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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昌寧曺氏)에 대(對)하여
1. 시조 : 조계룡(曺繼龍)
2. 유래 :
시조 조계룡(曺繼龍)은 신라 진평왕의 사위로, 벼슬이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상주국(上柱國) 대도독(大都督)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올라 창성부원군(昌成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그의 후손들이 조계룡(曺繼龍)을 시조로 하고 창녕(昌寧)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2. 本貫地 연혁
본래 신라의 비자화군(比自火郡)-비사벌(比斯伐)인데 뒤에 경덕왕이 화왕군(火王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23년 창녕군(昌寧郡)으로 개칭하고 현종9년 밀성군(密城郡)에 예속되었다.
조선 인조9년 영산군(靈山郡)에 편입시킨 뒤 인조15년 복구하여 현(縣)이 되었다. 고종32년 군(郡)이 되었으며 1914년 영산군(靈山郡)을 합쳤다.
주요 성씨로는 曺, 成, 張, 鄭씨 등이 있었다.
3. 계파
忠貞公(충정공), 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헌납공파(獻納公派), 지중추공파(知中樞公派), 문정공파(文貞公派), 좌시중공파(左侍中公派), 중추공파(中樞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충간공파(忠簡公派), 병조참의공파(兵曹參議公派), 사정공파(司正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양평공파(襄平公派), 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 부사직공파(副司直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 청구당공파(靑邱堂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문익공파(文翊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수찬공파(修撰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장양공파(壯襄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낭장공파(郎將公派)
4. 주요 世居地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시조 조계룡(曺繼龍) 이래로 관향(貫鄕)인 창녕(昌寧)에 오랫동안 세거해왔다.
조선 명종조 조식(曺植)이 만년(晩年)에 경남 산청(山淸)의 시천(矢川)에 퇴거한 이래로 일부 자손들이 그곳에 터를 잡았다고 믿어진다.
5. 氏族史의 개요
경남 창녕(昌寧)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조씨득성(曺氏得姓)과 시조 태사공(太師公에 관한 설화가 있다.
신라 진평왕 대의 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 우연히 병을 얻었다. 그는 창녕(昌寧)의 화왕산(火王山) 정상에 있는 용지(龍池)라는 연못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치병하던 중, 용자(龍子) 옥결(玉玦)과 만나 잉태, 집에 돌아가 아들을 낳았다.
그 아기의 겨드랑이에는 조자(曺字)와 비슷한 무늬가 새겨져 있어 이광옥(李光玉)이 진평왕에게 고하니, 왕은 이를 신기하게 여겨 아기에게 조(曺)성을 내리고 계룡(繼龍)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계룡(繼龍)은 자람에 따라 매우 총명하였으므로 王이 사랑하여 여러 가지 관직을 내리고 드디어 부마를 삼으니, 곧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시조이다.
태사공(太師公)은 그 후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이 되어 이들을 물리쳤고, 삼국통일의 주인공 김춘추(金春秋)·김유신(金庾信) 등을 배후에서 지도한 인물이었다고 ‘창녕조씨시조기(昌寧曺氏始祖記)’는 전한다.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신라·고려조에 걸쳐 현관(顯官)·거신(巨臣)들이 많았고, 조선조에 들어서는 절개 높은 선비를 적지 않게 배출했다.
신라말기 아간(阿干) 조흠(曺欽)은 신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여 벼슬을 버리고 ‘천년왕업일조진(千年王業一朝塵) 백수고신루만중(白首孤臣淚滿中) 차문수양하처시(借問首陽何處是) 토극명월자상친(吐亟明月自相親)’이란 시문을 남기고 경주(慶州) 토함산에 들어가 여생을 보냄으로써 신라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켰다.
그런데 조흠(曺欽)의 아들 조겸(曺謙)은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딸 덕공공주(德恭公主)와 결혼, 태조부마(駙馬)가 되었고 대악서승(大樂暑丞)의 벼슬을 지냈으니, 그가 곧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중시조이다.
