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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풍에 기대어 ·1
별리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간 이파리 하나쯤 떼어 가는 아픔이야
별리의 아름다움에 비길 수 있으랴
마음보다 치장이 아름다운 서풍이여
너의 안식의 기도 앞에서 몇 사람은 저녁 수저를 들고
몇 사람은 길 위에서 이슬처럼 깨어지기 쉬운 약속을 한다
저녁으로 갈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
모든 언약들이 반짝인다
우리는 이제 이른 저녁을 먹고
들 가운데 서서 오늘보다 아름다울 내일을 말할 차례다
펄럭이는 내일의 치맛자락을 끌어당기며
만남보다 진한 이별을 말할 차례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문 밖에서 바람은 흰 피륙을 짜고 있다
서쪽으로 가면 왠일인지 하늘로 오르는 사닥다리가 있을 것 같아
오늘도 들판 끝을 헤매다
서풍의 옷자락에 싸여 돌아온다
선사로 가고싶은 장엄한 몸짓의 서풍이여
너의 치마 끝에 내리는 놀의 물감으로
오늘 우리는 주홍빛 이별을 기록해야 한다
될 수만 있으면 바위에 기록하리라
어둠 뒤에서 마지막 한 겹 솟옷마저 벗고
알몸으로 초록 위를 부는 서풍이여
이맘때쯤 바람과 능금나무의 화간에도
우리는 박수치리
그리고 세상의 푸름들이 시들기 전에
우리는 필생의 편지를
한 사람의 이름 앞으로 보내야 하리
저녁놀의 성찬
금기는 짧고 방임은 길어라
내 어린 처녀들의 작은 침실에
면사포같은 행운이 찾아오고
꽃다운 신부들은 오늘 밤 첫 아일
가질 채비를 한다
이제 비탄의 노래는 부르지 마라
어둔 하늘엔 별들이 작은 어행을 서두르고
저물수록 어둠들은 서로를 불러
한 식구가 된다
어느 탕자가 저 붉은 노을에 장가들 수 있으랴
노을은 다만 노을일 뿐
벌레들의 귀 속으로 초저녁 달빛이
흘러 들어간다
열광이란 저렇게 찬란한 것임을,
한 사람의 생애에 마침표가 찍히는 시간에도
내 친척들은 찬탄을 기다리며
대문을 닦는다
그러나 아직은 기다려라
저 저녁놀의 성찬에 가기 위해서는
내 사랑하는 처녀들이 바삐 단추를 풀고
수밀도같은 알몸으로 목욕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은쟁반같은 손으로
너무 멀리 가버린 환희를 불러
형벌조차 초대할
저녁 식탁을 마련해야 한다
눈물
이제 우리의 기나긴 봉헌문자도
막을 내릴 때가 되었습니다
좀더 고함이었다면, 차라리 악담이었다면
아직 이 가시밭쯤이야 꽃밭으로 알고
걸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제 우리 오래된 헌사 한 구절도
폐기할 때가 되었습니다
돋는 열무 잎새 하나만 보아도 생이 아려
이제 다신 안 흘리겠다던 어제의 눈물
또 흘렸습니다만
어디에도 가두어 둘 수 없는 마음의 혈흔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랑처럼 바라봅니다
만나기도 어려운데 또 한 사람과 이별해야 하다니요
새들 나비들 떠난 자리보다 사람 떠난 자리
더 크다니요
눈썹 끝에 세운 왕국 이렇게 무거울 줄이야
가물거려서 아름다운 그 나라가 마음의 주인이
될 줄이야
불 밝혀 길 인도하지 않아도
어둠은 익숙히 제 자리를 찾습니다
걸어도 발에 걸리지 않는 어둠 속에
오래 발 묻고 서 있습니다
이런 슬픔이야 한낱 사치려니
스스로를 나무라는 어둠 속에서
별자리 우러르고 내려다 보는 신발 끝에
갑자기 툭 - 하고 떨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3월
봄풀 파릇파릇 돋아나는 날
나는 햇볕 바른 언덕에 누우리
내 곁에 털이 흰 짐승
울음이 고운 새
내 살아 있는 날 부를
가혹하게 그리운 이름들
내 신던 신, 입던 옷 입고
해 오르면 꽃빛으로 차츰 데워진
언덕에 누우리
3월이라 부르지 않아도 3월이 제 걸음으로 오는
아무리 가꾸지 않아도 꽃들이 제 기쁨에 피는
해마다 병으로 도지는 살풀이의 3월
생가 ·1
이 곳에 오면
서쪽 길이 잘 보인다
