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에서 아침을 먹다가 멀리 아래포도원 나무사이에 보이는 망대가 아래로 내려 온 것으로 보이면 입에 물은 숫가락을 내팽게치며 가방끈을 잡아채고 냅다 뛰기 시작했었다 망대표시는 와룡에서 기차가 출발하여 곧 부용역으로 들어 온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장터에 사는 나는 뛰는 코스를 세갈래로 첫째는 이웃집 뒷문을 통하는 코스, 둘째 셋째 코스는 함께 다니던 최완병네 집 앞에서 갈라지는 길로 긴급성에 따라 선택하였다 왼쪽은 기차 꽁무니 쪽을 향하여 초교동창 김창순, 김현남, 이석구, 이인장네 집 앞쪽으로 난 길로, 오른쪽은 부용역 개찰구를 향하여 신작로 길로 신작로에 있는 초교동창 최명숙네 이발관, 주재영네 집앞으로 필사적으로 달려 갔었다
아침 기차를 놓치면 학교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버스가 없던 시절이었다
허벌나게 달려서 역에 도착하면 기차는 사람을 다 태우고 이미 출발하여 가고 있다 서서히 가고있는 그놈을 나도 함께 달리며 왼손에 가방을 오른손으로 객차 입구에 달린 손잡이만 잡을 수만 있으면 훌쩍 난간에 뛰어 오를 수가 있었다
그땐 서서히 가는 열차를 올라타는 것도 일종의 재미였으며 기차통학했던 다른 친구들도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나중에는 역에 도착할 때도 기차가 다 멈출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통학열차가 부용쯤 오면 종착역을 앞두고 태운 승객으로 이미 만원되어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어 난간에서 그냥 갈 수 밖에 없기도 하였지만 . .
고교때는 그렇게 자만하다 그만 차를 놓친 적이 두번 있었다 온힘을 다해 달려 역에 갔는데 그만 기차가 가버려 아무도 없는 들녁바람이 차갑게 부는 황량한 부용역 플랫폼을 둘러 보면서 믿기지 않았다 그때의 씁쓸한 마음, 나홀로 두고 그냥 가버린 배신감 등 온갖 잡념과 함께 별안간 혼자 된 고독감이 엄습해 왔다
그래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늦게 황산쪽에서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들어오는 시내버스를 타야했다 목적지인 평화동 정류장에 내려 또 기다리다가 원대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학교에 가면 둘째 수업시간이 끝날 무렵 여러 친구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는 실례를 해야 했었다
처음부터 달리는 기차를 올라 타지는 않았었다 갓 입학한 통학 초기에는 일찌감치 아침밥을 먹고 역 플랫폼에서 친구들과 만나 기차를 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렸으며 차안에서 얌전히 다녔다
매일 기차를 타는게 익숙해지면서 친구들과 함께 올라가는 입구에 서서 바깥을 구경하는데 철거덕 철거덕 소리를 내는 바퀴소리가 무서웠던 것도 나중에는 재미있게 들렸다 그땐 어린 나이에 딱지치기, 자치기, 구슬치기하며 놀았던 시골 촌놈에게 새로운 즐거움으로 다가 온 것이다
입구에서 덜컹거리는 열차 바퀴에서 나는 쇳소리를 들으며 양쪽 손잡이를 잡고 일부러 매달리기도 하며 발판에서 미끄러지 않게만 서 있으면 놀이공원에서 청룡열차를 탄것 보다도 더 안정감을 가지면서도 스릴감을 느낄 수 있었다 떨어지면 골로 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전봇대와 건널목 차단기가 휙-휙 내옆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만경강 다리 위를 건널때는 철거덕 덜커덩 소리가 더 크게 반복하여 났고 열차 바퀴 밑의 강쪽 저 낮은 아래를 쳐다보면 조금 더 무섭지만 양쪽 손잡이만 잡고 있으면 전혀 겁이나지 않았다
선로가 구부러지는 곳으로 가면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는 기차 화통을 볼 수 있으며 때로는 뿜어대는 연기에 섞여있던 석탄재가 날라와 눈에 들어왔고 그땐 눈을 비비면서 눈물을 흘렸다 추운 겨울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입구 손잡이 부근에서 찬바람에 쏘여 나중에 손등이 거북등처럼 갈라지고 얼마 지난 뒤에 갈라진 틈에서 피가 나왔다
아마 부모님이 모르니까 그렇지 그런 모습을 봤다면 엄청 혼이 났을 것이다
이리역에 도착하면 구름떼 처럼 모여드는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친구들과 함께 개찰구를 나와 두갈래의 학교 가는길 하나를 택하여 갔었다
보통은 제일은행 사거리를 통하여 시공관에서 왼쪽으로 꺽어 쭈욱 곧바로 가는 길로 다녔다 아니면 역에서 왼쪽 비포장 넓은 길로 시내버스 정류장 앞을 지나 국토건설국 앞 좁아지는 길로 들어서 모현동가는 삼거리를 지나 이리여고의 가시울타리 옆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둘다 학교 정문옆에 있는 대한문구 앞으로 나와서 다른 쪽으로 온 친구들과 만났다
학교가는 길 중에 기억나는 것은 가끔 필요한 체육용품을 사러 곽영근 체육선생님네 문구점에 들렀으며 어느날 시공관 앞에 이층에서 아래까지 큼지막하게 잘 생기지 않은 얼굴에 화려한 한복을 입은 여자 그림이 걸려있어 누구인데 저렇게 이상하게 그려 전시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궁금했었다 나중에사 그게 이미자란 것을 알았고 그뒤로 훨씬 더 예뻐졌지만 . .
