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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오봉의 의병 활동과 지원아주신씨(鵝州申氏)
1. 오봉의 충효사상과 구국정신
1) 효제충신(孝悌忠信)
오봉 선생의 부모와 동기 가족 등에 대한 효와 애정은 앞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1569년 12월 선생이 8세 때에 어머니 박씨의상을 당하면서 몸이 야윌 정도로 슬퍼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으며 태어난 지 겨우 10개월 된 어린 누이를안아주고, 업어주고, 직접 유모를 구해 젖을 먹였다. 남들이 힘들어 가기 꺼려하는 예안 현감 자리도 본인이 퇴계 선생에 대한 추앙심도 있었지만 그 인근에 고향과부모가 계셔서 모시기 위함이었다. 임란초기에 고향(의성 봉양 천동)에 살던 형님(신지효)이 일본군에게 살해된 후 어린 조카를 종손 대접하면서 성장할때까지 물심양면으로 보살폈으며 노년에 이르러서는 1607년 아버지 좌승지공(신몽득)의 상을 당하여 7월비안현에 장사지내고 3년 동안 여막살이를 했다. 오봉은 1618년 7월에 구미에서 초가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으며, 평소 본인이 풍비(風痺)를앓고 있었는데 계모 오씨와 같은 시기에 병환이 심했으면서도 어머니의 병환을 걱정하였다.
오봉 신지제는 집안에 있을 때는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았고 몸가짐은 충신(忠信)을 위주로 하였다.158) 관직의 고저(高低)와 난편(難便)에는 관심을두지 않았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가까이서 효를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오봉은 스승 유일재 김언기의 사후에는 학본 김성일을 높은 산처럼 공경하고 섬기면서 따랐다. 이에 대한 부분은 학봉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과 청량산유람록 (조사보고)에서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1613년 창원 부사에 제수되어 5년 이상 역임하다가 1618년 체직되어 고향으로 귀환했고, 창원 부사 때에 지은 시(檜山雜詠)에는창원 지역의 풍습과 백성들의 고달픈삶, 그리고 군주에 대한 연민, 고향에대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회산잡영 에는 오봉의 애민의식을 살펴 볼 수 있는 시가 매우 많다. 그 내용 중에는 추위 때문에 물도 못 긷고 아침밥도 못 짓는 힘든 현실을 고발하면서 변방이라 왜구의 재침을방비해야 하는 실정과 흉년임에도 불구하고 경감 없는 세금으로 이중고, 삼중고를 겪고 있는 진지하게 표현하고있으며 오봉은 이러한 현실을 대궐에 알려 구제하고픈 마음이 간절하였다.
오봉은 재임 시에 세 사람의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 가장 오래 재위한선조 임금은 임진란 시기가 포함되었고, 오봉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를 지켜 선조에 의해 공신으로 책봉되었고, 1609년 2월 선조가 승하하자 여막 문을 나가 서쪽을 바라보고통곡했다. 광해군에게는 크게 따르지 않았지만 선조 사후 관직을 제수 받았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된 소식을 듣고 한양 도성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하직 인사를 하고, 예상했던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인조 즉위 때에도 승지 벼슬에 제수되었으나건강 때문에 사직 상소문을 보냈는데 일부에서는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가 내린 벼슬을 거부한 것은 ‘충신은두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이라는 전통적인 선비정신과 비교하기도 한다.
2) 퇴계학에 몰입된 오봉의 구국 정신 실천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가 경상북도의도내 9개 지역에서 개최한 학술 논문을 정리한 경북지역 임진란사� 3권 1질에 의하면 각 논고마다 일관되게 임진란을 극복한 원동력이 주자학의 실천 정신인 동시에 조선 유학 사승관계(師承關係)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159) 16세기 중후반에 형성ㆍ전개되어 임진란을 극복한 사상적 토대가 되었던 퇴계학맥의영남학파도 앞서 언급한 선대 유학에 연원을 두고 있다. 임진란기 퇴계의 직전제자(直傳弟子)인 류성룡은 영의정에 재직하면서 국정을 주도하였지만 특히대부분의 신료들이 주장했던 선조의 명나라 몽진(蒙塵)을 극구반대하여 관철시켰고, 명과 일본이 밀약한 대동강 기준 남과 북을 분할 점령을 막아냈다.
