도 과자가 아니라 포도주를 담는 병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솔 1:4에 등장한 "포도주"와 2:5의 "포도주"는 다른 것이 분명하며,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새포도주와 발효된 포도주의 차이점을 안다. 카톨릭 미사에서 사용하는 포도주는 발효된 술이며 "가짜 예수의 피"이다.
그들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않음을 우리의 원수들까지도 스스로 판단하는도다(신 32:31).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사탄 위에 세워진 게 아니다. 그러나 이방의 반석은 마귀 위에 세워졌다.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들에서 나온 것이라(신 32:32) 그래서 사제들은 어린 소년들을 성추행하는 것이다. 그들의 포도는 쓸개 포도니, 그 송이들은 쓰며 그들의 포도주는 용의 독이요, 독사들의 지독한 독이라(신 32:32-33).
주님께서 마신 포도주는 실제로 "포도 쥬스"이며 발효되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제부터 내가 너희와 함께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그 날까지 이 포도 열매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더라(마 26:29).
"새 것"이 무엇인가?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포도송이에 새 포도주가 보이면 누가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게 말라. 이는 복이 그 안에 있음이라.” 하는 것같이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들 모두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리라(사 65:8).
새 포도주는 포도에서 짠 즙을 바로 잔에 담은 것을 말한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창 40:9-11에 있다.
술 맡은 책임자가 자기 꿈을 요셉에게 이야기하였는데 말하기를 “보라, 내 꿈에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포도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는 것 같았는데 꽃이 피고, 그 포도송이에 익은 포도가 열렸더라.
파라오의 잔이 내 손에 있어, 내가 포도를 따서 파라오의 잔에다 즙을 짜서 그 잔을 파라오의 손에다 주었노라.” 하니,(창 40:9-11)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하신 일은 포도 한 송이를 취해서 즙을 짜서 잔에 담으시고 그 잔을 제자들에게 돌리신 것이다. 그 자신은 포도즙을 드시지 않았는데 주님은 앞으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 이전 같은 식으로 포도즙을 드실 때까지는 계속 드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성경대로 믿는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 때 발효된 포도주를 쓰지 않는다. 우리는 "포도 열매에서 난 것"을 쓴다.
솔 2:3-5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왕이 신부를 포도주 잔치를 벌이는 잔칫집으로 데려오셔서 3절에서 포도 송이에서 즙을 짜(3절: "그의 과일") 5절의 "담는 병들"(flagons)에 담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묘사란 것이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새 포도주"란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의 몸 안에 들어와 사시는 것을 뜻한다.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서 그의 열매를 내신다. 그 열매 중 첫번째는 "사랑"(4절: 내 위에 나부끼는 그의 깃발은 사랑이었도다)이다. 술로 채워지는 것과 대조적으로 성도는 "성령으로 채워진다"(엡 5:18). 성령께서는 믿는 자를 지탱시켜 주고(시 55:22) 지켜주신다(벧전 1:5). 그것이 "새포도주(건포도과자)로 힘을 돋우어준다"(5절)의 의미이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는데(요 14:16,26) 주의 말씀을 통해서(롬 15:4) 하신다. - "사과로 나를 위로해 주소서"(5절).
학자들이 5절을 공격할 때 그들은 이런 말로 주문을 시작한다: "불행히도 킹제임스 성경은 이 단어를 잘못 번역했다" "히브리 원문에 가라사대" "더 나은 번역은 이래야만 하는..." 당신이 1880년 이후로 번역된 어느 영어 성경을 보더라도 "flagons"의 자리에 "건포도, 혹은 건포도 과자"(cakes of raisins or raisins)가 들어가 있을 것이다. NKJV도 그렇게 해 놓았다.
flagons를 "건포도 케이크"나 포도 케이크로 흔히 말하는데 그래서 많은 영어 성경들이 5절에 그렇게 난외주를 단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히브리어에서 나왔다. 모든 현존 영어 사전들을 찾아보더라도 flagon은 "포도주나 다른 술을 마시는 병"으로 언급해 놓았다.
flagon의 히브리어 단어는 ashishah인데 그 뜻은 "누른 건포도로 만든 케이크"이다. 이 히브리 단어는 킹제임스 역자들에 의해 flagon(s)로 번역되었다. 영어 flagon의 또다른 히브리어 용례를 찾아보면 "nebel"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그 단어는 "병, 혹은 그릇"을 뜻하며 이사야 22:24에 사용되었다. 그 외에 flagon의 다른 용례들은 전부 히브리어 ashishah에 대응한다(삼하 6:19; 대상 16:3; 호 3:1).
