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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철학연구-Ⅰ; 비트겐슈타인과 언어
박영식, 현암사, 1995.11.30.
언어철학 그 과제와 쟁점 ; 엄정식
1. 머리말
철학은 존재의 본질과 현실의 구조를 궁극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것은 궁극적인 탐구이기 때문에 그 대상이나 방법에 있어서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대적인 특성과 철학자들의 접근방식에 따라 한계를 나타냈고 결과적으로 그 특색을 드러내는 다양한 입장과 학파가 형성되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전개되는 탐구의 성격을 넓은 의미로 '확실성의 추구'라고 할 때, 우리는 확실성의 본질과 그 추구의 방법이 항상 변천해 왔음을 주목하게 된다. 물론 이것이 반드시 상식으로부터 출발하고 경험과학의 수준을 넘어서며, 동시에 종교나 예술 혹은 윤리에서 추구하는 것과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추구가 때로는 본질적인 면에서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전개되어 온 확실성의 추구는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플라톤으로부터 중세로 이어지는 존재론적 추구로서 영원하고 불변하는 대상에서 확실성을 찾으려는 특성을 지닌다. 둘째는 데카르트가 그 전환점을 마련하여 오늘날 현상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인식론적 추구로서 절대적인 확실성을 내면적 심성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셋째는 프레게가 그 계기를 마련하여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이 주축이 된 분석철학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의미론적 추구로서, 여기서는 완전한 확실성을 언어의 분석을 통해 획득하려는 특징을 보인다. 이것을 우리는 각기 외부 지향적인 존재론적 추구, 내부지향적인 인식론적 추구 및 관계 지향적인 의미론적 추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1)
언어를 철학적 탐구의 주요과제로 부각시킨 의미론적 추구는 현대철학의 한 조류로서 현재 활발히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그 특성을 명확하게 규명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이러한 추구의 의미를 존재론적 및 인식론적 추구와 확연히 구분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가령 분석철학의 중심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을 플라톤이나 데카르트와 대등한 위치를 차지라는 인물로 간주할 수 있는지도 아직은 가늠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서양철학사를 통틀어 보아도 분석철학에서처럼 언어를 심층적으로 광범위하게 다룬 적이 없었고, 또 이러한 접근방식을 통해서 철학 그 자체를 의미론의 일종으로 간주한 적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근대 철학에서 진리에 대한 인식의 방법과 근거를 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철학적 주제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분석철학에서는 의미에 대한 체계적 분석과 명료화 작업이 핵심적인 과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작업을 주도하였고 발전시켰으며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사적으로 획기적인 인물로 취급되어도 좋을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철학에서 언어가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는 배경을 설명한 다음 언어철학의 의미와 과제를 다루고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또 전개되고 있는지를 검토함으로써 언어철학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시도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관점과 입장이 필요한데, 여기서는 비트겐슈타인을 중심인물로 평가하여 그의 전 후기 사상이 언어철학의 전반에 끼친 영향을 조명하고 이것을 수정하거나 보완하는, 혹은 반박하거나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러한 현상은 데이빗슨의 의미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언어철학의 현황에서 더욱 뚜렷한 특징으로 부각되는데. 의미이론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고 언어철학의 성립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로티의 접근방식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관점을 중심으로 하여 언어철학이 등장하는 배경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2. 언어철학의 등장과 의미
1)언어철학의 배경과 등장
언어철학은 현대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조류 중의 하나인 분석철학의 한 분과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분석철학은 여러 가지 철학적 주제를 이와 관련된 언어적 표현을 명료화하고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해결하고자하는 접근방식을 채택한다. 그러나 언어의 본질이 무엇인지 규명하지 않고 또 철학에서 차지하는 언어의 중요성이 제시되지 못한 채 이러한 접근을 시도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별로 설득력도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언어 자체를 분석 철학적 방법으로 다루려는 시도가 생겼는데 이것이 바로 언어철학이다. 그렇다면 철학적 주제에 대한 분석 철학적 접근방식이 필요했던 이유가 무엇이며 언어가 존재나 인식보다 더 중요한 과제로 간주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일반적으로 존재나 인식보다 의미를 더 중요하게 취급하게 된 계기를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계기가 마련된 데에는 철학사의 전개과정에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철학과 언어의 본질적인 관계를 자각한 계기이기도 한데 이러한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언어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언어는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하는 요소로 파악된다. 물론 다른 동물들도 의사소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형식을 빌리지는 않는다. 따라서 언어는 인간에게만 특유한 현상으로 인식되며 이 현상을 깊이 연구할 때 결국 우리는 인간과 우리들 자신에 관하여 좀더 심층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을 갖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철학적으로 언어가 개입되는 이유는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언어의 구조가 우리의 지식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가령 “신은 존재한다."와 "나무는 존재한다."는 문법적 구조에 있어서 동일하므로 신이 나무와 같은 구체적 대상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데, 언어의 구조를 면밀히 검토하면 이러한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의 철학적 분석은 우리의 참다운 인식을 돕고 진리를 발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끝으로 언어가 철학적으로 중요하다고 믿는 이유는 그것이 제대로 분석되었을 때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의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되므로 결국 언어는 우리를 실재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사실 언어의 구조가 실재의 구조와 유사하다는 생각은 상식적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입장이다. 언어는 사고를 표현하고 있고, 인간의 사고가 세계에 관한 지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그것은 실재의 세계를 반영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와 철학의 유기적인 관계와 그 중요성이 현대에 들어와서 새삼스럽게 부각된 것은 아니었다.
러셀(B. Russell)이 지적한 바와 그리스 철학을 이끌어 온 주된 개념들 중에 하나가 로고스(logos)인데, 그것은 언어와 이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논리(logic)의 어원이 되는 단어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성적 사고는 곧 논리적 사고를 의미하며 이러한 사고는 필연적으로 언어적 표현을 필요로 함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좀더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언어'와 ‘논리'와 ’이성'은 서로 같은 것을 지칭하는 세 가지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철학이 존재의 본질과 현상의 구조에 대한 궁극적 탐구이고 이러한 탐구가 이성적 사유와 논리적 분석 및 명료한 언어적 표현에 의존한다면 언어와 철학의 밀착된 관계는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포괄적인 측면에서 관찰할 때 언어에 관한 철학적 관심은 거의 철학사와 함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철학적 사고는 실재의 세계에 관한 것이고 이러한 사고는 언어에 의해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실재의 본질과 그 구조를 제대로 밝혀내기 위해서라도 언어의 영향은 무시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언어를 실재의 거울 같은 것으로 보고 결국, "나는 언어 속에서 거처를 찾았으며 그것을 통해서 사물에 관한 진리를 규명하기로 하였다."고 『파이돈(99E)』에 술회한 것은 그러한 관심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통논리학을 대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도 언어와 논증의 일반형식을 박히려는 최초의 본격적인 시도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언어에 관한 철학적 관심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가령 베이컨(F Bacon)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Organon)』에 기초한 중세의 철학적 사고를 비판하며, 그의 『새로운 논리학(Novum Organum)』(xvlii)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단어를 잘못 선택하여 서투르고 부적합하게 사용하는 것은 이해를 놀랄 만큼 방해한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말들이 모르는 사이에 이해를 좌우하고 또 완전히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며, 심지어 사람들을 공허한 논쟁과 부질없는 공상으로 이끌어 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관심은 오늘날 언어철학에서 보여주는 것과 비교할 때 매우 피상적이고 또 언어를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서 반드시 철학적인 것도 아니다. 가령 플라톤은 언어에서 '거처'를 찾았으나 거기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으며 사물의 진리를 규명하기 위한 도구로 삼았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논리를 중요시하였으나 그것이 언어의 본질을 나타내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와 사유의 법칙을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베이컨도 비록 언어의 역할에 좀더 큰 관심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것을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로 여겼다는 점에서 선대의 철학자들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언어가 철학과 더욱 밀착된 계기를 마련한 것은 물리학과 심리학이 등장하여 존재론과 인식론의 과제를 크게 잠식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뉴턴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제시하여 물리학이 탄생하자 물질에 관한 탐구는 이미 철학자들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철학이 중세 이래로 다시금 정체성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확실성의 추구는 이제 인간 자신의 내면을 향해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흄은 스스로 인간학에서의 뉴턴이라고 자처하였으며, 칸트는 철학이 모든 이론적 탐구의 총칭처럼 생각되었던 종래의 철학관에 자기수정이 필요함을 지적하고 그 성격을 비판적 기능으로 제한하였다. 이른바 '이성 비판'의 형태로 나타난 그의 철학관에 의하면 세계에 관한 이론적 탐구는 이미 철학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철학의 임무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비판하고 검토하는 '선험적' 작업이 된 것이다.
이후 철학은 이른바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으로 간주되고 뉴턴의 역학은 '자연과학(Naturwissenschaft)'이라는 통념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즈음 심리학이 출현하여 인간의 심리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차츰 그 성과가 철학을 능가하게 되자 다시 한번 정체성의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후설(E. Husserl)의 현상학(Phänomenologie)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고 해석되며, 마르크스(Karl Marx)와 같은 사회철학자는 철학의 사명이 세계의 본질과 그 구조를 파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개조하는 데 있다고 하여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는 반면 이론적 측면을 도외시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한편, 분석 철학은 존재의 본질이나 현상의 구조가 경험과학의 고유하고도 직접적인 연구 대상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따라서 철학의 임무는 이러한 과학의 이론들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데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이론이란 언어의 체계에 불과하므로 결국 철학은 언어의 논리적 분석에 국한시켜야 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칸트의 이성비판과 유사한 형태의 언어비판만이 철학의 유일한 과제이며 또 사명이기도 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한편, 철학이 과학의 발달에 따라 언어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철학의 기본 개념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데서도 찾을 수가 있었다. 파블로프(T Pavlov)의 조건반사 실험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지탱되어오던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 개념이 도전을 받게 되었고, 프로이드(S.Freud)의 무의식에 관한 연구로 '정신이 곧 의식'이라는 등식이 쓸모 없는 허구로 밝혀졌다. 더구나 칸트를 비롯하여 많은 철학자들이 의심 없이 받아 들였던 절대적 시공개념이 아인슈타인(A. Einstein)의 특수 상대성 이론 때문에 더 이상 철학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과학의 성과로 인하여 전통적인 기본 개념들이 뿌리째 뒤흔들리게 된 것은 '언어적 전환'의 직접적인 동기나 되었고 철학자들로 하여금 언어에 관하여 본격적인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였다,
사실 학문이 분화되고 구체화됨에 따라 고도로 전문화 현상을 보임으로써 존재의 본질이나 현상의 구조를 어느 하나의 학문이나 몇몇 학자가 모두 규명하고 체계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철학도 과거에 시도하던 사변철학을 계속할 수 없는 이상 전통적인 접근 방식을 포기하고 모든 현상의 전체적인 통합을 얻기 위하여, 그리고 존재의 본질에 관해 간접적으로나마 접근하기 위하여 모든 이론의 체계를 구성하는 언어 현상에 대하여 논리적 분석을 시도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하고 또 필요한 작업이다. 더구나 이것은 비록 그 동안 소홀히 다루어 왔으나 본래의 철학적 임무와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분석철학이 철학의 고유한 임무에 관여함을 자처하고 언어에 접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언어철학이 여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동시에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충분한 여건이 철학의 안팎에서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철학자들이 스스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분석철학이나 언어철학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더밋(M. Dummett)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언어에 관한 철학, 다시 말해서 ‘언어철학이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철학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누군가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2)언어철학의 등장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사람은 프레게(G. Frege)였다. 그는 더밋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철학의 전면에 언어를 등장시키는 데 중요한 논점을 확립해 주었던 것이다. 먼저 프레게는 철학의 목표가 사고의 구조를 분석하는 데 있다는 근대철학의 전반적인 통념을 받아들인다. 그러한 통념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형성되었고 칸트가 비판철학의 형태도 완성시켰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프레게는 이러한 분석이 사고의 심리적 과정에 대한 탐구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철학은 심리학과 같은 경험과학의 일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분석을 위해 적합한 단 하나의 대안은 언어에 대한 분석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프레게는 원래 수학자로서 산수가 논리에 귀착 혹은 환원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는 논리적 언어와 논리체계의 기준을 제시하고, 이 과정에서 모든 용어를 정의되지 않은 기본적 용어로 정의하고 추론의 규칙을 열거하여 명제 논리 혹은 명제 계산을 구성해 내는 것이다. 프레게는 1879년 이렇게 해서 창안한 '기호논리'를 완전하게 체계화시켜서 개념의 기호법(Begriffsschrift)을 출간하였는데, 이것이 말하자면 언어철학의 산실이 된 것이다.