학봉 김성일은 초유사의 명을 받고 경상도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의병 창의를 독려하여 의병이 봉기하게 했을 뿐아니라, 전술한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 의병장 곽재우 간의 대립을 중재ㆍ해결하였다. 안동 지역의 경우 퇴계학의 발흥지인데 퇴계학의 주리론적(主理論的) 사유(思惟)는 궁극적으로도덕 실천의 기반이 되는 마음의 수양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실천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퇴계학은 주자학에 비해 한층 더 심학적 경향(心學的傾向)을가져서 마음 공부를 중시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실천에 목적을 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퇴계학을이은 대표적 인물이 류성룡과 김성일이다. 이들은 출사한 이후 평생 관직생활을 통해 도덕정치를 구현하였으며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목숨을 건 실천 정신을 드러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현실참여 보다는성리학적 사유를 통해 심학(心學)에 침잠했던 예안 지역 제자들은주로 목숨을 건 의병 활동을 통해 퇴계학의 실천 정신을 구현했다.
오봉 신지제와 류성룡 및 김성일과의 관계와 교유는 앞서 수차례 언급했다. 오봉은이두 사람의 선현을 통해 퇴계학을 배웠고, 또한 예안 현감 부임이후 임진란 기간에도 퇴계의 늙은 제자들과교유 및 전시하에서도 빠짐없이 도산서원의 강학을 통하여 퇴계의 사상과 정신을 이어 받았고 4년 7개월 동안 예안 현감을 연임하면서 이웃 안동 지역까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오봉이예안, 안동, 의성 지역을 중심으로 서애와 학봉을 스승으로모시면서 특히 예안을 시발점으로 하여 유학과 학맥을 이용하여 의병을 조직하고 국난 극복에 앞장을 서게 된 것이다.이와 관련된 구체적 내용은 다음 의병 활동 및 지원과 관련하여 다시 검토하기로 한다.
158) 황만기, 오봉 신지제의 학문 경향과 삶의 제 양상 , 영남학� 69호, 경북대학교 영남문화 연구원, 2019,
179~21쪽. 오봉 선생문집� 권2, 한국국학진흥원, 2019.오봉선생연보 참조.
159) 노진환, 축간사 , 경북지역 임진란사� 3권,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2018, 18~23쪽.
2. 군사적으로 본 예안(현감)과 안동(부사)
임진란이국제 전쟁으로 확산되는 과정인 초기의 조선 침략 시기에서 보면 경상좌도 북부지역에 속하는 안동과 그 인근 지역은 일본군의 중요 침공로에서 벗어나있던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안, 안동에서 의병 창의가활발하였고 일본 전국 시대 무장중에서 최강이라고 언급되는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주력이 울산으로 후퇴하게 하는 영향력을 발휘하던 주요 군사 지역이었다. 일본군의주력 중에 1군은 평안도, 2군은 함경도를 침략한 부대이다. 안동 지역에서 2군의 후방을 요격하지 않았다면 1군과 합세하여 경기도를 위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란의 와중에안동도 참화가 비켜간 지역이 아닌 주요 격전지였음을 말해 주는 사례이며, 안동 지역의 임란사 연구가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주요 배경일 것이다. 임진란기 안동 지역에 대한 연구는 관군의 대응과 의병의소모(召募) 및 전투양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임진란이 7년이라는 장기권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군대와 전투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전쟁의 공간이었던 지역의행정 시스템이 어떻게 유지되고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임진란에서 경상도는 일본군이 최후까지울산을 근거로 저항하다가 퇴각한 지역이다. 더욱이 명나라 군대까지 주둔하게 되면서 안동을 비롯한 경상도는국제전을 치르는 양상까지 보이게 된다.
1) 진관 체제(鎭管體制)와 관방(關防)
안동은조선 왕조의 개국기부터 대도호부(大都護府)로 경상도의 대표적인행정, 군사거점도시였다.160) 안동의 지역적 위상은 세조 2년(1457) 지방 군사 조직으로 진관 체제를 정비하면서 재확인된다. 진관 체제는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가 관할하는 주진 아래에 첨절제사(僉節制使)가 관할하는 몇 개의 거진(巨鎭)을두고 그 밑에 절제도위(節制都尉), 만호(萬戶)161)등이관할하는 여러 진을 두어 유기적인 방어 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전국 행정 단위인 읍을 군사 조직 단위인진(鎭)으로 편성해 그 크기에 따라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으로 나누어각 읍의 수령이 군사 지휘관을 겸하는 것이다.
도마다진관 조직 들을 갖추어 도내의 군사들을 가까운 진관에 소속시킨 다음 유사시에 각 진관의 수령이 지역 방어를 담당하는 체제이다. 따라서 어느 한 지역의 방어 체제가 무너지더라도 인접 지역에서는 대적견수(對敵堅守)할 수 있는 방어 체제이다.