삼하 6:19, 대상 16:3에서는 "건포도 과자"를 "포도주 한 병" 대신 집어 넣더라도 말은 된다. 그래서 거기 "포도주"(of wine)는 이탤릭체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호세아 3:1에는 "of wine"이 이탤릭체가 아니다. 호세아서의 "of wine"은 히브리어 본문의 일부이며 이것을 지워 버리기 위해 새 번역본들에서는 단어를 말도 없이 빼 버렸고, 대신 "이교도의"(pagan), 혹은 "신성시되는"(sacred)의 의미를 포함한 단어를 집어넣었는데 그런 의미는 히브리어 본문에 전혀 없다.
NKJV 호세아 3:1
Then the Lord said to me, “Go again, love a woman who is loved by a lover and is committing adultery, just like the love of the Lord for the children of Israel, who look to other gods and love the raisin cakes of the pagans.”
NKJV는 약간 더 솔직하게 "of the pagans"(이교도의)을 이탤릭체로 써서 당신이 그 단어가 원문의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Jay Green의 "히브리어-영어 행간 성경 구약"에 보면 "cakes of raisins of grapes"를 문자적으로 번역했다. 유대인들이 건포도(raisin)가 포도(grape)에서 나온다고 "중복 표현"할 만큼 멍청하다 말인가? raisin 자체가 건포도인데 of grapes가 붙을 이유가 없다.
모든 증거가 킹제임스 성경 본문이 틀렸다고 몰아붙이는 것 같이 보이는가? 나는 이와 비슷한 난관에 봉착했던 적이 있는데 그것은 창 37:3에 나온 "채색옷"(coat of many colors) 문제였다. 모든 성구사전, 주석서들, 성경 사전들이 그 단어를 "조각들을 이어붙인 옷"(coat of many pieces)이라 써 놓았다.
마침내 나는 펜을 내려놓고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이제 더 해 볼 것이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시고 학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후 어느 날 나는 내셔널지오그래픽지를 펴서 이집트에서 고고학자들이 어떤 발굴을 하는 현장 사진을 보았다. 카나안에서 온 사절들이 파라오를 접견하는 그림인데 파라오가 입고 있는 겉옷은 여러 천조각을 이어붙인 형태였다. 그 천조각들은 각기 다른 색으로 염색되어 있었다. 나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말하고는 곧장 펜을 들고 학자들을 질책하는 내용을 주석서에 쓸 수 있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나는 "학문"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물론 고등 교육을 신뢰하지는 않는다). 내가 대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서 성경을 판단하는 자들이다. 일부 KJV를 수호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들은 예외일 뿐이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렇지 않다.
히브리어 "ashishah"에 관해서, 유대 랍비들도 그 단어가 "건포도 케이크 혹은 건포도"로 번역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사무엘이라는 한 랍비는 호세아 3:1의 용례에서 볼때 건포도가 아니라 "(나무로 된) 포도주통"(cask of wine)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flagons"는 분명 개연성 있는 번역이다. 성령께서 인정하신 킹제임스 성경 단어가 히브리어 학자들의 권위보다 신뢰성 면에서 우월하다고 나는 믿는다. flagon은 성경에서 보면 크건 작건, 가죽이나 질그릇으로 되었든, 컵이나 피쳐 형태, 혹은 큰 나무통이든 간에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뜻한다. 특별히 솔로몬의 노래에서는 그 용기에 담는 것이 "새 포도주"인 것이다.
5절에서 신부는 새 포도주로 인해 힘을 돋우고자 청하고 있다. 물론 flagons 자체는 포도주가 아닌 그릇이지만 은유적으로 그 안에 담긴 음료를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1:25에서 바울은 주의 만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식후에도 이와 같이 잔을 가지고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나의 피로 된 새 언약이라. 이것을 행하여 너희가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고 하신 것이라(고전 11:25).
"너희가 마실 때마다", 무엇을 마시는가? 주께서는 "잔"을 가리켜 말씀하셨지만 실질적으로 마시는 것은 잔 속에 든 새 포도주이다. 잔은 상징적으로 그 안에 든 포도주를 뜻하는 말이다.
미사 의식에서 실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다고 주장하는 카톨릭 교도를 본다면 그를 이렇게 바로잡아 주라. 카톨릭 교도들은 "피"는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잔"은 왜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가? 일관성 있게 하려면 그들은 주조된 금속 컵을 씹어 먹어야 할 것이다.
5절, 사과로 나를 위로해 주소서.
