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인천의 신선 정희량 선생 -인천은 참 복 받은 도시다. 신선급 인물 정희량 선생의 자취가 남아 있으니-
책도 철학이나 종교, 풍수 등 소위 탈속의 ‘도사학과’ 과목에 마음이 가는 것은 아마 나이 든 탓 같다. 그것도 신간보다 서가의 묵은 추억의 책들을 재독 한다. 일전 <조용헌의 인생독법>(2018)에서 ‘홀로 나를 달래며 철이 들다’를 봤다. 거기서 회재 이언적 선생(1491~1553)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해 지은 사랑채 당호가 독락당獨樂堂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당호의 뜻은 “홀로 있음을 즐기는 집”, 또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집”이다.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게 예나 지금이 똑같다. 특히 나이 들수록 외로움은 깊어지는데 어떻게 하면 외로움을 병이 아닌 삶의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을까.
예전 인천에 살 때 어느 지방지 기자 분의 정보로 당시 가천문화재단 문화부장인 이형석 선생(2009년 작고)을 알게 됐다. 차茶와 인천 지명에 대한 권위자인 그분은 검암동 118-3번지에 있는 허암 유거지를 발굴 ‘허암차샘’ 표지석도 세웠다. 문화의 문맹이던 나는 들뢰즈가 ‘니체는 우연으로 긍정을 만든다.’는 말처럼, 우연케 찾아든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서 긍정의 새 삶이 시작됐다. 책을 통해 커피가 아닌 진짜 차茶도 알게 됐고 필자의 고향 남원의 <차문화유산> 초고도 완성할 수 있었다.
<한국의 신선>에 인천에 자취를 남긴 정희량(1469~?)에 대해 “역易을 연구했고 수數를 잘해서 자신의 명운을 추산해보고는 일찍부터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뜻을 갖고 있었다.”라고 실려 있다. 그렇다면 정희량은 진짜 신선이 된 걸까. 알 수 없지만 신선을 꿈꾸면 살다 간 것만큼은 확실하다. <조선조 도가의 시문학 연구>에는 “정희랑希良은 아우 희검希儉과 함께 잠시 부평에 거주하여 같이 공부한 적이 있었다. 부평에 허암산이 있기에 호를 허암이라 하였고, 아우는 부평을 옛날에는 계양이라 불렀기에 호를 계양어은桂陽漁隱이라”라고 적혀있다.
강골인 정희량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연산군 때 무호사화와 갑자사화를 당했으나 갑자사화를 예견하고 34세 때 검암동으로 숨어들었다. 인천은 아우와 공부한 적 있었던 곳이자 한양에서 가까운 곳이라는 이점利點이 작용한 듯하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나만의 아지트가 필요하다. 인생살이 고달플 때 위로받을 수 있는 곳, 대체로 풍광이 뛰어난 곳이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해 준다. 평소 그런 장소를 답사 해 놔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정희량은 가히 신선급神仙級 인물이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건국 후, 한신 등을 죽여 버렸다. 사냥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때 장량은 장가계로 숨어들었다. 장량과 정희량은 모두 도교의 큰 인물들이다.
정희량의 문집 <허암유고>에 “산림에 숨는 것은 소은小隱이고 시성市城에 숨는 것은 대은大隱”이라는 구절이 있다. 혹자는 은거를 현실도피라며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내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면 우선 몸부터 보존해야 한다. 병법의 36계도 그래서 나왔다. 그렇다면 왜 정희량인가? 결론을 미리 내자면 ‘인천은 참 복 받은 도시다. 내가 좋아하는 신선급 인물인 정희량 선생의 자취가 또렷이 남아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 모두 일희일비하며 세상 부침에 시달리는 인생이지만 신선의 꿈만큼은 버리지 말자는 얘기다. 그래서다. 삶이 그대를 속여서 슬픔에 극에 닿았다 느껴질 때 검암동 정희량 은거지를 찾아가 보길 권한다. 결코 정희량의 삶과 이상은 정희량 만의 꿈은 아니다.
인생살이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잠시나마 정희량 선생의 자취를 더듬다 보면 회재 선생의 독락당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당시 어떻게 검암동 오지 산속에서 은거하며 무서운 외로움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중 하나가 바로 한잔의 차茶였을 것이다. <조용헌의 인생독법>의 한 구절 차용 했다. “차의 향이 코로 들어오고, 혀를 적시면서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아랫배로 찻물이 내려가면서 울림이 온다. ‘인생 이만하면 됐다.”(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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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남평에 온 어린왕자 -참교육의 기본은 책 읽기다. 그 시작인 베이스캠프가 바로 카페 <어린 왕자>다-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의미가 있다.”라는 니체의 통찰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최근 남평읍 변방에 ‘카페 어린 왕자’가 오픈했다. 주소는 남평읍 지석로 184다. 상호로만 보면 프랑스 소설가인 생텍쥐페리(1900~1944)가 1943년 발표한 소설 제목을 차용한 단순한 동네 커피집일 수도 있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가 평소 주창했던 ‘문화도시 남평’의 시작을 알리는, 작은 불씨를 제공하는 아지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여느 카페들이 차를 팔거나 마시는 공간을 제공하는 게 전부 라면, ‘카페 어린 왕자’는 무늬만이 아닌 내용도 어린 왕자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소설 <어린 왕자>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160여 개 언어로 번역된 책이자, 판매 부수만 해도 8천만 부가 넘고 해적판까지 합하면 무려 1억 부 이상 팔렸다. 그래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라고는 소문은 사실이다.