한편 경상도는 1407년(태종7) 낙동강을경계로 낙동과 낙서로 분도된 뒤 1436년(세종18) 도절제사가 파견되어 군권을 지휘했다. 경상좌도 병영은 1417년 경주에서 울산으로 옮겨진 뒤 존치되었다. 경상좌도의 병영은조선 전기 내내 울산에 있었다. 경국대전 체제에서 경상도는 안동진을 비롯하여 경주진, 상주진, 진주진, 김해진, 대구진의 6개의 거진이 있었다. 안동진은영해, 청송, 예천, 영주, 풍기의 5개 고을을 관할하였다. 안동진관을 지휘하는 부사(府使)는 정 3품관으로 병마첨절제사가 겸임하였으며, 판관(判官) 1명이 보좌하였다. 진관의군사는 번차(番次)에 따라 도성에 상경, 숙위(宿衛)하는 임무를수행하였고, 평상시에는 안동의 방어를 담당하는 유방병력(留防兵力)이었다. 안동 진관은 영해와 청송의 도호부(都護府), 예천ㆍ영천(영주 : 榮川)ㆍ풍기 등의 군(郡), 의성ㆍ봉화ㆍ진보ㆍ군위ㆍ비안ㆍ예안ㆍ영덕ㆍ용궁 등의 현(縣)이 소속된 체제였다.
조선 전기세조 즉위 초에 안동이 관할하던 지역을 좌향으로 구분하였는데 중익은 의성ㆍ의흥ㆍ진보ㆍ예안ㆍ청송ㆍ용궁ㆍ비안이며, 좌익은봉화, 우익은 순흥ㆍ예천ㆍ풍기ㆍ영천(영주)이었다. 1457년(세조3) 재차 진관의 조정이 있었는데 이것은 진관 체제를 갖추기 위한 시도였다. 안동진에는풍기ㆍ영천(영주)ㆍ봉화ㆍ의성ㆍ예안ㆍ진보ㆍ청송ㆍ군위ㆍ비안을속하게 하고, 상주진(경상우도)에는 선산ㆍ개령ㆍ금산ㆍ함창ㆍ용궁ㆍ문경ㆍ예천을 진관으로 배속시키는 조정이었다.
군제 개혁이활발하였던 세조대의 지방군은 장기적인 훈련을 시행하였다.162)1월과 1월에 행하는 진법 훈련과무예 훈련, 활ㆍ화살ㆍ갑주 등 병기의 제조와 정비, 관할지역 안의 읍성과 수축이었다. 이에 따라 안동 부사는 지방군의 무예를 훈련시키고 진법을 훈련시켜야 했다. 조선 정부에서도 임진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안동부를 비롯한 일본군의공격 방향이 될 수 있는 경상도 각지의 읍성들을 수착하고 방어 시설을 구축하였다.
특히 당시안동부는 내지(內地)로서 성이 없었다. 경상도 내지에서 성이 없는 곳은 안동부 이외에도 대구부, 청도군, 상주목, 성주목, 삼가현, 영천군, 경산현, 하향현이었다.
안동부의성은 민간인들을 징발하여 수축하였고, 전쟁 발발 1년 전에관 주도로 읍성이 갖추어지고 외침에 대비하였다.
160) 이왕무, 임진왜란기 안동 지역 지방관과 관군의 역할 , 경북지역 임진란사�, 3권,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2018,474~487쪽.
161) 종4품의 무관, 만호ㆍ천호ㆍ백호 등은 본래 그 관령하는 민가의 수를 말하는것으로 고려 때부터 마련된 벼슬, 병마만호와 수군만호가 있다.
162) 이왕무, 전게 논문, 476~47쪽.