영적인 적용은 이미 했으니 이제 사과에 대한 역사적 적용을 하도록 하자.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자라는 사과들은 "아로마 치료"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는 사과 향기가 "진정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으로 병이 났나이다.
그녀는 왕을 사랑하기 때문에 병이 난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로 인해 병이 난 것인데, 이를 "상사병"이라 부른다. 당신은 십대들의 "첫사랑"에서 그런 현상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참고 구절은 삼하 13:1-2이다.
그후의 일이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타말이더라. 다윗의 아들 암논이 그녀를 사랑하더라.
암논이 심히 고심하다가 그의 누이 타말로 인하여 병이 들었으나, 그녀가 처녀인지라,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행한다는 것이 어려운 줄로 생각하더라(삼하 13:1-2).
6절, 그의 왼손이 내 머리 아래 있고 그의 오른손이 나를 껴안는도다.
연인들의 일상적인 포옹이며 소설이나 영화에서 지겹도록 볼 수 있기에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7절,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의 암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1:5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한다. "노루들과 암사슴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사슴인데 노루는 가젤이며 "암사슴들"은 붉은 암사슴이다. 잠 5:18-19에서 네 젊은 날의 아내와 더불어 기뻐하라. 그녀로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게 하고 우아한 노루 같게 하라. 라고 말씀할 때 동일한 표현이 쓰였다.
9절로 잠시 가서 "나의 사랑하는 이(신랑)는 노루나 어린 사슴 같나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어린 사슴"(young hart)은 붉은 숫사슴을 뜻한다.
7절에서 교회인 신부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신랑과 신부를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예표적으로 말해, 교회는 이스라엘에게 주께서 스스로 깨시기 전까지 주를 깨우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교회시대인 지금, 주께서는 쉬고 계시거나 낮잠 주무시는 것처럼 성경에서 "상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그분은 전혀 주무시고 있지는 않다. 시 121:4에서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라. 라 말씀하기 때문에 그분이 실제 주무시는 것은 아니다. 대신 그분은 속죄 사역을 마치신 후 셋째 하늘에 앉아 계시며 자기 때가 되면 왕국을 세우기 위해 땅으로 오실 것이다(행 3:21; 히 10:12-13). 내려오실 때 그분은 마치 "잠에서 깬"(시 78:65) 남자처럼 보일 것이다.
그때에 주께서 잠에서 깬 자같이, 포도주로 인하여 외치는 용사같이 깨셨으니,
그가 그의 원수들을 뒤에서 치시고 영속하는 비방을 받게 하셨도다(시 78:65-66).
오 주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힘을 내소서. 옛날처럼 옛 세대처럼 깨소서. 라합을 자르시고 용을 상하게 하신 분이 주가 아니시니이까?(사 51:9)
이사야도 재림때 주께서 잠에서 깨시는 것 같이 일어나실 것이라 묘사했다.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시대에 "주무신다"고 말씀하는 의미는 지금 주께서 자신을 드러내어 일하지 않으신다, 즉 구약이나 사도시대의 초자연적 이적들을 쉬고 계시다는 뜻도 된다. 지금 시대에 주님께서는 세상 뒤에서 은밀히 섭리하시고 일하고 계시다. 그분은 환경과 사람들을 뒤에서 조정하시면서 뜻을 이루어가신다. 오순절파에서 말하는 "늦은 비" 같은 기적, 방언, 신유 같은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의 휴거가 발생하면(계 4:1) 그때 주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보좌로 가셔서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심판의 책을 취하신다(계 5:7). 그러면 지상에 엄청난 격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당신이 대단한 이적들을 보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말고 대환란을 통과하면 된다. 당신을 놀리려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불행히도 대환란에 남겨진 사람들이 볼 기적들은 "좋은 기적들"보다는 훨씬 많은 무서운 심판의 기적들일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이 이런 사실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는 것 보았는가?
시편 78:65 주석에서 쓴 적이 있지만 "나는 그분이 바(술집)를 쓸어버리러 오기 전에 그 장소를 속히 떠날 것이다" 대신 나는 쓸어버리시는 그분과 함께 내려올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속히 오시리라. 그런데 사람들이 정말로 그런 일들을 실감하는 때가 온다면 그들이 느끼기에 얼마나 끔찍하고 공포스럽겠는가? 막상 그때(대환란)가 되면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말은 더이상 웃기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로다!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도다.
2:9 나의 사랑하는 이는 노루나 어린 사슴 같나니, 보라, 그가 우리의 벽 뒤에 서서 창문으로 들여다보며 창살을 통해 몸을 내보이는도다.