이런 유명세도 유명세지만 남평읍 변방에 ‘카페 어린 왕자’가 문을 연 것은 <어린 왕자>라는 책이 어린아이들의 독서 입문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착안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전자책 등의 보급으로 종이책 읽기가 퇴보한 현실이긴 해도 여전히 종이책 읽기는 독서의 첫걸음이다. 카페 주변이 거의 아파트 촌이고 비교적 젊은 세대로 구성돼 있어 어린아이들이 많다. 비록 스터디카페는 아니지만, 어린이들이 책과 친해질 수 있게 하고 싶었던 카페 주인의 문화적 배려다.
물론 <어린 왕자>는 어린아이들의 독서 입문서뿐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다. 부모와 어린아이들이 함께 카페에서 차 한 잔 앞에 놓고 <어린 왕자> 읽기와 책 속의 한 문장을 놓고 약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참 괜찮은 인문학적 체험이 될 것이다.
카페를 좀 구경해 보자. 우선 입구와 내부 벽은 눈에 익은 어린 왕자 관련 삽화가 그려져 있다. 물론 출입구 대표 간판 가운데는 어린 왕자가 귀여운 칼을 지팡이 삼아 의젓하게 서 있다. 실내 한쪽 테이블에는 국내 출판 본 어린 왕자 책들과 책 속의 명대사 발췌자료, 저자인 생텍쥐페리의 약력과 논산 어린왕자문학관과 지난해 말 개관한 보성 대원사 어린왕자선禪문학관 자료까지 비치돼 있어 누구나 어린 왕자에 대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했다. 비록 화려한 구색은 아니지만 어린 왕자의 문향은 향기롭다. 어쩌면 조촐해서 아름답다는 말을 여기서 사용해도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다시 어린 왕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가 궁금하다. 그렇다. 어린이들의 책 읽기의 동기부여도 중요하지만, 코로나19 장기화와 각자도생 시대를 맞아 상처 난 마음의 처방전 중 하나가 어린 왕자의 가르침이 아닐까 싶다. 불교의 일체유심조는 여전히 유효한데, 어린 왕자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일체유심조와 다를 바 없다. 책 속의 몇 문장 인용했다.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정확하게 볼 수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야.//사막은 아름다워.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야.//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문화도시 남평은 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외관만 문화적으로 덧칠한다고 문화도시가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필자가 좋아하는 함평 출신 박노해 시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말했듯, 남평 문화도시의 희망은 “책 읽는 남평 주민(어린아이)”들이다. 책을 읽다 보면 절로 길이 보인다. 왜 남평을 문화도시로 거듭나게 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자녀들과 함께 카페를 찾아 <어린 왕자>를 낭랑한 목소리로 읽는 모습은 더 말해 무엇하랴. 맹모삼천지교 아니라도 이 더 아름다운 모습을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을까. 참교육의 기본은 책 읽기다. 그 시작인 베이스캠프가 바로 카페 <어린 왕자>다.(拙) ============================================================== ※ 사족 : 올해가 제(소식지 편집인) 직장생활의 세밑이라서, 현재 나주시 남평읍내 변두리까지 흘러와 ‘작은 사무실’에서 조용히 근무하고 있습니다. 남평지역에 와서 이 동네의 문화며 역사 등이 궁금했습니다. 어렵게 <남평읍지> 한 권을 얻어 보았습니다. 남평이 조선의 이단자인 허균 선생의 자취(시작품)가 남아 있는 곳이자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에 곡을 붙인 음악가 안상현 선생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무엇보다도 남평은 드들강이라는 강물이 아름답게 흘러가고 있는 강변마을이라서 좋아하게 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남평 읍내에 작은 움막이라도 한 채 구해 여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한국에 일본의 자연농법을 소개한 최성현 선생의 <힘들 때 펴보라는 편지>에 제 마음을 말해주는 구절이 있어 반가웠습니다. “후가이는 절을 떠나 어느 산골 마을 빈집을 얻어 살았다. 가난했지만 다시 절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홀로 지내는 것이 좋았다. 먹을 것은 주변 농가의 일손을 거들어주고 얻었다. 나머지는 좌선이었다.” 무욕의 경지인 반농반선半農伴禪의 생활입니다.
남평에 와서 남평을 ‘문화도시 생태도시’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에 7편의 거친 막 글 칼럼을 써 지역신문에 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필요에 의해 참고가 되라는 마음에 작은 씨를 뿌린 것입니다. 위 글은 최근에 쓴 글로, 남평에 대한 한 마지막 7번째 글 입니다.(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