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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 오현고 14회 略史
●들어가며
산지천이 내려다보이는 오현단 아래서 신나게 떠들고 공부하던 까까머리 하이틴 소년들이 귀밑에 서리가 허옇게 내려앉은 70대 중반이 되었으니 60년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재경 오현고 14회 동창생 70여 명은 1963년부터 3년간 학연을 맺은 이래 다양한 인생의 길을 걸어오면서도 같은 서울 하늘 아래서 우의를 다져오고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산지항의 목포행 황영호 갑판에서 부둣가로 전송나온 학우들이 던져주는 사과를 받으며 서울 등 수도권의 대학에 진학한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제주 또는 타지역에서 학교 또는 직장을 다니다가 나중에 서울에 진출해 터전을 잡고 합류한 사람도 여럿이다. 어느 경우든 고향을 떠나 객지에 정착하는 디아스포라의 운명이 그렇듯이 우리 삶의 출발은 에트랑제 같았으나 열심히 살았다. 이제 거의 직장에서 은퇴했지만, 자신의 경력과 경험을 발판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곤밥이 그리웠다"는 어느 동기생의 말마따나 1960년대 보릿고개라는 말을 일상으로 들으며 청소년기를 보냈고, 1970년대의 산업화, 1980년대의 민주화 격변기, 1990년대의 정보화 사회, 그리고 21세기 선진사회에 이르기까지 서구사회의 200년 역사를 압축한 듯한 격변기를 경험한 세대가 14회 동창들이니 모두 한국 현대사의 살아있는 증인들이라 할 수 있다.
● 1970년대 - "우리도 동창회 만들자"
재경 14회 동창회가 언제부터 태동되었는지 그 정확한 날짜는 애매하다. 학업과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나온 동창생들은 1970년대 초부터 유유상종(類類相從)하며 만나기 시작했다. 퇴근 후 막걸리 한 잔을 기울이거나 다방 커피를 마시며 우정을 나누던 것이 모임의 씨앗이었다.
그땐 강남이 본격 개발되기 이전으로 거의 모든 직장이 사대문 안에 밀집되어 있을 때였다. 1976년을 전후하여 광화문 일대와 종로에 직장을 가진 동창들이 만나기 시작했다. 이창근 양용하 이재병 강정립 강창일 허장호 문경용 김재훈 김유철 권유균 고강옥 김수종 등이 자주 모였다. 동국제강에 입사한 이창근이 연락하는 수고를 맡겠다며 나서주자 예닐곱 명이 쉽게 모였고 만나는 빈도도 높아졌다. 14회의 아지트는 북창동 해남빌딩 지하 '해남다방'과 조계사 건너편 제주은행 서울지점 지하 '제은다실'이었다.
취업한 동창생 숫자가 늘어나고 연락처도 속속 취합되면서 "14회 동창회를 만들자"는 논의가 1977년 무르익었다. 정관을 만들고 동창회를 출범시켰다. 초대 임원은 김수종(회장) 이재병(총무간사) 이창근(재무간사)으로 출범했다. 동창회는 친목이 최우선이라는 원칙을 세웠고 회장은 2년씩 하되 봉사직으로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정한 원칙은 45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회고해 보면, 멋있는 합의였다. 꾸준히 동기회에 나오는 약 20여 명이 거의 회장과 총무를 역임해서 임원을 맡을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
빈털터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동기생들의 주머니에 들어온 건 얄팍한 월급봉투였지만 마음만은 부자가 된 듯했다. 회비는 두 달마다 2천 원을 내기로 했다. 그즈음부터 결혼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동창회의 중요 임무 중 하나가 결혼 소식 알려주고 참석을 독려해서 축하해주는 일이었다. 요즘이었다면 카톡 문자 하나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지만, 당시는 휴대전화는 고사하고 하숙방에 전화 놓는 것도 엄두를 못 내는 때였기 때문에 직장 사무실 전화를 마음을 놓고 쓸 수 있는 동창생들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결혼 선물은 거의 앨범이었다. 당시 8천 원 정도의 앨범이 동창회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결혼 선물이었다. 그때 회계장부를 보면 5, 6명 모였을 때 다방 찻값이 전체 1천500원 정도가 나왔으니 당시 생활경제를 짐작할 수 있다. 14회 동창회의 첫 송년회는 1977년 12월 17일 그해 결혼한 문경용의 신방에서 열렸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당시엔 송년회라는 말은 없었고 망년회로 통했다.