프레게가 이룩한 업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것이 파생하는 효과가 배우 크고 또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좋은 시력을 지니는 데 있다면 존재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세련된 언어를 갖추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레게에 의해 창안된 기호논리학은 바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장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지닌 문제점들을 많이 제거해 주었고 동시에 일상 언어가 범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자연성(Natualness)'을 극복해 낼 수 있었다.
물론 일상언어를 논리적으로 기초화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요하고 또 바람직한 것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 때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점차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프레게의 시도에는 여러 가지로 문제점이 있고 그 중에는 기술적인 것에 불과한 것도 있지만 본질적인 것도 많이 있다 여하튼 러셀의 매개를 통해 대부분의 언어철학적 과제가 비트겐슈타인에게 넘어왔고 그는 이러한 과제에 정면으로 대응함으로써 오늘날의 언어철학이 탄생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로 언어철학의 과제와 쟁점은 그 대응과정에 관한 논쟁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중심으로 살펴 볼 때 가장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프레게와 러셀의 입장을 수용하고 논리 실증주의의 이념을 이해하여 논리적 원자론을 완성하였을 뿐 아니라 이것이 전제로 하는 언어관을 수정함으로써 오스틴과 라일을 중심으로 한 일상언어학파의 형성에 계기를 마련하여 언어철학의 모든 과제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늘날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개념적 실재론 논쟁에 있어서도 더밋과 퍼트남은 물론 콰인과 데이빗슨, 로티에 이르기까지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수정하거나 확대하려는, 혹은 논박하거나 극복하려는 노력이 뚜렷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언어철학의 중요한 쟁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 의미와 과제에 관하여 검토해보기로 하자.
2)언어철학의 의미와 과제
언어철학은 언어의 본질을 규명하고 언어현상의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존재와 인식을 의미의 차원에서 탐구하는 철학의 한 분과이다. 그러나 다른 철학적 탐구와 마찬가지로 언어철학도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뜻으로 언어철학자의 입장은 슬릭(M. Schlick)이 말한 바와 같이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는 동안 그 배를 수선해야 하는 선원의 입장과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배는 언어철학 뿐만 아니라 언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언어학이나 언어 심리학 같은 학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접 학문들과 비교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수 있다.
언어학은 자연언어의 음운(phonology)구조, 문법(grammar)구조, 의미(lexicology)구조 등을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이러한 언어현상에 내재하는 법칙과 체계를 밝히고자 하는 학문이다, 이와 같이 언어학은 언어의 사실적 작용과 기능의 분석 및 그 기술에 집중되어 있다. 이에 비해서 언어철학은 자연언어 외에 인공언어 즉 수학이나 논리학과 같은 형식언어에도 관심을 가지며 언어에 관한 분석과 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본성과 언어사용이 전제로 하는 것 및 그 함축이 무엇인지 다시 말해서 언어의 논리적 가능성에 깊이 관여한다. 특히, 중요한 차이점에 대해 김여수(金麗秀)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언어학은 언어의 의미를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보고 그 구조와 유도과정을 연구하는 데 비해 언어철학은 언어가 어떻게 해서 무엇인가를 의미할 수 있는가. 즉 언어와 세계, 언어와 사유 그리고 언어와 문화와의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3)
그는 이어, “언어학과 언어철학의 관심들이 부분적으로 중시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4)그것은 물리학과 과학철학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학문인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언어철학은 주로 언어의 의미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언어심리학과 유사한 점을 지리고 있나. 언어심리학의 과제는 인간의 언어적 행위나 표현, 혹은 이와 관련된 심리적 과정을 이해하는 것인데,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객관적인 사실들을 근거로 하여 의미의 습득과 이해의 과정을 밝히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언어철학의 일차적인 관심은 언어 행위에 관한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가능하게 하픈 논리적 구조와 관계, 다시 말해서 의미의 개념과 원칙을 밝히는 데 있는 것이다.
가령 언어심리학에서는 어린이가 어떤 낱말의 뜻을 터득하는 과정에서 그 뜻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알고 있다고 가정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김교수가 잘 지적해 주는 바와 같이 이러한 경우 "서로 다른 전제들 사이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언어철학적 탐구가 필요하게 된다".5) 낱말과 그 의미 사이에 형성되는 논리적 관계가 제대로 이해되어야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언어철학을 이와 유사한 경험과학들인 언어학 및 언어심리학과 비교해 봄으로써 그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경험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거기서 자양분을 얻지만 언어현상의 경험적 사실에 대한 탐구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것이 언어현상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지만 분석철학의 한 분과로서 그 특징을 유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을 강조하고 또 언어철학의 과제를 심층적으로 탐구해 나갈 때 그것은 분석철학 일반과 엄밀하게 구분하기가 어려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분석철학이 존재의 본질과 현상의 구조를 언어 분석적인 방법으로 탐구하는 학문이고 언어철학은 이 학문의 여러 분과 중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더구나 언어현상은 분석철학이 다루는 여러 현상 중에 하나일 뿐이기 때문에, 양자는 당연히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분석철학을 언어적 철학(Linguistic Philosophy)이라고 하여 언어를 탐구의 대상으로 하는 언어철학(Philosophy of Language)과 구분하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6)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언어에 대한 철학적 관심은 단순히 그것이 의사소통의 수단이 된다거나 그것을 다른 동물보다 더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언어에 대해 철학자들이 관심을 쏟는 것은 그것이 존재의 본질과 현상의 구조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 관해 의사를 교환하는 수단으로 쓰일 뿐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고 또 조작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언어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곧 분석철학과 언어철학의 차기는 개념적인 차이이거나 접근하는 방식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철학은 곧 언어비판'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먼저 언어의 기능을 중심으로 언어철학의 과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도대체 우리는 언어의 분석을 통해서 철학적 문제를 어떻게 또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검토해 보자.
우리는 언어를 주로 다른 사람들과 의사를 소통하는 데 활용한다. 그런데 우리가 의사를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언어에서 사용되는 낱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된 의미가 공통점을 지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나의 단어가 의미를 지니게 되는가. 이것은 언어철학의 중심과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의미'란 그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 혹은 존재의 세계에 관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단어로 지칭하는 인식의 산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미를 분석한다는 것은 존재의 세계와 인식작용을 좀더 심층적이고도 체계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어떤 낱말의 의미가 항상 고정되어 있는 점이 아니며 또 그 낱말이 무엇인가를 일정하게 지칭한다고 쉽사리 단정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 현상의 분석을 통해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의 기능을 검토해 보지 않으면 반된다. 가령 천문학자가 보아낸 별의 위치와 숫자와 크기가 망원경의 성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과 같이 존재의 본질과 현상의 구조도 결국은 언어의 기능과 필연적 관계를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6)가령 이명현은 “언어적 철학이란 말은 메타이론으서의 언어분석 철학을 철학의 기본과제로 삼는 분석철학의 별칭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이어 "언어 철학은 언어를 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철학의 한 영역 내지 분야를 지시하는 말이다”라고 설명한다.
「언어와 철학」,「이성과 언어」,문학과 지성사 1982,43족 참조
일반적으로 우리는 언어의 기능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는데, 표현(expression)과 인식(cognition)과 수행(performance)이 그것이다. 이것을 매우 엄격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또 관점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질 수 있으며 그 중요성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리하는 것도 사실이나 대체로 이러한 구분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언어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이제 그 특징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우리들 자신의 감정이나 희망, 소원 등을 밖으로 나타내 준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표현의 기능은 다른 동물도 지닌다는 점에서 포퍼(K. Popper)는 이것을 신호제시(Signalling)의 기능과 함께 가장 낮은 단계의 현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를 비롯한 예술 형식에서도 그 전형적인 예를 찾을 수 있으며, 복잡하고 차원 높은 체험을 통해서 생기는 영광과 환희와 비탄과 좌절을 이러한 표현의 기능를 통해서 우리는 언어에 담는다. 여기서는 객관적 세계의 본질과 구조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감정을 표출하는 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물론 표현적 기능도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반응에 따라 어느 정도 객관적 세계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나 이러한 기능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언어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의 기능이다. 언어는 자아와 세계에 관한 인식에 있어서 매개의 역할을 하는데 인간의 지적 탐구는 언어의 이러한 기능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객관적 지식은 언어행위의 산물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지식으로 우리는 인간의 특징을 나타낼 뿐 아니라 다른 존재를 지배할 능력을 지니기 때문에 결국 언어의 인식적 기능이야말로 인간의 위력을 가장 잘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기능을 통해서 사회현상을 이해할 뿐 아니라 역사를 예측하며 자연의 변화를 조종하고 또 통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포퍼는 이 인식적 기능을 다시 서술적(descriptive)인 것과 논증적(argumentative)인 것으로 나누고 이 두 기능에 의해서 우리는 인식주관의 심리적 상태에 얽매이지 않는 객관적 지식을 갖게 된다고 한다. 특히, 그는 논증적 기능을 최고의 것으로 평가하고 최근에 진화된 기능이라고 주장하며 이렇게 설명한다.
그 진화는 논증적, 비판적 및 합리적 태도의 강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과학적 진화를 이끌었기 때문에 언어의 논증적 기능은 지금까지 유기체의 진화 과정에서 출현한 생물학적 적응 장치 중에서 가장 강력한 도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7)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언어의 수행적 기능이다. 언어는 단순히 자기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뿐 아니라 자기가 의도하는 것을 실천하는 수행적 기능도 지닌다, "내가 너에게 세례를 준다., "나는 이것을 '밤비‘라고 이름짓는다. ", “나는 너에게 빛 갚을 것을 서약한다" 등과 같은 발언은 수행적 기능의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나는 무엇을 표현하거나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주고 이름을 지으며 서약을 하는 등 어떤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스틴(J. L. Austin)은 일상 언어의 기능을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수행적 기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철학자들은 언어의 인식적 기능에만 관심을 집중시켜 왔기 때문에 철학적 문제들을 야기시켰을 뿐 아니라 그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8)
전통적으로 우리는 언어를 하나의 기호체계로서만 취급해 왔기 때문에 말하는 행위와 언급되는 상황이 언어의 기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 왔던 것이다. 이제 이러한 언어의 기능, 즉 표현과 인식과 수행의 기능을 근거로 하여 언어철학의 중심과제가 무엇인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포괄적으로 보면 언어에는 세 가지 계기가 있다. 언어 혹은 기호 그 자체와 이 언어가 지칭하는 대상과 이러한 대상에 대해 언급하는 화자가 그것이다. 모리스(Charles Monis)는 이 계기들을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이론을 '기호론(semiotics)'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세 가지 분야로 나누어서 취급하였다. 구문론(syntax, syntactics)에서는 기호들 사이의 형식적인 관계를 다루고, 의미론(semantics)에서는 기호와 그것들이 표현하는 대상들과의 관계를 다루며, 화용론(prasmatics)에서는 기호와 기호를 해석하는 화자와의 관계를 다룬다는 것이다.9) 이 분야들을 카르납(R. Carnap)은 다음과 같이 설명해 준다.
어떤 연구에서 화자 즉 그 언어의 사용자가 분명히 언급되면 그것은 화용론의 분야에 속한다. 언어사용자를 떠나서 어떤 표현과 그 지시체 사이의 관계만을 분석한다면, 그것은 의미론의 분야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지시체를 떠나서 표현들사이의 관계만을 기술한다면 그것은 구문론에 속하게 된다.10)
이와 같이 강조하는 점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언어에 대한 철학적 접근에서 세 분야를 구분하는 것은 분명하고 또 바람직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제 이것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구문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하나의 언어적 기호가 다른 언어적 기호가 동의성(synonymity)관계에 있다는 것, 그리고 특히 분석성(analyticity) 관계에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해명하는 일이다. 이것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으면 명제의 진위를 가치는 작업에 차질이 오고 따라서 언어가 인식의 문제에 미치는 영향이 심각해지기 때문이다. 또 어떤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지시하는 규칙의 문제가 제기된다면 이것도 구문론의 주제가 된다.
