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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는 한국 최대 최고의 시인이다. 시인 고은(高銀)이 아직 미당의 시 그늘에 푹 파뭋혀 있을 때 그를 가리켜서 말한 '그는 또 하나의 정부(政府)'라는 수식어가 크게 과장된 말이 아닐 정도로, 미당의 시인된 이력과 그의 작품은 이미 하나의 '고전'이자 살아 있는 '문학사'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그의 시 <국화 옆에서>는 줄줄 외면서도, 또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팔 할이 바람'이라는 <자화상>의 첫 구절은 곧잘 인용하면서도, 그가 일제 말기에 그 눈부신 시적 재능을 일제에 대한 찬양과 황국신민화 정책의 선전에 기꺼이 쏟아부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또한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을 것을 강권하고, 일본 군대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종군기사를 썼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더러 있었다고 해도, 해방 이후에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이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고, 또 미당이 지금 누리고 있는 문단적 지위와 업적의 광휘, 그리고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수많은 후배와 제자들의 엄호에 가리어 미처 제대로 드러날 기회가 없었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에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서정주의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부분
이 시는 미당이 1944년 12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발표한 그의 대표적인 친일시다.
이른바 '자살 특공대'로 알려진 ---일제는 그것에다가 옥쇄(玉碎:공명, 충절을 위해 깨끗이 죽음)
라는 이름을 붙여 미화했지만---무모하기 짝이 없는 자살 놀음을 숭고한 애국행위로 한껏 찬양하고 있는 시다.
미당은 1933년 시<그 어머니의 부탁>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다 알다시피 그는 등단 초기에 <자화상><화사><문둥이>같은 개성있는 시들을 발표해 문단 일각의 주목을 받기도 하고, 동인지 '시인부락'{동인으로 김동리(金東里),김달진(金達鎭),오장환(吳章煥) 등이 참가}을 주재하는 등 비교적 활발한 시단 활동을 펼치게 된다.
그러던 그가 친일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는 것은 1942년 7월 평론[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다츠시로 시즈오'이라는 창씨명으로 [매일신보]에 발표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는 최재서(崔載瑞)의 주선으로 '인문사'에 입사해 친일 어용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일을 맡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작품들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1942년부터 1944년 사이에 그가 집중적으로 발표한 친일 작품의 목록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시의 이야기-국민 시가에 대하여(1942,평론)><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평론)><인보(隣保)의 정신(1943,수필)><스무 살 된 벗에게(1943,수필)><항공일에 (1943,일본어시)><최체부의 군속 지망(1943,소설)><헌시(獻詩1943,시)><보도행(1943,수필)><무제(1944,시)><오장 마쓰이 송가(1944,시)>.
미당의 당시 문단 지위나 연배로 보아 이것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상당히 많은 양이다.
이 가운데 수필인<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와 <수므 살 된 벗에게>,그리고 단편 소설인<최체부의 군속 지망>,시<헌시>등은 학병 지원을 권유하거나 징병의 정당화 내지는 신성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친일 작품들이고,그 외의 작품들도 대개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의 정책에 동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거나 태평양전쟁을 일본인들의 표현대로 성전(聖戰)으로 미화한 작품들이다.
미당은 또 1943년 10월 18일부터 엿새 동안 일본군 경성사단이 김제 평야에서 벌이는 추계 훈련에 평론가 최재서, 일본인 히라누마등과 함께 종군해 그 훈련 참관기를 쓴 [보도행]이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훈련 마지막 날, 이 훈련을 견학하기 위해 나온(입영을 앞둔)조선의 스무 살짜리 청년 수십 명과 미당 일행이 벌이는 수작은 차라리 서글픈 심정이 들 만큼 한심한 장면이다. 특히 미당의 몇 가지 미덕 가운데 그래도 높이 사주고 싶은, 우리 토박이 말을 빼어난 시어(詩語)로 빚어 내는 그 재주를 떠올리면 그 서글픔은 더욱 배가된다.
최재서 씨가 먼저 우리들의 신분을 간단히 소개한 후에
"이 중에 국어(일본어를 가리킴)를 모르는 이는 없겠지요?"
하고 동석한 교관에게 물으니
"없습니다."
하는 교관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부터 그들은 연방 빙글빙글 합니다.
지금 세상에 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하는 눈치입니다.
"그래, 명년에는 여러분이 모두 다 병대로서 입영을 하게 되는데 그 감상이나 희망을 말해 주시오 병정이 될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어떤지?"