2:10 나의 사랑하는 이가 내게 일러 말하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2:11 보라,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쳐 사라졌으며,
2:12 땅에는 꽃들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때가 왔도다. 산비둘기의 소리가 우리의 땅에서 들리는도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신부가 계속 말을 이어가는데 8절에서 단락구분이 된다. 방금 전 그녀는 유대인들에게 주를 깨우지 말라고 경고한 참이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깨우지 말란 것이다. 이제 신부는 주께서 "깨실 때" 유대인들이 아닌 신부인 교회가 어떤 변화를 겪는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이 구절들에서 재림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재림을 두 단계(교회의 휴거, 지상재림)로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적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몸을 하늘로 데려가기 위해 공중 재림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 (교회의) 휴거다. 두번째 단계는 정복자 왕으로 지상 재림하시는 것이다.
세상은 주의 "분노", "격노", 혹은 "질투의 불로 삼켜"지는 것(슾 3:8)에 대해 알아야 함에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들은 먹이(prey)가 될 것이고 주께서는 포식자(predator)가 되실 것이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진노 아래 있지 않으며(요 3:36) 우리를 데리러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있다. 주의 오심은 우리에게 위안이며(살전 4:18) 소망이다(딛 2:13).
비유하자면, 어떤 판사가 그날 재판에서 살인사건을 다루다가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판사의 아내와 아이들이 반갑게 맞이하는 것과 같다. 그 다음날 판사는 살인범에게 사형을 선고하려고 한다. 집에서 쉬는 판사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있어 법정에서 냉혹하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판결을 기다리는 살인범에게 있어 판사는 끔찍하게 무서운 사람이다.
8-13절 본문의 상황은 "지상 재림"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지고 적그리스도와 주의 대적들이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 아니다. 본문은 신부가 신랑의 부름을 받고 휴거되는 그 장면이다.
8절,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로다!"
이것이 우리가 기다리는 "신호"인데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신호로 알고 기다리지 않는다. 이스라엘에 성전이 재건되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부활한 로마 제국이 유럽에 세워지는 것을 보고자 하지도 않는다. 만일 그런 저런 일들이 휴거 이전에 일어난다면 우리는 휴거의 징조를 미리 간파할 수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우리가 기다리는 일들이 아니다.
우리는 휴거의 징조를 보려는 게 아니라 오직 "한 음성"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호령", "천사장의 음성", "하나님의 나팔소리"를 기다린다. 그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각자의 이름을 부르실 것인데(요 10:3) 또한 우리의 육신을 눈깜짝할 사이에 변화시키는 호령도 듣게 될 것이다(계 4:10, 고전 15:52). 우리는 "이리 올라오라"는 음성을 기다리고 있으며 위로 끌어올려줄 분을 기다리지 끌어내릴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는다.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도다.
이것은 분명 공중재림의 묘사이지 지상재림이 아니다. 지상재림하실 때 주님은 산들과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시지 않는다. 재림 때 그분은 싸우러 내려오신다(욜 2:1-2). 초자연적인 말을 탄 많은 군대를 대동하고 사람들을 죽이러 오시는 것이다(욜 2:3-5).
이 장면은 사랑에 빠진 신랑이 곧 신부를 만난다는 기쁨에 넘쳐 가볍게 뛰며 오는 것이지 살벌하게 무장하고 누군가를 죽이러 오는 게 아니다.
여기서 신랑은 누구와 동행하고 있지 않으며 홀로 신부를 데리러 오고 있다. 군대가 호위하고 오지 않는다.
더 실제적 의미에서, 산들과 작은 산들이란 언급은 주께서 지구 대기권의 낮은 부분으로 내려오신다는 말이다. 바울이 살전 4:17에 언급한 바에 따르면 주께서는 땅에 착지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구름 속에서" 그분을 만날 것이다.
9절, 나의 사랑하는 이는 노루나 어린 사슴 같나니,
신부는 두 마리 사슴이 빠른 속력으로 점프하고 달려가는 것을 묘사한다.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러 나타나는 산타 클로스는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있다. 그 사슴들은 하룻밤 안에 전세계 모든 아이들을 방문해야 한다. 세상은 성경을 믿거나 말거나 항상 모방한다. 주께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계 22:12)라 말씀하셨고 바울은 휴거가 "눈깜짝하는 순간에"(고전 15:52) 일어날 것으로 언급했다.
그가 우리의 벽 뒤에 서서 창문으로 들여다보며 창살을 통해 몸을 내보이는도다.