문법에서는 구문론(syntax)이 문장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규칙을 설명한다. 가령 영어에서 대명사가 명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은 구문론의 규칙 중에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언어를 일반적으로 규칙을 탐구할 때 우리는 구문론에 관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구분하기 위해 전자를 “문법적 구문론(grammatical syntax)"라고 하고 후자를 ”논리적 구문론(logical syntax)"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해석의 문제가 개입되지 않으며, 그러므로 형식체계의 속성이나 정관사(the)와 '그리고' 등 자연 언어 중에서도 형식적 요소를 지니는 것이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는 이러한 요소들이 진리치를 좌우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면밀히 검토되어야 하고 언어철학의 발족도 이러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의미론에서는 언어가 객관적 대상이나 주관적 사유를 표현한다는 사실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언어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대상 및 사유와 일정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의 무의미한 기호로부터 구체적 의미를 지니는 표현이 된다. 의미론은 바로 여기서 맺어지는 관계를 분석하고 해명하는 작업이다. 가경 '고양이'라는 단어와 그것이 의미하는 대상, '파랗다'와 그것이 의미하는 성질 사이의 관계를 알고 싶다면 의미론적 탐구를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미론에서는 기호들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을 어떠한 식으로 표현하는지를 문제 삼는다. 그러나 철학과 언어학의 접근방식이 조금씩 다른데, 철학자들은 의미의 본질에 관여하는 반면 언어학자들은 구체적인 자연언어에 대한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의미의 변화를 분석한다. 그러므로 의미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독자적인 분야가 되어 '의미 이론(theory of meaning)'으로 발전하고 구체적으로는 '지칭 이론(theory of reference)'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더욱 심층적으로 다루고 포괄적으로 접근하면 의미론이 화용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며 심지어 의미이론이 가능한 것인지의 문제도 제기된다.
끝으로 화용론에서는 기호를 매우 넓게 해석하여 언어적 기호와 그 화자뿐만 아니라 발언이 이루어진 상황까지 문제 삼는다 사실 우리가 말을 한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의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행위(speech act)와 기호체계로서의 언어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해명할 필요가 있다. 언어적 기호가 말하는 행위 속에 쓰여질 때 그 기호의 의미는 어떤 영향을 받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말을 한다는 행위는 결국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므로 언어와 문화적 맥락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성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화용론은 언어적 해명으로서 특히 언어가 사용되는 문화적 맥락에서의 관계에 관심을 쏟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언어의 세 가지 기능을 통해서 그 본질을 조명하고 이것을 근거로 하여 언어철학의 세 분야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언어의 기능을 반드시 세 가지로 구분할 필요가 없고 또 언어의 본질 같은 것이 있는지, 그 자체가 언어철학의 중요한 쟁점이 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접근을 통해서 우리는 언어에 대한 철학적 관심이 어떠한 것인지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언어의 세 가지 계기를 중심으로 언어철학의 세 분야를 나누어 보았지만 각 분야들이 서로 겹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구분 못지 않게 상호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이러한 분야에서 언어 철학의 과제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또 그 쟁점들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과제들과 쟁점이 서로 얽혀있기 때문에 이것을 각론으로 체계화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제들을 구체화하고 그 쟁점들에 뚜렷한 입장을 제시함으로써 더욱 부각시켜 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 보기로 하자. 그가 비록 오늘날 쟁점이 되고 있는 언어철학의 과제를 모두 제기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러한 쟁점들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고 또한 그것이 그의 입장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극복하려는 형태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3. 언어철학의 전개와 쟁점
1)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과 언어철학의 전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프레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집합 논리학(class logic)을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명제논리학(propositional logic)을 창안해 냄으로써 언어철학이 탄생할 수 있는 획기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러셀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것은 "추상적 상상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켜 주었으며 복잡한 사실을 분석하는 데 적용시켜 볼만한 가설을 한없이 많이 고안해 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러한 업적을 갈릴레오의 등장에 비견할 정도로 파격적인 것으로 평가한 러셀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언어철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11)그도 논리학이 수학처럼 일상언어의 모호성과 자연성으로부터 단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수학과 논리학의 결합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수학이 논리학의 일부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러셀은 많은 문제에 부딪쳤다. 우선 수학을 집합론으로 해석하여 이것을 매개로 논리학으로 환원하려 하였으나 이른바 '러셀의 역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언어와 세계의 동형성을 전제로 「논리적 원자론」 을 제시하였으나 여기서 양자 간의 대응관계를 밝혀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러셀은 프레게의 문제점을 이른바 한정기술이론(theory of definite description)으로 해결하여 언어철학의 중심과제를 제시한다.
가령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라는 문장을 검토해 보자, 프레게에 의하면 이 문장은 의미는 있지만 지칭체 즉 진리치는 없다고 한다. 그 부정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결국 러셀이 주장하는 배중률을 어기게 된다. 또한 "현재 프랑스 왕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장도 현재 프랑스 왕이 아무런 대상도 지칭하지 않으므로 진위를 가릴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그의 입장이 가지는 문제점들 중의 일부이다. 12)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러셀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유명사와의 관계 속에서 '한정기술어구'를 제거하자고 제안한다. 물론 이렇게 하면 프라게의 문제도 해소되고 배중률도 지켜질 수 있으나 고유명사를 일종의 기술어구로 간주해야 하는 문제점을 남긴다, 가령 크립키(s. Kripke)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고유명사가 '알렉산더의 선생'이라는 위장된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할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를 가르쳤다는 것은 필연적 진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적 사실에 불과하므로 고유명사를 기술의 일종으로 취급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크립키는 어떤 대상에서 본질적인 특성은 어떠한 가능세계에서도 그 대상에 속해야 한다는 '고정 지칭어' 개념을 도입한다. 그러나 콰인은 양상개념을 술어논리체계에 도입하는 것을 거부한다.
러셀이 구상했던 계획은 이밖에도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일단 비트겐슈타인에 의해서 계승되고 발전되었으며 논리 실증주의에 의해서 확대 적용되었는데, 그 핵심은 언어가 언어의 논리적 형식에 근거하여 특징 지워진다는 점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명제가 실재를 제대로 묘사하는 한 언어의 논리적 형식은 실재의 논리적 형식에 좌우된다. 사실 이러한 형식을 갖추어서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말로 표현해 볼 도리가 없다. 언어란 것은 무엇이 실재이고, 또한 현실적으로다 논리적으로 가능한지를 서술하고 표현하며 특정 지을 수 있을 뿐이다. 논리적으로 가능한 영역의 밖에 있는 것은 의미 있게 묘사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듯이, "사실에 대한 논리적 그림이 사유"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통 '언어의 그림이론(the picture theory of language)'이라고 한다.13)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은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언어이론 흑은 의미이론으로 나온 것인데, 여기에는 요소명제의 성격과 대상과의 대응관계 혹은 요소명제 사이의 논리적 관계 등이 좀더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 가령 그는 요소명제가 사실을 그려내고 그 명제들은 진리함수에 의해 과연 세계를 제대로 그려내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 이러한 점플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논고」에서 논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다. 무엇보다 그는 논리가 어떻게 언어와 연관을 맺고 있으며, 이것들이 또 존재의 세계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묻는다 결국 그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처럼 논리가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적어도 이것과 관계가 있다는 입장을 나타낸다. 그러나 전통적인 견해와 달리 그는 논리와 언어가 존재 그 자체보다 철학적으로 더 중요한 과제임을 강조하게 된다. 그것은 존재의 세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세계에 돌입할 수 있는 철학적 통로는 논리와 언어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철학의 전면에 논리와 언어를 부각시킨 이유가 무엇일까.
비트겐슈타인은 우선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존재의 세계에 관하여 생각하고 또 이야기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런데 우리의 사고 혹은 언어와 이 세계 사이에 무엇인가 공통된 것이 없다면 우리의 생각과 언어적 표현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 양자 사이에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을 언어와 세계의 구조에서 찾는다. 그리고 한쪽의 구조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면 다른 쪽의 구조에 관한 지식도 동시에 얻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논리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데,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언어의 구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또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논리는 세계의 구조와 관계를 맺고 또 그것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의 임무가 논리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있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본질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논고」에 의하면 논리적 분석의 방법으로 어떤 명제가 실재하는 사실임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떠한 형식을 갖게 될 것인지 알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논리를 존재 대신 언어와 밀착시키면 가령 파르메니데스의 사변적 형이상학을 피할 수는 있지만 이른바 '언어적 관년론(linguistic Idealism)'을 함축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내가 아는 세계의 구조는 나의 언어에 의해서 한정되며, 따라서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그가 "세계는 나의 세계이다. 이것은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명백해진다."고 주장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것은 현대논리가 언어에 너무 집착함으로써 생긴 필연적 귀결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그림이론에 의하면 의미 있는 명제는 사태를 반영하고, 사태는 대상의 연계로 형성된다. 따라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태가 형성될 수 없고 그러한 경우에는 사태에 대한 그림도 있을 수 있으므로 의미 있는 명제도 규정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의미 있는 명제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대상'이라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 논증에서 분명히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모든 명제의 환원적 분석에는 최종점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 문제로 대두된다. 언어가 의미를 지니려면 분석이 어느 지점에서 끝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제의 분석에서 단순체로서의 대상을 자칭하는 이름이 없다면 분석이 무한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어떠한 형태로든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서 대상의 존재는 그림이론의 전제로 받아들여진 것이지 증명된 것은 아니다.
논리실증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 담긴 사상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관념론으로부터 구제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본질적으로 경험론적 전통에 서 있는 이 학파는 비트겐슈타인과 러셀의 입장을 종합한 셈인데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에서 감각 소여(sense data)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감각적 경험을 근거로 하여 대상을 규정하고자 한다. 또한, 이 학과는 의미 있는 명제는 진위를 결정할 수 있는 진리조건을 전제로 하면서 종합명제와 분석명 제로 나누어진다는 경험론적 전통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인식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종합명제는 감각적 경험을 근거로 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한다. 검증원리(verification principle)는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다.
검증원리란 의미를 규정하는 기준으로서 어떤 명제의 의미는 그 명제를 검증하는 방법이라는 주장이다. 그 방법은 주로 과학에서 사용하는 경험적이고 실험적인 방법으로서 검증원리를 엄격하게 적용할 때 종교나 윤리 혹은 미학에서 사용하는 표현들이 모두 무의미한 발언이 되며 심지어 중요한 과학의 법칙이나 검증원리 그 자체로 무의미한 명제로 판명되고 만다. 더구나 콰인(W. V. Quine)은 논리실증주의의 진리조건의 전제인 종합명제와 분석명제의 구분이 경험론적 교설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지적하여 논리를 언어의 본질로 삼고 그 구조를 드러내어 존재의 본질과 천상의 구조를 탐구하고자 하는 언어철학의 전개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게 되었다.15)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는 논리를 언어의 본질로 이해하고 언어는 존재의 세계를 제대로 그려냄으로써 의미있는 표현이 된다고 보았으나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와 인식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난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가장 잘 파악한 사람은 바로 비트겐슈타인 자신이었다.
후기에 들어와서도 비트겐슈타인은 여전히 '철학은 곧 언어비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며 철학적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언어의 본질과 기능과 활용의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이제 그의 언어관은 그림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언어가 인식기능을 지니고 있고 그 중에서 논리적 구조를 드러내고 논증의 형식을 택할 때 세계에 관하여 지식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논리가 곧 언어의 본질이 아니며 인식이 언어의 유일한 기능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기능도 더욱 아니다. 따라서 어떤 표현의 의미를 찾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 세계를 제대로 그려내었는지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맥락에서든지 바로 그 맥락에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였는지에 달려있다. 언어의 용법은 다양하고 쓰이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쓰였는지 모르면 그 의미로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언어관은 파격적인 전환이 아닐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탐구」에 개진된 새로운 언어관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언어는 어휘를 도구로 사용하는 행위로 취급할 때 가장 잘 이해된다.
2, 어휘들이 일제로 활용될 때 무한한 다양성을 나타낸다.
3. 어떤 발언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거기서 어휘들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이해한다는 뜻이다.