2) 초기 전황과 행정조직
도요토미히데요시(豐臣秀吉)가 1585년 7월 일본의 최고 권력자로 등장하였고 1587년 일본 대부분의 지역을 통일하면서 10여 년간의 전국시대를마감하였다. 동시에 조선의 복속과 명나라 정복의 구상까지 진척시키면서 대마도 번주(藩主)에게 조선 국왕의 알현을 요구하도록 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조선을공격할 것을 통보하였다. 임진란이 1592년 4월 14일 발발하고 경상도 좌우 병영의 군사들이 일본군을 상대하기위해 소집될 때 안동부에서도 군대가 동원되었다. 안동 진관 소속의 군사들이 신속이 동원되어 4월 17일 저녁에 선발대가 영천을 지나 경상좌병을 향하여 이동하였고 18일에는 본대가 후속하였다. 특히 안동 진관에서 출동하였던 군사들은석전군(石戰軍)이라 불리는 투석(投石) 전문의 정예 부대로서 155년(명종10)에 발생한 을미왜변에 동원되어 큰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조선군의방어 계획은 경상도 자체 병력으로 저지가 어려운 상황에서 횡적으로는 조령을 중심으로 죽령-조령-추풍령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종적으로는 이일-신립-류성룡으로 이어지는 방어 전략이었다. 안동부는 이런 전화 속에서 일본군 정예 부대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군제2군인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부대는 4월 21 일대구를 점령했다. 이들은 양산-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비안-용궁-문경-조령 등으로 이동하여 26일에풍진(豊津)을 건너 제1군인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합류하여 결국 침공 20여일 만인 5월 3일에도성을 함락시켰다.
이러한전쟁 참화의 긴장감이 맴도는 가운데 안동부에서는 부사 정희적(鄭熙績)이안동 읍성을 버리고 후퇴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경상좌도에서는 정희적만이 아니라 경상좌병사 이각(李珏) 수사 박홍(朴泓), 방어사 성응길(成應吉), 조방장박종남, 변응성 등이 모두 근왕(勤王, 왕을 보위)을 핑계로 진을 버리고 도망갔다. 정희적은 처자를 거느리고 함경도 길주까지 도망쳤고, 조방장 박종남은의성으로부터 사잇길로 해서 안동 풍산으로 후퇴하면서 창고를 모두 불사르고 갔다. 이일과 신립이 상주와충주에서 각각 일본군에게 참패한 소식을 듣고 4월 30일선조가 도성을 떠나 북으로 피난을 떠나자 지방 관원이 동요하며 자리를 뜨면서 초유의 행정 공백과 마비를 가져왔다.
안동 부사정희적이 도망간 상황에서 부내 관원들이 동요하여 정부는 예안현을 지킨 신지제를 1592년 5월 안동 부사를 겸하게 했다. 부사가 도망가면서 성내 창고들의 군기와곡식들을 분배하여 적을 상대할 군병의 모집도 수비 할 군기를 갖출 여력이 없었다.
특히 군량이분탕된 실정에서 일본군을 상대할 물력이 없어서 결국 안동을 포기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안동 인근 예안현감 신지제가 군병을 인솔하여 일본군을 상대하면서 안동의 군병이 합세하였으나163) 패하였기 때문에 인근 군현의 관군도 안동을 응원할형편이 못되었다. 일본군의 전격적인 이동은 안동을 비롯한 경상도 전체가 정상적인 행정망을 동원하여 군대를모집하고 적을 막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적의 주력은 한양으로 향하고, 안동, 예안은 소규모 분견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신지제는 예안, 안동의 관민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왜적을 몰아내는 작전을 세울 수 있었다.
3. 신지제의 의병 대책 건의문-1593년 경상좌도 관찰사 한효순-
임진란이일어남과 거의 동시에 전국적으로 의병 조직과 활동이 전란 초기에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시기적으로 빨리 의병장이 아닌 지방 행정 관리로서 164)직접 예안현과 안동부를 지키면서의병 조직을 이끈 신지제는 문무양면으로 직접 현장 경험을 한 결과를 중심으로 문제가 되고 의병의 조직과 운영에 대해서 개선 사항을 경상좌도 관찰사에게직접 건의하는 내용의 글을 올리게 되었다. 그 내용은 오봉문집에 실려 있다.
관찰사에게 올리다[上方白書], 계사년(1593)
삼가 아룁니다. 겨울이 다가도록 적의 군대가 물러나지 않아 신민의 고통이 이미 극에 다다랐습니다. 나라를 회복하는 일이 왜 이리 더딥니까. 사람들은 대세가 이미 기울어서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마련한 시책이 부적절했던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에 저처럼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이 비루한 소회를 짧게 진달하고자 합니다. 한편으로생각해 보면 윗자리에 있는 분이 어찌 이를 분명하게 몰랐겠습니까. 다만 일찌감치 정책을 바꾸지 못해서겠지요. 게다가 고을 수령이 관찰사를 대할 때 저대로 체모가 있어 무례를 범하기 어렵기에 선뜻 말하지 못하고 주저한지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지금 아직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처리한 것을 보지 못해 성세(聲勢)가 갈수록 무너지고 줄어들고 있으니, 진실로 체통을 잃지 않으려고 가슴 아픈 일을 느긋하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아래에다 하나하나 열거하겠습니다.
