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장
혜인여중 2 최지윤
부산히 달리는 기차 안보다, 쉬어갈 수 있는 정류장이 좋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그저 푸른 하늘과 이글거리는 태양, 그리고 내 눈을 가리는 터널 뿐이다. 정류장에 앉아 숨을 고르면 작은 개미가 일하는 모습도,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가진 아이가 방긋 미소짓는 모습도, 벽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도 내 눈 한 폭에 모두 담을 수 있다. 우리는 어디로, 언제까지, 무얼 위해 그렇게 달려왔던가.
정류장의 사전식 의미는 머무르는 곳이다. 정류장이 없으면 우리는 좁은 차에 구겨져있던 몸에게 휴식을 빼앗는 것은 물론 간단한 대소변의 해결도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고마운 존재가 내 인생 속에서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생이라는 것은 과연 세월 바삐 흘러만 가는 것일까. 우리는 한 해가 눈 깜짝할 새 흐를 동안 얻은 것이 무엇일까. 명예? 부? 권력?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진부하고 부질없다고 자부한다. 그런 것들이 우리 인생 속에 빛과 진실된 행복을 가져다 주었을까? 물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보다 질 좋고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들이 사랑, 나눔, 행복을 절대 가져다 주지 않는다. 남들보다 자신의 위치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누구보다 한 발이라도 더 앞서기 위해서 하는 행동들이과연 앞서 말한 사랑, 나눔, 행복과 귀결될까?
욕망의 정류장에 멈추었다. 재물 쌓기를 멈추었더니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거지들이 보였다. 경쟁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나도 모르게 떨어뜨리고 온 것들이 보였다. 경쟁자들 간의 사랑, 옆에서 응원해주고 있는 사람들의 함성소리, 남을 위한 배려... 명예 얻기를 중단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내 외모를 청결히 하기 위해 더럽혀진 것들 위에 내가 서있었다.
거짓의 정류장에 멈추었다. 의심을 멈추고 믿음에 다가서니 진실된 것들이 보였다. 또 다른 나의 가면을 벗어보니 본래 나의 얼굴이 보였다. 가식을 버리니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증오의 정류장에 다다랐다. 남을 미워하는 것을 멈추고 예뻐했더니 그가 달라보였다. 복수를 접고 용서를 했더니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질투에서 벗어나니 그동안 가려졌던 나의 장점들이 보였다. 정류장에 멈추었더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내 인생의 전부임을 알게 되었다. 욕망, 거짓, 증오에서 벗어나 정류장에 머물렀더니 사랑, 진실, 나눔의 문이 보였다. 거렁뱅이들에게 나눔을 하고 경쟁자들과 협동하고 명예보다 보이지 않는 덕을 쌓고 의심을 버리고 믿음을 갈망하고 본연의 내 얼굴로 남을 대접하고 가식을 벗고 진실의 옷을 입고 증오의 마음을 사랑의 마음으로 바꾸고 복수의 꽃을 지고 용서의 꽃을 피우고 질투에서 벗어나 남을 선망하는 대신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 이 모두가 정류장 덕분이었다.
인생의 정류장에 멈추었을 때는 내 주변의 것들이 보였다. 내 뒷바라지를 해 주신 부모님이 제일 먼저 내 시야에 들어왔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나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사랑해주신 부모님. 두 번째는 친구들이 보였다. 벗과의 우정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내 안부를 물어왔던 나의 친구들. 마지막으로 내가 보였다. 그동안 쉬지 않고 바삐 달려오느라 힘들고 지쳤을 내가 인사를 건냈다. 욕망의 올가미에서 벗어나니 내가 알던 것들도 모두 달라보였다. 경주에서 멈추고 운동화끈을 다시 동여매니, 더욱 더 소중한 것들을 얻었다.
내가 존경하는 분은 조선 시대에 살던 맹사성이다. 그는 높은 관직에 있음에도 늘 소박한 옷과 청렴한 행동, 백성들을 위한 마음가짐들을 보면 그는 분명 성미있는 사람이 아니다. 쉴 줄 아는, 그런 훌륭한 분이시다. 권력이나 명예가 그를 아무리 유혹해도 절대 흔들리지 않고 항상 바르고 깨끗한 행동과 마음가짐을 가지셨던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나는 그를 '정류장같은 분'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맹사성같은 분들로 세상이 꽉 채워졌을 때, 비로소 세상은 정류장이 될 것이다.
내가 정류장에 머무름을 방해하는 것들 중 하나는 바로 '짐'이다. 내 어깨를 짓누르는 것은 아마 짐에 담긴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초월하신 위대한 분들만이 우리의 역사에 길이 남는 것처럼. 인간의 불필요한 본성을 버리고 가볍게 정류장에 머무르고 싶다. 냄비에서 끓은 된장찌개보다 뚝배기에서 천천히 끓은 된장찌개에서 더 깊은 맛이 나는 것처럼 진국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 나를 유혹하는 못된 인간의 본성의 실을 잘라버리고 맹사성같은 마음가짐을 갖고 인생을 살고 싶다. 정류장에 머물러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의 것으로 채워주고 싶다. 너무 빠르게 달려오느라 미쳐 보지 못했던 모든 이들에게 인사를 건내고 싶다.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내 인생의 종착점에 다다르기 전에 딱 한번만이라도 인생의 정류장에서 머물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