4. 언어는 대상을 지칭하는 어휘들로 구성된다는 언어관은 잘못된 견해이다.
5. 어떤 어휘의 활용을 이해하는 것은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는 것과 유사하다. 6. 어떤 게임에 참여한 사람이 새로운 규칙을 만들거나 규칙을 잘못 적용할 때, 혹은 게임을 경직된 방식으로 이해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과 마찬가 지로 언어 사용자가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잘못 이해할 때 혼란이 생긴다.
7.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활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16)
이러한 입장의 전환에 계기가 된 배경을 살펴보자.
「논고」의 그림 이론에 의하면 한 명제가 그림으로서 사건의 상태와 일치한다고 할 땐 그것은 그림의 여러 구성요소와 실재의 여러 구성 요소 사이에 논리적인 구조가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조 때문에 의사소통은 가능하고 그 구조가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단순명제로 환원된 상태일 때 완전한 의견의 일치를 도출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단순명제란 무엇인가.
세계는 사물이 아니라 사실로 분석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 그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여기서 나타나는 차이는 세계 자체의 차이가 아니라 결국 언어의 차이로 나타난다. 따라서 단순명제나 여러 사태도 절대적으로 단순하다고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절대적 단순성을 포기하면 의미의 개념도 달라지고 동시에 언어관이 전환될 수밖에 없다. 가령 논고에서 실질적인 고유명사의 의미들은 고유명사로 간주되었다. 어떤 이름의 의미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 단순성을 말할 수 없으면 이러한 식의 의미도 지탱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를 포기하면 다른 식으로 규명해야 하는데 비트겐슈타인은 새로운 의미론을 제시하기보다 어떤 어휘가 어떤 언어게임(language game)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살펴보기를 제안하고 있다. 언어의 본질을 찾기보다는 다양한 언어게임을 관찰함으로서 구체전이고 현실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탐구」에서 언어에 '본질'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는지 묻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공통된 그 무엇을 제시하는 대신, 나는 이러한 현상들이 모든 것에 동일한 낱말을 사용하도록 하는 공통된 한가지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하게 상이한 방식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모두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관계 혹은 관계들 때문이다.17)
우리가 본질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는 본질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언어에는 본질이라는 것이 없고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게 하는 복잡한 관계들이 있을 뿐이다. 이 관계를 비트겐슈타인은 서로 겹치고 교차되는 유사점들의 그물18)이라고 묘사하고, 이것은 마치 가족의 구성원들이 서로 닮은 것과 같다는 점에서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라고 표현한다.19)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러한 언어관이 함축하는 언어철학적 의미는 대단히 크다고 볼 수 있다. 언어철학이 언어의 본질과 언어현상의 구조를 탐구하여 존재와 인식의 문제를 규명하는 작업이라면 언어의 본질을 부정하고 언어현상의 구조에 대한 체계적 탐구의 가능성을 거부할 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곧 언어철학의 성립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얻은 결론이고 그가, 철학이 이론적 체계를 세워서 사물과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오용을 통해서 빚어진 철학적 질병을 치유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탐구」를 중심으로 개진된 언어관과 이러한 언어관의 영향을 받아 전개된 언어철학은 오히려 더욱 구성지고 다양하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로티(Richard Rorty)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더욱 급진적으로 해석하여 언어철학은 물론 분석철학의 성립 자체를 부정한 철학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그가 도달한 결론으로부터 출발하여 언어철학적 접근방식을 새롭게 개발하고 그 주체를 포괄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철학 외의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활발하게 탐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20)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직접 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독자적인 일상언어학파를 구상한 라일(G. Ryle)과 오스틴(J.L. Austin)의 등장이다. 이들은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는 일상언어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그 용법에 주의를 기울였으나 철학이 단순히 치유의 기능에 만족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라일은 철학의 임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의 논리적 구조를 바로잡는 데 있다고 주장하며 이른바 ‘범주습관'에 의해서 저질러진 '범주오류'를 '범주수련'으로 교정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그는 그 전형적인 예를 데카르트적 심신 이원론에서 찾고 일상언어 분석의 방법을 적용하여 심리철학분야에서 행태주의 일원론을 도출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심리철학의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생태심리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편, 오스틴은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체계화하여 실제로 언어적 상황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지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언어가 '발언'이라는 행위 즉 말을 한다는 일종의 수행적 사건으로 간주하고 그 발언이 무엇을 수행하였으며 그 수행의 결과에 따라 어떤 의미가 형성되는지 찾고자 하였다. 가령 그는, "내가 주례앞에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결론에 관해 보고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결혼 생활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언어철학의 화용론 분야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업적은 물론 언어학이나 언어 심리학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22)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언어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임무는 언어의 다양한 용법과 무수한 기능을 나열하거나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일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결국 언어철학적 과제를 다루기 위한 예비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철학은 철학의 한 분과이기 때문에 언어의 본질과 언어현상의 분석을 통해서 존재와 인식의 문제를 조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떼 언어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의 기능이며 그 기본적인 목적은 의사소통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가령 언어에 있어서도 자기의 감정을 표현한다든지 어떤 일을 수행한다는 것은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언어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언어가 무엇을 요구하고 명령하며 약속하는 등 수행적 기능을 한다는 점이 아니라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철학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언어철학자들이 이와 관련된 두 개의 개념 즉 ‘진리와 의미'에 집착하고 좀더 바람직한 의미이론의 창출에 몰두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는 그 의미론적 차원 즉 문장이나 발언의 진위에 대한 가능성 때문에 의사소통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오늘날의 언어철학자들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의미이론의 형성과 발전을 중심으로 언어철학의 현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2)의미이론과 언어철학의 쟁점
의미이론은 대체로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첫째는 동사로서의 ‘의미하다'를 해명하는 문제이고 둘째는 어휘나 문장의 의미를 규정하는 문제이며 셋째는 '의미'의 종류를 분류하고 이것이 다른 개념과 어떠한 관계를 지니는지 조명하는 문제이다. 이것을 엄격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우나 이 세 가지 접근방식을 나누어서 검토하면 '의미'의 다양성과 그 적용범위가 매우 광범위하게 되어서 언어철학의 거의 모든 주제가 이 이론을 통해 다루어질 수 있다.
우선 동사로서의 '의미' 즉 '의미하다'를 살펴볼 때 그것은 다양한 것을 지칭할 수 있는데, 이 경우 그것은 문장이나 명제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이나 행위, 예술작품은 물론 자연적 사건, 상태, 과정 등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먹구름은 소나기를 의미한다."나 "나의 삶은 의미가 없다.“나 ”바둑은 나에게 많은 것을 의미한다.“나 "혀를 내미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등의 용법이 있으며 "당신이 지금 한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등으로 쓰일 수 있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다양한 용법에서 '의미'라는 말의 필요충분조건을 찾기보다는 그 활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하여 의미이론의 정립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 다음 중요한 방향은 어떤 어휘나 문장의 의미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여기서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들이 무엇을 지칭하는지의 문제가 가장 중심적인 과제가 되며 그것이 화자가 달라지고 상황이 바뀜에 따라 어떻게 의미가 변화하는지 검토하는 일이 중요하다. 특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 가령 황금 산이나 천마, 천사 등을 지칭하는 단어들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문장에서 쓰일 때 어떠한 작용을 하는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쟁점이 된다. 이와 같이 어휘가 어떤 문장에서 쓰일 때 의미를 지니지만 그것이 제대로 쓰일 때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하며, 어휘마다 제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어휘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의미이론에서 중요한 접근방식은 이 이론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그 특징들을 살피며 다른 이론들과 비교하는 작업이다. 사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부분이 언어철학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단어나 문장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고 그 기준을 설정한다는 것은 체계적인 의미이론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또 어느 이론도 이론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검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비트겐슈타인의 탐구」가 의미이론의 성립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그 함축은 너무나 충격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더밋에 의하면 인식론을 중심으로 한 데카르트적 확실성의 추구는 철학적 논리학 옥은 좀더 포괄적으로는 의미론으로 대체시킨 비트겐슈타인에 의해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 이 이론을 체계적으로 확장시키지 못하고 개념적 혼란을 제거하는 것으로 철학의 임무를 완수하였다고 믿는 태도를 그는 격렬하게 비난한다. 철학은 치유가 아니라 이론의 체계이므로 무엇보다도 의미이론을 정립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의미이론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가 의미에 관한 이론이 의미에 관해서 아무런 빛을 던져주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의미의 본질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또 이것을 일반화할 때 오히려 중요한 요소를 잃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이 그가 "의미를 찾지 말고 그 활용을 살펴보자"고 한 진정한 이유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입장을 또다시 체계화하고 일반화하여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시켰을 때, 다시 말해서 그것을 의미의 , '활용론'이라고 이해했을 때 다른 이론들 못지 않게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활용'이라는 표현 자체가 모호할 뿐 아니라 활용에 의해서 의미가 모두 드러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더밋의 다음 논평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체계적인 의미이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혹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라면 오늘날 연구 성과에 비추어 볼 때 패배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상식적으로도 분명히 사실과 상반된다. 어떤 언어를 숙달한 사람이 자기가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던 그 언어의 무한히 많은 문장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촘스키로 대표되는 현대언어학자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 자신에 의해서도 강조된 사실이다. 그런데 화자가 각기 그 언어의 문장을 구성하는 낱말들의 사용을 지배하는 원리가 무엇인지 이미 은연중에 파악했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이러한 사실은 설명할 도리가 없다.24)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화자가 묵시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원리, 그리고 그것이 그 언어의 낱말들에 갖가지 의미를 부여하는 데 기여하는 일반원리가 있다면 그러한 것들을 분명히 밝혀 주는 네 이론적인 장애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 언어의 숙달을 가능하게 하는 그러한 원리들에 대한 명확한 언명은 바로 그 언어에 대한 완전한 의미이론이 될 것이다. 25)
그렇다면 그러한 원리들을 제시하는 의미이론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이제 이러한 이론들을 간단히 소개하고 여기에 얽힌 쟁점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라이스(H.P Grice)는 의미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누는데, 하나는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자연적인 상태나 사건과 연관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나 상징, 단어나 문장 등 인위적인 대상에 적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추분의 배경에는 의미가 가치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측면과 자연적으고 주어진 측면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러한 측면 중에서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는지 흑은 이 양자가 어떠한 식으로 연결되는지에 따라 다른 의미이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의미이론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주관과 대상 혹은 언어적 표현과 그것이 표현하고자 하는 언급대상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이른바 관계론(Relational Theory)의 형태를 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관계를 어떠한 형태로 규정하는지에 따라 의미이론이 다양해지고, 그 어떠한 종류의 관계로도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할 때, 파격적인 이론이 되거나 의미이론 자체를 거부하는 입장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고전적인 의미이론은 '지칭이론(Referential theory)이다. 그 극단적인 경우를 '명칭이론(naming theory)이라고 하여 "모든 명칭에는 각기 각개에 상응하는 대상이 있다(unum nomen unum nominatum)"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엄정식'이란 고유명사는 엄정식이란 사람을 지칭하며, '사람'이란 일반명사는 러셀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보편성인 인간성을 지칭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붉은'은 붉음을, 또 '뛰다'는 뛰어감을 지칭하며 아마 '만약'은 의심이나 미지의 상태를 지칭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의미의 근거를 지칭해서 찾으면 표현의 숫자만큼이나 존재의 숫자도 많아지고 그것이 과연 어떠한 식으로 대응하는지의 문제를 밝혀야 하는 부담을 안게 묀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 구조와 사실의 구조 사이의 대응이라고 설명하였지만 사실의 내용을 규명하지 못함으로써 언어적 관념혼의 위험을 안게 된 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변형된 관계이론이 나오고 또한 이 관계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려는 시도가 전개된 것이다.
지칭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하나는 지칭의 방법을 단순한 대응이 아니라 좀더 구체적인 관계로 설명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지칭의 대상을 실재에서 관념으로 바꾸는 방법일 것이다. 지칭의 방법을 구체화하여 의미이론을 제시한 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검증이론(verification theory)으로서 검증방법을 통해서 의미의 본성을 제시할 뿐 아니라 바로 그 방법이 어떤 명제의 유의미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는 입장이다. 둘째는 행태이론(behavioral theory)으로서 언어현상을 행태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조명하여 발언의 의미를 특정한 상황에서 청자에게 일으키는 반응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것은 인과이론 (causal theory)이라고도 하는데 발언의 의미는 원인으로서의 발언이 반응으로서의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기 때문이다.
