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 1506년(중종 1)에 손중돈(孫仲暾)이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는데, 백성들이 진정으로 다시 연임이 되어 선정을 펴다가 승지로 영전되어 간 뒤에 백성들은 그의 공적을 못잊어 1509년(중종 4)에 생사당(生祠堂)을 지었다. 그 후 1592년(선조 25) 때 병화로 불타 없어진 것을 지방의 유림들이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1656년(효종 7)에 다시 경현사(景賢祠)를 개설하여 고려 말 전라도안렴사로 선정을 베풀고 고려조를 위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효자로 조정에까지 알려진 신우(申祐)를 주벽으로 하고 손중돈을 함께 배향하였다. 이때에 서원의 이름도 ‘속수(涑水)’로 개칭하였다. 1703년(영조 6)에는 김우굉(金宇宏)과 조정(趙靖)이 추향되고 1826년(순조 26)에는 조익(趙翊)도 추향되었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매판소만 남아 있다가 1971년 3월에 세 문중의 후손인 조성학, 신기성, 김영해 등이 주역이 되어 지방 유림과 유지들의 협력으로 속수명륜당(涑水明倫堂)을 중건하고, 1989년에는 경현사(景賢祠)를 복원하게 되었다. 1971년에 세문중의 후손들이 주역이 되어서 속수명륜당과 사당을 세웠다. 1983년 봄부터 향사를 지내고 있다. |
배향인물 | 1)신우(申祐) 본관은 아주(鵝洲), 호는 퇴재(退齋) 고려말 조선 초의 이름난 효자이다. 부친은 판도판서(判圖判書) 신윤유(申允濡)이다. 고려 말기 안렴사(按廉使)를 지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와 친구사이인데, 조선이 개국한 후 형조판서에 임명되었 으나 취임하지 않고 의성현에 낙향하여 지절(志節)을 지켰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장사를 지내고 3년 동안 여막살이를 하였다. 신우는 효행으로 유명한데, 그의 행실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에 나와 있다. 현 의성군 단밀면에 정려각이 세워져 있다. 고려 때 벼슬은 안렴사 (按廉使)를 지냈다. 그의 아버지가 죽고 여막(廬幕)에서 3년상을 마치자 무덤 앞에 쌍죽(雙竹)이 생겼으므로 효성이 지극한 때문이라고 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태조와 일찍부터 친구간으로서 조선이 개국된 뒤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2)손중돈(孫仲敦, 1463~152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대발(大發), 호는 우재(愚齋). 등(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병조참판 사성(士晟)이고, 아버지는 계천군(鷄川君) 소(昭)이며, 어머니는 유복하(柳復河)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2년(성종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를 거쳐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497년(연산군 3) 양산군수, 이어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서 간관(諫官)들이 거의 다 쫓겨날 때 파직당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직후에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1509년(중종 4)에는 표리(表裡) 1습(襲)을 하사받고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이어 공조·예조 참판을 역임하다가 1517년에는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공조판서·이조판서·세자시강원빈객(世子侍講院賓客)을 지낸 뒤 도승지를 세번, 대사간을 네번 지냈으며, 경상도·전라도·충청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우참찬에 이르렀다.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경주의 동강서원(東江書院), 상주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경절(景節)이다.