무너진 다릿목이 보이고
다릿목에서 죽은
물새의 꿈이 보인다
백 년 전에 핀
안개꽃이 보이고
동구 밖에 묻힌
흰 달빛도 보인다
이 곳에 오면
늙은 느티나무의 생애가
보이고
서쪽 길이 잘 보이고
가을에 우는 새의
그리움이 잘 보인다
봄잠으로 누워
바람같은 것 먼지같은 것 더불고
이 봄을 난다
겨울에 말랐던 꽃들이 피어나는 논둑에
추위 타는 마른 쑥잎 터지는 소리
가다가 멈춰서서 깊은 생각에 잠기는 강물이
얼음 풀고
낱낱이 흩어지는 모래들이 제 모습 감추며
천의 얼굴을 씻어 내린다
헐벗은 것들 많이도 모여
찾가리고 우는 인동초
금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 아래서
굴뚝새의 소문이 궁금해
혼자 산을 오른다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무용한 일들에
부심해 왔는가
반짝이는 은화와 부질없는 논리와
주말까지는 관습으로 걷는
반이나 닳은 구두창
어제 띄운 두어줄 편지는 도착했는가
긋고 지운 부끄러운 말의 조각은 전해졌는가
걸레 조각같은 데라도 손을 닦고
돌아돌아 보이는 마을을 두고 푸섶길 밟으면
인종의 저녁연기 두근거리며 산 아래 흩어진다
너무도 많은 봄을 놓쳐버린 들판을 보며
개울물 한 가닥 하늘로 띄워올리는
봄잠 가운데 눕는 이 조그만 그리움
아름다운 여자
나는 아직 아름다운 여자를 노래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내가 본 아름다운 여자
한국의 여자, 미국의 여자, 터키의 여자,
그리스의 여자를 노래하리라
그들은 모두 한 남자의 아내이고 두 아이의 어머니이다
그들은 모두 부엌에선 익숙하고 시장에선 활발하다
그들은 모두 어둠 속에서도 도마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
시장의 어느 쪽에
연어가게가 있는 지를 안다
그들은 남편의 허리 둘레와 제 아이의 발의 크기를 잘 알고
시금치가 웃자라는 계절을 알고 포도가
단맛을 익히는 계절을 안다
그들은 식탁의 채소와 육류의 배합을 잘 안다
내가 본 아름다운 여자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식단을 짜고
휘파람을 불면서 양말을 깁는다
한국의 여자는 한국말로 전화를 걸고
그리스 여자는 그리스말로 편지를 쓴다
그들은 생애에 두 번 저를 닮은 아이를 낳는다
수밀도같은 유방을 꺼내어 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뭉게구름같은 내일을 꿈꾸며
나무처럼 푸르게 자라는 제 아이를 바라본다
아름다운 여자는 아름다운 남자와 아름다운 아이를 갖는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는 제 사랑하는 남자의 곁에 누워
솜처럼 잠든다
애인들은 모두 필라델피아로 간다
라일락을 꺾어들고 애인들은 모두 필라델피아로 간다
금빛 치장을 한 거리 끝으로 델라웨어강은 흐르고
이제 갓 사랑을 안 처녀들은 자작나무 아래서 제 애인을 기다린다
모트를 젓던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자작나무숲이 적당하기 때문이다
자작나무 흰 둥치와 처녀의 흰 다리가 강물위에 비친다
굴곡이 없는 자작나무 둥치가 물결을 재우고 굴곡이 아름다운
처녀의 흰 다리가 물결을 일으킨다
자작나무 둥치에 기대어 흰 살을 맞대면
그들의 아랫도리에 힘이 솟아올라
오늘밤은 어둠이 오기 전에
한 처녀의 폴리에스트 치마가 벗겨지리라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애인들은 모두 필라델피아로 간다
애인들의 몸이 뜨거워질 때 강물이 더워지고
씨앗들은 들판의 깊은 살 속으로 제 뿌리를 내린다
젖어 있는 풀밭에선 오늘밤이 오기 전에
달맞이꽃이 피리라
필라델피아의 애인들은 오늘밤 모두
목화송이같은 아이를 가지리라
생의 노래
움 돋는 나무들은 나를 황홀하게 한다
흙 속에서 초록이 돋아나는 걸 보면 경건해진다
삭은 처마 아래 내일 시집갈 처녀가 신부의 꿈을 꾸고
녹슨 대문 안에 햇빛처럼 밝은 아이가
잠에서 깨어난다
사람의 이름과 함께 생애를 살고