한편, 대응의 관계를 규명하기보다는 그 대상을 새롭게 규정하는 의미이론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관념형성이론(ideational theory)이다. 이 이론은 모든 표현에 대응하는 것이 지칭되는 대상으로서의 .실재가 아니라 관념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지칭이론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여 언어적 표현과 정신적 관념사이의 관계로 해명한다. 이제 이러한 입장들과 관련하여 어더한 문제들이 쟁점으로 부각되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검증이론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자연과학의 dudgd을 받아 실증주의적 경험론에 입각하여 자연과학의 명제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채택된 이론이었다. 그런데 이 이론에서 제시하는 검증원리를 적용하려면 감각적 경험에 의해 객관적인 사실들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포착된 사실들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객관적으로 이해되고 전달되기 위해서는 명제형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경험은 이 과정에서 과거의 경험이나 관찰과의 연관 속에서 일반 개념에 의해 분류되고 해석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지 변질된 상태로 명제화된다. 이렇게 변질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의 경험은 해석되고 묘사되며 의미도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문장과 이론의 관계가 명시되기 어렵다는 점을 콰인은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문장이 그 이론에 포함되는지, 어떤 것이 변항의 값으로 간주되는지, 그리고 어떤 것이 술어기호를 만족시키는지 등을 우리의 언어로 충분히 밝혀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한 어떤 이론을 우리 자신의 언어로 상대적으로 해석하고 또 우리 이론(home theory)에 상대적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것은 배경이론의 대상에 상대적으로만 해당이론의 대상을 결정한다.26)
이것은 사실이 확립되기 전에 이론이 성립될 수 있으며 이론이 성립되지 않으면 사실도 확립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관계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콰인은 이러한 점을 근거로 하여 환원적 접근을 비판하고 경험론을 일종의 전제론으로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의미이론에 있어서도 전체론적인 입장을 취하여 경험적 사실과 체계적 이론이 조화를 이루어야 문장의 의미가 확립된다고 주장한다. 사실 비트겐슈타인도 경험론자는 아니지만 의미의 성립에 관한 한 이러한 입장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생기는 쟁점은 이론 전체와 개별적인 문장인 하나의 분자 중에서 이론 형성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가리는 문제가 된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분자와 전체는 서로 보완관계를 이루어야 의미가 확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양자 중에서는 분자인 문장들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택할 수도 있다. 의미의 검증주의를 고집하는 더밋은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언어의 어떤 단편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주장하며27) 그렇기 때문에 "각 문장은 언어 전체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파악되는 개별적인 내용을 지닌다."고 역설한다.28)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검증이론이 성립되기 위해 전체론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검증의 기준과 방법을 좀더 세련되게 정립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더밋에 의하면 전체론을 택할 경우 언어의 습득을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원자 문장의 의미를 규정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결국 의미이론의 가능성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콰인은 어떻게 언어의 습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콰인에 의하면 번역하는 데 필요한 의미를 대조하려면 관찰 가능한 자극(stimulus)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해야 하는, 다시 말해서 반응성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행태주의적 전제가 필요하다. 언어란 다른 사람의 행동을 토대로 해서 습득되는 사회적 기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미는 정신적 대상에 붙이는 이름표가 아니라 인간 행위의 속성으로 해석된다.
어원이 전혀 다른 생소한 말을 번역하는 원초적 상황에서 행태에만 의존하면 확정적 의미를 부여할 도리가 없다. 비록 행태는 일치하지만 한 개 이상의 해석체계를 가질 수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고 이러한 경우에는 어느 것이 올바른 번역인지 결정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관찰 가능한 행태들의 총체와 양립이 가능하면서도 하나의 문장에 대해서 서로 다른 진리치를 할당하는 번역을 내 놓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상충하는 두 개 이상이 번역이 가능하고 그 중에서 어떤 것이 옳은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복수, 접미사, 대명사, 수사 등개별화의 장치가 이러한 경우 동일하다고 전제할 근거도 없다. 그 낯선 언어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개별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시 대상이 그 언어와 일치하는지 확인할 길조차 없음을 의미한다. 그의 언어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구분하고 개별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의미는 무엇보다도 언어의 의미이다. 언어는 공적으로 인식 가능한 상황하에서 다른 사람들의 드러난 행위만을 근거로 하여 우리 모두가 터득한 사회적 기술이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언어는 사회적 기술이다. 그것을 습득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언제 무엇을 말하 는가에 대하여 서로 이용할 수 있는 단서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따라서 사회적으로 관찰 가능한 자극에 대하여 외부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의 성향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언어의 의미를 확인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29)
이와 같이 그는 의미의 사회성을 강조하며, 특히 의미를 관념과 대응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정신주의(mentalism)를 '박물관의 신화(the myth of museum)'라고 매도한다. 어떠한 경우이든 의미를 터득하려면 "궁극적으로 감각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30)
27) Dummett, Truth and Other Enigma,앞의 책 302쪽
28)같은 책, 304쪽
29) Quine, Ontological Relativitv'. 앞의 책, 26쪽
30) Quine, Word and Object. Cambridge : MIT Press. 1960
그러나 사회성을 강조하고 감각의 중요성을 지적한다고 해서 언어현상이 정신현상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리스호텔레스나 로크와 같이 의미이론에서 고전적인 관념이론을 택하지 않더라도 여러 맥락에서 언어와 정신의 유기적 관계를 지적하는 것이 새로운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촘스키(N. Chomsky)는 우리의 실제적인 언어행위의 밑바닥에 정신적 실재가 있다고 믿고 특히 구문론을 다를 때 이 부분에 관심을 기울인다. 여기서 정신적 실재란 언어현상을 지배하는 원리로서의 크고 작은 규칙들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물질로 환원될 수 없는 데카르트적 실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언어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구조'에 물리적 기반이 있는지의 문제는 '공허한' 논쟁에 지나지 않게 된다. 현대 과학이 발달됨에 따라 '물리적(physical)'이라고 간주되던 개념으로 '정신적(mental)'인 것을 모두 포괄할 수 있게 되었고 정신적 속성에 물리적 개념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촘스키는 정신현상이 원칙적으로 생리학적 및 물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가논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정신주의는 오히려 물리주의적인 성격을 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스키너(B. F. Skiner)식의 기계적 결정론이나 행태주의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언어가 생물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물학적 성향을 따르고 그 제약을 받는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생물학적 유전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언어 현상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특징을 확장하여 행태과학의 추세들 실질적인 인지과학으로 전환시키기도 한 것이다.
촘스키의 입장은 이와 같이 경험적 사실에 근거해 있지만 경험론자들처럼 우리가 백지상태에서 출발하여 후천적인 경험과 훈련으로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언어가 '조건 지우기(Conditionin9)'에 의해서 습득된다는 콰인의 입장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물촌 콰인은 그 구조가 ‘아직 안 알려진 타고나는 구조'라고 말하지만 원칙적으로 알려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촘스키의 입장과는 구분된다. 더구나 그 구조는 자연 과학적 명제로 표현될 수 있고 좀더 구체적으로는 생물학의 일부가 된다고 명시함으로써 언어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31). N. Chomsky, Language and Mind. Harcourt 참조,
하만(G. Harman)의 'A Review of Chomsky, Language and Mind'는 좋은 비 평을 제공한다.
C.P.Otera ed. N. Chomsky : Critical Assessment.
London:Routledge,1994, vol. 2. 242-258쪽 참조
지금까지 우리는 의미이론과 관련하여 지칭관계의 다양성과 그 변형을 검토해 오는 동안 언어와 정신의 밀착된 관계를 외면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의미가 곧 관념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분명히 규명되어야 할 과제가 있으며 오늘날 주로 '지향성'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점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브렌타노(F. Brentano)는 정신적 표상의 특징은 지향성(intentionality)에 있긴 때문에 그것이 물리적 현상으로 설명되거나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른바 이 '지향성 논제31)가 언어철학에서 중요한 쟁점이 된 것은 치좀(R. Chisholm)이 정신상태를 기술하는 언어의 의미론적 특성을 통해서 정신적 표상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자 본격화되었다. 그리하여 언어적 기호가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그것이 가능한지의 문제는 언어적 표상의 본질과 그 근거를 묻는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여기서 핵심적인 개념이 바로 지향성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대상 그 자체에 대하여 말하는 대신 대상에 대한 표현에 관하여 언급하는 '의미론적 상승(semantic ascent)'이 이루어졌는데 치좀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 하였다.
비심리적 현상들 즉 물리적 현상들을 기술할 때는 지향적 문장들을 사용할 필
요가 없다. 물리적 현상들에 대한 믿음은 모두 비지향적인 문장들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희망, 상상, 공포 등 심리적 태도를 기술할 때는 지향적인 문장들을 사용해야 한다. 32)
32) R. Chisholm, Perceiving:172-173쪽
이렇게 재구성된 논제를 의미론의 문제에 적용할 때 일단 언어적 표상들은 파생적으로만 지향성을 지니게 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언어적 표상은 정신을 지닌 주체의 관념이나 신념 혹은 의도에 따라 정신적 표상이 결정되고 이 표상들이 언어적 표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은 납득할만한 입장인가. 언어적 표상의 지향성인 의미가 정신적 표상의 지향성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일까. 이제 이러한 점들을 살펴보자.
어떤 단어나 기호가 지향성을 가진다는 것은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거나 어떤 것를 지칭한다는 것을 말한다 가령 '엄정식'이라는 특정한 색깔의, 흔적 또는 그러한 소리의 울림은 엄정식이라는 사람을 의미 혹은 지칭한다.
언어철학의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는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 지 규명하는 일이다. 그러한 뜻으로 의미론은 물리적인 대상이 지향성을 갖게 되는 근거를 규명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기호가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고 그냥 방치되어 있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그 기호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에 의해서 그렇게 구성되었을 뿐이라면 여전히 언어적 의미와는 상관이 없다. 따라서 언어적 표현은 반드시 심리적 상태와 만났을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언어적 표현으로서의 표상과 심리적 작용으로서의 표상중에서 어떤 것이 더 근본적인지, 또 어느 것을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보아야 더 만족스런 의미론이 정립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생긴다.
그라이스(P. Grice)는 심리적 표상을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보고 여기서 언어적 표상의 근거를 찾으려는 이른바 '그라이스 프로그램'을 제시하였다.33)
한편, 썰(John Searle)은 언어행위(speech act)이론을 이용하여 이 입장을 확장하고 또 체계화 시켰다.
썰(J Searle)에 의하면 언어행위는 대상과 사태를 표상한다. 그러나 지향성도 그러한 표상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그는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러한 유사점을 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준다. 일반적으로 언어행위에는 명제적 내용과 언어행위의 양태가 구별되어 다루어진다. 이와 비슷한 구별이 지향적 상태에도 있는데 표상적 내용과 심리적 양태와 구별이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지향 상태는 그 상대와 같은 유형의 언어 행위에 성실 조건으로 작용한다. 끝으로 만족조건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양자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러한 유사점 혹은 공통점은 이른바 지향상태란 어떤 심리적 상태를 지닌 표상적 내용으로 구성된 상태라는 결론을 유도한다. 여기서 표상의 개념을 강조한다는 것은 지향성과 의미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함축하며 동시에 언어와 심성이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 준다.
썰은 표상개념을 부각시킴으로써 이와 같은 심리상태인 지향성과 언어의 의미를 밀착시키는데 그에 의하면 언어 행위를 통한 지향성은 심리상태가 지닌 지향성에서 파생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미의 구조를 규명하는 언어철학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심리상태의 분석에 의존하기 마련이며, 그러한 뜻으로 심리철학은 언어철학에 논리적으로 선행할 뿐 아니라 그것을 일부로 포용해야 한다. 썰의 경우 의미에 관한 탐구는 지향적 내용의 탐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34)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언어적 표상이 심리적 표상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일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제는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이러한 점들을 살펴보자.