3)김우굉(金宇宏, 1524~159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岩). 경상북도 성주 출신. 종혁(從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도승지 치정(致精)이고, 아버지는 부사 희삼(希參)이며, 어머니는 청주 곽씨(淸州郭氏)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2년(중종 37) 향시에 수석 합격하고, 1552년(명종 7) 진사시에도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565년 경상도 유생을 대표해 여덟 차례에 걸쳐 중 보우(普雨)의 주살을 상소하였다. 이듬 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 뒤 주서(注書)·대교(待敎)·봉교(奉敎)·전적(典籍), 예조와 병조의 좌랑·정랑, 지제교(知製敎)·정언(正言)·헌납(獻納)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573년(선조 6)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578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 등을 지내고 이듬 해 병조참의·승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수(李銖)의 옥사로 곧 파직되었다. 1582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형조참의·장례원판결사·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 해 유생 박제(朴濟)로부터 음흉하다는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 청송부사·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1589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성주로 돌아갔다. 그 해에 동생 우옹(宇顒)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연좌되어 안동의 임지에서 회령으로 귀양가자, 영천으로 달려가 동생을 만나 갓과 옷을 벗어주고 시 한 수를 지어 주며 이별했다 한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옥송(獄訟)을 결정한 형조판서를 당당히 탄핵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상주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개암집≫이 있다.
4)조정(趙靖, 1555~16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안중(安中), 호는 검간(黔澗). 윤영(允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禧)이고, 아버지는 광헌(光憲)이며, 어머니는 홍윤최(洪胤崔)의 딸이다.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고, 1596년 왜와의 강화를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1599년 천거로 참봉이 되고,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05년 좌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까지 호가(扈駕)하였고, 그 뒤 벼슬이 봉상시정에 이르렀다. 또한, 정구(鄭逑)와 교유하였으며, 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상주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검간문집≫과 ≪진사일록 辰巳日錄≫이 있다.
5)조익(趙翊, 1556~16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비중(棐仲), 호는 가휴(可畦). 윤영(允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禧)이고, 아버지는 광헌(光憲)이며, 어머니는 홍윤최(洪胤崔)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88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 후 여러 벼슬을 역임한 뒤 세자시강원필선·병조좌랑·광주목사(光州牧使)·장령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호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상주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
건축물 | 속수서원은 강당의 후면으로 사당이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강당과 사당이 일직선축을 이루고 있으며,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경현사(景賢祠)인 사당과 속수명륜당(涑水明倫堂)인 강당, 고직사 등 총 3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