이후 조겸(曺謙)의 손자 조연우(曺延祐)로부터 조자기(曺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다시 6代 뒤에 조송무(曺松茂)·조송군(曺松君)·조송학(曺松鶴)의 삼형제를 위시하여 6代에 걸쳐 소감(少監)을 배출, 문중(門中)이 크게 일어났다.
특히 조자기(曺自奇)는 고려 현종조에 계단(契丹)과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을 여러차례 토벌한 명장(名將)으로서, 여말(麗末)에 활약했던 무장(武將) 조민수(曺敏修)와 더불어 창녕조문(昌寧曺門)이 자랑하는 인물이다.
조민수(曺敏修)는 공민왕 때에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맞아 이를 섬멸하였고, 우왕 초에는 경상도 순문사(巡問使)로 도처에 들끓던 왜구(倭寇)를 토벌한 명장(名將)이었으며,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뒤에 정권을 장악하려는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야심에 반기를 들었다가 창녕(昌寧)으로 귀양가서 죽은 지조있는 장군이기도 하다.
그의 아들 조인(曺璘) 역시 조선조 태종이 한성부윤(漢城府尹)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끝내 불응하여 여조(麗朝)에 대한 절개를 고수하였다.
창녕조문(昌寧曺門)이 내세우는 고려조의 인물의 한 사람으로 벼슬이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던 양평공(襄平公) 조익청(曺益淸)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충숙왕 때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3代의 王을 모시면서 나라의 기둥으로 사직(社稷)을 보필한 공(功)으로 창녕조문(昌寧曺門)에서는 유일하게 王廟(恭愍王)에 함께 배향(配享)되는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조민수(曺敏修) 장군의 영향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손들이 벼슬을 멀리하고 초야(草野)로 많이 돌아갔다고는 하나, 조석문(曺錫文)은 세조 때 영의정(領議政)까지 지낸 명신(名臣)이었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 도승지(都承旨)가 되었고,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뒤, 영의정의 벼슬에 올랐다. 청렴한 대신으로 알려졌으며, 충간공(忠簡公)의 시호를 받았다.
성종조의 대문장가(大文章家)로 널리 알려진 매계(梅溪) 조위(曺偉)는 당시 사림(士林)의 거유(巨儒)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처남(妻男)이며 수제자(首弟子)로서, ‘두시언해(杜詩諺解)’ ‘유배가사(流配歌辭)’ ‘만분가(晩憤歌)’를 지었으며 성리학에도 깊이 통달한 대표적 학자이다.
조위(曺偉)의 동생인 적암(適庵), 조신(曺伸) 역시 문장가(文章家)로서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역관(譯官)으로 10여 차례 일본(日本)·연경(燕京) 등지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와 외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쳤다.
한편 조선조 중엽의 대표적 석학(碩學)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창녕조문(昌寧曺門)의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학문이 뛰어났으나 벼슬을 탐하지 않고 초야(草野)에 묻혀 살면서 사림(士林)들에게 불의(不義)에 항거(抗拒)할 줄 아는 선비정신을 심어 주었으니, 그가 죽은 지 5년만에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났을 때, 그의 제자였던 홍의(紅衣)장군 곽재우(郭再祐)를 위시한 57명의 문하생(門下生)이 의병을 일으켰던 것도 그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남명(南冥)은 조정(朝廷)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이를 거절하고, 경남 산청(山淸)의 두류산(頭流山) 기슭에 있는 속칭 덕산(德山)마을로 은거, 후학들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사후(死後) 손조 때에 대사간(大司諫)에, 광해군 때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그밖에도 많은 자손들이 창녕조문(昌寧曺門)의 정신을 이어받아 문중을 빛냈다.
