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頭大幹의 유 래
우리국토의 등뼈를 이루는 중심 산줄기인 백두대간의 유래는 우리민족 고유의 성산인 {백두산(白頭山)}의 신성화와 있습니다. 백두산은 고대 단군신화로부터 시작해서 언제나 크고 높으며 성스러운 산으로 여겨겼으며 본격적으로 숭배화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 생각됩니다. 또한 조선 세종때 두만강,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을 확보함에 따라 백두산은 영토의식 성립과 함께 민족의 산으로 명실상부하게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후 관찬사료인 세종실록에 [백두산(白頭山)의 내맥(來脈)], 조선왕조실록에는 산맥 ·정맥 ·대맥 등의 용어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18세기에 이르러 함경도지도, 이익의 성호사설등 고지도와 지리서에 [백두대간]이라는 표기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 백두대간식 표기
최초출현
-실질적 내용상의 백두대간이 최초로 나타난 문헌은 10세기 초의 고려 승려 도선이 지은 옥룡기(玉龍記)로서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끝났으 물의 근원, 나무 줄기의 땅이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백두대간을 의미하는 대간(大幹) 이라는 용어를 국내에서 최초로 사용한 문헌은 이중환의 [택리지](1751년)로서 "대간은 끊어 지지 않고 옆으로 뻗었으며 남쪽으로 수천리를 내려가 경상도 태백산에 까지 통하여 하나의 맥령(脈嶺)을 이루었다" 라고 표현되어 있습 니다.
-백두대간과 백두정간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문헌은 이익의 [성호 사설](1760년경)로서, 백두산을 우리나라의 조종산이며 대간의 시작 산으로 보았으며 "백두대간(白頭大幹)"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산맥상황도 나름대로 제시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백두대간을 체계화한 것은 1770년경(영조) 여암 신경준의 [산경표]로서 백두대간에 대해서 그 용어뿐만 아니라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산맥연결의 상태 · 관계 · 순서를 알기쉽도록 일목요연하게 표로 제시 하였습니다.
다만 산경표의 저자나 제작시기에 대하여 다른 의견도 있습니다. 우리청에서는 ['96 백두대간 연구용역] 결과보고서에 의거 여암의 저서 로 추정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여암 지은 [산수고]에 산경의 내용이 있고 이저술과 거의 동시기에 이루어진 점을 감안하여 신경준이라고 보게 되었습니다).
♣ 백두대간의 산지 체계 인식
-수계가 연속적인 것과 같이 산계도 연속되어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한반도의 지리적 일체감을 인식할 수 있으며 경관측면에서 첨봉이나 능선 및 생활권역의 연결통로로 주요고개를 중요시하고 고도가 높은 산능선일수록 위계가 높은 기본줄기로 보았 습니다.
-줄기의 의미로 연결된 선을 설정하고 폭을 가진 띠의 형태인 산지개념 이므로 지질 구조, 지형의 형성과정과 변화등은 고려하지 않았으며 인문 적인 생활영역을 구분하고 있는 분수계 체계를 중시하며 국토의 일체감 측면에서 백두산과 지리산을 연결하면서 백두산의 상징성을 한반도 전역으로 전파한다고 인식하였습니다.
♣ 오늘날 산맥(山脈)식 표기
산맥식 표기의 출현은
-현행산맥체계는 일본인지질학자고또분지로(小藤文次郞)가 1903년 발표 한 [한국산악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후 1904년, 야쓰쇼에이(失津昌永)가 이를 바탕으로 [한국지리]를 저술 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하여 1908년 한국에서 나온 대동서관 편집 의 [대한 지지교과서(고등소학 대한지지)]에 산맥식 표기가 그대로 채택된 이후 자연스럽게 도입·사용되었습니다
※ 야쓰쇼에이는 저서 [한국지리]에서 "고또분지로가 1900년부터 약 15개 월간 탐험 여행에 의거하여 한국의 산악계통과 지체구조를 밝혀 냈으며 1901년 조선남부의 지세, 1902년 조선북부의 지세, 그리고 1903년에는 조선의 산악에 대해서 각각 논문을 발표 하였다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현행산맥체계에 비해 백두대간 표기는 고려초에 등장한 이후 20세기초까지 1,000년간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산경의 개념
o 모든 산줄기는 물을 건너뛰어 넘을 수 없음
o 산줄기의 시작과 끝남이 정확함
o 정맥의 시작은 산이고, 끝은 대체로 해안임
o 수계를 경계하는 능선으로 전 국토의 지세지형에 대한 이해가 용이함
o 수계중심으로 발달된 도시 형성의 자연스러운 생활권역과 전체 유역을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세분하여 골(谷)까지 수계파악이 용이함.