건축배경 | 속수서원은 상주 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던,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의 공적을 추모하며 1509년에 세운 ‘생사당(生祠堂)’에서 비롯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병화로 불타 없어졌다가, 1656년 지방의 유림은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다시 묘우 ‘경현사(景賢祠)’를 개설하고, 퇴재(退齋) 신우(申祐)와 손중돈(孫仲暾)를 배향하였다. 그 후 170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서 ‘속수서원(涑水書院)’이라 개칭하였다. 1730년 개암(開岩) 김우굉(金宇宏)과 검간(黔澗) 조정(趙靖), 1826년에는 가규(可畦) 조익(趙翊)을 추향하였다. 186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뒤, 1972년 속수서원명륜당(涑水書院明倫堂)을 건립하였다 그래서 1983년 봄부터 단소향사(壇所享祀)를 지내다가, 1988년 경현사(景賢祠)를 복원하였다. |
건축특징 | 사주문(四柱門), 속수명륜당(涑水明倫堂), 내삼문, 경현사가 동일축선상(同一軸線上)에 배치된 전학후묘형(前學後廟)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사주문의 서남쪽으로 집사(執事)가 기거할 수 있는 관리실이 있다. |
건축구성 | 속수서원은 가파른 경사에 자리 잡고 있다. 서원은 크게 강학공간인 사주문과 명륜당, 제향영역인 내삼문과 경현사로 구분되고, 기타 건물로는 집사(執事)가 거주할 수 있는 관리실로 나누어진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인 경현사(景賢祠)는 묘우이다. 경현사는 1m정도의 높은 기단을 쌓은 위에 초석을 놓고 둥근기둥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고, 좌우측면에 방풍판을 달았다. 기단의 중앙과 좌우의 측면에 돌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경현사 현판은 가운데 칸에 걸려 있다. 내삼문은 정면 3칸 규모로, 어칸의 지붕을 좌우보다 높게 한 솟을삼문으로 되어 있다. 지붕 전체에 단청을 하였고, 문의 상부에는 궁판을 두었고, 어칸 상부에만 홍살이 있다. 전면 각 판문에는 3태극 문양이 채색되어 있다. 기와를 얹은 토석담이 내삼문에서 시작하여 경현사 뒤쪽으로 두르고 있다. 명륜당은 30cm정도의 기단을 만든 위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기단의 한 가운데만 돌계단이 있다. 정면 4칸, 측면1칸 반의 규모인데, 반 칸은 퇴칸(退間)을 설치한 것이다. 가운데 2칸은 마루이고, 양쪽으로 한 칸씩 온돌을 깔았다. 오량(五梁)의 팔작지붕을 얹었다. 가운데 칸의 동쪽에는 ‘속수서원(涑水書院)’, 서쪽에는 ‘속수명륜당(涑水明倫堂)’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명륜당과 내삼문 사이는 가파른 경사로 되어 있다. 경사진 면의 반을 나누어서 명륜당 뒤쪽으로 명륜당 마루높이 정도의 단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같은 높이의 단을 만들었다. 두 개의 단 위의 경사는 자연 그대로 두고, 단의 가운데에는 내삼문과 통하는 계단을 만들었다. 서원의 진입문인 사주문은 서원의 가장 전면에 위치한다. 정면 1칸 규모이고, 맞배지붕을 얹었다. 사주문에서 담이 시작하여 내삼문까지 이어져 있다. 관리실은 20cm정도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주초를 두고 건물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고, 어칸을 중심으로 동편 2칸은 퇴칸을 반 칸 내었다. 서편은 1칸 반이 모두 방이고, 전면 아래 쪽에 궁판을 대었다. 3량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현판 | 속수서원강당중수기(涑水書院講堂重修記) 생원 조학수(趙學洙)가 1805년에 지은 글이다. 속수서원명륜당중건기(涑水書院明倫堂重建記) 인주(仁州) 장병규(張炳逵)가 1974년에 지었고, 풍양(豐壤) 조욱연(趙郁衍)이 쓴 기문이다. 속수서원중건기(涑水書院重建記) 1989년에 신천(信川) 강재기(康在璣)가 짓고, 함안(咸安) 조양제(趙良濟)가 쓴 기문이다. |
마을이야기 | 의성 > 서북권 > 속암리 - 절이 있었고 스님이 많아서 승당(僧堂)이라불린 마을 단밀면은 의성군의 서쪽 끝에 위치하였다. 단밀면의 면소재지가 있는 속암리(涑岩里)는 동쪽으로 안계평야가 펼쳐져 있고, 서쪽에는 만경산(萬景山)이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 위천(渭川)이 흐르고 북쪽으로 벌뫼산이 솟아 있다. 속암1리는 단밀현의 소재지이던 관동 마을 연접하여 있으므로 여기도 예부터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추리되어 고실이란 마을 이름이 있게 되었다. 고실 혹은 속상이라 부르는 이 동네 바로 왼쪽으로 돌아서 이웃하는 곳에 신암(新岩)이란 바위가 있다. 속상과 신암이란 한자씩을 취하여 속암이라 칭했으리라 추리된다. 속수서원은 단밀면사무소를 중심으로 동쪽 끝의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은 이 마을의 가장 동쪽에 있는데, 산 중턱에 자리잡고 서서 안계평야와 속암들 사이를 흐르는 위천을 굽어보고 있다. 속암2리는 신라시대에 이 마을에 절이 있었고 스님이 많아서 승당(僧堂)이라 하여 왔다. 약 400년 전에 이(李)씨와 정(丁)씨가 정착하였는데, 승당이라는 이름은 자손이 번창하지 못할 조짐이라고 여겨 승당(勝堂)으로 글자를 바꾸었다고 한다. 벌뫼산의 서북쪽 아래에 위치하고 아담한 마을을 가꾸어서 북쪽으로는 방품림을 무성하게 가꾸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