풀잎의 이름으로 시를 쓴다
세상의 것 다 녹슬었다고 핍박하는 것
아직 이르다
어느 산 기슭에 샘물이 솟고
들판 가운데 풀꽃이 씨를 익힌다
절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지레 절망을 노래하지만
누구나 마음 속에 꽃잎 하나씩은 지니고 산다
근심이 비단이 되는 하루
상처가 보석이 되는 한 해를 노래할 수 있다면
햇살의 은실 풀어 내 아는 사람에게
금박 입혀 보내고 싶다
내 열 줄 시가 아니면 무슨 말로
손수건만한 생애가 소중함을 노래하리
초록에서 숨쉬고 순금의 햇빛에서 일하는
생의 향기를 흰 종이 위에 조심히 쓰며
오막살이 집 한 채
시든 채송화의 얼굴 곁에 앉으면
잊고 있던 농구의 이름이 떠오른다
청석 밭에 자라던 갯풀 이름이 떠오르고
무 뽑힌 백 평의 빈 밭이 떠오른다
초겨울엔 바람 차가와 밤벌레들 울지 않고
여울물 소리 그칠 때
풀잎이 무거운 이마를 숙인다
주름 많은 가업들이 골마다 누워있고
작은 씨앗들은 맹목으로 자라
포만한 들 가운데 숙연한 생애를 붇는다
누가 들길 밖에 나아가 잎 벗은 나무로
설 수 있을까
누가 무욕으로 저 산하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
하늘엔 추운 새 날고
마음엔 채찍질 잦아
이 겨울에는 아무래도 무너지고 말
적은 누에도 자주 묻히던
오막살이 집 한 채
마음 속 푸른 이름
아직 이르구나
내 이 지상의 햇빛,
지상의 바람 녹슬었다고 슬퍼하는 것은
아직 이르구나
내 사람들의 마음 모두 재가 되엇다고
탄식하는 것은
수평으로 나는 흰 새의 날개에 내려앉는
저 모본단같은 구름장과
우단같은 바람 앞에 제 키를 세우는 상수리 나무들
꿈꾸는 유리 강물
햇볕 한 움큼씩 베어문 나생이 잎새들
마음 열고 바라보면 아직도 이 세상 늙지 않아
외출할 때 돌아와 부를 노래만은
언제나 문고리에 매어둔다
이제 조그맣게 속삭여도 되리라
내일 아침에는 이 봄에 못 피었던 수제비꽃 한 송이
길 옆에 피고
수제미꽃 옆에 어제까지 없던 우체국이 하나
새로 지어질 것이라고
내 귓속말로 전해도 되리라
오늘 태어나는 아이가 내일 아침에는 주홍신을 신고
가장 따뜻한 말을 싸서 부치러
우체국으로 갈 것이라고.
이웃에게
오늘 우리가 걸어온 길가에는
이름 없는 들꽃이 피었더군요
내일 우리가 걸어갈 들판에도
이름 숨긴 들꽃이 피겠습니까
먼길 걸어 지친 자의 문간에도
절망의 가루를 털며
어제와 다른 하루를 몰고 오는
아침은 열리겠습니까
문득 길가에 넘어진 고목등걸에 앉아서도
짧은 울음을 남기고 죽은 사슴처럼
참혹하게 깨우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거친 나무껍질도 유순해지는 넉넉한 밤이
이불로 덮여오기를 바라기에는
지은 죄가 너무 무겁다 하겠습니까
모난 돌멩이들이 밀알같이 부드러워지는 저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형벌입니까
오늘 우리가 바라본 하늘에는 별이 푸르더군요
내일 우리가 바라볼 하늘에도 별이 푸르겠습니까
우리는 꿈 꾸는 자
찢어진 신문지 한 장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고도
나는 내 생애의 반쪽이 뒤척이는 것을 보았네
우리는 모두 꿈 꾸는 자
꿈 꾸면서 눈물과 쌀을 섞어 밥을 짓는 사람들이네
오늘 저녁은 서쪽 창틀에 녹이 한 겹 더 슬고
아직 재가 되지 않은 희망들은
서까래 밑에서 여린 움을 키울 것이네
붉은 신호등이 켜질 때마다 자동차들은 멎고
사람들은 하나씩 태어나고 죽네
우리는 늘 가슴 밑바닥에 불을 담은 사람들
꺼지지 않은 부리 어디 있을까마는
불 있는 동안만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네
발 뒤꿈치에 못이 박혀도
달려가는 것만이 우리의 숨이고 목숨이네
우리는 꿈 꾸는 자
눈물과 쌀을 섞어 밥을 짓는 사람들이네
아름다운 사람
이 세상 아름다운 사람은 모두
제 몸 속에 아름다운 하나씩의 아이를 갖는다
사과나무가 햇볕 아래서 마침내
달고 시원한 사과를 달 듯이
이 세상 아름다운 사람은 모두
제 몸 속에 저를 닮은 하나씩의 아이를 갖는다
그들이 가꾸어온 장롱 속의 향기가
