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뺑이는 쳐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고 있다.
초급대학을 졸업하든 1970년 봄, 나는 졸업을 하는데 여자 친구는 간호대학에 입학을 했다. 실은 여자 친구에게 4년제
대학을 다닌다고 거짓말을 하고 2학년 끝나면 군대 갈 것이라 속이고 연애를 했다. 여자 친구는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졸업하고 나서도 입대일인 6월12일까지 여자 친구의 기숙사로 찾아가 만남을 계속했다. 드디어 논산훈련소에 입소,
수용연대라는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수용소 같은 곳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여기서는 논산훈련소로 가기 전 최종신체검사를 해서 이상이 없으면 “완”자를 찍어 군번을 부여하고 치료가 불가능하거나
군 생활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면 귀향조치도 시키는 입대의 마지막 관문이다. 나는 공교롭게도 충치가 심해서 치과에 걸렸
다. 처음 생각에 사회에서는 생돈 들여가며 치료도 하는데 치료를 받고 훈련소는 천천히 가리라 생각하고 치료를 받겠노라고
했다. 함께 입대한 친구가 알아보니 수용연대에 있었던 기간은 군대생활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면서 가능한 빨리 “완”자
를 받아야 군대생활이 하루라도 빨리 시작된다고 했다.
친구는 자기가 아는 사람을 통해서 군의관에게 부탁하겠노라고 하면서 얼마간의 돈을 요구했다. 치료도 끝나지 않았지만 “완”
자를 받고 6월23일 드디어 논산훈련소 28연대에 입소를 하였다. 논산훈련소 가는 첫날 우리 옆에서는 “개구리복”(얼룩무늬: 당
시는 예비군 훈련복으로 전역하는 장병에게만 지급, 현역병에게는 개구리복 입은 선배들이 우상처럼 보였음)입은 장병들이 전
역신고 연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짜증이 난다. 우리는 3년 후에나 입을 수 있는 개구리복 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내무반 친구들은 군번이 없는 친구들이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군번은 있는데 인식표를 주지 않았다.
소문에 인식표와 군번줄 없는 훈련병들은 하사관후보 요원으로 하사관학교로 갈 것 이라고 했다.
군기가 세고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누구도 가기를 꺼려하는 하사관학교를 가야 하다니 잠도 오지 않았다. 하사관으로 지원
하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갈 수도 있단 말인가? 그러나 당장 소문의 진위를 확인 할 수 없으니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다.
훈련은 힘들었다. 제식 훈련,사격술예비훈련, 사격, 수류탄투척 등등. 특히 계절이 여름이라 더욱 힘들었다. 유일한 희망은
집에서 오는 편지였다. 특히 여자 친구에게서 오는 편지는 너무너무 소중했다. 나의 여자 친구도 내가 2학년 마치고 군대 간
것으로 알고 제대하면 계속 사귈 거라고 편지를 열심히 보내왔다. 그녀에게서는 거의 매일 편지가 왔다. 나는 편지를 관물
보관함에 두었는데 편지가 점점 많아져 부피가 크지는 바람에 관물 보관함에 둘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침상을 뜯고 침상
밑에다 숨겼다. 내무반 내에서 없어지는 물품이 엄청 많았다. 개인 장비가 없어지면 현금으로 변상을 하거나 남의 것을 훔쳐서
채워야 한다. 수량이 부족하면 점호시간에 기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밤 나는 심야에 야외 불침번을 서게 되었다. 나이 많은 上士인 인사계가 주번사관을 하고 있었다.
나는 불침번 교대를 하면서 비가오니 고향생각도 나고 부모님도 보고싶고 마음이 뒤숭숭해서 별 생각 없이 나도 모르게 다른
때보다 좀 큰소리로 불침번교대신고 복창을 했다. 마침 주번사관 이었던 인사계가 내 복창소리에 깨었는지 잠을 못자고 있었는
지 다짜고짜로 나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발로차고 아귀를 날리고 훅을 치고 거의 1시간 동안 완전 묵사발이 되도록 맞았다.
맞다 보니 불침번 교대시간이 지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인사계가 이빨이 아파서 신경이 몹시 날카로워져 있었단다. 그래도
그렇지 지금 같았으면 폭행죄로 고소라도 할 수 있었을 터지만 그때는 그저 때리면 맞아야 하는 것이 군대였다.
인사계의 이상한 행동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주말저녁 점호시간에는 훈련병 모두를 침상앞줄에 서게 하고 모든 훈련병이
팬티를 무릎 아래까지 내리고 00스 청결상태 검사를 했다. 명색은 검사이지만 00스크기를 비교하는 아주 변태적인 짓을
했다. 그 결과 키는 제일 작은 훈련병이 그것의 크기가 비정상적으로 큰 것이 밝혀졌다. 그 후로 그에게는 “ㅈ대장”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우여 곡절 끝에 전반기 훈련 6주간이 끝나고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각자 근무 할 부대로 배속되어 갔다.
소문은 사실 이었다. 군번줄과 인식표를 받지 못한 우리는 후반기 교육장인 27연대로 가게 되었다. 보통은 특과병으로 박격포
훈련을 받고 우리는 분대장 요원으로 분대 공용화기인 AR자동소총 훈련 중대로 편성 되었다. 이제는 후반기 교육이 끝나면
하사관학교 가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 버렸다. 정신없이 4주간의 교육이 끝나고 하사관학교로 가는 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모두가 죽을상이 되어 입교를 했다. 직각식사, 직각보행, 자기반성 등 육군사관학교 교범을 그대로 축소해 만들어 짧은
기간에 훈련하다보니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기술행정 하사 후보로 하사관학교
교육은 8주간 교육만 받고 내 주특기인 통신병 특과학교에서 16주간의 교육을 받고서야 하사계급장을 달 수 있었다.
우리는 깡통 계급장이라고 불렀는데 원하지 않았던 “하사”로 임관하는데 훈련만 34주간을 받았다. 장기복무도 아닌 단기 하사관
으로 말이다. 이렇게 힘든 생활 중에도 국방부의 시계는 멈추지 않고 계속 돌고 돌아서 1973년 5월3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개구
리복”을 입고 전역을 했다. 별 볼일 없이 보낸 군대생활 이었지만 군대 안가서 곤욕을 치르는 유명한 가수, 청문회에서 쩔쩔매는
고위 공직 후보님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그들 보다 나은 점이 한 가지라도 있다는 게 적잖게 위안이 되기도 한다.
40년이 지난 오늘의 나의 후배들 머리 에서는 “뺑이는 쳐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 없어지고 하루 빨리 남북통일이
되어서 우리의 자손들은 맘 편히 군대생활 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되면 누구처럼 군대 가기 싫어서 외국국적
취득을 하지 않아도 되고 병원에 가서 억지로 신체검사를 몇 번씩 받지 않아도 되고 서로 믿고 사랑하고 위하면서 함께 잘 사는
대한민국이 되지 않을까? 나는 하나뿐인 내 아들은 의무경찰로 보내 군대생활을 대체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그 녀석 군대 있
는 동안에 왠놈의 시위가 그렇게 많은지 시위 현장진압에 거의 매일 동원 되다시피 하여 전방의 군대생활보다 열배, 스무배는 더
힘든 군대생활을 하고 나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역시 국방부시계는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 (끝)
첫댓글 군대에서 하던 말 좃퉁수는 불어도 시간은 간다.
그렇습니다. 좀 언어를 순화한다고 해서 부드럽게 표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