1979년 제2대 임원진이 출범했다. 회장 이창근 총무 강정립 재무 김재훈 섭외 강창일이 맡아서 한 걸음 발전된 모임 체제를 갖추었다. 힘든 말단 직장인들이었지만 동창회 모임은 큰 즐거움이었고 위안이었다. 초창기 재경 14회 동창회 명단에 오른 회의록을 보면, 여건상 모임에는 나오기 힘들었지만 1970년대에 직장에 안착한 사람은 50명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재경 14회 동창생들의 첫 직장은 다양했다. 산업화의 영향인 듯 공직보다는 민간회사로 많이 진출했다. 강정립 강창일 고인헌 고길수 고현우 권상수 권시형 권유균 김명헌 김성순 김용민 김유철 김병흠 김익태 김종언 김재훈 김태균 김희철 문경용 문대전 부태완 송태원 성정연 오영호 오용성 오충일 오헌영 이수열 이재병 이창근 임종표 최성근 황해수 등이 무역, 건설, 항공, 식품, 서비스 등 다양한 분야에 취업했다. 양용하 최양호 김인성은 은행원이 되었고 조봉삼은 투자신탁회사에 입사했다.
약사 자격증을 가진 김병윤 조영중은 약국을 열었고, 고양명은 한독약품에 입사해서 영업의 길을 택해서 훗날 CEO를 기약했다. 의대를 나와 서울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친 김용범은 제주도로 귀향하여 안과 의원을 개업했고, 정수만과 오동준은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 의사가 되었다.
학자의 길로 들어선 사람은 김호건과 김정림이 한양대학에 둥지를 틀었고, 고강옥은 고려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부산의 부경대 교수가 되었다. 김정림은 처음에 오현고 화학 교사로 후배를 가르쳤다. 홍승운 장갑천 김영국은 서울과 인천에서 고교교사로 부임했다. 허장호가 국회도서관에 들어간 것을 비롯 백성훈 등 서너 명이 공직에 들어갔다. 김수종이 한국일보에, 김태주가 조선일보에 기자로 발을 들여놓았다.
대부분 동창생이 대학 졸업하고 취업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던 것과는 달리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일찍 진로를 정한 3인이 있었으니 사관학교 생도들이었다. 14회에서는 특이하게 육사의 양일우, 해사의 강익중, 공사의 강만수 등 3개 사관학교에 각 1명씩 진학했다. 김두행은 공군 학사장교로 임관됐고, 김만흥도 공군 항공 정비직으로 직업군인의 길을 걸었다. 농사를 천직으로 여긴 진길부는 서울농대를 나와 경기 이천에서 개척농장을 시작하여 훗날 한국 축산업계에 큰 족적을 남기는 초석을 깔았다.
1979년 한국 현대사의 변곡점이 생겼으니 그해 10월에 일어난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이다. 이 사건의 단초 중 하나가 그해 여름 일어난 'YH여공 마포 신민당사 점거농성' 사건이다. 당시 조선일보 경찰 기자였던 김태주가 현장 취재를 맡아 경찰의 YH여공 강제해산을 취재하던 중 무술경찰의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곤봉과 주먹에 앞니가 부러지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는 중상을 입었고, 이 일로 여론이 악화되자 경찰간부와 정부 고위직 인사들이 입원실을 찾는 등 소동이 일어났다.
재경 14회 동창생들의 1970년대는 이렇게 저물어 갔다.
● 1980년대 - 질풍노도의 시대
1980년대는 한국 사회가 가장 역동적으로 변한 10년이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아웅산 테러, 중공 민항기 불시착사건, 북한 이웅평 귀순, KAL 007기 사할린 상공 격추사건, 아시아경기와 서울올림픽, 6월항쟁과 6·29선언, 직선 대통령 선거 등 큰 변화가 소용돌이치듯 일어났다.
1980년 재경 14회 동창회 기록에 남은 첫 사업은 재경 오현고 동창회 장학기금 모금에 10만 원을 거두어 낸 일이다. 1980년 2월 3대 임원진이 출범했다. 회장 강정립 부회장 강창일 총무간사 허장호 섭외간사 이재병 감사 김익태가 선출되었다. 꽤 인원이 늘어난 14회 동창생들의 대소사를 보살피는 일이 많아졌다. 자녀의 돌잔치에 초대받아 기념품을 전달하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지만, 동창회 활동은 최소한의 친목을 유지해야 하는 그런 시기였다. 모두 직장 일에 바빴기 때문이다. 소수가 어울려 등산을 하거나 바둑을 두고 또는 가라오케 노래방에 가는 정도가 그때의 여가생활이었다.