몰래 장롱 속을 바져나와
잠든 그들의 머리카락과 목덜미와
목화송이같은 아랫배로 스며들어
이 세상 아름다운 사람은
이 세상의 크기에 알맞는 하나씩의 아이를 갖는다
그들이 가꾸고 싶은 세상은
아침숲처럼 신선한 기운으로 충만하다
그가 담그는 술은 길이 향기롭고
그의 치마는 햇볕 아래 서면
호랑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간다
그의 어깨는 좁아도 그의 등 뒤에는 언제나
한 남자가 누울 휴식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아름다운 사람은 제 몸 속의 샘물로
한 남자를 적시고
세상의 목마른 아이들을 적신다
서정시를 쓰는 남자
바람타는 나무 아래서 온종일 정물이 되어 서있는 남자
정물이 되지 않기 위해 새들은 하늘로 날아오르고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고전적인 늑골을 들고 서있는 남자
벽돌집 한 채를 사기에는 형편없이 부족한 시를
밤 늦게까지 쓰고 있는 남자
아파트 건너집 주인 이름을 모르는 남자
담요 위에 누워서도 별을 헤고
백리 밖 강물소릴 듣는 남자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개울물에 발이 빠진 남자
주식시세와 온라인 계좌를 못 외는 남자
가슴 속에 늘 수선화같은 근심 한 가닥 끼고 다니는 남자
장미가시에 찔려 죽을 남자
거미줄같은 그리움 몇 올 바지춤에 차고 다니는 남자
민중시인도 동서기도 되기에는 부적합한 남자
활자보면 즐겁고 햇살보면 슬퍼지는 남자
한 아내를 부채로만 살아가는 남자
가을강에 잠긴 산그늘같은 남자
버려진 빈 술병같은, 지푸라기같은 남자
서정시를 쓰는 남자
죽은 사람들은 그리워할 줄 모른다
내일 아침에는 새 신을 신고 걸어가고 싶다
오전에는 아직 못 만난 사람 처음으로 만나
아이처럼 싱싱한 말로 그의 이름 불러주고 싶다
잎 핀 가지를 보면 불현듯 생의 한 쪽이 밝아 오고
언덕을 바라보면 짧고 환한 노래들이
참새처럼 공중으로 뛰어오른다
지붕들은 아무리 햇빛이 쌓여도 무너지지 않는다
처마들은 남쪽으로 기울고
복사꽃 향기는 먼 곳까지 간다
송아지 울음에서 초승달이 돋고
버들가지 흔들릴 때마다 청호반새가 날아오른다
죽은 사람들은 그리워할 줄 모른다
그리워하는 일은 산 사람의 몫이다
움돋는 나무를 보면
불현듯 삶이 향기로워진다
언제나 아침, 언제나 5월
언제나 봄강물인 신생을 위하여
사람들은 오늘도 수저를 든다
노래하는 사람
납가새 조개풀들 우거진 채 하늘 가려
홀로 채어로운 향초잎 내밀 하늘이 없다
자락마다 못에 찔린 슬픈 꿈들을
온 아침 새로 내린 이슬 한 방울로 씻는다
미농지 같은 봄풀이 사나운 억새 되기까지는
경건한 귀를 가진 시인이여, 유독 나무 앞에서
기다려야 한다
그대 가슴 좁아 저토옥 풍만한 여름 다 껴안지 못해도
수천의 잎사귀로 대지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는
저 뿌리의 땀 밴 노동을 그대 아니면 주가 노래하리
낙타 등같이 굽은 산 아래
제 아이 이름 부르듯 풀 이름 부르며 사는 사람이여
봄날은 항상 고통으로 다가와서
계절을 펄펄 끓여 놓고 떠나지만
이마 맞댄 처마들 낮아 그 아래 신발 벗어 놓고
잠드는 사람이란
무 배추의 연명 아니면 날선 고통을 어떻게
제 몸 지켜 쓰다듬을 수 있을까
내 먼지 묻은 소맷자락으로 눈물 닦아
그 먼지 눈시울에 다시 묻혀도
사람들이 지나간 길에 남루와 증오 대신
따스한 노래 한 가닥 남을 수 있기를,
귓전을 스치는 노래 한 가닥이면
삶의 잉걸불에 데인 몸에 새살 돋을지니
나는 노래 부르는 사람
오늘 저녁 한끼 식사도 추청쌀 한 움큼 솥에 안치며
그 아궁이의 불빛에 낯붉히며 노래하는 사람
시인
시가 직업이길 나는 원했지만
나의 직업은 허가받지 못한 철부지 공상이었다
시인이 되기엔
시보다 사람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산봉우리에 걸리는 저녁놀처럼
아름답게 사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호반새 삭정이를 물고 둥지로 날아가듯
사람 사는 거리와 집들