다른 한쪽은 삼거리 길에서 이발소에서 다니는 친구를 가끔 만나 함께 갔으며 이리여고 탱자울타리를 지나면서 간간히 들려오는 여학생 소리가 들리면 그 안쪽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하교 길도 혼자서 가기싫어 친구네 반이 끝나기를 기다려 함께 걸어 왔었다 학교 끝나고 올때는 시간 여유가 있으면 중앙시장 물건 파는 곳을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지나오기도 했으며 거기서 빈 커피병을 사서 가방에 도시락 김치 국물을 흘리지 않게 하기도 했다 또 이리여고 울타리 옆 삼거리에서 모현동 쪽으로 꺽어 철로 옆길로 남성여고 건물을 보면서 철인동으로 불리는 골목 야리끼리한 좁은 길을 지나 오기도 했다
역에 오면 그땐 거의 매일 정읍선 열차가 연착했다 친구들과 늘 역 플랫폼에서 2시간 정도는 기다리기 일수였는데 추운 겨울에는 엄청 발이 시려 서서 동동 구르며 언제나 기차가 오나 하며 기다렸던 것이 기억에 선명하다 때로는 기다리다 못해 나중에는 정거장 한쪽에 대기하고 있는 차량을 찾아서 미리 타기도 했다
기차는 매일 대전에서 출발하는 여수행 열차를 기다렸다가 객차 차량을 뒤에 연결해 가기 위하여 일부러 늦게 가기도 하여 늘 플랫폼에서 황등쪽으로 보이는 철로 끝부분에 휘어져 들어오는 철로쪽을 응시했었다 그러다가 대전쪽으로 출발하는 차에 올라타서 황등에서 교행하는 차를 갈아 타고 내려 오기도 했었는데 그때는 잘못되어 정읍선 열차가 먼저 떼어놓고 가버리면 어떡하나 하고 겁이 더럭 났었다
통학열차는 아침 저녁으로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반공일 토요일이 항상 통학생들 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고 그 몇시간을 떼우기 위하여 고민했었고 매주 이리역 광장에서 방황 했었다
특히 정읍선은 다른 선에 비하여 탈 수있는 차가 적어 더 힘들었으며 그래도 다들 잘 극복하였고 이 이야기를 들으면 새삼 생각이 날 것으로 생각된다 역 대합실 한쪽에서 그냥 죽치고 기다리던지 아니면 오른쪽에 있던 학생회관으로 갔다 아래층에 앉아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던지 2층에는 책상에서 공부하는 사람들로 항상 자리가 만원이었는데 빈자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어느날 날씨가 맑은 날 기차길로 7.2km 밖에 되지않는 부용을 친구들과 걸어오기로 했다 평화동 변전소를 지나 건널목에서 철길로 들어서 쭈욱 철로 위로 걸어 왔다
조금 가다 중간에 철다리가 나오는데 조금 길어서 건너 가기가 무서웠었다 침목 사이로 보이는 저 아래 흐르는 강물이 보여 간담이 서늘 하지만 침목 위를 조심조심 발 딛으면서 건너야 했다 건너는 도중에 기차라도 온다면 침목 위를 한발 두발 떼던 걸음이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려고 달려야 했을 것이고 그러다 침목 사이로 발이 쑥 빠지기라도 한다면 . .
무사이 건너 목천포 철교에 다다르면 또한번 친구들간의 약간의 논쟁이 벌어졌으나 우리는 곧 안전한 길을 택하고 목천포에 버스가 다니는 다리로 우회하기로 정했다 목천포 철교위로 건너 갔다는 용감한 친구 이야기도 들었지만 상당히 길어서 가다가 얼마전 영화 '기적'에서 나온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는 중간에 같은 반이었던 김종대는 둑길 옆에 있는 자기 집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목천포 다리로 우회하여 건널목에서 다시 철로로 돌어 섰다 부용까지 철로위를 걸어 오면서 이야기들을 나누며 왔지만 꽤 시간이 길게 느껴졌으며 기차로 10여분이면 오는 길이 두시간 이상 걸렸다
고교때 임시열차였던 것 같은데 승객이 만원으로 입구마다 발 디딜 틈이 없어 이리저리 탈곳을 찾고 있는데 기차가 출발해 버린다 그래도 일단 한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한발을 올렸다 왼손에 무거운 가방을 잡은채 한손으로 매달려 부용까지 오는데 그땐 정말 힘들고 무서워서 혼났었다
이제 돌이켜 보면 통학은 매일의 작은 기차여행이었다 철로 가까이 지나가는 동네 아저씨가 지게지고 논에 가는 모습, 멀리 논에서 조합모를 심느라 노래 부르고 못줄을 옮길 때마다 어-이 외치는 무리들, 넓다란 푸른 벌판, 가을에는 들녁이 햇빛에 빛나는 황금색 물결로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다른 모습들을 차창 밖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또한 김제, 신태인에서 다니는 친구들과 만나 열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갈 수 있었고 이야기 하다보면 벌써 내릴 때가 되어 가까운 내가 항상 먼저 내려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때의 통학친구들이 더 가까운것 같기도 하다
열차가 부용역에 도착하면 김동규, 최완병, 둘이 같은 동네에 살아 항상 붙어 다니는 남상준, 김인성과 함께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거기서 어린 내가 세상을 알아가며 성장하였던 것 같다 어느날 역에서 나와 집을 향하며 가는데 상준이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 . ." 고 그때 막 발표된 국민교육헌장을 다 외웠다고 주루루 외우는 소리를 들었다 나도 집에가서 다른 숙제를 제껴놓고 바로 국민교육헌장을 끝까지 다 외웠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그때의 부용역은 폐지되어 버리고 목포행 완행열차도 통학열차도 지금은 멈추지 않는다 지금도 가끔 그때 상준이가 말해 준 나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나름대로 다 했는가 곰곰히 생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