당시 14회 동창생들은 인생에서 가장 팔팔하고 변화가 심한 30대를 살았다. 대학 생활까지 계산하면 서울 생활 10년을 훨씬 넘긴 시점이었다. 사회적으로는 왕성한 직장 생활을, 개인적으로는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의 삶을 열심히 살았던 시절이었다.
1980년대 중반이 되면서 14회 동창생들도 직장에서 중견이 되었다. 당시 직장 분위기 또한 휴일도 반납하고 일해야 할 만큼 곁눈질을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승진을 하는 사람, 해외로 진출하는 사람, 직장을 옮기는 사람도 많이 생겨났다. 외국 여행은 명분이 있어야 단수여권을 들고 고작 일본이나 홍콩을 생각하던 시절, 14회 동창생들의 해외 발길이 잦아졌다. 월남파병과 해외 건설의 영향이었다. 1970년 일찍 현대건설에 들어간 김희철은 승진이 빨랐다. 해외 건설 현장을 빈번히 드나들었고 33세에 부장, 35세에 이사로 초고속 승진을 해서 화제가 됐다. 한국주택공사에서 대우로 옮긴 김유철이 리비아 트리폴리로 파견되었고, 한일건설에 입사한 김익태는 필리핀 지사로 나갔다. 항공정비직으로 공군에 8년간 근무한 김만흥은 제대 후 대한항공(KAL)으로 이직하여 정비사로서 국내외 공항의 KAL 지점에서 근무했다.
수도경비사 소대장을 지낸 양일우는 서울대 화학과 학사편입이 계기가 되어 텍사스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육사 교수가 되어 학자와 군인의 길을 병행했다. 강익중은 해군 대잠초계기 파일럿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김호건은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김정림은 독일에 교환교수로, 고강옥(고주몽으로 2008년 법적 개명)은 연구교수(자유중국) 및 객좌교수(중국 시안) 활동과 더불어 도이즘 관련 논문을 독일, 미국, 스웨덴 대학에서 발표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대기업의 해외 지사 주재원도 생겼다. 오충일은 럭키상사(LG) 도쿄지사 주재원이 되었고, 금호실업에 근무하던 문경용은 호주 시드니 현지법인에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귀국 후 완구업체의 수출입 영업을 맡아 미국 LA에서 근무했다. 그때 한국일보 LA 특파원으로 취재 활동을 하던 김수종과 조우했다. 둘은 2년 가까이 가족끼리 자주 교류하며 살았다.
벤처 정신을 발휘하여 개인 사업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문시영은 1970년대에 오퍼상을 열 정도로 독립적이었다. 동국제강에 다니던 이창근이 1980년대 초 세무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오충일 이재병 문경용이 기업을 떠나 오퍼상을 열었다. 김유철은 건축사무소를 냈고, 김익태는 대학입시 학원을 열었다.
공자는 삼십이립(三十而立), 즉 30대는 마음의 뜻을 세우는 나이대로 정의했지만, 1980년대에 30대를 살았던 14회 동창생들에게는 한마디로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1980년대 14회 동창회 임원진을 보면, 3대에 이어 강정립이 제4대 회장을 연임하고 총무는 이수열이 맡았고, 제5대(1985년 2월) 회장 이수열 총무 김용민이, 제6대(1987년 2월) 회장 강창일 총무 조봉삼이, 제7대(1989년 2월)와 제8대(1991년 2월) 회장 김유철 총무 오충일이 맡았다.
●1990년대 - 불혹(不惑)과 원숙함으로
1990년대는 20세기가 끝나는 세기말의 10년이었다. 14회 동창생들은 40대와 50대를 걸친 시기로, 인생의 절정기이자 노후를 생각할 때였다. 직장에 다니든 자영업을 하든 원숙해졌고 회사에서는 임원이 되고 공직에서는 고위공무원이 되는 나이대였다. 여럿이 어울리는 취미 생활도 필요했고 동창 모임에도 관심이 커진 게 이때다.
진급과 개인 사업, 그리고 자녀의 상급학교 진학과 같은 경사가 많았다. 또 부모나 장인 장모의 상을 당하는 친구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애경사를 알리고 축하 난을 보내고, 문상하고, 부의금을 모아 전달하는 일 등 동창회 임원진의 발길은 분주했다.
1990년대 초 14회 동창회 회장을 맡은 김유철은 강남에 신도시건축 설계사무실을 크게 열었고, 그 사무실이 동창 모임의 아지트가 됐다. 1992년 김유철의 신도시건축은 총동창회의 숙원인 총동창회관 건축 설계와 감리를 무료로 제공해서 제주 시내에 총동창회관을 신축하는 데 도움을 줬다.