o 모든 산줄기는 자연지리학과 관계되어 있음.
♣ 백 두 정 간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이다. 철령으로 부터 그 서쪽의 모든 산맥들은 서남쪽으로 내달렸다. 철령으로 부터 태백산, 소백산에 이르기까지 산봉우리들이 우뚝히 하늘에 닿도록 치솟았으니, 이것이 정간을 이룬다. 그 사이의 여러 지맥들이 모두 서쪽으로 치달았으니, 이는 풍수가들이 말하는 버들가지 형국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오동나무 잎에는 반쪽짜리 열매가 열리고, 버들가지 끝에는 알맹이가 맺힌다.”고 하였다. 그건 즉 소위 알맹이는 생각컨데 영남지방에 해당될 것이다. 아마도 이는 안동과 예안 사이를 벗어나지 않을 듯 하다. 태백산과 소백산 이상은 산세가 이와 같아서 물이 모두 흩어져 흐른다.
오직 영남 좌도와 우도는 동래와 김해를 둘러 싸안아 문막이를 이룬다. 이는 곧 산이 끝난 곳에 물이 모여서, 거칠고 사나운 살기가 제거되고 흔적도 없어진 것이다.
그 왼쪽 줄기는 동해를 끼고서 뭉쳐 있는데, 하나의 큰 바다와 백두대간은 그 시종을 같이 하였다. 거북이와 자라, 용과 물고기들이 여기에 살고, 재화가 여기에서 번성한다. 그래서 무한한 인재가 양성되었다.
바깥으로는 일본을 두른채 대간이 남쪽으로 달리고 서쪽으로 달려 물어구를 싸안으매, 물보라가 흩날려 산맥자락을 넘으면서 큰섬 작은섬을 이루었다. 오른쪽 줄기는 지리산에서 멈추었는데, 그 기세는 마치 큰 바다를 가로질러 나갈 듯이 웅장하고 기운차서, 기상이 무서울 정도이다. 인물로 말하자면, 고려 이전은 미개한 상태가 아직 깨뜨려지지 않아서 오랑캐의 풍습을 지닌채 살았는데,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 중화의 풍속으로 일변하였다.
퇴계 이 황이 태백산과 소백산 아래서 태어나 우리나라 유학의 조종이 되었다. 그 문도들이 학문에 깊이 젖어들고 다지며 빛내어, 예의와 겸양으로 문화를 현창하여, 중국의 수수와 사수에서 공자의 문화가 꽃핀 것과 같았다.
남명 조식은 지리산 아래서 출생하여 이 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그 후계자들은 마음을 다지고 실천에 힘썼기에, 외로움을 즐겁게 여겼으며, 이익이 그들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해끼침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여 우뚝이 지조를 세웠다. 이것이 영남 상하도의 차이이다.
대개 그 한줄기 곧은 대간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서 중봉을 이루고 지리산에서 끝났으니, 애당초 백두정간이라 이름지음이 뜻이 있어서일 듯하다. 그리고 인재가 나온 것이 여기를 곳간으로 삼았으니, 필경 국가가 크게 기댈 바가 다른 곳이 있지 않음을 알겠다. (이하생략)
산은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까닭이다. 옛 사람들은 산과 강이 서로를 넘보지 않는다고 여겼다. 비록 높은 산이 이웃해 있어도 사이에 물이 있으면 산줄기를 돌아갔고 평야에서도 산맥이 흐르면 물줄기는 물러선다고 했다. 백두대간은 그렇게 산과 물이 평화로운 한반도를 달린다.