양평공(襄平公) 조익청(曺益淸)의 맏아들 조의충(曺義忠)이 상호군(上護軍)을, 둘째아들 조신충(曺信忠)은 희천군수(熙川郡守)를 지냈으며, 조신충(曺信忠)의 다섯 아들 가운데 조상보(曺尙保)가 사의(司議)였고 조상정(曺尙貞)이 현감(縣監),
6. 충정공(忠正公)의 발자취 : 조상치(曺尙治)
조상치(曺尙治)는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자경(子景), 호는 단고(丹皐)·정재(靜齋), 시호는 충정공(忠正公). 1419년(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 집현전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세종·문종·단종의 세 왕을 섬겨 김문기·성삼문·박팽년과 함께 총애를 받고 1455년(단종 3) 집현전 부제학에 발탁되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 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적극 사양하고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끊고 지냈다. 임종 때에는 자기의 시문(詩文)을 모두 불태워 버려 남긴 작품이 전혀 없다.
조상치(曺尙治)는 세종·문종·단종조에 걸쳐 김문기(金文起)·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왕(王)의 총애를 받다가 세조가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영천(永川)으로 은거(隱居), <노산조부제학보인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라는 묘비(묘비)를 미리 써놓고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스스로 밝혀 절의를 지켰다. 정조조에 충정(忠貞)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조상치(曺尙治)는 부제학(副提學)의 벼슬을 지냈다.
또한 조상치(曺尙治)의 증손 조계은(曺繼殷)·조계상(曺繼商) 형제는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각각 정국공신창산군(靖國功臣昌山君)·정국공신창녕군(靖國功臣昌寧君)에 봉해졌으며, 조계상(曺繼商)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에 이르렀다.
특히 조계상(曺繼商)의 직계후손들 가운데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조계상(曺繼商)의 아들 조광원(曺光遠)이 명종 때에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했고, 증손 조문수(曺文秀)는 시문(詩文)에 능할 뿐 아니라 글씨로도 당대에 이름을 날렸다.
조문수(曺文秀)의 아들인 회곡(晦谷) 조한영(曺漢英)은 인조 때 배청파(排淸派)로 지목되어 김상헌(金尙憲)·최명길(崔鳴吉) 등과 함께 심양(瀋陽)까지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고초를 겪었으며, 조한영(曺漢英)의 현손 동포(東浦) 조윤대(曺允大)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명필가(名筆家)로 이름을 떨쳤다.
조윤대(曺允大)의 아들 신암(愼庵) 조봉진(曺鳳振)과, 조봉진의 조카 연암(烟岩) 조석우(曺錫雨)·하강(荷江) 조석여(曺錫輿) 등이 모두 문장(文章)이 뛰어났으며 중종조에 대구부사(大邱府使)를 지낸 조치우(曺致虞)는 청백리(淸白吏)에 올랐고 효성이 지극하기로도 이름이 났다.
조치우(曺致虞)에게 증손이 되는 조광익(曺光益)·조호익(曺好益)이 모두 성리학에 통달한 대가(大家)로서 특히 조호익(曺好益)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門下)에서 성리학을 연구, 관서(關西)지방의 학풍진작(學風振作)에 기여하였다.
공민왕 때 예조참판(禮曹參判)이던 조서(曺庶)는 태조 때 홍범대전(洪範大全)을 써올려 나라의 규범을 바로잡고, 태종 때 왕명으로 明나라에 가서 명제(明帝)로부터 도해배(桃亥盃)를 하사받아 지금도 전북 고창(高敞)의 정산사(鼎山祠)에 보존되어 있다.
역시 중종조에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한 조세우(曺世虞)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 당시에 우의정(右議政) 김안로(金安老)와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이 세도를 앞세워 갖은 비리와 폭정을 일삼는 것을 목격하고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들과 뜻을 모아 거듭 상소한 끝에 그 일당을 몰아내고 관(官)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또 재종손(再從孫)인 응남(應南)·진남(鎭南) 형제와 종손인 열(悅)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창녕 대산진(昌寧 臺山陣)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뒤 형제가 순절, 그 충공(忠功)으로 정려(旌閭)되고 열(悅)은 훈정(訓正)에 서수(除授)되었다.