이렇게 할 일이 많다 보니 동창회 임원진들의 짐도 무거웠다. 제9대(1993년 2월)는 회장 이재병 총무 허장호가, 제10대(1995년 2월)와 11대(1997년 2월)는 회장 김익태와 총무 조영중이, 12대(1999년 2월)는 회장 김호건과 총무 홍승운이 맡아 수고했다.
아울러 14회 동창생들의 활동도 활발해지고 원숙해졌다. 오충일은 오퍼상을 확충하여 (주)일양코포레이션을 세우고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수출입 규모를 키웠다. 김희철은 현대산업개발 임원을 그만두고 새로운 종합설계 및 감리 전문기업 (주)토팩엔지니어링 창업에 참여하였다. 학원 사업을 시작한 김익태는 대입 전문 대성학원과 제휴하여 성남에 대학입시 '대성기숙학원'을 열어 한때 기숙생 300명 규모의 대형 학원으로 키웠다. 김정림과 김호건은 연달아 한양대 이과대학장에 각각 선임되었다. 김재훈이 한국네슬레 상무로, 고양명은 한독약품 전무로 승진했다. 조선일보를 퇴직하고 CJ로 이직했던 김태주는 CJ 상무가 되었다. 김수종은 한국일보 뉴욕 특파원으로 유엔을 취재했다. 은행지점장도 나왔다. 최양호가 기업은행 지점장으로 승진했고 조봉삼은 대한투자신탁 임원이 됐다. 제일은행 지점장으로 승진한 양용하는 서울에서 지점장을 하다가 2000년대 초 제주 지점장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퇴임하고 귀향했다. 김두행은 공군 중령으로 예편한 후 군경력을 살려 한국공항공사에서 근무했다. 개인 사업을 하던 이재병은 1998년 송파구에 '丕荃(비전) 철학관'을 열어 작명과 상호를 지어주는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재경 총동창회의 춘계 정기 야유회와 등산회는 14회가 없으면 심심할 정도로 참가율이 높았고 해마다 참가상을 차지해 화제가 되었다. 서울 거주자 숫자도 많았지만, 단합도 잘 되었다.
14회 중에 누가 처음 등산을 주선했는지는 모르지만 몇 사람씩 모여 등산을 다니고 바둑을 두는 일은 1980년대부터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96년 국회의 의원동산에서 열린 총동창회 춘계야유회에서 14회 동창 산악회를 만들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강정립이 등산회장을 자청해서 산을 오르고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1996년 9월 22일 모교에서 열린 '오현인의 날 행사'는 14회 동창회, 즉 현지회(賢志會)가 주관했다. 재경 14회 동창회 회원 55명이 1천180만 원을 모아 행사경비로 현지회에 보탰고, 재경 현지회를 대표하여 김익태 허장호 조영중이 제관으로 참가했다.
재경 14회 동창회는 서울이라는 위치적 이유로 다른 지역 동창과 교류할 일이 적잖았다. 특히 해외 거주 동창이 귀국할 때면 환영파티를 열어주곤 했다. 재미 의사 정수만과 오동준(만춘), 재일본 사업가 현경언이 귀국했을 때 환영회를 열었다. 제주도에서 14회 총동창회 초대 회장으로 수고하다 캐나다에 이민 간 고영식이 귀국했을 때는 재경 14회의 반가운 손님이었다. 또 특별한 임무를 갖고 제주에서 왕래하는 동창도 따뜻이 맞아야 할 손님이었다. 제주은행 서울 양천구 신정동 개점 지점장으로 부임한 임현순을 축하하러 동창들이 몰려갔고, 동창 음악인으로 제주시향 지휘자 이선문 제주대 교수가 서울 공연을 할 땐 꽃다발을 들고 연주회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동창회 모임이 잘 되기 위해선 뭔가 구심점이 필요했다. 1990년대 후반 김호건 회장과 홍승운 총무가 동창회를 이끌 때였다. 웬일인지 모임 출석률이 시원치 않자 임원진의 고민이 커졌다. 이때 나온 아이디어가 뉴스레터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홍승운이 편집을 해보겠다고 나섰고 김호건이 호주머니를 털어 100만 원을 마련했다. 재경 14회 동기생들의 근황을 담아 월 1회 뉴스레터를 만들었다. A-4 용지 4쪽짜리 <賢14 소식지>를 70부쯤 만들어 확보된 동창 주소 70여 명에게 매달 우편으로 발송했다. 이외로 반응이 좋아 동창 모임 참석률이 높아졌다. 소식지가 다리가 되어 동창 가족 20여 명이 경기 이천 도드람 양돈농장을 경영하는 진길부를 찾아가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소식지는 13대 강익중 회장으로 이어져 4년 동안 44호까지 발간되었다. 뉴스레터에 대한 호응이 좋아지자 제주도에 거주하는 14회 일부 동창들에게도 우송했고 재경총동창회 임원들에게도 보내면서 14회 범위를 뛰어넘는 소식지 역할을 했다.