이 단락에서 과학자들이 궁금해 하는 "우주의 구조"가 드러난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에 대해 이해하기를 기도했다(엡 3:18).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세계와 분리되어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하늘과 그 밑의 세상은 격리되어 있다. 주께서 우주를 붙잡고 계시며(골 1:17) 심지어 우주를 옷처럼 입고 계시다(히 1:10-12) 해도 그분은 피조물 자체와는 구별되신다. 하나님의 본체는 우리의 피조세계로부터 떨어진 "벽 너머"에 거하고 계신다.
그 벽에는 "창문"과 "출입문"이 있는데 그 "창"을 통해서 주께서는 실제적 홍수나 영적 축복들을 내려보내실 수 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니,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와 내 집에 식량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의 창문들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부어 주지 않나 보라. 그것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장소가 없으리라(말 3:10).
"하늘의 창문들"에 대해 학자들은 그것은 상징적인 표현이라 하겠지만, 그렇다면 창 7:11을 보라.
노아의 생이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그 달 십칠일, 그 날에 모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렸으니,(창 7:11)
"하늘에 창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수십만명이 코웃음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창문을 "근본 교리"로 간주하시며 이것을 비웃는 사람을 그분이 죽이신다고 해서 놀라지 말라.
열왕기하 7장에서 실제로 하늘의 창을 비웃다가 죽은 사람이 있다.
왕의 조언자인 귀족 중 하나가 "보소서, 만일 주께서 하늘에 창문들을 내신들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말했기에 그는 다음날 사람들의 발에 밟혀 죽게 되었다.
내가 "근본주의자"라 자처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내가 "근본 교리들"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다 믿는다. 그러나 형제여, 성경에는 "근본 교리들"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네. 자네가 무슨 신조를 믿던간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네. 나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다. 그것은 "근본주의자"보다 더 포괄적인 말이다. "성경대로 믿는다"라는 것은 성경의 첫장부터 끝장까지 믿는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보존하셔서 영어가 모국어인 나에게 KJV를 주셨다.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 표명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나는 천체물리학자가 아니기에 "창문", "벽" 같은 것이 실제로 어떤 원리이고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성경이 이것들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줄 수 있다.
그는 북쪽을 빈 자리에 펼치시고 땅을 허공에 매다시는도다(욥 26:7).
"북쪽"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말한다.
이는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나 남쪽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시 75:6).
주께서 출발하시는 지점이 어디인가? 북쪽이다. 시 75:7에서는 "북쪽"이 들어갈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가 있다.
그는 물들을 그의 짙은 구름 속에 싸매시나 구름이 물들 밑에서 찢어지지 아니하는도다(욥 26:8).
창조과학협회는 이 물들이 보통의 비구름이라고 가르치지만 그렇지 않다. 9절을 보라.
그는 그의 보좌의 정면을 가리시고 그 위에 그의 구름을 펼치시는도다(욥 26:9).
욥 26:8,10의 구름은 주의 보좌 위에 펼쳐져 있기에 지상의 구름일 수가 없다. 이 구름은 하늘의 적운, 층운, 권운 같은 구름이 아니라 둘째, 셋째 하늘 사이의 구름이다.
바닷물이 마치 태에서 물이 터져 나온 것처럼 쏟아져 나왔을 때 누가 바다를 문들로 막았더냐?(욥 38:8)
욥 38:4-7에서는 "땅의 기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 단락은 창 1:2과 연결된다. 주께서 우주의 물들을 취하셔서 성운들과 은하들, 알파드라코니스, 펄사, 퀘이사를 지으셨다. 그 과정이 욥 38:9-11에 묘사된 대로이다.
물론 당신이 보기에 이 장면이 하나님께서 대서양이나 태평양을 휘저어 물결을 일으키는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구름"이나 "흑암"은 어쩔 셈인가? 지구상의 대양이 땅으로 넘치지 않게 하려고 감싸고 있는 짙은 흑암이나 구름이 존재하는가?
이것이 우리가 "깊음"에 대한 교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피라미드처럼 생겼으며 왜냐하면 피라미드만이 모든 건축물 가운데 4 면을 가졌기 때문이다(엡 3:18). 이 피라미드 구조물의 하부는 불못을 이룬다(사 14:15). 중간부가 우리가 우주 공간이라고 부르는 공간이다. 이것이 "단단하게 부어만든 하늘"(창 1:6-7)이라 불리는 공간으로 이 안에 태양, 달, 별들, 기타 등등이 있다. 이곳이 우리가 둘째 하늘이라고 부르고 외부 우주라고 부르기도 하는 곳이다. 우리가 있는 이 창공이 그 거대한 물층, 즉 지구상의 모든 대양들, 강, 호수, 샘을 목욕탕 속의 한방울 물로 여겨지게 하는 거대한 우주적 물덩어리를 둘로 나누고 있는 공간이다.