연산군 때에 사헌(司憲)을 지낸 조숙소(曺淑泝)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중종조에 왜구(倭寇)와 여진족(女眞族) 토벌(討伐)에 큰 공을 세워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조몽정(曺夢禎)의 아들 조탁(曺倬)은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 정난선무공신(靖難宣武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는 왕에게 부흥책십조(復興策十條)를 올려 국무(國務)에 실시케 하였으며 광해군 때, 그가 소장했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진헌(進獻), 이 책을 대본(臺本) 삼아 다시 간행함으로써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는 데 공헌을 했다.
조숙소(曺淑泝)의 손자인 장호공(莊湖公) 조윤손(曺潤孫), 중종반정 때의 공신 조계형(曺繼衡), 인조 때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내고 시(詩)·서(書)·화(畵)에 뛰어나 삼절(三絶)으로 불리웠던 매호(梅湖) 조우인(曺友仁) 등도 두드러진 인물들이다.
또한 소감(少監) 조송학(曺松鶴)의 증손이며 진사(進士) 조적(曺適)의 아들 조익순(曺益順)은 고려조에 삼중대광(三重大匡) 영의정(領議政)이었고, 그의 후손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 조광한(調匡漢)·직제학(直提學) 청구당(靑邱堂) 조계방(曺繼芳)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고려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조박(曺珀)의 아들 이판(吏判) 조수익(曺受益)과, 역시 이판(吏判)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로도 이름이 났던 조문택(曺文澤), 시중(侍中) 조목남(曺目南)의 손자이며 여말(麗末)에 신돈(辛旽)을 탄핵했던 철야군(鐵冶君) 조정통(曺精通), 그의 다섯 아들인 조경룡(曺慶龍)·조응룡(曺應龍)·조한용(曺漢龍)·조변용(曺變龍)·조견용(曺見龍) 등이 두드러진 인물들이며, 이들에게서 비롯된 자손들이 번창하다.
감무공(監務公) 조신의(曺臣義)의 증손 조유인(曺由仁)은 판부사(判府事)로 대과(大科)급제하여 문중을 빛냈으며, 평장사(平章事) 조용기(曺用奇)의 후손인 상서(尙書) 조희우(曺希遇)에게 6대손이 되는 조홍립(曺弘立)은 문과에 급제, 병조·형조정랑(兵曹·刑曹正郞)을 거쳐 여주목사(驪州牧使)를 지냈고 뒤에 노인직(老人職)으로 가선(嘉善)에 올랐다.
한말(韓末)에 와서 창녕조문(昌寧曺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 청애 조성환(曺成煥)과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을 꼽는다.
조성환(曺成煥)은 육군참위(陸軍參尉)로 국운(國運)이 다하자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 등과 더불어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군정부장(軍政部長)과 정무위원(政務委員)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근세(近世)의 거목(巨木)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은 한일합병이 되던 무렵 20대 청년이었다. 고당(古堂)은 안도산(安島山)의 국내투쟁이론에 큰 감화를 받아 민족지도이념 노선을 결정했다.
고당(古堂)은 일제치하에서도 국내에 머물면서 ‘민족산업증진·생활조건 개선·배일(排日)독립정신함양’을 지표로 한 민족주의운동을 전개했다.
광복후 북한(北韓)이 공산화(共産化)된 뒤에도 동포를 버리고 혼자 월남(越南)할 수 없다며 끝까지 북한에 남았던 민족사(民族史)에 길이 남을 인물이다.
