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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나의 삶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독학으로 문학 수업을 하다가 1988년 시 전문 무크지 [현대시사상] 1집에 [양동시편―뼉다귀집] 외 6편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 김신용의 장편소설. 세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 이후 도시 최하층민의 세계와 그들의 삶을 고백체 형식으로 묘사한 두 번째 시집 [개같은 날들의 기록] , 장편소설 [달은 어디에 있나] (원제 [고백] ) 등을 통해 도시 빈민의 생태를 적나라하게 묘파했다는 찬사를 받은 작가는 [새를 아세요?] 에서 더욱 내밀해진 고백의 양식으로 밑바닥 인생들의 비애와 사랑을 그리고 있다. 젊은 시절 직접 체험했던 도시 빈민들의 처절한 삶과 그 속을 맨몸으로 통과해온 작가 본인의 이야기가 오롯이 녹아 있는 이 장편소설은 한 여자의 생을 통해 고난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과 조우하며 "인생의 고난을 깨닫게 될 때, 아름다움은 더 깊이 이해된다"라는 사실을 말이 아니라 온몸으로 전해주고 있다.
한 사람에 대해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냥 단순한 추억일까? 회상일까?
그러나 기억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더구나 소설로 쓴다는 것은, 그 기억에 대해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많은 것들을 만나고 또 보고 겪는다. 그래, 살다보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기억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번의 글쓰기도 그런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꼭 기억해야 하는 것.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줄곧 망설였고 갈등에 시달렸다. 이것도 소설일 수 있을까?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할 수 있을까?
그랬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체험한 것만 글로 써왔다. 프랑스의 여성 작가 ‘아니 에르노’처럼 말이다. 이 작가도 "나는 내가 체험한 것만 글로 써왔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어떤 소설적 상상력이나 허구에 기댄 형식, 줄거리의 플롯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그냥 체험의 현실적 공간과 시간의 흐름 속에 펜을 자연스레 놓아두었었다.
어쩌면 이런 형식의 글을 소설 이전의 소설, 소설 이후의 소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나는 이 흐름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갔었다. 그것이 소설이라는 이름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는 차지해두자.
언젠가 어떤 책에서 "인생의 고난을 깨닫게 될 때, 아름다움은 더 깊이 이해된다"라는 글을 읽었었다. 아마 미술에 관련된 책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 그 의미를 늘 염두에 두고 글을 끝맺었었다. 그리고 내가 만난 한 여자의 생을 통해 고난이 가져다주는 한 아름다움과 만났었다.
그 아름다움이 더 큰 고통이었을지라도 나는 그것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고통 속에서 마지막으로 움켜쥐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똑똑히 직시했었다. 현재가 과거의 미래이며 미래의 과거라는 것을.......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내내 이 한마디만은 결코 잊지 않았다. 애이불비(哀而不悲)―슬프지만 결코 겉으로 슬픔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그 느낌으로 지금 마지막 이 글까지 쓰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들이 흘러갈지 모르지만 과거의 미래인 이 시간 속에서 나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 哀而不悲―.
(/ '작가의 말' 중에서)
1988년 등단 이후 다채로운 작품을 통해 자기만의 문학 세계를 구축해온 김신용의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 시집 [버려진 사람들] , [개같은 날들의 기록] , 장편소설 [달은 어디에 있나] (원제 [고백] ) 등 초기 작품 세계에서 도시 빈민들의 삶과 비애를 적나라하게 묘파하며 찬사를 받은 바 있는 작가는 [새를 아세요?] 를 통해 미처 다 말하지 못한 그날의 밑바닥 사랑을 아프게 추억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의 정서가 소설 전반을 관류하는 가운데, 특유의 시적인 문체로 되살아나는 사랑의 추억은 단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으로 또 아름다움과 삶의 본질에 대한 탐색으로 깊어진다.