최씨가 이번엔 그들을 향해 물으니, 그 중에 한 소년은 참으로 유창한 국어로써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열다섯 살 때부터 용산의 어느 내지인 상점에서 일을 보고 있다가 금년 봄에사 고향으로 왔습니다. 용산에 내 일터가 있던 관계로 나는 늘 병정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고는 참 씩씩하다,나도 한 번 저렇게 되어 봤으면 쓰겠다 하고 늘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던 만큼 우리도 군인이 된다는 기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너무 기뻐서 뛰었습니다. 지금의 감상은......감상은, 그저 하루라도 빨리 입영해서 나라를 위해 한몸을 바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형. 이것은 결코 제 문장이 아닙니다. 소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안정되어 있는 어조와 능란한 국어에는 뭐라고 한마디 물으려 했던 나 자신이 주저될 정도였습니다{서정주'보도행','조광',1943년,12월호(여기서는 실천문학사의 <친일문학작품선집>2에서 재인용함}.
해방이 되자 미당은 문단에도 몰아닥친 이념과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서 주저없이 우익쪽을 선택해 그것도 이승만 노선에 충실한 쪽으로 선회한다. 이미 해방 직후부터 활발한 조직 활동과 문예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던 좌익쪽에 비해 여러 가지로 열세에 놓여 있던 우익 문학 진영은, 그에 맞서기 위해 1946년 4월 조직적 투쟁의 전위 부대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이하 청문협)'를 결성한다.
미당은 이 조직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시분과 회장을 맡게 된다.'청문협'의 강연 중에 한 구절을 보면 '일체의 공식적 예속적 경향을 배격하고 진정한 문학 정신을 옹호함'이란 대목이 있지만, 실제로 이 무렵 '청문협'에 소속된 문인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우익 진영의 각종 정치 단체와 사회 단체, 문화 기구와 청년 단체 들에 기반을 두고 활발한 정치 공작을 하고 있었다.
'청문협'은 어떤 단체였는가. 그 간부 중의 한 사람이었던 곽종원(郭鐘元)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청문협'은 발족한 지 불과 3년 반여 만에 발전적인 해산을 하고 말았지마는, 그 첫 출발부터 해산하는 그날까지, 순전히 투쟁 단체로 지속되고 있었다. 공산주의 이론을 분쇄하고, 또 공산주의 문학 이론을 타도하는가 하면, 저들의 문학 단체를 격파하는 데 또한 과감했던 것이다. 지금 새삼스럽게 감개무량함을 느낄 따름이다.(<조선청년문학가협회>.[해방문학 20년],145쪽).
미당은 이 '청문협'의 시분과 회장을 맞고 있다가 정부 수립과 함께, 이 단체가 확대재편된 '한국 문학가 협회(1948)'에서도 시가 분과 위원장을 맡는다. 그가 이승만의 전기 집필을 담당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정치적 행보와 결코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미당은 1946년 최재서와 함께 부산의 '남조선대학교(지금의 동아대학교 전신)'에 강사로 내려가 있다가, 이듬해 [민중일보]사장이자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이던 윤보선의 주선으로 이승만의 전기 집필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온다. 당신 [민중일보]는 그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했던 김동리의 회고를 빌자면, 자신들 스스로 '돈암장 신문'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이승만 개인의 선전과 그를 위한 여론 형성의 창구 역할을 했던 신문이었다(돈암장은 당시 이승만이 묵고 있던 저택). 당시 국내에서 활약하던 어느 정치가보다도 조직이나 정치적 배경에서 열세에 놓여 있던 이승만과 그의 추종 세력으로서는 이승만의 영향력을 더 널리 대중적으로 확산시킬 필요가 있었고, 전기 집필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었음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미당은 나중에 이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나 그(이승만)와의 반 해쯤의 접촉은 내게는 은근히 큰 힘이 되었다. 늘 짓눌리면서도 끈질기게 뚫고 나온 민족혼의 상징을 그에게서 가까이 느끼고, 일정 말기 한때의 엉터리였던 내 오판을 대조해 보고, 다시 살 미련과 용기를 내 속에 일으키는 데에 아주 큰 힘이 되었다.
(서정주 문학전집 3,264쪽).