34) J. Searle, Intentionality, Cambridge, 1983 특히 6장인 -의미」 를 참조
가령 우리는 '신'을 믿는다고 할 수 있지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믿음의 대상은 '신'이 아니라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명제는 믿음 뿐만 아니라 상상이나 원망, 혹은 공포나 희망 등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우리의 정신현상은 어떤 대상을 향하여 지향한다라기 보다 어떤 명제의 내용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과 연관되어 규정되는 태도를 '명제 태도(Propositional attitude)'라고 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경우 심리적 태도들은 그것이 어떠할 명제를 그 내용으로 갖는지 규정함으로써만 그 동일성이 확인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심리적 태도들이 내용으로 지니는 명제들은 선결문제 오류를 범하는 것이지 그것이 규정될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언어의 의미에 축소하지 않고도 심적인 태도를 구성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에는 스탈나커(R. Stalnaker)를 위시해서 여러 철학자들이 공적인 언어에 호소하지 않고 규정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데, 그는 명제를 가능세계의 정합으로 설명하려고 한다.35) 카플란(D. Kaplan)은 러셀의 입장을 변용하여 명제가 세계 속의 대상들과 속성들의 배열이라고 해석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한다.
35) R.Stalnaker, Inquiry, MIT Press 1984 참조
36) D. Kaplan, " Dthat" Midwest, Studies in Philosophy,vol. 4. 1973, P. French and Othcrs ed. 참조
지금까지 우리는 언어철학의 호전적인 구분법에 따라 구문론, 의미론, 화용론을 중심으로 그 과제와 쟁점이 무엇인지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언어철학의 중심 인물이라고 평가되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구심점으로 하여 의미이론이 어떻게 전개되고 또 점점 더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는 '지칭'의 문제가 어떠한 양상으로 다루어지는 지도 살펴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이 '진리'라는 새로운 쟁점이 대두되면서 오히려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거나 진리와의 관계 속에서만 언급되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등장한 의미이론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고 또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이른바 '진리조건적 의미이론(Truth Conditional Theory of Meaning)'의 영향력 때문이다.
이제 데이빗슨(D. Davidson)이 제시한 이 이론을 중심으로 언어철학의 현황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4. 진리조건적 의미이론과 언어철학의 현황
1)데이빗슨의 진리조건적 의미이론
더밋이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너무 완벽한 이론을 창출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이론은 가능하고 또 그러한 이론을 지니는 것이 언어의 본질과 언어적 현상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의미이론을 구문론적인 면에서 언어적 기호를 분류하고 인식하는 능력 즉 구문론적 생산력(Syntactical Productivity)을 규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미론적 생산력(Semantical Productivity)과 모순되지 않아야 하며 또 이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화자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문장을 생산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말하며 어떤 이론이 이 능력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은 " --을 의미한다."라는 표현 즉 의미에 호소하는 현상과 일관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산성을 지니려면 우리가 언어의 규칙을 이미 터득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의미이론은 이것을 규명해야 한다, 더구나 그 규칙을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것은 화자가 자기의 언어로써 무엇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의미이론은 무엇이 이해되었는지도 밝혀 주어야 한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켜 주는 이론을 정립하고자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기술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언어의 활용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충고를 비롯하여 기준의 설정과 규칙을 준수하는 현상을 강조하든가 의사소통에 있어서 단순히 의견의 일치가 아니라 생태형식의 일치를 지적하는 것은 모두 의미가 성립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한 것이라고 해석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데이빗슨은 이러한 이념이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되고 체계화될 수 있는 지를 시험하고 있다. 그 가능성을 그는 타르스키의 '의미론적 진리론'을 도입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 진리론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적어도 "실질적으로 적합하고 형식적으로 정확한" 진리의 정의를 제시한다고 평가받고 있는데 데이빗슨은 이것을 영어나 한국어와 같은 자연언어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의미이론의 정립에 원용하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의미론적 생산성과 모순되지 않는 의미이론을 만들기 위하여 '의미하다'라는 모호한 표현 대신 "진리이다“라는 술어를 도입하는 데 있어서 타르스키의 정의를 응용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의 진리조건적 의미이론의 성립과정을 살펴보고 이 이론에 대한 문제점이 무엇인지 검토함으로써 언어철학의 현황을 점검해 보자.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진리의 형식적 정의를 규명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데이빗슨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언어는 그 의미론적 차원 즉 문장이나 발언의 진위에 대한 가능성 때문에 의사소통의 도구가 되기"때문이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어떤 문장의 진위에 관한 연구는 일반적으로 여러 학문들의 과제이다. 그러나 진리조건에 관한 연구는 의미론의 영역에 속한다. 실재 세계의 일반적인 특징을 드러내려면 어떤 문장이 진리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37)
그는 또한 이렇게 주장한다.
형이상학의 문제이다. 실재의 본성에 관한 질문은 언어의 문장에 관한 적절한 진리개념이 무엇인지 폭은 어떻게 문장을 통해 실재를 드러내는지 묻는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38)
이와 같이 의미이론은 진리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은 모순을 범해서도 안되고 상식적 직관과 상충되어도 안될 것이다. 말하자면 S는 S가 묘사하는 사태가 곧 사례일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진리라는 직관과 일관된 정의여야 한다는 것이다. 데이빗슨은 타르스키(A.Tarski)의 의미론적 진리 개념에서 그러한 정의를 발견한다.
그는 이것을 수용할 만한 대응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타르스키는 먼저 대상언어와 상위언어를 구분하고 진리개념은 대상언어의 범주를 넘어서기 때문에 이 범주에 속하는 문장S의 진위는 상위 언어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정의를 위해서 상위 언어는 대상언어보다 논리적인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풍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언어는 대상언어의 모든 문장을 지칭하는 논리적인 장치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문장들의 '번역'을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대상언어에 속하는 문장 S를 상위언어에 있어서 표시하는 명칭을 X라 하고, S를 상위 언어로 번역한 표현을 P라고 할 때, P가 성립하는 경우에만, 오직 그 때에만 참이다."라는 진리의 규약(T규칙)을 이끌어낸다. 이것을 T. X가 (대상언어에서) 참이면, 오직 그 때에만 P이다.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40)
38)D. Davidson.Thought and Talk 같은 책 157쪽
39)D. Davidson Treu to the Facts 같은 책 37-54쪽 참조
40)A.Tarski, "The Concept of Truth in Formalize Language".Logic. Semantics, and Mathmatics, ed J. H. Woodger, Indianapolis, 1983. 153-278쪽 그는 후에 평이하게 요약한 논문 'The Semantic Conception'
이러한 타르스키의 진리개념을 도입하여 데이빗슨은 의미이론을 구성한 것이다. 데이빗슨은 우선 해석하려는 언어 사용자의 행동과 상황을 관찰하고 이것을 근거로 여러 단언에 적합한 T-문장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S가 참이면 또 오직 그때에만 P이다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S'는 한 문장의 구조를 드러내는 기술이며, 'P'는 S의 진리조건을 진술한 것이다. 여기서 이른바 자비의 원리(Principle of Charity)-즉 "어떤 사람이 스스로 진리라고 믿으면 대부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원리에 의거하여 T문장을 확증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Es regnet"에 동의할 때 그리고 그 때에만 비가 내린다면 그의 언어를 위한 신빙성 있는 T문장을 "Es regnet"가 참이면 그 때에만 비가 내린다가 된다. 이러한 종류의 잠정적 T문장을 수집한 다음 타르스키 식의 진리정의를 시도한다. 말하자면 화자의 발언들을 반복되는 부분들로 나누고 변항을 포함하는 기본적인 식의 만족조건을 밝힌 다음 파생적인 식의 만족조건을 기술하는 적절한 회귀조항을 만들어 낸다. 데이빗슨은 이러한 맥락에서 ‘진리론은 대상언어 L에 있어서 참이다'와 같이 진리술어의 성격을 회귀적으로 규정해 나감으로써 어떤 언어체계 L의 각 문장 S에 대하여 P가 참이면 그 때에만 참이다'라는 형식의 상위 언어문장을 반드시 함의하는 이론"임을 강조한다.
☞‘of Truth and the Foundations of Semantics'를 발표하였다.
다음 단계는 진리 정의로부터 더 많은 T문장을 연역해 내어 그 정의를 시험하며여기서 통과하면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며, 만약 그것이
S가 참이면 그때에만 P이다
를 함의한다면 그 문장을
S는 P를 의미한다
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 문장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데이빗슨에 의하면 "진리이론이 해석을 산출할 경우 그 이론의 문장은 대상언어 문장에 '의미를 부여하는' 진리조건을 제시한다.“는 것이다.41)
여기서 데이빗슨은 '해석이론(Theory of Interpretation)'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다른 언어나 같은 언어에서 표현된 발언의 해석에 관한 이론으로서, 어느 때 ,p가 'S'에 의해서 기술되는 의미를 지닌 문장인지 밝히려는 데 있다. 그는 그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어떤 사람이 지니고 있는 신념을 알지 못하고는 그의 발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이렇다. 언어행위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화자가 말하는 문장이 언제 참이 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장은 부분적으로는 화자가 믿는 것 배문에, 또 부분적으로는 화자가 자기가 한 말로 의미하고자 하는 것 때문에 참이라고 간주 된다. 그러므로 해석의 문제는 화자가 줄곧 동의하는 문장의 모형으로부터 신념과 의미의 역할을 동시에 추출해 내는 문제이다.42)
41)D.Davidson,"Belief and the Basis ofMeaning". Inquiry. 앞의 책 50쪽
42)D.Davidson, Essays on Actions and Events.Oxford: Clarendon Press 1980,238쪽
그러므로 '해석의 단위'는 어떤 단어나 문장이 아미라 언어 전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단어나 문장을 별개로 검증하는 경험의 문제를 넘어선다. 여기서 우리는 데이빗슨의 의미이론이 일종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석의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신념의 검증인데 그것은 하나의 유기체적인 전체의 맥락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의미이론이 듀헴(P. Duhem)이나 콰인이 주장하는 이른바 인식론적 전체주의(epistemic holism)에 근거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이론의 근본 이념이 무엇인지 정리해 보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의들을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진리조건적 의미이론의 기본적인 입장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어떤 문장이 진리가 되는 조건을 안다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거기서 어떤 단어나 구절이 그 문장의 의미를 형성하는 데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안다면 그 단어나 주절의 의미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조건이란 개념은 서술문뿐만 아니라 명령문과 의문문에도 확대하여 적용될 수 있다. 명령문의 의미는 그 수행조건(performance condition)이 무엇인지, 그리고 의문문의 의미는 그 긍정조건(affirmation condition)이 무엇인지 이해할 때 동시에 파악되기 때문이다.
한편, 진리조건적 의미이론의 장점은 무한한 진리조건을 유한한 기본식의 의미론적 값에 의거해서 계산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한다. 사실 우리는 끊임없는 과정을 거쳐서 어떤 문장의 의미를 습득하지만 그것을 이해할 때는 문장형성의 내면화규칙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규칙은 타르스키 식의 진리 정의에 의해 포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일반적인 의미이론도 그러한 진리 정의의 기본구조를 지닌다고 상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정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수정이 필요하다 데이빗슨은 타르스키가 진리를 정의할 때 밟은 절차를 역순으로 재구성하여 이 문제들을 극복한다. 우선 진리를 정의해 보면 이것을 하나의 경험적 가설로 설정하여 시험한 다음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어떤 귀결을 연역해 본다. 그 다음 이 귀결을 언어 사용자의 행위를 통해 검증해 보고 여기서 통과하면 마침내 우리가 필요로 하는 하나의 해석을 얻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해석이 지칭하는 대상과의 일치나 경험적 확인의 결과가 아니라 이해의 산물임을 간파하게 된다. 우리가 언어를 이해해서 이미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그리고 그 이해라는 것은 단순히 의견의 일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태형식의 일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할 때 데이빗슨의 의미이론은 “의미를 묻지 말고 그 활용을 살펴보라"고 가르친 비트겐슈타인의 충고를 타르스키의 진리론에 입각하여 체계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의미이론은 일종의 이해 이론(Theor3: of Understanding)이 된파고 볼 수 있는데 어떤 표현의 의미는 결국 그 표현으로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지 밝혀주는 작업에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데이빗슨은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준다.