세상과 골목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이란 아무에게도 알려서는 안 될
비밀한 이름
그때 나의 직업은 시인이 된다
잎새 뒤에 숨어서 명주실 뽑아내는 은빛 누에처럼
날아간 새처럼
아파트 난간에 흘러 든 햇빛처럼
군데군데 낱모르는 불행이 반짝이는 소설처럼
아무리 불러도 단풍나무숲으로 날아가 버린 새처럼
울타리 하나가 온통 꽃밭인 작은 마을처럼
저녁 안부
금호강 가에 저녁놀이 떨어집니다
일하던 사람들은 일손을 풀고
문패없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엉잎도 돌나물도 찾아볼 수 없는 밤이
울고싶은 사람만 마음놓고 울 수 있는 밤이
처마를 누르며 찾아듭니다
거친 들판에는 아무도 씨 뿌리지 않고
풀잎의 얼굴을 한 사람들만
미농지같은 잠을 청합니다
피나물과 바지락을 사들고 오는 아낙들의 얼굴이
더욱 멀어 눈시울을 적십니다
내일 아침 날빛 맞을 때까지
살아있는 이들이여
부디 편앙하기 바랍니다
너는 와서
내 가진 조그만 향기 네가 원한다면
그 향기 모두 떼어 너를 주겠다
내 가진 조그만 아름다움 네가 원한다면
그 아름다움 모두 베어 너를 주겠다
그러나 나는 가진 것 아무 것도 없어
너에게 줄 것은 마음의 불꽃 한 송이 뿐이다
네 곁에 서면 절로 향기가 되고 아름다움이 되는
너는 내 곁으로 와서
내 향기가 되어다오
그때 나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
안 보이는 너는 속마음의 장미가 되겠다
백지의 꿈
새봄의 개나리향 말고는 아무 것도
내 위에 쓰지 말라
씀바귀 위에 내리는 이슬 말고는 아무 것도
내 위에 쓰지 말라
처음 가 본 길처럼 설레는 마음 말고는
아무 것도 내 위에 쓰지 말라
유리창에 부딪친 그날의 첫 햇빛 말고는
아무 것도 내 위에 쓰지 말라
어떤 화염에도 타지 않는 금결의 말 말고는
아물면 보석이 되는 상처 말고는
잊혀져도 맹서로 남는 사랑 말고는
날아가도 꽃이 되는 씨앗 말고는
아름답게 사는 길
그 작은 향내를 맡고
배추밭까지 날아온 가난한 나비처럼
보리밭 뒤에 피어난
철 이른 패랭이꽃처럼
여름밤 화톳불 가에서 듣던
별 형제 이야기처럼
개나리 꽃잎에도 눈부셔
마을 앞길을 쫓아가는
병아리처럼
철쭉꽃 따라
철쭉꽃 따라 산을 넘다
지치면 언덕에 누워 풀피리를 불었다
내 부는 풀피리 소리만큼
하늘은 어깨 위에 내려와 앉고
제 혼자 피고지는 패랭이꽃들에도
내 소년은 즐거웠다
연두빛 기슭에서 내가 연두빛이 되어 돌아오는 저녁엔
목매기와 저녁새들만 내 친구가 되었다
또 봄이 가고 봄빛도 제 물에 회색이 되는 날
철쭉꽃 한 송이 꺾어 나는 뉘에게 바쳐야 하나
들 가운데 놓쳐버린 내 신발짝 간 데 없고
내 어깨를 짓밟으며 험한 세월만 흘러갔다
도라지꽃처럼
무슨 사닥다리 놓아 너의 눈물 끝의
푸른 강에 닿을 수 있으랴
금 간 돌 위에 꽃 한 송이 피고
봄에서 가을까지 트이지 않는 길 위로
강물보다 낮은 소리로
비비새는 울면서 제 길을 갔다
제 슬픔에 져내리는 꽃잎의 무게에도
이제 옷섶이 무거워지는 날들이 온다
밤새 가슴을 쥐어뜯던 말 한마디를
부끄럽게 너의 섬돌 위에 올려놓으려
도라지꽃처럼 파랗게 멍든 새벽길 간다
달빛에도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 한 올
부질없는 말 한 마디로 엮어
너에게 띄우며
언덕길
노란 속적삼 내어밀고 민들레는 백 년 전 얼굴로 피어나고
텅스턴 부러지는 소리로 아카시아 뒤에서 풀벌레가 운다
쇠울타리마다 무꽃 대신에 바람의 앞치마들이 펄럭이다 찢어지고
손가락에 듣던 피 멎으면 악쓰며 기어오르던 넝쿨 장미도 진다
점점 제 신명 못이겨 한 겹 두 겹 옷 벗고 속살 내보이는 봄날에도
식은 밥 먹는 아이들이 오이 속같은 잠 속으로 걸어간다
파랑새 날아올 리 없는 세월에 사람들은 헌 구두같은 세월을 깁고
덧나지 않은 상처의 언덕길만 남쪽으로 뻗어있다
고향
신발을 벗지 않으면 건널 수 없는 내를 건너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불과 열 집 안팎의 촌락은 봄이면 화사했다
복숭아꽃이 바람에 떨어져도
아무도 알은 체를 안했다