●21세기 22년 - 길은 끝나지 않더라
1966년 고교를 졸업할 때 21세기는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던 멀고 먼 미래였다. 그러나 서기 2000년이 우리 곁을 쓱 지나갔고 또 22년이 흘렀다. 2007년에 1947년생 동창들이 환갑을 맞았고 그해 송년회는 환갑연을 겸해서 마포 가든호텔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가는 동창들도 생겼다. 동창의 경조사가 부쩍 많아졌다. 부모 부음. 그리고 처부모의 부음이 계속 들려왔다. 은사들의 부음도 들려왔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검은 머리의 청년들이었는데 세월은 무섭게 흘러버린 것이다. 아쉽게도 동창의 부음도 간혹 들려왔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가장 흔한 동창회 소식은 자녀의 혼사였다.
인생의 깊이를 터득한 동창들의 우의는 한층 더 깊어졌고 동창 모임은 끈끈해졌다. 2000년대 임원진을 보면, 제13대(2001년 2월) 회장 강익중 총무 이창근이, 제14대(2003년 2월) 회장 조영중 총무 장갑천이, 제15대(2005년 2월) 회장 부태완 총무 임종표가, 제16대(2007년 2월) 회장 장갑천이, 제17대(2009년 2월) 회장 임종표 총무 문경용이 맡았다.
새 밀레니엄을 알리는 2000년 재경 14회 동창들의 귓전을 때린 반가운 뉴스는 제주에서 신경과 의사로 활동하던 고진부 동창의 국회의원 당선 소식이었다. 그는 1996년 15대 총선에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가 16대 총선에서 재도전하여 당선되었다. 국회의원이 된 그는 재경 14회 동창회 회원들을 국회에 초대하여 대접하는 등 재경 14회 동창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 기여했다. 14회 고진부의 국회 입성은 같은 14회로 국회도서관 총무과장(부이사관)으로 근무하던 허장호의 업무에 큰 힘이 되었다.
2010년대에 재경 오현고 장학재단 설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14회 동창회도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모금 운동을 벌였다. 14회에 배정된 액수는 1천만 원이었는데 김익태가 1천만 원을 쾌척해서 조기에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고진부가 3백만 원 이창근이 1백만 원을 내놓고 나머지 동창들도 십시일반으로 기부해서 총액 1천7백61만 원을 14회 이름으로 냈다.
2005년을 전후해 교육계를 제외하곤 14회 동창들의 정년이 찾아왔다. 청·장년에 열정을 바쳤던 직장을 떠났지만, 동창들의 제2 인생은 경험을 살리거나 새로운 도전을 찾아 다양하게 시작되었다. 군인들도 병영을 떠나야 했다. 재경 14회 동창회 회원들은 사관학교 출신 3명이 모두 대령 계급장을 다는 것을 보며 장군 동창이 나오기를 기대했는데 강익중 해군 대령과 강만수 공군 대령이 55세에 계급정년으로 예편했고, 육사 교수인 양일우는 대령 계급으로 교수 정년 60세까지 근무하고 명예교수가 되었다. 동창들은 아쉬웠지만 자유로워진 그들과 더 자주 더 가까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2000년대 14회 동창회 친목의 밑거름이 된 것은 등산, 여행, 바둑 등 취미활동이었다. 환갑이 가까워지면 대개 고등학교 동문 모임에 따로 산악회가 있다. 끈끈한 정이 남아 있는 고교 동기생들이 모임을 하다 보면 등반과 바둑 모임은 생기게 마련이고 이런 활동을 통해 정도 나누고 건강도 챙기고 스트레스도 풀 수 있다. 나이가 지긋해지면 일요일 여가선용과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산을 찾는다. 특히 서울은 세계 대도시로서는 산수가 빼어난 곳이니 더욱더 매력적이다.