첫째, 포상이 분명하지 못하여 사기를 진작시키지 못하는 점입니다. 생각하건대병126 • 梧峯 申之悌의 생애와 임진란 의병활동사들이 어찌 꼭 오학(烏獲 : 전국시대 중국 진(秦)나라역사(力士)처럼 천 균(勻)의무게를 들어 올릴 힘이 있고 신궁인 궁예(窮羿 : 중국 하(夏)나라 사람)처럼 네 화살을 모두 정곡을 맞추는 솜씨가 있어야 날랜병사라고 하겠습니까. 누구든 스스로 분발하여 저마다 죽을 각오로 싸움에 임한다면 절름발이 병사라 할지라도몽둥이를 만들어서 적의 단단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상대하여 쳐부술 수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 조정에서내린 사목(事目)을 보니 수급 하나를 벤 이는 급제의 자격을하사하고 둘을 벤 이는 6품을 하사하며, 셋을 벤 이는 당상관에임명하고, 왜군 장수를 벤 이는 가선대부에 봉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내용을 널리 알리자 군졸과 백성이 몹시 감동하여 분발하는 기상을 보였고 중앙의 관군과 지방의 병졸이 모두 분발하여 모집에 응했습니다. 그 중에서 의리를 조금 아는 사대부들이야 물론 관직과 포상을 기대하지 않으리란 걸 알지만 저 우매한 백성들은어찌 모두 임금을 친애하고 상관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알겠습니까. 그저 공을 바라고 포상을 구하는마음에 격앙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사이나라에서 공로에 보답하는 일이 전에 내린 사목의 취지와 너무 달라서 백성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대열을수행하던 수령에게는 금띠와 옥관자의 명예가 돌아가지만 창과 칼을 맞으며 싸운 군사들에게는 미관말직의 은총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아! 장수의 공이 참으로 크지만 조정에서는 장수의 공만 알고 군졸들의수고를 모릅니다. 공이 없는 사람이 위에 있고 공이 있는 사람이 아래에 있으니, 이에 군졸과 백성이 크게 실망한 데다 의욕마저 사라져 전혀 힘쓸 방도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군사를 지휘하는 자가 “정예병을 얻을 수 없고적의 군세를 감히 당해 내지 못한다.”라고 한다면 이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서입니다. 널리 알리자 군졸과 백성이 몹시 감동하여 분발하는 기상을 보였고 중앙의 관군과 지방의 병졸이 모두 분발하여모집에 응했습니다. 그 중에서 의리를 조금 아는 사대부들이야 물론 관직과 포상을 기대하지 않으리란 걸알지만 저 우매한 백성들은 어찌 모두 임금을 친애하고 상관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알겠습니까. 그저공을 바라고 포상을 구하는 마음에 격앙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래에영남 사람으로서 행재소에 달려간 이를 보았는데 선비에게는 관직을 제수하고 시골의 천민에게는 부역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귀의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니, 은총과포상이 사람을 격동시킬 수 있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라고 어찌 유독 그렇지않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만, 감사께서는 이런 사정을 조정에상세하게 아뢰었습니까? 아니면 조정에는 아뢰었지만 시행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까? 얼핏 듣기로는 관서지방에서 과거를 크게 실시하여 무예가 뛰어난 인재를3,30명이나 선발한다는데 제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굳이 이런 식으로 할 것 없고 바로 전날에 정한 포상 규정대로 군졸의 노고에 보답한다면과거 시험이 이처럼 구차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라가민심을 잃지 않으면 군졸들은 명을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서로 격려하여 일어날 것이니, 정예병을 얻기어렵다고 근심할 것이 없고 적의 형세를 당할 수 없다고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관작은 중요한기물이어서 함부로 베풀어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지금 같은 때에 어찌 관작의 경중을 따지겠습니까. 옛 사람이 출정할 때 성난 개구리를 보고 경의를 표한 것이 어찌 미물이 공경할 만하다고 여겨서 이겠습니까. 사기를 북돋우는 방법은 요컨대 이와 같을 뿐입니다. 병가의 말에 “후한 포상 아래에 반드시 용맹한 장부가 있기 마련이다.”라고 하였으니참으로 옳지 않습니까.