♣ 白頭大幹 !
민족의 영산 白頭山에서 민중의 한이 서린 지리산까지 거침없이 뻗어내린 산줄기다. 금강산을 넘고 설악산을 거쳐 .오대산과 태백산. 속리산을 이어 달린다. 그 힘이 하도 세차고 맑아 한반도를 받치고도 남는다.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에 닿아서도 숨가쁨을 모른다. 그 장엄한 달리기에서 이 땅의 숱한 물줄기를 낳고 平野 를 길러낸다.
백두대간은 요즘 산꾼들의 방문을 받느라 바쁘다. 國土의 등뼈를 밟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많큼 늘어났기 때문이다. /소위 백두대간을 종주하지 못하면 산악인축에 끼지 못하듯이/ 산악인들은 바늘로 땀을 뜨 듯 구간을 나눠 오르기도 하고 줄자를 뽑아내듯 쉼없이 종주를 감행하기도 한다.
늘그막에 접어든 부부가. 아버지와 아들이 그리고 그저 좋와하는 산악인들이 줄지어 백두대간의 품을 찾는다. 산나물로 배를 채우고 샘물로 목을 축이며 홀홀단신 백두대간을 거쳐 오르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하기를 백두대간은 이땅이며 그 生命이다.
젊은이 두사람이 몇년전 백두대간을 밟았다. 폭우와 강풍. 그리고 폭염을 뚫고 40여일을 걷고 걸었다.
도중에 길을 잃고 계곡을 헤매기도 했고 병들어 쓰러지기도 했다. 모기때와 뱀이 길을 막아서고 하늘로 향하는 것 같은 오르막길이 전진을 방해했다. 그리고 인적없는 산에서 만난 고독감. 정열만으로 오르기엔 백두대간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등산화는 밑창이 떨어져 너덜너덜해지고 옷은 땟구정물로 절었다. 세상에 저항에 산으로 숨어든 동학군들과 빨치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백두대간이 무작정 사람들에게 호된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붉은 바다처럼 펼쳐지는 노을이 있고 세속을 품지않은 구름이 행열을 지어 흐르기도 한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산 봉우리는 신비롭고. 산줄기 곳곳에 숨은 산 마을의 인심은 푸근하다. 비록 군사용 참호와 송전탑. 도로. 광산. 목장 따위로 상처투성이지만 성깔을 부리지도 않는다. 백두대간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수만년을 제자리에서 묵묵히 서 있다.
대개 白頭大幹 從走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해 고성 진부령에서 끝을 맺는다. 진부령 이후 향로봉까지는 군사통제지역이고. 너머는 휴전선이 가로막고 있다. 남에서 북을 향해 가다 가 분단의 장벽에 막혀 걸음이 멈추어질때의 감회가 남다르다. 휴전선 너머 백두대간은 아직 가볼 길이 없다.
태여난 이래 한번도 스스로 끊긴 적이 없건만 사람들이 길을 막았다. 그리고 총과 대포로 금을 그었다.
산새와 바람만이 그 단절로부터 자유로울 뿐이다. 그래서 달리고 싶은것은 鐵馬만이 아니다. 백두대간은 철마보다 더 빨리 백두산까지 내달리고 싶은지 모른다. 아~ 그 소리없는 아우성 ?
◈ 백두대간을 해야겠다면
강인한 정신력과. 투지. 인내심. 체력. 그리고 용기가 필요합니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 하는것은 중간에 실패 할수도 있습니다.
백두대간은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하지만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산악회를 이용하여 백두대간을 한다면 산악회의 일정에 빠지지 않고 참가해야 17개월 의 기간속에 목표을 달성할수 있으며 한 두번씩 빠지다 보면 3~5년이란 오랜기간이 걸릴수도 있습니다.
♣ 백두대간은 남한구간이 도상거리 672km 실거리 1.300km의 대장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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