아쉽다든지 안타깝다든지
양달에는 작년처럼, 너무도 작년처럼
삭은 가랑잎을 뚫고 씀바귀 잎새가 새로 돋고
두엄더미엔 자루가 부러진 쇠스랑 하나가
버려진 듯 꽂혀 있다
발을 닦으며 바라보면
모래는 모래대로 송아지는 송아지대로
모두 제 생각에만 골똘했다
바람도 그랬다
꽃이 한창인 뜰
내 심장의 피 한되박이를 쏟으면
저렇게 붉은 뜰이 될까
모든 산 것들의 맥박 한데 모아놓으면
저렇게 뜨거운 꽃밭이 될까
내 언제 저렇게 붉은 그리움 속에 풍덩 뛰어들어
발톱에서 머리카락까지 붉은 그리움으로
물들일 수 있을까
꽃이 한창인 뜰, 그것은
진실로 사람을 사랑한 사람만이 갖는
뜨거운 뜨거운 자살의 빛
너와 함께
너와 앉으면 나는 항상 혼자가 된다
오동잎에 떨어지는 빗방울도
모여서는 끝내 땅으로 떨어지고
밤을 지새워 울던 꾀꼬리 소리도
아침을 만나면
푸른 밀밭 속으로 사라진다
등꽃이 하얗게 피는 밤에
달빛 아래 흔들리는 너의 목소리
그것은 태고로 부는 바람이
솔잎 사이를 스치는 맑은 소리며
울창한 솔잎을 뚫고 떨어지는
반짝이는 햇살의 금빛 얼굴이다
뜰에 늦은 봄의 오수午睡가 내리고
우리들의 가장 조용한 시간에
찻잔에다 한 숟갈 오수를 타면
찻잔에 부서지는 너의 흰 얼굴
바다에 너훌거리는 너의 속눈썹
너와 함께 다락에 앉으면
나는 항상 혼자가 되고
너는 먼 전설 속의 사람이 된다
맑은 날
이렇게 하늘이 푸르른 날은
너의 이름 부르기도 황홀하여라
꽃같이 강물같이 아침빛같이
멀린 듯 가까이서 다가오는 것
이렇게 햇살이 투명한 날은
너의 이름 쓰는 일도 황홀하여라
찔레꽃 향기
오월엔 찔레꽃이 핀다
감나무 잎이 푸르고
늦게 핀 대추나무잎이
초록을 길어 제 몸에 칠하면
산과 들 어디서나 찔레꽃은 핀다
흐드러지게 핀다
코를 찌르는 향기를 싣고 핀다
논과 밭 어디서나 핀다
갯가나 담장에도 핀다
버드나무 아래도 피고
상수리나무 아래도 핀다
해 뜰 때도 피고
해 질 때도 핀다
오월이 가고
유월이 와도 핀다
다듬어도 다듬어도
찔레꽃은 길들지 않는다
끊어내고 끊어내도
찔레꽃은 가지를 편다
오월의 들과 산은 찔레꽃 천지다
내 이마와 손발,
내 머리카락과 양말에도
찔레꽃 향기다
찔레꽃 향기는
들판이 뿜는 향내다
찔레꽃 향기는
들판이 밀어올리는 힘이다
-시집 <스무살에게>(수밀원)에서
습관에 대하여
빗방울의 말을 누가 번역하는가
돌멩이가 어제보다 야위었음을 누가 보는가
꽃 봉지 만지던 바람은 한아름 향기를 안고 강을 건너고
나무 이파리는 떨어져서도 한 기슭을 가득 채운다
나뭇가지를 떠난 새는 저녁이 오면
어두워진 눈으로 아까 앉았던 나무를 생각하고
금방 떨어진 새똥은 점점 엷어지는 저녁 햇빛을 생각한다
누가 초록을 끌고 오는 6월 아침을 막겠는가
누가 7월에 돋는 메밀 싹을 막겠는가
소가 풀을 먹는 것이 습관이듯이
내가 먹는 습관의 밥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저녁은 다시 올 아침을 기다리고
신발은 저를 신어줄 따뜻한 발을 기다린다
오늘도 코발트빛깔의 하늘이 지붕 위에 내려와 있다
오래 내 몸의 주인이 되어버린 습관
습관은 나의 가장 큰 적이다
「현대시학 」2005년 1월호
노랑나비를 꿈꾸며
하루를 여는 자연의 빛은 말없이 내게 손짓하고
밥상 앞에 앉은 가부좌의 내 배꼽엔
덩그러니 푸른 넥타이가 혀를 내밀고 있으니
허기진듯 드러낸 모양새가 나 인양 어설프다
수저를 드는 찰나 주변에서 배회하는 작은 움직임
뒤 돌아본 사이 나보다 먼저 시식하는 임자
노란 옷 귀여운 나그네가 주인이라 두 팔 펄럭인채
자그만 더듬이 하늘거리며 흰 쌀밥 위에 앉았다
미완의 봄결에 소슬히 잠 깨어 내 집에 들른 모양이다
언 몸 녹여 잠을 청하려나 날개짓이 둔해지다 어느새,
요동조차 멈춰버린 가련함이 놀랠까 조심히 손을 댔다
집 안의 모든 슬픔을 흡수한듯 온 몸은 냉기로 가득
삶이 흩날리고 시간마져 멈춤에 애달프다
고뇌의 껍질을 벗고서 찬란함을 이뤄야 하거늘,
기다리는 님 만나지 못한채 魂은 떠나 갔다
마치 내 삶이 그러할까 목젖이 까칠하여
놓아버린 수저에 그를 올려 뜰에 고이 묻었다
되뇌이다 사라진 흔적의 뒤안길을 서성이다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보랏빛 세상을 훨훨 누비는 노랑 나비를 꿈꾸며.