둘째, 군율이 공정하지 못해 사람들을 승복시킬 수 없는 점입니다. 군령은엄격함을 중시하여 죄가 가벼우면 장을 치고 무거우면 목을 벱니다. 이는 군대를 출정시키거나 군사를 동원할때 부득이 무거운 법을 써서 사람들에게 군율은 지엄한 것이어서 죽음도 각오해야 함을 알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결국은 장수가 그때 사정에 맞게 완급을 조절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지난번용궁(龍宮)전투 때 달아나거나 무너진 병사들은 군법으로 논한다면다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유독 병사들의 죄일 뿐이겠습니까. 부산에서 패한 뒤로 장수와 병졸들 중에서 후퇴하거나 달아났다는 죄명으로 처형된 이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 무지한 백성들은 마음속으로 아무 장수와 아무 사람은 아무 곳으로 달아나 숨었는데도 처벌이 없었다고 하고서이것을 예사로운 일로 여깁니다. 적을 마주쳐 다급할 때에 장수 가운데 간혹 불리함을 알고 일단 후퇴할때가 있는데, 그러면 병졸들은 “장수가 이미 물러났으니 우리도달아나야겠다.”라고 하며 마침내 예전의 습성을 답습하여 까마귀처럼 사방으로 흩어져버리니 그 죄는 용서하기어려우나 그 정상은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만약 한두 명의 목을 베어 군중에 효시한다면군문의 위엄이 분명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70여명이 한꺼번에 중벌을 받아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생기면 차라리 군율을 잘못 집행하는 일이 있더라도 군졸과 백성에게 상해를 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감사께서그들의 죄명만 알고 아직 실정을 살피지 못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은 굳이 논한 것 없습니다. 지금 여러 고을이 군대를 물린 뒤 저마다 책임자를 가두는 탓에 젊은 장정들은 전장에 나가고 노약자는 감옥에갇혀있으니 남은 사람이나 출정한 사람이나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에 부모나 자식이있는 경우는 그나마 괜찮지만, 부모나 자식이 없는 경우는 아내가 옥에 들어가고 남편이 변경에 출정하고나면 집을 지킬 이가 없어 살림을 보존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날마다 사정을 호소하고 간혹 원망을 토로하여모두가 “왜구에게 죽지 않으면 굶주려 죽겠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어찌 잠시 윗사람을 원망하는 말이겠습니까. 인정과 도리를헤아려 보아도 그렇습니다. 백성이 삶을 지탱하지 못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병사를 어디에서 차출하겠습니까. 비유하면 나무뿌리가 병이 들면 가지와 잎이 절로 시들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아서 결국은 아무 소용없을 것이니이것으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줄 수 없습니다. 현감이 일전에 이러한 뜻을 두어 차례 아뢰었는데끝내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현감이 그 폐단을 범범하게 여겨 상세하게 전달하지 않고서 오래도록끌며 결단하지 않아서이니, 현감의 죄가 그야말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셋째, 비장(裨將)165)이 불필요하게 많은 점입니다. 대개 순찰사의 임무가전투에 직접 참여할 수 없으니 군무를 점검하고 군영을 단속할 때 그 사령이 10여 명만 있어도 부족하지않습니다. 굳이 어리석고 흐리멍덩한 무리로 구차히 그 숫자를 채울 것없으니 적을 토벌하는 일에는 관심이없고 창고의 곡식만 축낼 뿐입니다. 그 중에 어찌 용감하고 강개한 사람이 없겠습니까마는 적군 하나를베거나 수급을 하나 바치는 이가 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으니, 아마도 구애되는 바가 있어서 아직계책을 행하지 못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각 역참은 인부와 말을 감당하지 못하고 여러 고을은 군량 제공을감히 감당하지 못하여 무수한 정예병이 쓸모없게 되었고 그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감사가 처음모집할 때 마음이 어찌 이와 같이 하려고 하였을 뿐이었겠습니까.
넷째, 군비 확충을 늦추어선 안 되는 점입니다. 대개 여러 고을의 군장(軍裝)이 한번은 병화에 불타고 다시 전쟁 중에 흩어졌습니다. 다급히 다시 갖출 것을 생각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할까 걱정인데, 지금특별히 신칙하는 명령이 없고 무기고에 남은 수가 많지 않으니, 한번 거사한 뒤에 활과 화살이 거의 바닥나면추후에 다시 거사하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여러 고을에서 또한 모두 성심을 다해 조달하려고하고있지만 대나무와 부레풀을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생각건대 대나무는 해변의 고을로 하여금 베어서 실어나르게 하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고 부레풀도 다른 도에 공문을 보내면 혹 구할 길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지금 가장 먼저 조치해야 할 일입니다.