어떠한 것도, 어떠한 사물도 문장과 이론을 참인 것으로 입증해 주지 않는다. 어떠한 경험도 표피적 자극도, 세계도 우리의 문장이 참인 것으로 입증하지 않는다. --"내 피부가 따뜻하다."는 문장은 네 피부가 따뜻할 때,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참이다 여기서 사실, 세계, 경험, 혹은 증거에 대한 언급은 찾아 볼 수 없다.43)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취한 입장과도 흡사하다. 그는 "명제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그것이 참일 때 사례인 것을 안다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한 다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명제가 참된지 여부를 모르면서도 이해할 수 있다고 부연한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는 그 명제의 모든 구성요소들을 이해할 때, 그 명젤르 이해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44) 결국 우리는 데이빗슨의 의미이론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와 「탐구」의 사상이 새롭게 해석되고 체계화되어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아마 이러한 특성은 이 의미이론이 타르스키의 의미론적 진리론에 근거해 있고 이것은 「논고」에서 제시된 진리정의와 놀라운 유사점을 보이는데 데이빗슨은 다시 이것을 「탐구」에서 개진된 언어관과 의미관에 적용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고 판단된다. 이제 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살펴 보자.
2)의미이론과 언어현상
지금까지 우리는 언어철학의 핵심적인 과제를 의미이론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문제로 보고 이 기빼에 가장 잘 부응하는 이론으로 데이빗슨의 진리조건적 의미이론을 검토해 보았다. 그것은 하나의 의미이론이 갖추고 있어야 할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론들이 지니고 있는 결함을 보완해 주며, 더구나 언어철학의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전, 후기 사상을 상당히 많이 반영해 주기도 한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의미이론은 이론화 작업뿐만 아니라 이론의 목표와 역할과 기능에 대한 심층적인 반성작업을 전개하고 있고 검증절차를 구체화함으로써 언어현상 전반에 관한 실증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진리조건적 의미이론에 대한 비판도 결코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이것을 우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 이론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을 지적하여 좀더 나은 의미이론을 만들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현상에 관한 견해의 차이 때문에 의미이론의 성립 가능성을 부연하는 입장이다. 더밋과 퍼트남, 필드 등은 전자에 속하고 콰인과 로티, 파이어아벤트 등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세 이들의 입장들을 검토해보자.
더밋에 의하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실행(practice)을 터득하는 것인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먼저 언어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의미이론은 본질적으로 이해에 관한 이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화자가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지 알아보려면 그가 진술한 문장이 언제 정당화되는지를 인식하는 실제의 행태기술(behavioral skill)을 검토하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진리조건적 의미론은 만족할 만한 이론이 될 수 없다. 가령 어떤 문장을 진술할 때 그것이 이해됨에도 불구하고 그 진리조건이 충족되었는지 모를 때가 있으므로 그 조건으로는 실제의 언어형태를 제대로 설명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더밋은 "의미이론은 곧 이해이론"이라는 점에서 데이빗슨과 의견을 같이 하며 어떤 명제의 의미가 어떻게 이해되는지의 문제에 관심을 쏟는다. 어떤 명제의 진위를 결정하기 위채서는 그것을 둘러싼 지식이 필요하며 이 지식은 그 명제의 진리조건을 제대로 이해해야 터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어떤 명제를 안다거나 참이라고 판단하는 것의 밑바탕에는 검증주의적 접근 방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에게 진리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밋에 의하면 진리조건적 의미론에서는 진리개념이 중심이 되고 또 그것이 화자에게 이미 이해된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만약 이 개념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의미이론에서 중심개념으로 활용될 수 없다, 그런데 언어 학습과정에서 우리가 진리개념을 터득하게 되는 상황을 관찰하면 그것이 동치관계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타르스키의 규약 T토 동치관계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관계에 대한 지식은 대상 언어문장의 의미를 충분히 밝혀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진위만 규명되지 않은 문장이 있을 때 “p는 참이다."라는 형식의 문장이 항상 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더밋은 내재적(internal) 진리와 외재적(external)진리를 나누고 논의를 주로 후자를 중심으로 전개시킨다. 그는 타르스키의 진리개념을 내재적 진리의 대표적 예로 들고 있는데, 여기서 T문장의 내재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을 다만 ‘동치(esuivalence)'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라고 주장한다. "'눈은 희다'는 눈이 흴 때 오직 그 경우에만 참이다."라는 문장을 이해했더라노 "눈이 희다."나 "눈이 희다'는 참이다."라는 문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또는 어떠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이 명제의 주장이 정당화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진리의 내재적 의미만을 제시해 줄 뿐이라는 것이 더밋의 입장이다46)
그 다음으로 검토해 볼 것은 진리조건이 차원 높은 과학적 이론에 적용될 경우이다.
더밋에 의하면 이론적 신념을 표현하는 발언들은 '검증조건'을 표현하는 발언틀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다. 그러나 해석자로서의 우리는 그러한 검증적 발언에 의해 지지되는 신념에 관해 추측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그림이나 도표 혹은 다른 전문적 장치에 의해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추측의 범위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이와 같이 많은 경우에 진리조건은 "인지를 초월''하기 마련이므로 진리조건적 의미이론은 불충분 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진리조건이 어떤 발언의 해석자가 경험하거나 인지하는 것에만 근거해서 그 발언에 할당될 수는 없다는 것이 더밋의 입장이다.47)
아마 이러한 반론은 관찰에 의해 쉽게 판명되는 진리조건을 가진 다른 발언에 근거해서 발혀질 수 있다고 간단히 응수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데이빗슨은 의미이론의 검증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발언의 진리조건이 관찰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가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더밋이 제기하는 진리조건의 위상에 관해서는 진지간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진리개념에 대한 직관의 차이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퍼트남은 진리란. "합리적 수용 가능성의 이상화(idealization)"라고 주장하며 이렇게 주장한다.48)
우리는 인식적으로 이상적인 조건들이 있는 것처럼 말하며, 어떤 진술이 그러한 조건들로 정당화될 수 있을 때 그것을 '참'이라고 안다. 물론 '인식 적으로 이상적인 조건들'이간 '마찰 없는 평면'과 같은 것인데, 이러한 조건을 실제로 얻을 수는 없으며 여기에 충분히 근접했는지 조차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찰 없는 평면 역시 실제로 획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정도로 근사치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이 평면에 대한 논의는 '현금가치'글 지니고 있다.
이러한 진리관은 더밋과 데이빗슨의 대립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더밋이 검증 조건을 강화하고 데이빗슨이 해석의 문제를 더 중요한 것으로 고집하면 그 대립은 더 날카로워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이론은 이해이론이어야 하고 의미론적 생산력을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 등에 의견이 일치하므로 이들 사이에 극한적인 대립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관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였다. 결과적으로 퍼트남은 데이빗슨의 이론을 좀더 보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셈이 되었던 것이다.49)
그러나 퍼트남 자신은 진리조건적 의미이론보다는 더밋의 검증주의적 의미이론을 선호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는 언어의 활용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검증주의를 여기에 적용하기 때문에 의미이론을 이해이론이라고 고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퍼트남에 의하면 현대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세계와 언어의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이라고 주장한다, 이 관계에 관하여 고전적인 입장을 제시한 철학자는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프레게이다, 그에 의하면 한 낱말의 의미는 그 지시체를 결정한다. 이러한 입장을 우리는 '내포론적 의미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퍼트남은 이러한 의미론을 거부하고 이른바 '외연론적 의미론'을 제시하는데, 이 입장에 의하면 한 낱말과 의미는 그 지시체 즉 세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가령 '물'이라는 이름은 일정한 미시구조(H2O)를 가진 물질과의 직접적 지칭관계에 의해서만 그 의미가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개의 물질 A와 B중에서 A는 H2O라는 미시구조를 가지고 있고 B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물'이라는 단어는 A에 대해서만 적용될 수 있다. 여하튼 이러한 의미이론은 데이빗슨의 진리조건적 의미이론이나 더밋의 검증우선적 의미이론과 차이가 나는 것이지만 의미이론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는 점에서 입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언어현상에서 좀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여 도대체 의미이론이 성립될 수 있는지를 의심할 정도로 심각한 비판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데이빗슨의 해석이론에서 번역에 관한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좀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것으로서 언어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더밋이나 퍼트남의 건설적인 비판과 달리 급진적이고 파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제 이러한 비판들을 간단히 고찰해 보자.
번역의 문제에 관해서는 콰인의 불확정성 논변을 고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콰인에 의하면 서로 다른 두 언어 혹은 언어 공동체의 표현들은 이것들을 단어와 같은 부분으로 분해한 다음 일정한 구속물을 만족시켜 주면서 서로 관련시키는 방식에 의해서만 바람직한 번역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언어는 그러한 구속물을 만족시켜 주면서 서로 관련시키는 방식에 의해서만 바람직한 번역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언어는 그러한 구속물을 만족시키면서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분해되고 상관될 수 있으므로 상이한 번역의 도식은 언제나 가능하게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올바르고 적절한 번역은 있을 수 없으므로 번역 불확정성 논제가 도출되는 것이다. 어느 특정한 번역은 하나의 도식에서는 바람직하겠지만 다른 도식도 역시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국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단어가 의미를 지니려면 배경언어가 필요하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또 하나의 배경언어를 필요로 하므로 결국은 무한 소급에 빠지게 된다. 결국 자연언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의미도 임의로 선택된 개념적 구도 안에서만 작동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언어와 존재와 의미에 관하여 몇 가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지칭론적 관점에서 볼 때 언어와 존재는 상호 독립적이며 언어가 존재를 일정한 방법으로 지칭할 때 의미를 지니게 된다. 가령 비트겐슈타인의 '사실'도 그러한 방법으로 의미를 지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콰인에 의하면 오히려 이 '사실'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진체적 인식체계와 함께 달라질 수 있다. 어떤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지의 여부도 이 전체적 인식체계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사실 「논고」를 「탐구」와의 연계성 속에서 이해할 때 오히려 이것이 더 정확하게 해석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이렇게 해석되었을 때 하나의 의미이론이 가능할 것인가.
물론 데이빗슨은 이 번역 불확정성의 명제를 받아들이지만 콰인과 같이 그 함축에 대해서 심각하지도 않고 수용하는 이유도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 무엇보다 데이빗슨은 해석의 문제가 언어에서뿐만 아니라 신념의 체계에도 관련되어 있고 검증의 차원에서도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불확정성의 요소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는 포괄적인 의미의 '번역'이 아니라 '해석'에 불확정성을 부여한다고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결국 검증의 문제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콰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존재론적 함축을 지닌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50) 50)D. Davldson,같은 책. 101-102쪽
지금까지 우리는 데이빗슨의 의미이론이 지니는 문제점들을 몇 가지 지적하고 이와 관련된 논의들을 간단히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들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좀더 바람직한 의미이론을 창출하기 위한 건설적인 비판이며, 따라서 그러한 의미이론의 성립은 원칙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언어철학에는 이러한 사조 못지 않게 의미이론뿐만 아니라 언어철학이나 분석철학의 성립 자체를 부정하고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거세게 주장하는 풍조가 있으며, 가령 파이어아벤트(P. Feyerabend)는 그 극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는 스스로 상대주의자임을 공언하면서 한마디로 의미이론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완벽한 의미이론을 내놓아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51) 그리하여 그는 의미이론을 포기하고 문장에 대해서만 생각하라고 충고하며, 더구나 의미를 지니는 문장이나 그 의미가 문제되는 문장이 아니라 그냥 문장 그 자체만을 고려하라는 것이다.
한편, 로티(R. Rorty)는 파이어아벤트처럼 상대주의자일을 자처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훨씬 더 파괴적인 비판을 감행하고 마침내 언어철학과 아울러 분석철학의 종언을 선포한다 그는 셀라스(W. Sellars)가 '소여(The given)의 신화'를 지적한 이래 경험주의에 대한 콰인과 데이빗슨의 비관이 그것을 자초했다고 주장하며 이제는 '신칸트주의적 인식론 중심의 철학'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선언한다.52) 더구나 그는 데이빗슨의 작업이 우상파괴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라고 평가한 다음, 번역과 해석에 관한 논의도 지식의 정당화에 관한 선험적 논증을 종식시키는 논증이라고 해석한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자신이 수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뎃슨을 자기가 새롭게 구축하고 있는 '실용주의'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분석철학의 중심인물인 비트겐슈타인을 실용주의의 새로운 우상 중에 한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점이다.