이 피라미드 구조물의 정상에는, 즉 북쪽에는 "하늘나라"가 있다. 피라미드의 "머릿돌"에 해당하는 장소인데 1달러 지폐 뒷면에 보면 피라미드의 머릿돌이 분리되어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머릿돌에는 "전시안"(모든 것을 보는 눈)이 있는데 이 상징이 바로 우주의 구조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는 눈"(시 5:3)이시며 그가 계신 머릿돌(셋째 하늘)은 우주에서 "떠 있다".
구름과 짙은 흑암으로 싸매진 물덩어리가 "셋째 하늘"과 우주를 나누고 있다. 나는 출애굽기 14:22의 "물이 그들에게 오른쪽과 왼쪽에서 벽이 되었더라."라는 표현에서 그 물은 실제로 돌처럼 단단한 벽을 이루었으리라 생각한다.
물이 돌로 된 것처럼 감추어졌고 깊음의 표면은 얼어 있도다(욥 38:30).
보좌 앞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그 보좌 가운데와 그 보좌 주위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한 네 짐승이 있더라(계 4:6).
물이 단단하게 얼어서 벽이 된 그 물벽에는 창문과 문들이 있으며 빗장도 있다(욥 38:10). 계 4:1에서 요한이 보았던 "하늘의 문"은 그 문이다.
물론 주님께서는 그 문을 자신으로 묘사하시면서 "나는 양들의 문이라"고 하셨다(요 10:7). 그렇다 해서 영적인 진리가 물리적인 진리를 뒤집어 엎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는 문이 있고 그것은 꼭대기가 얼어있는 거대한 물층을 통해 셋째 하늘로 통하는 문이다.
새예루살렘을 살펴보면 그곳에는 열두 대문이 있는데(계 21장) 그 문들의 이름은 느헤미야서에 밝혀져 있다. 땅의 예루살렘 문들이 하늘의 문들, 창문들과 동일한지는 모르지만 만일 그렇다면 하늘의 문들은 용도별로 구분되어 있을 것이다.
주께서 휴거를 위해 내려오실 때 통과하는 문은 "양 문"(요 10:3)이 될 것이며, 신부를 데리고 다시 올라가실 때는 "물고기 문"(마 4:19)을 통과하실 것이다. 지상재림 시에는 하늘의 군대와 함께 "말 문"을 통과하실 것이며 큰 백보좌 심판 때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과 마귀들을 모아서 "똥문"을 통해 불못으로 던지실 것이다.
"휴거"의 의미는 단지 "낚아채 가다"만 있는 게 아니다.
그 복된 소망, 곧 위대한 하나님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음이니,(딛 2:13)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어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며 또 나뿐만 아니라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이라(딤후 4:8).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3:2).
바울은 "지금은 우리가 유리를 통해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내가 알려진 것처럼 알게 되리라."(고전 13:12) 라 말씀했다.
솔 2:9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창살을 통해 몸을 내보이는도다."라 했으므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실제 휴거되기 직전에 주님께서 하늘의 창들 중 하나(블라인드가 쳐진 창)를 통해 어떤 사람이 밖을 쳐다보듯이 내다 보실 것이며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어느 정도는 추측이기 때문에, 또 더 분명한 증거가 다른 구절들에 없기 때문에 감안하기 바란다.
휴거의 순서를 보자면, 첫째로 당신이 듣게 되는 것은 "나팔 소리"이다. 그 소리는 이어지는 나팔소리의 시작이다. 민수기에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이동하는 장면을 보면 주께서 모세에게 은나팔들을 만들라 명하신다.
“은으로 나팔 두 개를 만들되, 한 덩어리를 가지고 만들지니, 집회를 소집할 때와 진영을 이동시킬 때 사용할지니라(민 10:2).
그 나팔소리를 듣고 온 이스라엘 회중이 성막 문 앞으로 집결했다(민 10:3). 그 다음 나팔을 불면 그때부터 회중이 여행을 시작한다.
너희가 경고 나팔을 불면 동쪽에 있는 진영들이 나아갈 것이요,
너희가 두 번째 경고 나팔을 불면 남쪽에 있는 진영들이 이동할 것이며, 그들은 그들의 이동을 위해서 경고 나팔을 불지니라(민 10:5-6).