아! 난리 초기에는 이 왜적을 여름에 토벌하지 못하면 가을에는 반드시 섬멸할 것이라고 여겼고, 가을이 되어서는 겨울이 되면 반드시 물리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지금 한 해가 저물었는데도 아직 서로 대치하여 결판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적들의흉악한 모략과 은미한 자취는 하루아침이나 하루저녁에 계획된 것이 아닌 듯합니다. 저들은 장구한 계책을강구하는데 우리는 늘 임시방편으로 대충 넘기고 있으니 또한 계책이 가볍고 얕지 않습니까. 지금 용궁과예천지역에 매복을 설치하고는 느긋하게 세월을 보내고 소탕할 계책 없이 수고롭게 시일만 허비하고 있는 탓에 병사와 군량이 모두 피폐한 실정입니다. 장차 궁무를 담당하려는 자가 모두 하나같이
“명나라군대는 언제 오고, 서쪽의 적은 언제 돌아가려나.”라고 말하고있습니다.
아! 명나라 군대가 오고 서쪽의 적이 돌아갈 기약은 없는데 병력이 고달프고 군량이 부족한 것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 앞으로 몇 달이 가게 되면 다시 어떻게 하려고합니까. 제 생각에는굳이 이렇게 무익한 매복을 둘 것 없이 여러 군진의 병마를 크게 모아 결전을 벌인다면 이것이 상책이니 부로들은 지금 가장 바라는 바입니다. 만일 아군의 역량을 살피고 적군의 형세를 헤아려 보건대 강약이 서로 같지 않아 쉽게 할 수없다고 한다면 차라리하책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경상좌도 중에 그나마 온전한 곳은 이 몇몇 고을뿐이니, 오는 봄에 유린당할 일이 절대 없으리라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제 생각에는대강 모집한 병사가 다시 흩어져 모으기 어렵고 힘들게 모은 군량이 거꾸로 도적을 먹이는 데 보탬이 되고 말까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험고한 지형을 선점하여 미리 대비할 장소를 마련하는 편이 낫습니다.이를테면 소백산(小白山), 청량산(淸凉山), 주왕산(周王山), 팔공산(八公山)등의지역은 그 험고함이 거점으로 삼을 만한 곳입니다. 이때에 미쳐서 그 형세를 살피고 무기를 준비한 다음근처의 군량을 이곳에 모아 끝내 범할 수 없는 형세를 구축해 놓고서 각 진으로 하여금 그 험한 곳을 나누어 지키고 서로 도움을 주며 때를 기다렸다가거사하는 것도 혹 한 가지 방법인 듯합니다.
아! 국난이 몹시 다급하고 죽을 날이 닥치기에 졸렬함을 무릅쓰고 함부로 이와 같이 장황하게 말씀드렸으니 참으로 벌을받아 마땅합니다.
163) 상동, 484쪽. 신해진 역주, 향병일기(鄕兵日記)�, 역락, 2014,15쪽 이후 참조.
164) 오봉 선생문집� 권2, 36~341쪽.
165) 비장(裨將) : 감사(監司), 유수(留守), 병사(兵使), 수사(水使), 견외(遣外) 사신을따라다니며 보좌하던 무관 벼슬, 막료라고도 한다.
4. 의병 조직 및 지원 활동
오봉 신지제(1562~1624)는 임진란의 의병과 관련하여 두 개의 공신, 즉선무원종공신 1등과 호성원종공신 2등을 받았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다른 의병장(표10 참조)처럼 지명도가 높지도 않고,기록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오봉 선생의 임란 공적이 선조실록등에 실려 유명해진 것은예안 현감 겸 안동 부사라는 관직에 있으면서 직접 의병장의 위치에 있을 수 없었고, 임란 전시하에 계속해서예안과 안동일대에서 전시 행정, 즉 관군 통솔ㆍ의병 창의ㆍ지원ㆍ성곽 수축ㆍ주재 명나라 군사 지원 등일상 업무가 임란전쟁과 직접 관련되고 있어서 따로 언급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임란 직후 경상좌도 북부지역에서예안, 안동을 중심으로 직접 의병 조직과 지원에 앞장을 섰고, 특히예안의병조직 직후 이웃 안동은 한 달 늦게 의병 조직화에 관여하였다. 물론 그 당시(1592.5) 공석중인 안동 부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고 안동은 안동별읍향병(安東別邑鄕兵)이라고 하여 의병 연합조직으로 출발하였다.