작은 이름 하나라도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 때 너무 멀어서 못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 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저녁이 되면 먼 들이 가까워진다
놀이 만지다 두고 간 산과 나무들을
내가 대신 만지면
추억이 종잇장 찢는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겹겹 기운 마음들을 어둠 속에 내려놓고
풀잎으로 얽은 초옥에 혼자 잠들면
발끝에 스미는 저녁의 체온이 따뜻하다
오랫동안 나는 보이는 것만 사랑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사랑해야 하리라
내 등뒤로 사라진 어제, 나 몰래 피었다 진 들꽃
한 번도 이름 불러보지 못한 사람의 이름
눈 속에 묻힌 씀바귀
겨울 들판에 남아 있는 철새들의 영혼
오래 만지다 둔 낫지 않은 병,
추억은 어제로의 망명이다
생을 벗어버린 벌레들이 고치 속으로 들어간다
너무 가벼워서 가지조차 흔들리지 않는 집
그렇게 생각하니 내 생이 아려온다
짓밟혀서도 다시 움을 밀어 올리는 풀잎
침묵의 들판 끝에서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청산행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人家를 내려다 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野性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 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들
서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 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의 양식으로 피어오르고
生木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시월의 사유
텅 빈 자리가 그리워 낙엽들은 쏟아져 내린다
극한을 견디려면 나무들은 제 껍질을 튼튼히 쌓아야 한다
저마다 최후의 생을 간직하고 싶어 나뭇잎들은
흙을 향하여 떨어진다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들이 가장 그리워했던 부분을 기억하려고 나무를 만진다
차가움에서 따스함으로 다가오는 나무들
모든 감각들은 너무 향기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엽록일까 물관일까, 향기를 버리지 않으면 나무들은 삭풍을 이기지 못한다
어두워야 읽혀지는 가을의 문장들, 그 상형문자들은 난해하다
더러 덜컹거리는 문짝들도 제자리에 머물며 더 깊은 가을의 심방을 기다린다
나뭇잎들, 저렇게 생을 마구 내버릴 수 있다니,
그러니까 너희에게도 생은 무거운 것이었구나
나는 면사무소 정문으로 한 노인이 자전거를 끌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사람이 나뭇잎보다 더 가벼워질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염소들이 지나간 길을 골라 걷는다
가벼운 것들,
뽕나무잎 누에고치 거미줄 잠자리 제비집 종이컵 볼펜 다 읽은 시집들
그러나 나를 짓누르는 것들, 무거운 것들
불면증 월급봉투 서문시장 팔공산 조지 부시 아프간 전쟁 매리어트 호텔 비자금
영변 경수로 대북송금 김정일 트로츠키 조정래 천리안 이회창 인천공항 유에스 달러
면사무소 은행나무 위에도 가을이 오고
이제 무들이 더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병든 새들과 거지들은 어서 집을 지어야 한다
이 주식의 가을에 사람들은 끝없이 회의를 하고
쫓겨난 염소처럼 나는 혼자 면사무소 옆길을 걷는다
나뭇잎은 아무것도 추억하지 않는다
은행나무가 그렇듯이. 염소가 그렇듯이
봄밤
가난도 지나고 보면 즐거운 친구라고
배춧국 김 오르는 양은그릇들이 날을 부딪치며 속삭인다
쌀과 채소가 내 안에 타올라 목숨이 되는 것을
나무의 무언(無言)으로는 전할 수 없어 시로 써보는 봄밤
어느 집 눈썹 여린 처녀가 삼십 촉 전등 아래
이별이 긴 소설을 읽는가보다
땅 위에는 내가 아는 이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서까래 아래 제 이름 가꾸듯 제 아이를 다독여 잠재운다
여기에 우리는 한 生을 살러 왔다
누가 푸른 밤이면 오리나무 숲에서 비둘기를 울리는지