밑바닥 인생의 만화경
그녀는 힘겹게 걸어 올라왔다. 몸이 불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은 듯 오른쪽 다리가 가늘게 휘어져 보였다. 그 가늘어진 무릎의 관절은 그녀가 걸을 때마다 몸을 기우뚱거리게 했다. 한쪽 팔도 마찬가지였다. 왼쪽 팔이었는데, 그것도 역시 어린아이의 것처럼 가늘어져 있었고 손목은 굽어져 있었다. 그녀는 굽어진 손목을 오른쪽 손으로 꼭 쥐고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발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굽어진 손목이 자꾸만 뒤틀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런 모습으로 몸을 기우뚱거리며 힘겹게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23~4쪽
[새를 아세요?] 는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사는 일용직 잡부인 ‘나’와 소아마비로 몸의 절반이 미성숙한 창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소설은 1970~80년대 서울 남산과 서울역 앞 양동의 빈민굴을 주요 무대로 삼고 있는데, 이곳은 실제 피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을 정도로 가난했던 작가가 일용직 잡부로서 하루하루를 전전했던 치열한 삶의 장소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창녀, 노동자, 날품팔이, 부랑자 들의 밑바닥 인생이 사실성을 갖고 독자에게 육박하는 것은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그들과 살을 부비며 살았던 작가의 체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까닭이다. 사회에서 멸시당하고 사람에게 버림받으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인간 실존이라는 보편적 문제와 자연스레 연결되며 현재진행형의 사건으로서 독자에게 다가간다. 또한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펼쳐지는,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인생이기에 애써 사랑을 외면하는 ‘나’와 진흙탕 같은 인생에서 사랑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창녀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는 소설의 큰 뼈대로서 읽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새를 아세요?] 는 그 절절한 내용과 함께 당대 사회상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데 시대의 풍속도이자 문화사회사적 기록으로서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사랑, 그 구원의 가능성에 대하여
그녀는 벤치의 바닥과 등받이가 잇대어 있는 모서리 부분에 얼굴을 박은 채, 팔과 다리는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는, 마치 공원의 늙고 병든 주정뱅이처럼 잠들어 있었다. 반쯤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흘렀고, 한쪽 신발은 벗겨져 저만치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동안 머리카락은 많이 자라 있었지만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어, 그녀를 더 추하게 보이게 했다. 그리고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녀가 들고 있어야 할, 커피를 만드는 도구가 담긴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는 눈에 띄지 않았다. 물방울무늬의 흰색 원피스는 지난날보다 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177쪽
이름조차 없이 그저 길거리의 창녀로 불리는 여자, 창녀의 이름으로 밑바닥 인생들을 다 품고 안아주는 여자, 사랑에 자신을 내던진 여자, "저는, 미아리 텍사스의 언니처럼 춤을 추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여자, 그녀는 불구의 몸을 담고 있는 남루한 현실 속에서 사랑을 꿈꾼다. 그리고 또 한 남자가 있다. "사방 막힌 벽이 있고 세끼 밥이 있는 감방에서 마음 놓고 책을 읽고 싶어서" 일부러 죄를 지은 남자,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피를 팔고 두 번씩이나 정관수술을 한 남자, 사랑을 자신에게 과분한 것이라고 여기며 외면하는 남자, 비록 "부서진 악기가 내는 음률 같은 것"일지라도 ‘시인’이라는 혼자만의 꿈을 간직하고 사는 남자. 과연 사랑은 이들에게 사랑은 구원이 될 수 있을까?
한 편의 시로 재연되는 시대상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 빈민굴 사창가에서마저 몸을 팔 수 없는 부류의 여자들이 있다.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버렸거나 병이 들었거나 몸이 불구인 그런 여자들 말이다. 요컨대 사창가를 찾아든 남자들이 돈을 지불하기를 꺼려하는 그런 여자들은 이 공원을 떠돌아다니며, 또 그런 빈민굴 사창가에서마저 정상적으로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그런 남자들을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녀도 그런 떠돌이 창녀들 중의 하나였다. 나는 그녀가 "짜장면 한 그릇만 사주실래요?" 할 때, 그것을 대략 눈치챘었다. 그러나 모르는 척해주며 모든 것을 농담으로 얼버무리며 아직 어려 보이는 그녀가 낯선 사람에게서 부끄러움과 수치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었다. ―34쪽
우후죽순처럼 아파트가 들어서며 개발 열풍이 한창인 1970~80년대의 서울. 남산과 서울역 앞 양동의 빈민굴은 온갖 뜨내기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하루를 나기 위해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는 사내들과 창녀로서도 구실하기 힘든 여자들이 얽혀 있는 이곳은 심심찮게 ‘지랄 스트립쇼’를 볼 수 있는 서울의 치부였다. 소설 속에는 실제로 그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작가의 체험이 가감 없이 표현되고 있다.