안동 지역의의병 운동에 있어서 새로운 단계로 열읍(列邑 또는 別邑)의의병들이 8월20일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안동의 영향아래에 있는 그 인근 지역, 즉 예안ㆍ안동ㆍ의성ㆍ의흥ㆍ군위ㆍ비안 등지의 인사들이 안동 일직에 모여 의병조직을연합화하고,166) 본진을 안동에 두기로한 것이다. 오봉 선생이 직접 의병 전투에 앞장 선 것은 필자의 조사로는 용궁 지역 비안현ㆍ다인현, 의성, 군위 접경 지역 등 최소한3곳으로 확인되고 있다. 임란 직후 의병의 전투 활동은6개월~10개월 기간이었는데 대부분은 안동별읍향병이 인근 지역(영천, 경주 등)까지 출전하였다. 이 지역의 의병 활동은 예안현감으로 임란 기간 중 4년 7개월 근무한 신지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여기서 포괄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166) 1592년 9월에는 연합 분위기가 확산되어 영천, 합천 등의 의병진과도 합진하기로했다. 안동진은 위에서 열거한 지역 이외에도 봉화ㆍ영주ㆍ풍기ㆍ청송ㆍ진보ㆍ영해ㆍ영덕을 포함한다. 이들 지역은 진관 체제상 뿐만 아니라 정치ㆍ문화ㆍ학문적으로도 안동문화권으로 볼 수 있는 지역이다.
1) 예안의병의 조직
20만 대군을 이끌고 1592년 4월 13일부산 앞 바다에 도착한 왜병들은 4월 25일 상주를 함락하였고또 4월 28일 신립 장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함에 따라선조 임금은 도성을 비우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한편 상주가 왜적의 손에 들어가기도 전에 안동부사정희적(鄭熙績)은 영천(永川)에서 도망을 오다가 조방장(助防將)을만나 도망갈 계획을 세우고 평소 알고 지낸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관인을 버리고 도망갔다.(1592.5.14.)이 소식을 접한 안동 인근의 수령들은 죽음이 두려워 성(城)을 비우고 도망을 쳐서 행정 공백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불러일으켰다.167) 그러나 예안 현감 신지제 만은 평소와 다름없이 성을 지키며 치안 유지에진력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난 1592년은 선생의 나이 31세이었고 고향으로 가서 어버이를 문안하고 수연(잔치)를 베풀고 있었는데 왜구들이 갑자기 침입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예안 관아로 돌아갔다.
선생은고향에서 왜구의 변란 소식을 듣고 아우들에게 어버이를 모시고 난리를 피해 고을 동쪽 공곡(孔谷)에 숨게 하였다. 이곳은 현재 의성군 사곡면 공정리에 있는 골짜기로임란 당시 피난민들이 산속 깊숙한 이곳에 숨어들면서 마을이 생겼다. 선생이 급히 예안으로 돌아가려고길을 나서는 데 갑자기 예안 백성이라고 하는 건장한 병사 수십 명이 나타나 “원님을 모시러 왔습니다.”라고 하였고 임지에 도착한 뒤에도 늘 따라 다니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선생이괴이하게 여겨 물어보니, 바로 지난번에 풀어주었던 강도 무리들이 목숨 바쳐 은덕에 보답하고 싶어서 한일이었다.168) 1592년 6월 1일 신지제(申之悌)ㆍ배용길(裵龍吉)ㆍ김용(金涌)ㆍ김륵(金玏) 등이 의병 모집을 논의하고, 6월 1일 예안에서의병을 일으켰다. 이는 안동 의병 보다 한 달가량 앞선다. 의병은예안의 사족(士族)들이 중심이 되었고 이들은 근시제(近始齊) 김해(金垓)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다음과 같은 인사들이 주요 직책을 맡았다.
■ 대장 : 김해
■ 격문 작성, 궐기 촉구 : 이숙량
■ 도총사(都摠使) : 금응훈
■ 정제장(整齊將) : 김택룡, 김기(金圻)
■ 부장(副將) : 김광도, 김광적
■ 군량 : 이영도
■ 군관 : 김강, 채연, 김평
■ 장서(掌書) : 금경
■ 유사(有司) : 류의, 박몽담
■ 기병(騎兵) : 황진기, 우성적 외 53명
■ 보병 : 김사순(金士純), 김지(金址) 외 365명
■ 식량 공급 등 : 조목, 금응협, 김부륜, 서천일, 이숙량 외 41명
(나이가 많은 사람들)
예안의병에참여한 구체적 인사로서 황만기 교수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169)
167)황만기, 임진란기 예안의 유학과 학맥 , 경북지역 임진란사� 3권, 임진란정신문화 선양회, 2018.
168)오봉 선생문집� 권2, 3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