당초 [민중일보]에 연재하기로 했던 이 전기는 우여곡절 끝에 1949년 10월 '삼팔사(三八社)'에서 <이승만 박사전>이라는 제목의 전작으로 출간된다. 그런데 꼬박 2년의 공력을 들인 이 전기는 출간되자마자 이승만의 지시로 발매 금지 처분을 당한다. 그 이유는, 책 속에 등장하는 이승만 집안의 어른들에게 경칭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사실 여부는 제쳐놓고라도, 이미 이 무렵에는 정부가 수립되어 확고한 정권을 쥐게 된 이승만으로서는, 그런 하찮은 이유 때문에 발매 금지 처분을 내릴 정도로 전기 출간이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을 것이다.
이 노회한 정치가를 향한 미당의 짝사랑은 그렇게 무너져 내린 셈인데, 이쯤되면 정치가와의 신의나 관계를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볼법도 한 일이건만, 미당은 그렇지를 못했다. 특히 그가 5공화국 때 보여 준 여러 행적은 그를 따르던 문인들조차 등을 돌리게 만들 만큼 어설픈 것이었다. 정치가나 권력자에 대한 그의 친여성(親與性)은 딱히 시인된 천품으로서의 천진난만 함으로 설명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너무 많은 것이다.
미당은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행보에 힘입어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 자리에 앉게 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당은 문총 구국대 결성에 앞장서서 후방의 선무 활동에 박차를 가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예술원 회원,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문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관변 문화단체의 중핵 역할을 맡아 이른바 '순수문학'의 성곽을 철옹성처럼 지키는 역할에 주저함없이 나선다.
미당이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조선 백자니 학이니 구름이니 꽃을 벗삼을 때는 그의 시적 미덕이 그런대로 지켜지지만, 이미 일제 말에 경험했던 그 정세에 대한 오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현실 문제에 달려들기만 하면 그는 거의 예외없이 잘못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는 문학가는 현실에 초연해 '영원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면서도, 민감한 문제가 있으면 언제나 정권의 편에 서서 충실히 그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어서, 그 '영원성'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이런 일이 가장 극심하게 나타났던 경우가 바로 1980년대였다.
1980년대는 그 초입에 '광주민중항쟁'이 있었고, 그 피어린 민중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18년간의 지긋지긋한 박정희 군사 독재에 이어 또다시 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작가와 예술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러한 불의의 현실에 맞서 싸웠다. 그 치열한 문학 운동이 이른바 '민중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세간에 퍼지게 되었던 것인데, 미당은 그 '민중 문학'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게 대두되던 1986년에 [문학정신]이란 잡지를 만들어 그 발행인이 된다. 이 잡지가 창간된 자세한 배경과 연유는 알 길이 없으나, 당시 큰 힘을 지니고 뻗어나가던 민중 문학의 기세에 맞서 보수 우익 진영의 목소리를 회복하려는 일단의 시도임은 창간호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문학정신]은 그 창간호에 '문학자 50인의 목소리'라 하여 민중 문학을 일제히 비판하는 글을 특집으로 싣는가 하면, 이 잡지가 1989년 발행인이 바뀌고 잡지의 편집진과 그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기 전까지 줄곧 미당이 도맡아 쓰던 그 '권두언'속에서 민중 문학에 대한 형언키 어려운 비난과 험담을 늘어놓게 된다.
그 몇 구절을 옮겨 보자.
민족이나 인류의 역사 진행 속에서 한 사람의 문학자가 어떤 사관(史觀)을 가지고 작품을 쓰고 비평을 해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특히 오늘날의 우리 한국 문단의 현상 속에서는 중요한 일로만 보인다....사관의 유형가운데서 아무래도 재고삼고(再考三考)를 요하는 문젯거리는 그 사회혁명파적 사관이라고 보이는데, 이것이 점점 더 파급되어 그 수를 늘여갈 경우에 올 하기(下記)의 두 가지 효과에 대해 나는 문학 외적인 입장에서까지도 심한 우려를 여기 표명해 두지 않을 수 없다.
그 두 가지 염려되는 효과의 첫째는 아직도 철이 덜 든 학생들이나 공장 근로자의 군중 심리를 선동하여 '민주 민족 민중은 아시안 게임도 망국 아시안 게임이라고 몰고 우방 미국까지도 따돌리고...때려 부수자. 돌이다. 화염병이다. 막 던져라!'의 파괴의 편이 되어, 유사이래의 새 발전의 여러 계기들이 눈앞에 마련되어 와 있는 민족사적 호운(好運)의 이 시점을 위태롭게까지 하는 데 일조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것이요, 그 둘째는 (이것이 더 큰 염려이지만) 그런 일조의 힘이라는 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북한 김일성 일파의 한반도 적화 통일 야욕을 고무하여 제2의 6.25의 참변을 이 민족에 다시 가져 오는 촉진제가 되면 어찌 하겠느냐 하는 것이 그것이다([문학자의 사관],[문학정신], 창간호, 권두언).