나팔을 두 번 불면 진영이 나가기 시작한다. 휴거받을 두 부류의 성도들이 있다. 첫째는 죽은 그리스도인들이다. 10:5은 말씀하기를 "동쪽"이 먼저 움직인다 한다. 보통 무덤들은 사자의 몸이 동쪽을 쳐다보게 조성된다. 이미 말한대로 세상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항상 성경을 모방한다.
휴거받는 둘째 그룹은 산 성도들이다. 그들은 남쪽에서 이동하기 시작한다. 주님은 북쪽에서 오시므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첫째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고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 동시에 주께서 하늘의 창문을 통해 여러분을 보실 것이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나팔 소리에 놀라 당신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거인의 얼굴같은 예수님의 얼굴이 당신을 곧장 내려다 보고 있다면? 놀라서 넘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생각해 보라. 주께서 바다를 밟고 제자들에게 걸어오실 때(마 14:25-27) 제자들은 놀라서 사색이 되었었다. 갈릴리 바다의 그 장면은 휴거의 예표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오시자 베드로가 주와 함께 물 위를 산책하기를 청했던 것 같이 우리도 대기를 딛고 가볍게 뛰어 올라서 곧장 주님께 올라갈 것이다.
물론 나는 주께서 공중에 얼굴을 비치시는 때와 살아있는 자들의 휴거 사건 간의 시차가 얼마나 날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감정을 표출할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미친 사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뛸 것이다.
만일 어떤 크리스챤이 달리는 차 안에 아내와 함께 타고 가고 있는데 그들이 첫째 나팔을 듣는다 가정해 보자. 그들은 어리둥절해서 서로를 쳐다보다가 "당신도 들었어?"라고 서로에게 동시에 물어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남편은 차창 밖을 둘러보다가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얼굴을 본다. 그때 그 사람 안에 계신 성령께서 "저 분이 너를 구원하신, 네가 사랑하는 그 주님이시다"(벧전 1:8)라 알려주신다.
갑자기 그들은 벼락맞은 듯이 놀라며 깨닫는다. "그래 이거야. 휴거야. 그분이 이제 우리를 데려가시겠군"
그 순간 주요 도로는 차를 멈추고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는 수많은 사람들, 기뻐 뛰는 사람들 때문에 교통이 멎어 버린다. 사람들이 차량 행렬 속을 이리저리 뛰면서 미친 사람처럼 "야호, 나 구원받았어" "나는 구원받았어" "주께서 오셨어"라 외쳐댈 것이다.
그 와중에 상황을 지켜보는 모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미친 종교쟁이들", "성경에 미쳐버린 녀석들"이라고 욕하고 저주할 것이다. 쟈넷 레노(미국 법무장관)는 그런 미친 크리스챤들을 잡아 테러리스트 딱지를 붙여 감옥에 넣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두번째 나팔 소리가 울려퍼진다.
계 4:1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 일 후에 내가 쳐다보니, 보라, 하늘에 한 문이 열려 있는데 내가 들은 첫 음성은 나팔 소리 같았으며,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리 올라오라. 내가 이후에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네게 보여 주리라.” 하더라(계 4:1).
이 음성은 나팔 소리와 같은 음성인데 요한복음 12장에서 사람들이 들었던 소리와 같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그 나팔소리들이 차례로 울려퍼질 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거대한 천둥소리로 들릴 것이며 그 소리가 너무나 커서 3차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거듭난 크리스챤들만이 천둥소리가 아닌 구체적인 음성으로 듣게 될 것이다.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무덤들 속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는 저주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휴거가 일어나기 단 몇시간 전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해도(야이로의 딸처럼), 매장하기 위해 염하는 중이라 해도(나인성 과부의 아들처럼), 혹은 좀더 시간이 경과해서 몸이 부패되는 중이라 해도(나사로처럼) 그들은 모두 주의 음성을 듣고 무덤 밖으로 나오게 된다.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고전 15:52) 언젠가 제임스 맥긴리 목사에게 어느 여인이 와서 물었다. "맥긴리 형제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데 왜 휴거 때는 죽은 자들이 먼저 일으켜지지요?"
맥긴리는 느헤미야처럼 짧게 기도하고 나서 "아마도, 죽은 자들은 6피트만큼 더 밑에 있으니까 주님께서 그들의 스타팅 시점을 좀더 앞당겨 주신 것이겠지요. 그들이 시차를 두고 출발하기에 우리는 하늘에서 동시에 만나게 되는 것이죠"라 대답했다.
재치있는 대답이지만 물론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다. 죽은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참고 구절인 마 27:52-53을 찾아보자.
무덤들이 열리며 잠들었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으며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더라(마 2:52-53).