6. 집성촌
1988년 현재에는
경남 昌寧·密陽·陜川·山淸·咸安·金海·巨濟,
경북 永川·金陵·漆谷·尙州·慶山·高靈·星州·淸道,
전남 和順·珍島·靈岩·潭陽·羅州·靈光·海南,
전북 高敞,
충북 玉川·鎭川·槐山,
경기도 水原·驪州·華城·坡州,
강원도 江陵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十六) 諡號錄 三十六位 (시호록 36위)
曺繼龍 (조계룡) --- 文懿公 (문의공)
曺延祐 (조연우) --- 武烈公 (무열공)
曺仲龍 (조중용) --- 文忠公 (문충공)
曺大隆 (조대륭) --- 文靖公 (문정공)
曺文澤 (조문택) --- 忠翊公 (충익공)
曺益淸 (조익청) --- 襄平公 (양평공)
曺尙治 (조상치) --- 忠貞公 (충정공)
曺孝門 (조효문) --- 成度公 (성도공)
曺 著 (조 저) --- 莊襄公 (장양공)
曺漢龍 (조한용) --- 淸簡公 (청간공)
曺仁輔 (조인보) --- 貞簡公 (정간공)
曺潤孫 (조윤손) --- 莊胡公 (장호공)
曺 偉 (조 위) --- 文莊公 (문장공)
曺 植 (조 식) --- 文貞公 (문정공)
曺등(옥돌등)(조등)---武烈公 (무열공)
曺義擧 (조의거) --- 文僖公 (문희공)
曺寅承 (조인승) --- 忠憲公 (충헌공)
曺秉徵 (조병직) --- 文靖公 (문정공)
曺 欽 (조 흠) --- 忠純公 (충순공)
曺之賢 (조지현) --- 忠敬公 (충경공)
曺用奇 (조용기) --- 文忠公 (문충공)
曺 直 (조 직) --- 恭貞公 (공정공)
曺樞材 (조추재) --- 武肅公 (무숙공)
曺信忠 (조신충) --- 夷簡公 (이간공)
曺錫文 (조석문) --- 忠簡公 (충간공)
曺備衡 (조비형) --- 安武公 (안무공)
曺成漢 (조성한) --- 忠愍公 (충민공)
曺 洽 (조 흡) --- 恭僖公 (공희공)
曺繼商 (조계상) --- 忠貞公 (충정공)
曺光遠 (조광원) --- 忠景公 (충경공)
曺千齡 (조천령) --- 安汝公 (안여공)
曺好益 (조호익) --- 文簡公 (문간공)
曺夢禎 (조몽정) --- 孝安公 (효안공)
曺漢英 (조한영) --- 文忠公 (문충공)
曺錫雨 (조석우) --- 文靖公 (문정공)
曺秉恒 (조병항) --- 文玄公 (문현공)
7. 집성촌(集姓村)
전남 화순군 일원
전남 진도군 일원
경남 산청군 일원
경남 합천군 일원
경남 영천군 일원
8. 분파
감사공파(監司公派)
낭장공파(郎將公派)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만호공파(萬戶公派)
문익공파(文翊公派)
문장공파(文莊公派)
문정공파(文貞公派)
문간공파(文簡公派)
목사공파(牧使公派)
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
병조참의공파(兵曹參議公派)
부사직공파(副司直公派)
부위공파(副尉公派)
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상호군공파(上護軍公派)
시직공파(侍直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사의공파(司議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사정공파(司正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송학공파(松鶴公派)
수찬공파(修撰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양평공파(襄平公派)
지평공파(持平公派)
직장공파(直長公派)
장양공파(壯襄公派)
좌시중공파(左侍中公派)
중추공파(中樞公派)
지중추공파(知中樞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찬성공파(贊成公派)
청구당공파(靑邱堂公派)
청간공파(淸澗公派)
창산군파(昌山君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충간공파(忠簡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충정공파(忠貞公派)
충익공파(忠翼公派)
취원당파(聚遠堂派)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
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
판윤공파(判尹公派)
헌납공파(獻納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희천공파(熙川公派)
효강공파(孝康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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