먼저 문학인의 입장에서보다도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의 정치적 입장에서 근년 우리 나라 문단 일각에서 문제되어 오고 있는 그 민중 문학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나 같은 연배의 사람의 사적 식견(史的 識見)으로는 이 민중이란 말은 말하자면 사회주의적 무산 계급 혁명을 이 나라에서 달성하여 공산주의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던 말로 알고 있는데 근년 우리 나라 문단 일각에서 써오고 있는 이 말의 뜻이 그것과 다른 것이라면 여기에 대한 해명은 반드시 진실하고 구체적으로 있어야 할 것으로 안다.만일에 이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면 38선 이북에 김일성의 공산주의 체제의 딴전을 두고 있는 우리 자유 민주주의 국민들로서는 더 이상 좌시만 하고 있기는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민중 문학 재고],[문학정신],1987년 1월호, 권두언).
위의 권두언의 내용은 시인의 말이라기보다는 공안 당국의 서슬 퍼른 검사의 엄포와 같은 인상을 풍긴다. '6월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우리 현대사 민주화 운동의 한 페이지를 찬란하게 수놓은 바 있는 1987년 초여름의 그 시점에, 한국문인협회는 전두환의 '4,13호헌조치'가 위대한 구국의 결단이라고 지지하는 성명을 내서 그 관제 어용 단체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어 양식있는 국민들의 분노를 산바 있지만, 바로 그 초여름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온 나라가 독재 정권의 음모에 저항해 싸울 때, 이 노시인은 다음과 같이 준엄하게 그것을 꾸짖고 있었다.
우리 겨레의 이 역사적 현시점에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노력해야 할 일은 각자 자기가 해온 전공의 일들을 각자가 놓인 그 자리에서 성실히 침묵 속에 꾸준히 이행하여 이 결과의 합계로서 이 민족의 흥융(興隆)을 가져오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일은 접어 두고 전연 불필요한 자유 과잉의 풍조 속에 정권 탈취의 야망의 발산만 음으로 양으로 왼갖 꾀와 폭력까지 다하여 전개하고 있는 식자라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으니 웃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거슬리는 꼴이 아닐 수 없다. '이 사람들 속셈은 베트남의 말로와 같이 이 나라를 새빨갛게 하려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도 안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말씀이 아니라 누구나 이목구비와 건전한 마음 가진 사람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뚜렷한 사실로, 우리 나라는 지금 유사 이래 처음으로 세계 경제 속의 흑자 생산 제2연도를 통과하고 있고, 또 여러모로 일대 약진의 계기가 될 게 분명한 세계 올림픽 개최 1년 전의 바쁜 준비기에 처해 있다. 전 국민의 획기적인 합심 노력만이 요청되는 이 중차대한 역사적인 시점에서 왜 무슨 바람으로 등 돌리고 뒤돌아서서 딴전을 보며 힐난과 불화 조성과 혼란과 파괴만 일삼고 있는지 참으로 이해해 줄 수 없는 일이다.
문학자들이란 특히 민족과 인류의 사회 현상 속에 간절하게 살면서도 그것들이 주는 의미와 느낌을 선택하고 또 선택하여 여기 역사적 영원성의 가치까지를 부여해야 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야 하는 것인데, 정말 신중해야 될 줄로 안다([문학자의 사관],[문학정신], 1987년 7월호, 권두언).
이 글에서, 저 일제 말기에, 천황폐하의 황은을 배신하고 대동아공영의 위업에 찬물을 끼얹으며, 조선 독립과 같은 가당찮은 꿈이나 꾼다고 동족을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매도하던 친일 인사의 논조와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이 필자 혼자만의 헛된 상상력의 발동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정말 신중해야 했던 것은 정작 그가 아니었을까.