1996년에 만들어진 14회 산악회는 동창회 모임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서울 근교의 당일치기 산행을 주로 했지만 때로는 1박 2일 코스로 여행과 산행을 겸한 부부 동반 여행이 잦아졌다. 서울 근교의 검단산 북한산 도봉산 소요산 관악산은 말할 것도 없고 충북 도락산 전남 월악산 전북 덕유산 경남 외도와 해금강 등 전국에 14회 산악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틈틈이 열리는 정기산행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강정립 문시영 오충일 허장호 문경용 임종표 등 10여 명은 정기산행 외에 일요일마다 관악산을 오르는 등산모임을 가졌다. 재미있는 현상은 1990년대 관악산 연주암을 너끈히 오르던 회원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헬리포트를 경유해서 과천으로 내려가더니 드디어 왕바위가 목적지가 되었으니 늙음에 약이 없다는 말을 실감했다. 이 관악산 등산모임엔 사진에 조예가 깊은 허장호 부인 박혜련 여사가 카메라를 메고 동반했다. 동창들에게 그녀가 찍은 남편 친구들의 스냅 사진은 기분 좋은 선물이었다.
2015년을 전후하여 산악회는 인원이 줄어들었지만 아주 특이한 산행 형태로 매주 일요일 계속 열리고 있다. 이른바 '우면산 외국어 공부 산행'이다. 일본에 살았고 일본과 중국 기업들과 교류하며 무역업을 하는 오충일이 산행의 리더이자 외국어 선생 노릇을 자청하고 나섰다. 김태주 허장호 문대전 임종표가 개근하고, 결석이 잦지만 문경용 조봉삼 이창근 김수종이 틈만 나면 따라붙는다. 오전 10시에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만나 우면산 둘레길 중 예술의 전당에서 사당역까지 걷는 약 6㎞ 코스다. 이 등산 모임의 하이라이트는 점심시간을 겸한 1시간의 일본어와 중국어 공부다. 관악산 등산 때부터 시작된 이 산행 외국어 공부에서 교재는 여행 언어에서 문학작품까지 다양하다. 삼국지, 홍루몽, 당·송대의 한시를 공부하고 일본어 교재는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가 등장하는가 하면 최근 2년은 옛날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읽었던 알퐁소 도테의 '마지막 수업'과 '별' 일본어 번역판을 공부했다. 대단한 중국어와 일본어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한자의 도움을 받아 가며 퍼즐 맞추듯 공부한다. 이 광경은 우면산 등산객들의 구경거리다. 이 산행 공부팀에는 비(非) 동창이 한 사람 있다. 오충일의 배필이자 고 김진흡 은사의 딸 김지애 여사가 과일과 초콜릿을 배낭에 담고 꼭 참가해서 배급한다. 사당동 등산로 입구 주택가에 조그만 카페가 하나 있다. 일요일 오후 1시가 넘으면 카페 여주인은 등산팀을 기다린다. 일요일마다 들리니 연간 50번을 찾아오는 대단한 단골이 됐으니 대접이 좋다. 팬데믹이 있기 전 이 팀은 다달이 모은 돈으로 일본 규슈 올레길을 걸은 적도 있다. 코로나19 팬데믹도 이들의 산행은 막지 못했으니 그 2년 동안 110회 이상 우면산을 걸었다.
바둑도 14회 동창생들에겐 좋은 취미였다. 고현우의 집에서 모이던 바둑 모임은 이재병의 비전철학관으로 옮겨지더니 동창회의 보조를 받으며 코로나19 팬데믹 전까지 종로3가의 기원에서 가끔 모여 바둑대회를 열었다. 바둑 모임의 핵심 멤버는 문경용 이재병 강익중 최양호 조영중 임종표 등 예닐곱 명이 넘었다.
나이를 먹으면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했던가. 일찍이 김용민 권상수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양용하가 뒤따르더니 강정립이 고향 애월로 돌아가 밭일을 하기 시작했다. 반면 대한민국에서 렌터카 영업경력이 제일 오랜 이원진은 '제주렌터카' 사장으로 활약하다가 환갑이 넘어 서울에 진출하여 차량 5백여 대를 보유한 '퍼시픽렌터카'를 창업해서 벤처 정신을 발휘했다. 토팩엔지어링을 종업원 5백여 명의 대기업으로 키운 CEO 김희철은 고향 제주에 지사를 개설하고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가 야심 차게 기획한 항공박물관 설계 감리에 깊이 참여했다. 한국일보 주필을 지낸 김수종은 제주대학에 민간의 아이디어와 경험을 토대로 대학생들의 인성과 취업 역량을 함양해주는 휴먼르네상스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사단법인 '위즈덤시티' 멤버의 한 사람으로서 15년째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반서울시민 반제주도민'이 되었다.