로티에 의하면 언어철학은 크게 '순수언어철학'과 '비순수 언어철학'으로 나누어서 고찰할 수 있다. 전자는 프레게와 러셀에 의해서 형성되고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와 논리실증주의자들에 의해서 완숙기에 접어든 철학으로서 논리와 개념들의 명료화를 목적으로 단다. 후자는 언어의 분석을 통해서 흄과 칸트가 다루었던 인식론적 문제를 재구성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데이빗슨이나 콰인, 더밋과 퍼트남 등이 바로 여기에 관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을 무시하거나 잘못 이해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에 관여하여 무리하게 의미이론을 체계화하고자 시도했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그러나 로티에 의하면 이러한 시도는 가능하지도 않고 또 언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대안은 실용주의적 접근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53)
그리고 그는 「탐구」에 나타나는 구절, 특히 "개념은 우리를 탐구에로 이끈다. 말하자면 그것은 관심의 표현이며 우리의 관심을 유도해 간다.“54)는 구절에 천착하고 그것을 실용주의적으로 해석한다.
실용주의자들은 언어의 도구적이고 소통적이며 상황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로티의 언어 개념은 매우 광범위한 것으로서, 지금까지 논의해 온 인공언어나 자연언어는 물론이고 우리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은 언어 사회적 규약을 배경으로 할 경우 모두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령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어진 문장에서 의미론적 및 구문론적 특징들 (그리고 영어의 다른 문장들이 현실적 혹은 가능적 문형이나 배열, 점 등)에 그 특징을 부합시킬 수가 있다면, 불결의 무의, 별들의 배치, 바위에 생긴 점 등 그 어느것이라도 모두 언어로 취급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영어로 표현된 어느 문장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고 역설하고 싶다.55)
그는 또한 이렇게 주장한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공동체적 의도(Community intentions)의 체계, 혹은 루이스(David Lewis)가 분석한 의미로 규약의 체계가 성립될 경우 언어가 존재함을 부인하는 사람을 나는 상상할 수 없다.56)
이토록 광범위한 언어 개념이야말로 비트겐슈타인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고 그가 후기에 와서 「논고」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진정한 이유라는 것이 로티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로티에 의하면 언어는 무엇을 매개하는 도구가 아니다. 가령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그 언어에 의해서 표현되는 대상을 연결하는 역할을 언어가 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언어에 의해서 매개될 '언어 외적 존재: 말하자면 자연이나 자아 혹은 그 밖에 어떠한 대상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입장을 피셔(John Andrew Fisher)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언어적 관념론(Linguistic idealism)'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57) 그것은 "명제 태도뿐만 아니라 경험의 대상들(내용들)까지도 언어의 지능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극단적인" 입장으로서 결국 "어떤 사람이 경험하는 언어의 기능(함수)“에 지나지 않게 된다. 사실 이러한 관념론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서 추적해 볼 수 있는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탐구」를 중심으로 한 후기의 사상에서도 여전히 그러한 요소를 찾아 볼 수 있는가? 아마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로티에 의하면 보편적이고 직관적이며 초역사적인 진리를 찾기보다는 문화공동체 안에서 유대성을 확보하고 상호 주관적인 합의에 도달하며 자민족주의(ethnocentrism)에 근거한 문화상대주의와 역사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대안이다. 심지어 그는 이러한 입장을 제시하고 확인하기 위하여 체계적인 논증의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론의 체계가 아니라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해설이거나 수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방식으로 로티는 인식론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명료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기술'에 전념하던 비트겐슈타인처럼 담론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어철학과 분석철학과 의미이론이 다루던 인식론적 과제 대신에 윤리적 혹은 정치적 결단이 그 자리에 들어선다. 그리고 로티 자신도 한 사람의 철학자라기 보다는 '자유로운 풍자가'로 남아있게 된다. 과학은 이제 문화의 총아가 될 수 없으며 과학의 여왕을 자처하는,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철학'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티에 의하면 철학의 파라다임은 정초주의에서 반정초주의로 옮겨오고 과학중심에서 문예중심으로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반인식론적이고 반형이상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반방법론적인 동시에 반체계적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만약 언어철학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해야 한다면 그것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리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사조차 데이빗슨의 의미이론 못지 않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언어철학의 현황인 것이다.
5. 맺는말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서양 철학이 전개하는 치적 탐구의 특징을 넓은 의미로 '확실성의 추구'라고 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을 핵심적인 인물로 해서 진행되고 있는 언어철학의 과제를 우리는 존재와 사유를 잇는 '관계 지향적인 의미론적 추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추구의 특징은 지금까지 살펴 온 바와 같이 존재 그 자체나 심성의 구조를 직접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이 필연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언어적 표현이 형식과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전통적인 철학적 주제에 간접적으로도 접근한다. 그러나 언어의 본질과 언어 현상의 구조에 관한 입장들이 다양하긴 또 강조하는 부분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쟁점들이 매우 복잡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 논문에서 충분히 다루지는 못 하였다 아마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긴 또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닐 것이다. 물론 그 범위가 매우 넓고 논점이 복잡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어철학이 현재 형성되고 있는 과정에 있는 분야라는 점도 그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이 사조의 조류를 정리할 수가 있는데,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언어철학은 본질적으로 '언어 비판'이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철학적 주제를 언어분석적으로 접근하는 '분석철학'과 언어의 본질과 그 현상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언어철학'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 분석철학의 쟁점은 적어도 대부분 의미이론과의 연계 속에서 다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언어철학은 항상 의미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안고 있는 문제점 때문에 철학의 한 분과로서 존재할 이유와 근거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이것은 인식의 가능성을 묻는 회의론의 끊임없는 도전 때문에 인식론 자체가 가능한지를 항상 문제 삼아야 하는 양상과 유사한 성격을 나타낸다.
셋째, 언어철학은 비곡 완전한 의미이론을 제시하지 못 하너라코 언어에 대한 비판 그 자체만으로도 '비판철학'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다. 그러한 의미론 언어철학의 등장은 분명히 서양 철학사에서 하나의 진보를 의미한다. 이제 이러한 점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철학이 본질적으로 언어 비판이라는 입장에 대해서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가령 포퍼는 철학과 과학의 연계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언어 분석 철학자들은 진정한 철학적 문제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언어의 또는 단어의 의미에 관한 문제라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누구나 흥미를 가지는 철학적 문제가 적어도 하나는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우주론의 문제이다. 즉 세계의 일부로써의 우리들 자신과 우리의 지식을 포함하고 있는 이 세계를 이해하는 문제이다 내 생각에 모든 과학은 우주론이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철학의 관심사는 과학이나 마찬가지로 그 이해에 기여하는 데 있다. 철학이든 과학이든 그러한 추구를 포기한다면 그 매력을 상실해 버릴 것이다. 언어의 기능을 이해하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젓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를 단순히 언어적 '수수께끼'라고 설명해 버리는 것은 잘못이다.58)
물론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우리는 과학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철학관을 제시할 수 있고 언어적 관념론을 연상시킬 정도의 포괄적인 언어관을 고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에라도 의미의 세계를 넘어서는 존재의 영역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실재론을 둘러싼 논쟁들이 근본적으로 언어 철학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더밋의 견해는 존중될만 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일반 명사들과 같은 표현, 즉 뭍질적 대상들의 이름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지칭하는지" 규명하는 것이 논쟁의 핵심이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재론이란 주장된 명제들이 그 진리치에 대한 우리의 인지 방식과 상관없이 객관적 진리치를 갖는다는 신념이다. 즉 그 명제들은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에 의거해서 진위가 가려진다는 것이다. 반실재론자들은 이에 반대하여, 주장된 명제들은 우리가 그 명네의 증거로 여기는 그 무엇에 의거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59)
스스로 반실재론자임을 자처하는 더밋은 어떤 명제를 안다거나 참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의미의 정당화 문제에 속하며 이 인식적 정당화의 밑바탕에는 인식론과 존재론이 깔려있음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이 주제를 다루지 못하였고 소 그 논의가 언어철학에 국한된 것만도 아니지만 더밋이 보여준 문제의식은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 다음 우리는 언어철학을 위협하는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를 항상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 그것은 오히려 지나친 기대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퍼트남은 과학을 항해하는 동안 배를 재건하는 작업이라고 평가한 노이라트(Otto Neurath)의 그림을 수정하여 이렇게 우리의 상황을 설명한다.
나는 노이라트의 그림을 두 가지로 변경하고자 한다. 첫째 문화는 모든 부분들 이 상호 의존적이라고 믿기 때문에 나는 '과학' 뿐만 아니라 윤리학, 철학, 그리고 실제로 문화 전체를 그 배에 넣고 싶다. 둘째, 나의 그림에서는 하나의 배가 아니라 선단이 있다. 노이라트의 그림에서처럼 배에 탄 사람들은 일시에 너무 많이 수선하여 가라앉지 않도록 자기들이 탄 배를 재건하려고 애쓴다. 더구나 사람들은 이 배에서 저 배로 물건이나 도구를 주고 받으며 춤고나 격려(또는 낙담)를 외쳐 댄다. 끝으로 때로는 자기들이 타고 있는 배를 좋아하지 않기도 하며 다른 배로 옮겨가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어떤 배가 침몰하거나 폐기되기도 한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이 다소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배들은 하나의 선단을 이루고 있어서 다른 배에 신호를 보낼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있는 사람은 없다. 요컨대 집단성과 개별적 책임을 모두 지니고 있다, 더 이상 갈망한다면 그것은 절대에 대한 해묵고 충족될 수 없는 동경이 아닐까.60)
이러한 충고는 확실성에 대한 합리적이고도 지속적인 추구를 전개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기왕에 배를 탔으면 표류하거나 정박해 있지 말고 항해를 계속해야 하며 일단 항해를 결심한 이상 허무주의적 도전은 오히려 유익한 것으로 전환될 추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는 '언어적 전회'에 의한 의미론적 탐구가 존재론적 탐구와 인식론적 탐구를 보강한다는 뜻으로 확실성의 추구에 기여하는 점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철학이 비판철학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성격을 같이 한다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칸트의 비탄철학이 인식의 한계를 규명함으로써 철학사에 공헌한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적인 언어철학이 하나의 비판철학으로 평가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또 하나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리오타르(J.-F Lyotard)의 입장을 참고로 하면 어느 정도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리오타르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을 검토한 다음 로티보다 훨씬 더 격렬한 어조로 "언어의 통일성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언어의 섬들만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이것들은 각기 다른 규칙들에 의해 지배되며, 어떤 것도 다른 것에 의해 번역될 수 없다. 이러한 언어의 분산은 그 자체 바람직한 것이고 또 그렇게 고려되어야 한다 어떤 문장의 규칙이 다른 것을 침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61)
이러한 급진적 언어관에 대한 비판을 그는 기꺼이 감수하며, 그러나 로티와 달리 철학 그 자체를 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칸트나 비트겐슈타인류의 새고운 비판철학임을 자부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성적인 것 같은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나는 그들을 비판할 수 있다. 즉 하나의 이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이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칸트의 모델에 의존하고 있으며 전적으로 그와 일치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상당한 정도로 비트겐슈타인과도 일치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이해하고 수정하며 보완하면서 전개된 언어철학이 비판철학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게 하는 한 철학사의 발전에 공헌한다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어떤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이용하여 천체를 관찰하는 상황을 하나의 비유로 생각해 보자 그가 별들의 숫자와 위치와 크기의 파악에 너무 몰두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하였다면 우리는 그것을 플라톤 이래의 외부 지향적인 존재론적 추구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어느 날 불현듯 그 관찰의 결과가 자기 자신의 인식능력의 함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데카르트적 내부 지향적인 인식론적 추구라고 평가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자기 자신과 천체들 사이에 성능 좋은 망원경이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의 기능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비트겐슈타인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관계 지향적인 의미론적 추구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비록 더 많은 별을 보아 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과 망원경의 존재를 실감함으로써 그 존재의 의미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의 진보가 아닐까. 그러한 의미로 전통적인 철학적 주제에 대한 의미론적 접근을 과제로 삼는 언어철학의 등장은 철학사에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