그때, 내 얼굴은 또 난처함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자신이 지게꾼이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지게꾼이라는 직업은 그때까지도 내게는 부끄러운 것이었다. 도시 곳곳에 우아한 빌딩들이 솟고, 화려한 네온사인과 전광판이 번쩍이는 거리마다 물신(物神)들로 넘쳐나기 시작한 이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그 직업은 부끄러운 것이었다. 나는 지게를 등에 둘러메고 이 서울의 거리를 돌아다닐 때마다 나 자신이 혹성에서 온 외계인 같다는 느낌을 갖곤 했다. 그것은 자신의 등에 얹혀 있는 지게의 기형적인 모습 때문만이 아니라, 그 지게가 가지고 있는 본연적인 초라함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 등에 돋은 혹 같기도 했고 불치의 병소(病巢) 같기도 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을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때마다 더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다가오곤 했다. 어떤 때는 ‘자코메티’의 그 세기말적 상상력이 빚어낸 기괴한 조각 같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초라한 기형적인 모습으로 하루를 견디기 위해 매일 청계천을 헤매 다녀야 했다. 그것이 내게는 부끄러움이었고 수치였다. 또 지워지지 않는 상처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나 자신의 치부를 설명하고 싶지 않아 또 아무렇게나 얼버무려주었다. ―38~39쪽
작가는 이러한 체험의 글쓰기를 ‘소설 이전의 소설, 소설 이후의 소설’이라고 말한다. 어떤 소설적 상상력이나 인위적인 플롯에 의지하지 않은 [새를 아세요?] 는 일종의 기록문학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렇지만 당대 사회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적나라하게 묘사함에도 불구하고 이 다큐멘터리가 아름다운 것은 김신용만의 시적인 문체 때문이다. 그 특유의 리듬감과 서정성을 배태하고 있는 문장들은 [새를 아세요?] 를 한 권의 소설이 아니라 한 편의 시로 만들고 있다.
추천사
이십 년 전 한국문학에 돌연히 등장한 소설 [고백] 의 충격은 대단했다. 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들이 가공되지 않은 언어 속에 생생히 묘파된, 김신용의 자전소설 [고백] 은 한마디로 ‘가난과 고통의 해부학’이었다. 처절한 혹은 너절한, 피투성이의 삶이 소설 속에 고스란했다.
그때 "인간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요?"라고 묻던 소설 [고백] 속의 화자 ‘시부랑탕’이 돌아왔다. [새를 아세요?] 는 아주 지독한 신파다. 신파 중에서도 고전인 창녀와의 벼랑 끝 사랑을 소재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그가 내놓은 답은 ‘비브르 사 비(Vivre Sa Vie)’ 즉 ‘살아야 할 나의 삶’이다. 자유의 인간 조르바의 질문과 거리의 여자 나나의 대답은 결코 신파로 치부할 수 없는 비상(飛上)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삶의 밑바닥에서 곰삭을 대로 곰삭은 ‘변신의 에너지인 절망, 그 절망의 동력인 자학’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성속(聖俗)의 경계가 사라진 생의 극지(極地)에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으니, 박차고 오르는 수밖에.
소설 [고백] 에는 한고조(寒苦鳥)라는 새가 등장한다. 히말라야 설산에 살며 밤새 집을 짓는 꿈을 꾸다 아침이면 집을 잊어버리는 허무의 새. [새를 아세요?] 의 그 새가 바로 한고조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비겁하고 온건한, 안전하여 누추한 세상에는 새의 날갯짓이 간절하다. 꿈을 거세한 뒤에야 꿀 수 있었던 꿈, 꿈의 꿈이었던 삶, 그것이.
- 김별아 / 소설가