물론 나는 이 부분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께서 "죽은 크리스챤들의 부활"을 몇 시간 정도 세상에 보여주실 수도 있다. 그들은 무덤에서 몸이 일으켜지고 나서 돌아다니며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최후의 간증"을 남길 것이다. 지난달에 죽은 크리스챤 할머니가 구원받지 못한 어린 손자의 집 앞에 나타나서 "얘야, 너무 늦기 전에 예수님을 믿지 않으련?" 하게 된다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나서 마지막 나팔이 울려퍼지는데 이것이 살아있는 성도들이 휴거되는 신호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 소리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
죽은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우리도 각자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을 듣게 된다(요 10:3). 그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나는 "피터 스터지 럭크만, 이리 올라오라!"는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러면, 형제들이여, 이제 간다.
나는 이렇게 떠날 준비를 하고 산다. "곧 떠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빨리 오면 더 좋다.
이제 우리는 바울 서신서에서 언급되지 않은 "휴거의 시기(대략적인)"에 대한 교리를 솔로몬의 노래에서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그 때와 시기는 알 수 없다고 성도들에게 말했지만 솔로몬은 그에 대해 썼다(살전 5:1).
11절, 보라,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쳐 사라졌으며,
"겨울이 지났고", 따라서 12월, 1월, 혹은 2월에 대해서는 잊어라. "비도 그쳤고", 4월도 건너뛰자. 봄비가 내리는 4월은 아니다.
12절, 땅에는 꽃들이 피고
4월에 비가 내리고 5월에는 꽃이 핀다. 5월을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다. 13절은 보다 확실하다.
13절,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이는 마 24:32의 무화과나무에 대한 비유를 연상케 한다. 휴거의 시기는 늦은 봄, 초여름이 시작될 무렵이 될 것이다. 그 시기는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가 될 것이다.
그 시기는 이스라엘의 유월절과 겹치는데 따라서 나팔절은 교회의 휴거와는 무관한 절기이다. 나팔절은 환란성도들의 휴거와 관련이 있다. 나팔절 후 한주일 후 장막절과 속죄일이 오는데 장막절은 지상 재림의 예표다.
교회의 휴거는 오순절 때 있게 되는 것이다. 교회가 시작된 탄생 기점과 같은 시기에 교회는 휴거될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기에 배교한 근본주의자들이 서로 속삭이는 것을 안다. "오, 럭크만이 또 시작했군. 그가 휴거의 날짜를 정했어. 역시 이단이 맞군."
나는 내 생애에 한번도 휴거의 날짜를 결코 못박지 않았다. 나는 성경적 추론을 통해서 그 시기를 추정했을 뿐이다.
당신은 "당신 그러다가 또 틀리면 어떡하려고 합니까?" 라 말할지 모른다.
들으라, 나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모든 면에서 철저히 다 맞추지 못한다고 인정하고 그래서 내 학생들 앞에 부끄럽지 않다. 나는 주께서 오셔서 나를 영광스런 고향집으로 데려가실 것을 믿는다. 그분이 만일 겨울이나 여름, 가을을 선택하신다 해도 나는 환영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내가 잘못 가르쳤던 데 대해서 다소 책망받을 것이다.
주께서 내게 물으시기를 "럭크만, 왜 너는 내 성도들에게 내가 봄에 올 것이라고 가르쳤지?" 하신다면 나는 "주여, 저는 솔로몬의 노래 2:8-13을 읽었고 그것은 휴거를 분명히 말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믿었어야 되지요?"라 대답할 것이다.
"그래, 너는 틀렸어" 주께서 말씀하시길 "그에 대한 벌로 너는 이 모든 선하고 경건한 학자님들(솔로몬의 노래가 목자, 목자 처녀, 솔로몬왕의 삼각 연애담이라 가르친)을 각 사람당 1천년씩 섬겨야 될 거야. 그들이 뭘 시키든 너는 해야 해. 네가 낡은 킹제임스 성경만 어리석게 고수할 때 그들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 "히브리어 원문"에 있다고 믿었어. 이에 대해 할말 있는가?"
"좋습니다. 주님. 완벽히 알았습니다. 이제 그렇게 하겠습니다. 히브리어에 모든 영광을 돌리라!"
내가 틀렸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가 틀렸다면 책임지겠다. 그러나 학자들이 틀렸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의심을 불어넣었고,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고, 말씀을 변개하게 만들고, 또 믿지 않게 만들었다면 그들은 그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나는 학자들이 뭐라고 중얼거리건 간에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 그대로를 고수할 것이다.
12절의 "산비둘기"(turtle)는 예레미야 8:7의 상황과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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