책을 쓰거나 문필가로서 사회에 기여하거나, 평소 천성적으로 마음속에 품었던 철학을 실천하며 제2의 인생을 사는 동창도 있다. 약사 출신으로 한독약품 신입사원에서 사장까지 지낸 고양명은 CEO로 일하면서 틈틈이 사유한 생각을 다듬어 책을 냈다. 한국의 출생률 격감 문제를 다룬 사회 비평 화제 도서 '우리 손주 큰일 났네'이다. 또 다국적 식품기업 '한국네슬레' 상무에서 퇴임한 김재훈은 원래 글쓰기를 좋아했던 천성을 갈고 닦아 수필을 썼는데 문단으로부터 뒤늦게 인정받아 수필 작가가 됐다. 그의 수필집 '내 마음의 강'은 생활 주변에서 겪은 경험을 문학적 감수성으로 승화한 글을 모은 작품집이다. 2010년 신곡 문학상을 비롯한 수필 문학상을 여러 차례 받았다. 1998년 송파구에 '丕荃(비전) 철학관'을 열었던 이재병은 고객의 가정사와 사업 고민을 덜어 주는 서비스 일을 20년째 하고 있다. 천성적으로 불경과 중국 고전 및 역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의 역학 풀이는 입소문을 탔고, 그 덕분에 이재병은 경기대 평생교육원 교수로 초빙되어 15년간 생활 역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제일은행을 퇴직한 김인성은 목사 수업을 받고 종교인이 되어 제1 인생 같은 제2 인생을 살고 있다.
이창근은 프로 같은 아마 골퍼로서 나이 들어 특별한 재능을 발휘한 동창이다. 그는 2007년 열린 SBS 전국챔피언전에서 8언더파로 전국의 내로라하는 클럽 챔피언들을 모두 물리쳐 우승했고, 이어 열린 한일 챔피언 대항전에서 그해의 일본 아마 챔피언을 물리쳐 기염을 토했다. 나이 40에 세무사 사무실을 운영하며 골프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2000년대 들어 경기체전에서 우승하는 등 아마 골프계를 석권했다. 그는 지금도 에이지슈터(Age Shooter)로서 주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에이지슈터란 자기 나이 이하로 타수가 적은 사람을 일컫는다. 그가 뒤늦게 발휘한 재능은 골프뿐만 아니라 시작(詩作)과 사진에도 조예가 깊어 문학지의 신인상을 받고 전시회를 여는 등 빛나는 노년을 누리고 있다.
재경 14회 동창의 활동무대는 주로 대도시다. 14회 동창 회원 중 농촌에서 사회를 크게 이롭게 만든 자랑스러운 사람은 개척농장을 일군 진길부다. 1970년 서울농대 잠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농업으로 성공한 덴마크를 벤치마킹하여 한국 농민이 상부상조하며 높은 소득을 올리는 영농조합의 꿈을 꿨다. 그는 경기도 이천에 터를 잡고 축산에 몰두했다. 소사육에 실패한 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양돈에 매달려서 고품질의 돼지고기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도드람' 브랜드의 돼지고기는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전국에 걸쳐 도드람 양돈 조합을 확산시켰다. 그는 양돈조합원들을 설득해서 고액을 주고 덴마크 양돈 기술자를 초빙하여 맛있는 돼지고기 만드는 기술을 전파했다. 특히 그는 양돈장의 악취를 미생물을 배양하여 퇴치하는 기술을 개발했으며 한때 제주도 양돈농가에 이를 적용하려고 애썼다. 농업을 기업처럼 경영해야 한다는 그의 개척정신은 농촌 지도자들은 물론 정부 정책 당국자 사이에서도 화제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하늘은 착한 사람을 먼저 불러간다고 했던가, 도드람 양돈 조합의 전설 진길부 조합장은 2017년 그렇게 아끼며 키웠던 도드람 양돈 마을에서 영원히 눈을 감았다.
2010년대 14회 동창회 임원진은 제18대(2011년 2월) 회장 문경용 총무 김태주가, 제19대(2013년 2월) 회장 김태주 총무 김만흥이, 제20대(2015년2월) 회장 김만흥 총무 박병택이, 제21대(2017년 2월) 회장 박병택 총무 최양호가, 제22대(2019년 2월) 회장 최양호 총무 앙일우가 맡았다. 제23대(2021년 2월) 회장은 양일우가 맡아 오늘에 이르렀다.