동정 다는 아낙의 바느질 소리에 비둘기 울음이 기워지는 봄밤
잊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슬픈 빛깔을 띠고 있다
숟가락으로 되질해온 생이 나이테 없어
이제 제 나이 헤는 것도 형벌인 세월 낫에
잘린 봄풀이 작년의 그루터기 위에
또 푸르게 돋는다
여기에 우리는 잠시 주소를 적어두려 왔다
어느 집인들 한 오리 근심 없는 집이 있으랴
군불 때는 연기들은 한 가정의 고통을 태우며 타오르고
근심이 쌓여 추녀가 낮아지는 집들
여기에 우리는 한줌의 삶을 기탁하러 왔다
유리(琉璃)의 길 3
개미를 보면 나는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나비를 보면 나는 너무 많은 약에 길들였다라는 생각이 든다
잔디를 보면 냉이꽃을 보면 나는 너무 많은 봄을 놓쳐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나생이 둥굴레풀 꽃다지 민들레
고사리 우엉잎 도꼬마리 이질풀
아, 나는 너무 많은 이름들을 놓쳐버렸다
구름을 보면 나는 아직도 내 앞에 걸어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강물을 보면 파도를 보면 나는 아직도 내 앞에 출렁거릴 것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신의 처녀림
내 한끼 식사
가혹한 유혹을 버리면
거기 길들이지 않아도
유순한 내 처녀림의 정신을 만날 수 있으리니
아무리 헐고 뜯어도
뼈 드러내지 않는 갈망들이
어린 날 우리의 맨살에 부딪치던 강물처럼
유년의 식욕을 돋우고 자라고 있으리
나생이 옥잠 같은 것,
모두 살고 싶은 욕망으로 잎새를 반짝이고
저들끼리 은어로 부르는 소리,
사운대며 우리 옷깃 스칠 때
그리운 것들이란 항상 목마름의 뒤로 와서
生意의 꽃잎으로 잠을 털고 일어나리
삶의 이름으로 부르는 音色은
언제나 兒名처럼 낮고 친근해
발목이 아프도록 걸어가지 않으면
닿을 수없는 삶이라도
삶의 이름앞에 우리는 경건하다
아직 한번도 문자로 기록 된 적 없는 산의 슬기와
呼名되지 않은 들판가운데 선인장처럼 가시 세운 밤들을,
그 풋풋한 야만의 의식앞에 드리는 목례를
삶이라는 찬사 외엔 내 부를 이름 없다
캄캄한 흙 속에 서식하는 씨앗의 인력처럼
불빛으로는 닿을 수 없는 어둠의 肉質을 칼로 베면
칼날에 묻어나는 숨 가쁜 생명의 과육들
나는 길들지 않은 언어들로 그를 노래하고 싶다
이제 헐린 집은 다시 세워지고
꺼진 아궁이의 불빛 다시 살아나
저 인간과 자연의 혼연의 합창 들으리
나는 문명에서 떨어져 나간 만리 이역,
맨발 아니면 닿을 수 없는 정신의 처녀림으로 가야하리
순금의 나날
내 몸은 가벼워
하늘 뜨는 한 점 새의 깃털에 불과해요
오늘 한 때 내 몸을 때리며 지나간 바람은
어느 산맥에 묻혀 금이 될것이다
강를 건너며 떠 올렸던 이름,
강 지나면 잊어버려도
내 걸어 온 발자국의 온기 비둘기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날 기다린다
깨어질 수록 반짝이는 유리처럼
내 정신 깨어져 파편으로
이 어둔 삶 밝힐 수는 없을까
푸른 들판 바라보면 아직 안 잊힌 풀꽃 이름 많고
등불 켜진 마을 바라보면 아직 불러 볼 이름 넉넉하다
햇빛 맑은 날 기다려 그 이름 앞에
병을 이기고 일어나는 꿈 한 자락 소포로 싸서 부친다
돌에 새겨진 이름처럼
내 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말 한마디
너는 살이되지 말고 추운 사람 가슴데우는 외투가 되어라
저문 날 흰새의 날개가 어두워질 때
어느 날 내 지친 발이 한 그루 사과나무 아래 쉬고 있을 때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달걀이 아직 따뜻할 동안 만이라도
사람을 사랑할 수 으면 좋겠다
우리 사는 세상엔 때로 살구꽃 같은 만남도 있고
단풍잎 같은 이별도 있다
지붕이 기다린만큼 너는 기다려 보았느냐
사람 나 죽으면 하늘에 별 하나 더 뜬 다고 믿는 사람들의 동네에
나는 새로 사온 호미로 박꽃 한 포기 심겠다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내 아는 사람이여
햇볕이 데워놓은 이 세상에
하루만이라도 더 아름답게 머물다 가라
들꽃같이
기쁨이거든
시집의 첫 글자 같이
슬픔이거든
늦가을 혼자 핀 들꽃 같이
밝기는
첫 아침 돋아오는 순금 햇빛 같이
정겹기는
살구꽃 만지고 온 동풍 같이
더 멀리도 더 가까이도 아니게
너는 풀꽃만큼 거기서 흔들리거라
밤 새워 아홉 가지 꽃 피워 놓고
혼자 기다리는 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