미당은 다른 친일 문학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친일 경력을 비교적 여러 차례에 걸쳐 밝혀온 바가 있다. 애써 감추고 숨기려는 친일 인사들이 훨씬 많은 사실에 견주어 그 솔직함만은 높이 사줄 만한 것이다. 그는 1972년에 나온 <<서정주 문학전집>>의 <부끄러운 이야기>에서 친일 경력을 밝혔으며, 1992년 1월 잡지 [시와 시학]의 대담에서도 솔직히 털어 놓았고, 최근에는 [신동아] 1992년 4월호에서 [일정 말기와 나의 친일시]라는 글에서 당시에 시비가 일고 있던 그의 친일 경력을 또 한 번 시인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친일행위를 변명하기 위해 기묘한 상황론에다가 죄없는 조선 사람 전부를 공범(?)으로 옭아넣어 얼토당토 않은 합리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논리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자전적 담시집 <<팔 할이 바람>>속에 있는 <종천순일파?>라는 시에서다.
그러나 이 무렵의 나를'친일파'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있다.
'친하다'는 것은
사타구니와 사타구니가 서로 친하 듯하는
뭐 그런 것도 있어야만 할 것인데
내게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으니 말씀이다.
'부일파(附日派)'란 말도 있긴 하지만
거기에도 나는 해당되지 않는 걸로 안다.
일본에 바짝 다붙어 사는 걸로 이익을 노리자면
끈적끈적 잘 다붙는 무얼 가졌어야 했을 것인데
나는 내가 해준 일이 싼 월급을 받은 외에
그런 끈끈한 걸로 다붙어 보려고 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 그저 다만,
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종천친일파(從天順日派)'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이때에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다수 동포 속의 또 다수는
아마도 나와 의견이 같으실 듯하다.
친일하게 된 연유에 대해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는 미당의 고백은 그 솔직함과, 또 솔직함 뒤에 놓인 그 우매함 덕에 이제 제법 많이 알려진 말이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일제가 1945년 8월에 패망하지 않았으면 그의 친일행위는 더 연장되었을 것이란 말과 똑같다. 열 발짝을 양보해 그의 말을 다 받아들인다 해도, 그 일제 말의 참혹한 상황에서 설움을 곱씹으며 묵묵히 버텨낸 수많은 우리 민족의 선남선녀와, 징병 가라, 학병 지원해라, 당신 아들 지원병 보내라고 떠들고, 가미가제(특공대)의 자살 놀음을 숭고한 애국 행위로 본받으라 소리 높여 노래하고, 혈서로 군속 지원을 하는 젊은이를 미화시키고, 일본 군대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종군 기사를 쓴 그가, 대체 어떻게 동일시 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 행위에 감히 '하늘 뜻에 따라(從天)'라는 변명이 붙을 수 있는가. 겉으로 드러난 말뜻의 꼬리를 잡아 시비를 따질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친일이 하늘 뜻에 따른 것이었다면 당시에 혹독한 탄압을 무릅쓰고 나라 안팎에서 항일 운동을 한 애국 지사들은 '하늘 뜻을 거스른 사람'들이란 말인가.
시대의 오욕을 참고 견뎌내는 일과, 자의든 타의든 불의의 압력에 굴복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친일행위에 대한 미당의 반성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일제의 존재가 불의인 줄 몰랐거나, 불의인 줄 알면서도 그 힘이 너무 강하고 오래 지속될 것 같아 굴복하고 말았던 사실, 그것 자체에 국한되었어야 한다.
1980년대 중반에 미당이 민중 문학자들을 향해 그토록 강조했던 문학자가 지녀야 할 신중함과 글쓰기의 엄중함은, 거꾸로 그의 친일행위와 해방 이후에 그가 보여 준 체제 순응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숱한 발언과 행적을 향한 경구(警句)가 되어야 도리에 옳을 것이다.
미당은 여전히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가급의 시인이며, 그애동시의 보유 숫자로도 으뜸가는 큰 시인이다. 이 점은 아무도 부인 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의 언행과 정치적 행보는 그 큰 사랑에 견주면 실망스러운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물론 그의 친일과 해방 이후의 활동이 우리 시문학에 남긴 그의 큰 발자취와 성과를 완전히 부정하는 조건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향력과 명성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용기있고 진실한 반성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이 글이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 참된 미당의 시인됨을 밝히기에는 처음부터 '당랑거철(螳螂拒轍)'의 형국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역사의 엄중함을 신뢰한다면, 그의 시와 시인됨이 온전히 하나로 묶여, 덜고 보탬이 없이 객관적으로 조명받을 때가 반드시 있으리라고 믿는다.
* 당랑거철(螳螂拒轍) 사마귀가 수레를 막는다는 말로, 자기 분수를 모르고 상대가 되지 않는
사람이나 사물과 대적한다는 뜻.
- 한수영(문학평론가) -
출처 :Lets go Lib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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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광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