2010년대 동창들의 애경사는 더욱 많아졌고 동창회가 할 일도 많았다. 2011년 재경총동창회장을 14회가 맡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14회가 추천한 회장과 총동창회고문단이 추천한 회장이 겹쳐나오는 혼선이 빚어졌으나 선후배들의 아량과 고뇌 어린 조정으로 '김익태 김희철 공동회장 체제'로 위기를 넘겼다. 어쨌든 14회에서 빚어졌다는 점에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14회 동창들에게 정말 뜻깊은 해는 2016년이었다. 졸업 50주년이 되는 해이자 나이가 70세가 되는 해였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란 말이 있듯이 100년 전만 해도 저승 문턱을 나들 나이였지만 대부분 건강하게 나름의 직분을 다하며 열심히 살게 됐으니 이런 행사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해 여름 14회 졸업 50주년 기념행사 사은회가 신제주 메종글래드 호텔에서 열렸다. 행사 준비를 위해 재경 14회도 1년 전부터 움직였다. 제주도에서 행사 추진을 총괄하던 김종천이 서울로 동창들을 찾아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마치 50년 전 ‘김종천 학생회장’을 다시 보는 듯한 아련한 추억을 되살렸다. 50주년 사은회에 재경 14회 21명이 참석했고 그중 14명이 부인을 동반했다. 14회 동창의 부인 중에는 유난히 신성여고 출신이 많은데 특히 같은 해 졸업한 여고 동기들이 많아 단합이 잘된다. 그날 밤 제주와 서울에 50년간 떨어져 살던 동창생들은 서로가 감격스러워 포옹했다. 겉으로는 웃으며 반겼지만, 주름이 깊게 패인 동창생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론 세월의 빠름을 아쉬워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재경 14회 회장 김만흥이 스승에게 드리는 따뜻한 글을 낭송했다.
연회가 끝날 때 모두가 일어나 부른 노래는 "산 높고 물 맑은 오현 옛터에..". 50년 전 학교 다닐 때 교장 고봉식 선생이 작곡한 응원가다. 그러나 작사자는 미상이었다. 그런데 응원가의 작사자는 바로 14회 동창 양용하의 작고한 아버지 양명률 선생인 것이 2021년에 발굴된 문서에 의해 밝혀졌다. 양명률 선생은 1945년 해방 후 오현 학원 설립을 위한 모임 <로고스> 멤버로 재원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던 오현 학원 산파의 한 사람이었으니 14회 동창들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졸업 50주년 행사에 참석한 재경 14회 동창들은 감격을 안고 행사 이튿날 거문오름 탐방을 비롯한 제주도 내 관광을 하고 상경했다. 또 언제 그런 날이 있을까 싶다
● 글을 끝내며
75년 인생을 살면서 희한한 일을 겪었으니 코로나19 팬데믹이다. 2019년 말부터 창궐한 팬데믹은 2년 이상 인류의 생활을 억눌렀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외출을 할 수 없고 자유롭게 만나던 사람들과 거리두기를 해야 했다.
우리 14회 동창들도 비상 체제로 갈 수밖에 없었다. 경조사에 아주 제한적으로 참석했을 뿐 모임을 할 수 없었다. 나이 들면서 친구가 더 그리워지는 게 인지상정인데 만날 수 없었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2021년 2월 동기회 일을 맡은 양일우 회장은 동기회의 가장 큰 행사인 송년회도 대면으로 할 수 없어 회무 보고도 카톡과 오현고 14회 홈페이지 게시로 대신했다. 카톡 등 SNS가 동창 회원을 연결해주는 통신줄이 되었다.
빨리 바이러스 팬데믹이 퇴치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래야 우리 14회 동창들은 물론 선배들이 여생을 자유롭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또 앞날이 창창한 후배들도 마스크와 거리두기 없이 마음껏 기개와 꿈을 펼칠 수 있는 날이 곧 도래하기를 기대한다.
재경 14회 동창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궤적은 어디서 무슨 일을 했든 모두 귀중하다. 인생 경험이 묻어나는 삶은 가정, 일터, 사회 곳곳에서 마지막 빛을 발휘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단체로 구경했던 미녀 배우 나탈리 우드와 미남 배우 워런 비티 주연 영화 '초원의 빛'은 우리들의 10대를 가슴설레게 했던 활동사진이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강한 힘으로 살아남으리
존재의 영원함을
티 없는 가슴으로 믿으리"
초원의 빛을 노래한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어린 시절의 회상으로부터 깨달은 불멸의 노래'의 싯귀처럼 14회 동창생들은 존재의 영원함을 믿으며 살아갈 것이다.
첫댓글 五賢人의 精神을 녹여내는 최고의 머찐 글입니다.감사합니다.在京賢志會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